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차 건국②
1466년에 시행된 직전법(職田法)도 세조의 3차 건국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예다. 앞서 보았듯이 태종과 세종 대에 이르러 이미 과전법(科田法)은 붕괴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언제나 그렇듯이 근본적인 문제는 과전으로 지급된 토지가 세습되는 데 있다. 원래 명목이야 만들기 나름이므로, 현직 관리가 죽어도 그에게 주어진 과전은 수신전(守信田, 관리의 과부에게 수절을 지키라고 주는 토지), 휼양전(恤養田, 관리의 어린 자식들을 구호하기 위한 토지) 등 각종 명목으로 유가족에게 자연스럽게 세습된다. 게다가 관직이 없는 양반, 즉 산관(散官)에게도 과전이 지급되니 가뜩이나 부족한 토지는 더욱 부족해진다. 그래서 세조는 현직 관리들에게만 과전을 지급한다는 원칙을 다시금 강조하는 데, 그게 바로 직전법이다. 실은 개국 초의 정신으로 되돌아가는 이야기니까 굳이 직전법(職田法)이라는 명칭을 다는 것조차 우습긴 하지만 세조가 또 다른 ‘건국자’가 아니라면 시행하기 어려운 제도다.
그런데 개국 초로 돌아가는 게 토지제도의 모순을 해결하는 데 반드시 유리한 건 아니다. 세조가 나라를 다시 건국했다면 공신들도 새로 생겨난 것은 당연하다. 아닌 게 아니라 계유정난과 사육신(死六臣)의 난을 겪으면서 공신들의 수도 자꾸 늘어간다. 원래 개국 초에 공신에게 주어진 공신전은 세습이 허용되는 데다가 면세의 혜택까지 누린 바 있지 않던가? 따라서 공신의 수가 크게 늘어난 것은 토지 부족 현상을 더욱 부추겼으므로 세조가 직전법을 제정하면서까지 노력한 것과 비교하면 자가당착이 아닐 수 없다. 더 큰 문제는 세조 자신도 전혀 예상치 못했겠지만 그런 공신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사대부(士大夫)들의 세력 판도에는 커다란 지각 변동이 일어나게 되며, 이는 이후 조선의 역사 전체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는 점이다.
세조가 3차 건국의 기분을 유감없이 만끽한 분야는 아마 국가의 이념일 것이다. 지배 이데올로기를 택하는 것은 원래 건국자의 고유 권한이다. 천륜과 인륜을 어기면서 조카의 왕위를 찬탈한 그였으니 유교 이념이 마음에 들 리 없다. 그렇다고 개국 초부터, 아니 멀리는 고려시대부터 차근차근 닦아온 유교왕국의 길에서 완전히 이탈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유교 이념의 색채를 다소나마 탈색시키고 싶은 게 그의 심정이다. 집현전의 문을 닫고 경연을 폐지한 게 그 구도의 서곡이라면, 단군과 기자, 동명왕 등 한반도 고대 건국자들(말하자면 세조의 ‘동업자들’)의 신위를 격상시키고 1457년 정월을 맞아 원구단(圓丘壇)을 설치한 것, 그리고 도교의 제사 의식을 주관하는 소격서(昭格署)를 설립한 것은 주제곡에 해당한다【원구단은 천제(天祭)를 지내기 위한 제천단이다. 원래 고려 성종 때 처음 설치된 바 있으나 조선은 스스로 중국의 제후국이라는 지위를 자각한 왕조였으므로 당연히 처음부터 원구단 설치는 인정되지 않았다(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것은 중국 천자만의 특권이다). 물론 세조가 원구단을 쌓고 원구제를 지낸 목적은 중국에 대해 자주성을 주장하려는 게 아니라 과거 정권과의 단절을 표방하려는 데 있었으므로 원구단은 몇 년 동안만 사용되다 곧 용도폐기되었다】.
그 마무리는 불교 중흥이다. 일찍이 왕자 시절에 『석보상절』을 지은 이력도 있을 만큼 개인적으로도 불교에 심취했던 세조였으나, 1461년 간경도감(刊經都監)을 설치해서 불경을 한글로 번역하는 계획을 추진한 것은 유교 일변도인 국가 이념에 변화를 주고자 한 의도가 담겨 있음에 틀림없다.
구분 | 과전법(科田法) | 직전법(職田法) | 관수관급제(官收官給制) |
시기 | 고려 말 공양왕 | 조선 세조 | 조선 성종 |
목적 | 사대부의 경제 기반 마련 | 지급할 토지의 부족 해결 | 국가의 토지 지배권 강화 |
지급대상 | 전직, 현직 관리 | 현직 관리 | 국가의 수조권 대행 |
결과 | 토지 제도의 모순 해소 | 농장 확대의 계기 | 토지 사유화 현상 진전 |
▲ 탈유교 노선 사육신(死六臣)의 홍역을 치렀으니 아마 세조는 유학과 사대부(士大夫)라면 지긋지긋했을 법하다. 그래서 그는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원구단을 쌓았다. 중화를 숭배하는 유학이라면 천제란 감히 생각할 수 없다. 사진에 보이는 원구단은 1897년 고종이 대한제국으로 국호를 고치면서 새로 지은 것인데(그는 여기서 황제 대관식을 치렀다), 일제에 의해 헐려 지금은 그 자리에 조선호텔이 들어섰고 팔각정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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