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차 왕자의 난③
하지만 기선을 제압당한 수양대군의 자세는 다르다. 아마 그에게는, 호방한 성격에다 학문은 물론이고 시와 글씨와 그림에 능해 일찍이 삼절(三絶)이라 불리면서 문인들과 폭넓게 교류하는 동생에 대한 콤플렉스가 적지 않았을 터이다. 그런데 권력마저 동생에게 빼앗기니 수양대군은 참담한 심정이다. 여러 모로 그에게는 안평대군처럼 막후의 실력자를 택하기보다 왕위 자체를 노릴 만한 동기가 충분하다. 그래서 그는 동생이 미처 신경쓰지 못한 분야, 그러나 조선의 대권후보라면 가장 중시해야 할 분야를 개척한다. 그것은 바로 명나라와의 관계다. 마침 명 황실에서 황태자를 새로 책봉하자 수양은 이게 역전의 계기가 되지 않겠느냐고 조심스레 타진해 본다.
중국의 황태자가 책봉되면 조선에서는 사은사(謝恩使), 즉 ‘은혜에 감사하는 사절’을 보내야 한다【참고로, 조선이 중국에 보내는 사절에는 크게 정기 사절과 임시 사절이 있었다. 정기 사절은 중국 황제 부부의 생일을 축하하는 성절사(聖節使)와 황태자의 생일을 축하하는 천추사(天秋使), 그리고 새해를 맞아 보내는 정조사(正朝使)와 동지에 보내는 동지사(冬至使)를 말한다. 임시 사절로는 황제가 즉위했거나 황태자를 책봉하거나 외적을 물리쳤거나 할 때 보내는 사은사와 진하사(進賀使), 황족 중에 누가 죽었거나 황궁에 불이 났거나 할 때 보내는 진위사(陳慰使)와 진향사(進香使), 특별히 보고해야 할 일이 있을 때 보내는 주청사(奏請使) 등이 있다. 그 가운데 실질적인 업무가 있다는 점에서 정작으로 중요한 것은 주청사였으나, 파견되는 사신의 지위로 보면 오히려 주청사에 비해 다른 사절들이 훨씬 높았다. 동양식 제국 질서의 유교적 허례허식을 보여주는 한 예다】. 그게 조선에게 무슨 은혜를 베푼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좌우간 명나라에 사대하는 조선으로서는 명 황실에 경사가 있으면 무조건 ‘은혜’로 규정할 의무가 있다. 사은사는 중요 사절이므로 보통은 의정부 정승 중 한 명이 가는데, 영의정인 황보인(皇甫仁, ? ~ 1453)은 얼마 전에 중국에 다녀온 적이 있으므로 누구나 생각하는 사은사 후보는 좌의정인 김종서(金宗瑞, 1383 ~ 1453)다. 그런데 문제는 황보인이나 김종서가 모두 안평대군의 인맥이라는 점이다.
이번마저 놓치면 수양대군에게는 두 번 다시 기회가 오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놀랍게도 그는 자신이 직접 사은사로 가겠노라고 나선다. 김종서는 너무 늙었다는 게 그가 준비한 구실이다(사실 김종서는 6진을 개척할 때 북변의 여진과 원수 진 일 때문에 사신으로 가기를 꺼렸다). 그러자 화들짝 놀란 안평대군은 서둘러 황보인을 찾아가서 자신을 천거하라고 다그친다. 그러나 수양대군은 거기서도 준비해 놓은 카드가 있었다. 안평대군을 보내자고 말하는 황보인에게 그는 이렇게 대답한다. “나는 국정에 참여하지도 않았으니 두어 달 원행을 한들 어떻겠습니까?” 이것은 명백히 자신을 소외시킨 안평에 대한 불만의 토로이자 경고다.
굳이 사신으로 가겠다는 형의 의도를 간파한 안평은 그것을 좌절시키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결국 실패한다. 과연 사은사 자리는 두 왕자가 경쟁을 벌일 만한 가치가 충분했다. 1453년 4월 베이징에서 돌아온 수양은 돌아오자마자 즉각 황표정사를 폐지해 버린다. 여기에 관해서는 구체적인 기록이 없으나 모르긴 몰라도 그는 필경 명 황실의 이름을 적절히 활용했을 것이다. 이제 세 번째 왕자의 난은 필연적이다. 다만, 앞서 두 차례 있었던 왕자의 난과 다른 점은 이번의 정변에는 왕실만이 아니라 사대부(士大夫)들까지도 깊숙이 관련된다는 사실인데, 앞으로 이것은 조선에서 일어나는 모든 정변의 기본 패턴으로 자리잡게 된다.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