두 신생국의 신경전③
이제 사태는 명확해졌다. 명나라는 처음부터 정도전을 타깃으로 삼고 있었다. 왜? 정도전은 조선의 기획자이기 때문이다. 앞서 말했듯이 명나라는 한반도에 조선이 들어서는 것보다 고려의 온건파이자 친명파인 개혁 세력이 집권해주기를 바랐다.
그렇게 해서 환골탈태한 고려 왕조가 적극적인 친명 정책으로 나와 충실하게 사대해주기를 원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하게 역성 쿠데타가 발생해서 고려 왕조가 무너지고 새 나라가 생겨났다. 게다가 그 주체 세력은 이색(李穡)과 정몽주 등 적극적인 친명파를 제거하고 집권했다. 따라서 명나라의 의도는 조선의 브레인이자 기획자인 정도전(鄭道傳)을 제거하거나, 최소한 그에게서 충성의 다짐을 받아둬야겠다는 것이다【물론 고려 말에는 정도전도 친명파였으며, 새 국호를 정하는 과정에서 보듯이 지금도 여전히 중국에 사대하는 입장을 취하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명나라에서 보기에 이성계와 정도전은 중국의 승인 없이 쿠데타를 일으키고 집권한 일종의 ‘반역자’다. 명 황실에서 특히 정도전(鄭道傳)을 밉본 이유는 정몽주(鄭夢周)가 살해된 사건 탓도 있다(비록 범행 자체는 이방원이 꾸민 것이지만 정몽주를 제거하지 않았으면 쿠데타가 성공하기 어려웠으니 정도전도 그 책임을 면할 수는 없다). 앞에서 보았듯이 정몽주는 고려와 명나라의 관계가 악화되어 있던 1384년에 사신으로 와서 그 관계를 개선하는 데 공로가 있었기 때문이다(게다가 정도전 자신도 당시 정몽주의 서장관으로 함께 명에 갔었으니 명 황실이 정도전을 어떻게 볼지는 명백하다)】.
그런 진의를 알고서도 호랑이굴로 찾아갈 바보는 없다. 정도전은 한 해 동안 몇 차례나 중국의 소환령을 거부하고 대타로 다른 후배 관료들을 보내면서 버틴다. 결국 이 사건은 1년이상 질질 끌다가 1396년 7월 표문 짓는 일에 참여했던 정탁(鄭擢, 1363 ~ 1423)과 권근(權近, 1352 ~ 1409)이 명나라에 가서 사죄하면서 일단락되었으나 그것으로 사태가 종결되지는 않았음을 명나라도 정도전도 잘 알고 있다. 무엇보다 표문의 근본 목적인 이성계의 책봉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차피 명나라는 다시 그것을 이용해서 뭔가 꼬투리를 잡을 테고, 그렇게 되면 결국 최대의 피해자는 정도전이 될 터이다. 그래서 정도전은 중대 결심을 한다. 바로 명나라에게 무력 시위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조선 초에 있었던 랴오둥(遼東, 요동) 정벌인데, 계획은 있었어도 실제 집행은 이루어지지 않았으니 정벌이라 할 것도 없다. 일단 정도전은 군량미를 비축하고 군대를 증강하고 예행 연습도 하는 등 나름대로 정벌의 차비를 갖추었다. 그러나 그게 ‘시위용’이라는 것은 정도전(鄭道傳)도 명나라도 알았고, 아마 참가한 병사들도 알았을 것이다. 실제로 당시 조선 군대의 힘으로 랴오둥을 정벌할 가능성은 거의 제로였을 뿐 아니라, 정도전의 최대 목표는 어떻게든 이성계의 책봉을 받아내는 것인데, 책봉을 바라는 나라가 책봉을 주는 나라를 공격해서 그 목표를 이루려 한다는 것은 누가 봐도 어불성설이다. 실제로 이 계획은 1398년 사건의 양 당사자인 주원장(朱元璋)과 정도전이 죽음으로써 끝내 계획에만 머물고 만다【기본적으로 친명파이자 사대주의자였던 정도전이 비록 계획뿐이지만 감히(?) 랴오둥 정벌을 계획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당시 명나라가 신생국이었다는 사실과도 무관하지 않다. 이런 상황은 고려 초기 광종(光宗)의 정책과 닮은 데가 있다. 960년 중국에서 송나라가 분열시대를 종식시키고 새로운 통일제국으로 성립하자 광종 역시 송나라를 쉽게 인정하지 않다가 12년 뒤에야 비로소 송나라를 섬기는 정책으로 바꾸지 않았던가? 그래도 고려 초 광종은 잠시나마 독자적인 연호를 쓸 만큼 강경 노선을 취했으나 정도전(鄭道傳)은 그 정도까지 버틸 생각은 아니었을 것이다】.
▲ 배산임수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정도전(鄭道傳)은 북한산을 뒤로 하고 한강을 앞에 둔 천혜의 도습지인 한양으로 수도를 정하고 궁궐을 새로 지었다. 그림은 경복궁의 전경인데, 이것은 19세기 말에 중건된 모습이고 처음 지을 무렵에는 이보다 훨씬 작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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