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건국②
그 모든 개혁 조치, 2차 건국사업의 최종 목표는 조선을 분명한 왕국으로 만드는 데 있다. 그러나 단순히 정치와 행정 개혁만으로는 그 목표를 달성할 수 없다. 또 뭐가 필요할까? 바로 재정이다. 국가 재정이 튼실하지 못하면 왕국은커녕 사대부 국가조차 이룰 수 없을 것이다. 더구나 개인적으로도 쿠데타로 집권한 태종 자신이 조선 왕계의 새로운 적통으로 자리 잡으려면 안정된 재정 확보가 무엇보다 절실하다. 그동안 다져놓은 권력을 기반으로 그는 드디어 최종 마무리 작업인 경제 개혁에 들어간다.
국가 재정의 기초는 단연 토지이므로 우선 필요한 것은 양전(量田), 즉 토지 측량이다. 가용할 수 있는 재산이 얼마나 되는지 알아야 어디 다 쓸 것인가를 결정할 수 있을 테니까. 양전은 이미 고려 말 창왕 때부터 시작된 사업이었으나, 태종은 거기에 더욱 채찍질을 가해 1413년에 마침내 그 결실을 거둔다. 남쪽의 전라도와 경상도에서 북쪽의 평안도와 함경도까지 대대적인 측량 사업을 전개한 결과 120만 결의 토지를 확보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임자 없는 땅을 거둬들였다면 그 다음 절차는 부당한 임자가 가진 땅을 빼앗는 것이다. 그 대상은 뭐니뭐니해도 고려시대 최대의 성황을 누렸던 불교 사원들의 토지다. 면세의 혜택에다 고려 중기부터 대지주들과 함께 토지 겸병으로 엄청난 토지를 장악했던 사원들은 세상이 바뀌었다는 사실을 새삼 실감할 수밖에 없다. 이미 정도전(鄭道傳)의 이념적 포화를 받은 데다 태종의 경제적 공략으로 사원들은 사실상 기능 마비가 되어 버린다. 오늘날 유명 사찰들이 거의 대부분 산자락에 자리잡고 있는 이유는 당시 도시와 촌락에 있던 시원들이 깨끗이 청소되었기 때문이다.
예나 지금이나 국가 재정의 목표는 국가가 재산을 그러모으는 데 있지 않다. 국가는 거둬들인 재정 수입에 맞게 재정 지출을 해야 하며, 그게 곧 국가의 운영이다. 지금처럼 사회간접시설이 많지 않았던 시절이었으니 그 재정 지출 가운데 으뜸은 단연 관리들의 봉급이다. 고려시대에도 바로 그 문제가 토지제도를 결정하는 가장 큰 변수가 아니었던가? 따라서 태종은 고려 말 전시과(田柴科)가 다른 옷을 입고 나온 과전법(科田法)을 손보기 시작한다. 마침 상당량의 사전(私田)을 폐지하고 공전(公田)을 잔뜩 늘려놓은 덕분에 비교적 여유롭게 과전법을 개혁할 수 있는 조건이 숙성되었다【농경문명을 중심으로 하는 동양식 왕조에서는 원래 토지제도를 근본적으로 바꾸려면 기존의 토지 소유를 무효화해야 하므로 왕조 교체가 필수적이다. 중국과 한반도의 역사에서 왕조 교체가 일정한 패턴처럼 반복되는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다. 전 왕조를 무너뜨리고 새로 건국된 왕조는 새 토지제도가 효력을 발휘하는 시기까지는 대체로 잘 나간다. 그러나 그 제도가 수명을 다하는 중기 무렵부터 경제가 붕괴하기 시작하고 그 영향이 정치에까지 미칠 때 다시 새 왕조로 대체되는 것이다. 나중에 보겠지만 조선 역시 이 법칙에서 예외가 아니다】.
구분 | 과전법(科田法) | 직전법(職田法) | 관수관급제(官收官給制) |
시기 | 고려 말 공양왕 | 조선 세조 | 조선 성종 |
목적 | 사대부의 경제 기반 마련 | 지급할 토지의 부족 해결 | 국가의 토지 지배권 강화 |
지급대상 | 전직, 현직 관리 | 현직 관리 | 국가의 수조권 대행 |
결과 | 토지 제도의 모순 해소 | 농장 확대의 계기 | 토지 사유화 현상 진전 |
▲ 왕조 교체 = 지주 교체 고려와 조선의 닮은꼴은 무엇보다 토지제도에서 나타난다. 태종 때 전면적으로 실시한 새 토지제도인 과전법(科田法)은 고려 초의 전시과(田柴科)와 전혀 다를 바 없다. 과전법은 기존의 토지 소유관계를 그대로 두고 임자만 새 왕조의 건국 세력으로 바꾸었을 뿐이다. 결국 왕조 교체의 필연성은 별로 없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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