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 모순 관료 vs 귀족②
그러나 광종(光宗)의 개혁은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호족들의 물리력은 제압했지만 지역에서 그들이 행사하는 행정력은 여전하다. 사실 치열한 왕위계승전이 끝나고 나라가 정상화된 지금에 와서는 그들에게도 군사력은 부차적인 권력 기반일 뿐이다. 그들의 실제적인 권력은 자기 마음대로 지방 관리를 임명하고 지방행정을 주무르는 데서 나온다. 따라서 그것마저 뿌리 뽑지 않으면 호족들의 세상은 여전할 것이다. 그래서 광종은 958년에 2차 개혁을 추진하는데 그게 바로 과거제(科擧制)다【오늘날 우리는 시험을 통해 인력(공무원, 학생 등)을 선발하는 방식에 익숙해져 있지만, 그래서 공부를 잘해야 성공한다는 걸 철칙처럼 여기지만, 막상 과거가 처음 실시될 때는 얼마나 낯선 것이었을까? 사실 이런 방식은 국가권력이 강력하지 않으면 생각할 수도, 시행할 수도 없는 제도다. 관리(官吏)라는 말 자체가 ‘관(官)에서 일하는 벼슬아치[吏]’라는 뜻이니까 ‘관’이 없다면 관리도 있을 수 없다. 정치적 통일 권력이 늦게 발달한 서양의 역사에서는 관이 없었기에 동양식 관리와 같은 개념도 없었다. 따라서 과거 같은 제도가 필요도 없었고 가능하지도 않았다. 서양의 경우에는 국민국가가 성립하는 17세기부터 관리와 관료제가 발달하기 시작하는데, 초기에는 주로 귀족들이 관직을 맡았으며, 18세기 시민 사회 시대에 들어서는 시민들의 ‘선출’에 의해 관리가 임명되는 방식이 자리잡는다. 그에 비해 동양 사회에서는 근대에 들어 중앙집권적 제국 체제가 무너질 때까지 과거가 가장 주요한 관리 임명제도로 기능했다. 그 후유증이 지금의 입시지옥과 각종 ‘국가고시’의 폐해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
광종은 중국의 후주에서 귀화한 쌍기(雙冀)의 제안을 받아들여 과거제를 실시했는데, 이것으로 미루어 그는 아마 처음부터 호족들이 분립하는 무질서를 타개할 장기적인 구상으로 중국적 질서를 염두에 두었던 듯하다(쌍기는 후주에서도 황제 세종의 황권 강화를 위해 노력하던 인물이었다. 그는 고려에 사신으로 왔다가 병을 얻어 치료하던 중 고려인으로 귀화했다). 중국이야말로 전통적으로 동아시아 질서의 축이 아니던가? 무릇 한반도 왕조의 입장에서는 언제나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수직적 질서에 편입되는 게 안정이며 번영이었고 그렇지 않으면 무질서요 혼란이었다. 광종(光宗)이 과거제를 도입한 목적은 흔히 잘못 알려진 것처럼 주체적이고 자주적인 국가 체제를 구축하려는 데 있는 게 아니라 중국적 질서에 편입되려는 데 있었던 것이다【즉위 직후 광종은 광덕(光德)이라는 독자적 연호를 제정하는 등 자주적인 입장을 취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당시 중국이 분열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그런 제스처를 보인 것일 뿐이다. 그래서 광덕이라는 연호는 얼마 사용되지 못했고 곧 그는 후주의 연호를 사용하게 된다. 960년 후주의 절도사 조광윤(趙匡胤, 927 ~ 976)이 후주를 멸망시키고 송나라를 세웠을 때도 광종(光宗)은 또 잠시 준풍(峻豊)이라는 별도의 연호를 쓴 적이 있으나 송나라가 안정되자 곧 송의 연호를 사용했다(그 무렵 광종은 개경을 황도皇都라고 부르고 황제를 자칭하기도 했으나 그건 신생제국인 송나라를 쉽게 인정하지 않겠다는 제스처에 불과했다). 준풍을 끝으로 이후 우리 역사에서는 19세기 말 청일전쟁으로 중국이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을 잃게 되기까지 두 번 다시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는 일이 없다】.
어쨌든 시험으로 관리를 선발하는 제도가 생겨 났으니 우선 무엇보다 중요한 건 과목이다. 과거(科擧)라는 말 자체가 과목으로 인재를 등용한다[擧]는 뜻이니까. 그럼 시험 과목은 무엇으로 할까? 전통적인 불교 사상? 아니면 왕건이 탐닉했던 도참설과 풍수지리설? 하지만 둘 다 관리를 뽑는다는 취지에는 걸맞지 않은 학문이다. 사실 광종(光宗)은 애초부터 과목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았다. 바로 신흥 학문인 유학이 있었기 때문이다. 유학은 옛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에 탄생할 때부터 국가 경영을 목적으로 하는 실천적인 학문으로서, 수직적 질서(국왕을 정점으로 삼고 사대부들이 그를 보좌하는)를 뒷받침하는 이데올로기가 아니었던가? 신라 말기 독서삼품과나 최치원(崔致遠)의 개혁이 실패한 이유는 유학이 아직 제 자리를 잡지 못한 탓이었으나 지금은 사정이 다르다. 신라는 유학을 도입하기만 했을 뿐 현실에 적용하지 못했기 때문에 하대에 들어 왕권이 약해졌고 멸망의 길을 걸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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