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착오의 정신병②
삼국시대에 겪은 침략(고구려 초기 한나라와 랴오둥 정권의 침략, 후기의 삼국통일 전쟁)은 중국의 한족 왕조가 한반도를 중화세계로 끌어 들이는 과정이었다. 이것이 성공하면서 한반도는 중화세계의 막내로 편입되었는데, 불행히도 이후 중화세계는 동북아의 중심에서 서서히 물러나고 북방의 비중화세계가 강성해진다. 고려 초기에 거란의 침략을 당하고, 중기에 여진의 금에 사대하고, 후기에 몽골의 속국이 된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럼에도 고려는 내내 중화세계의 일원이 되고자 노력했으며, 그 결과 조선이라는 역사상 가장 완벽한 유교왕국이 성립했다. 여기에는 때마침 중국에서 복고 바람을 타고 한족 왕조가 부활한 덕분이 크다(그런 의미에서 명나라는 단지 이민족 지배에 반발하는 분위기에 편승해서 성립했을 뿐 역사적 존재 가치는 전혀 없는 왕조다). 그러나 시대적 조류는 중화세계가 더 이상 우물 안 개구리로 존속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흐르고 있었고(또 다른 비중화세계인 일본의 도전이 그것이다), 결국 그 와중에 명나라는 무너진다.
이와 같은 역사적 추이로 보나, 청나라가 대륙을 정복한 현재의 상황으로 보나 조선이 나아가야 할 길은 명백했다. 비록 씻을 수 없는 국치를 당한 것은 가슴아픈 일이지만, 역사적ㆍ현실적 필연성을 솔직히 인정하고 새 시대에 어울리는 역동적인 체제 개혁의 길로 나서야 했다. 마침 기존의 질서가 송두리째 파괴된 상황을 맞았으니 모든 것을 새롭게 시작할 조건은 갖춰진 셈이었다【조선의 사대부(士大夫)들은 미처 몰랐겠지만 당시는 세계적으로도 격변의 시대였다. 멀리 유라시아 대륙의 서쪽 끝인 영국에서는 시민혁명이 한창이었고, 유럽 대륙에서는 30년 전쟁(1618 ~ 48)의 소용돌이 속에서 근대 사회의 문턱으로 향하는 진통을 겪고 있었다. 이 진통이 끝나면 유럽 세계는 200년 전의 대항해 시대에 이어 다시 세계 진출에 박차를 가하게 되는데, 이것이 동양사에서 말하는 이른바 서세동점(西勢東漸, 서양 세력의 동양 진출)의 시작이다. 물론 극동 세계에서 유럽의 그런 변화까지는 충분히 예측할 수 없었으리라. 그러나 종교개혁 이후 동양으로 온 수많은 가톨릭 선교사들을 통해 유럽의 사정을 어느 정도 인식하고 있었을 것이므로 조금만 촉각을 곤두세운다면 적어도 당시가 세계사적인 전환기라는 사실은 감지하기에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조선의 사대부들이 택한 노선은 그런 시대적 요구와는 정반대다. 그들은 그저 오랫동안 유지되어 왔던 중화적 질서가 오랑캐에 의해 깨졌다는 사실에 분개할 따름이다(환향녀들에 대한 태도는 그 분풀이다). 그랬기에 전후 그들이 맨먼저 착수한 역사 서술은 역사적 흐름을 읽어내고 거기서 당면의 과제를 추출하기보다 그들의 견해에 부합되지 않는 과거 역사를 바로잡는 작업이었다. 광해군(光海君) 시절에 기록된 『선조실록』을 수정해서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의 편찬을 시작한 게 바로 그것이다. 이유인즉슨 대북파가 득세하던 시절이라 이이, 성혼, 정철(鄭澈), 유성룡 등 서인의 주요 보스들에 대해서 왜곡된 기록이 많았다는 것이다. 사실 이 작업은 인조반정(仁祖反正) 직후부터 기획된 것이었으니 전란으로 미뤄진 일을 처리한다는 의미가 있었지만, 전후의 혼란스런 정국에서 하필 그 작업이 우선시된 이유는 뭘까??
그것은 그들이 수구적인 자세를 굳히기로 작정했음을 뜻한다. 그들은 동북아를 휩쓸고 있는 거센 변화의 흐름을 거슬러 좋았던 옛날로 역사의 시계추를 되돌리기로 결심한 것이다. 따라서 그들이 해야 할 임무는 두 가지다. 우선 대외적으로는 이제부터 조선이 지구상에 남은 유일한 중화세계임을 분명히 하는 일이다(이것이 이른바 소중화小中華 이념으로 나타난다). 그 다음 대내적으로는 조선을 완벽한 사대부 국가로 만드는 작업에 박차를 가하는 일이다(여기에는 당쟁의 지속과 업그레이드가 포함된다).
결국 엄청난 전란의 발톱이 할퀴고 지나갔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에서는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은 셈이다. 집권 사대부들은 아무 것도 반성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전보다 더욱 강력한 수구적 자세와, 전보다 더욱 강렬한 복고적 태도와, 전보다 더욱 강경한 반동적 분위기를 조성하면서 정신병적인 시대착오로 빠져들어간다. 나중에 보겠지만 그런 배경에서 우리 역사상 가장 민족적이고 자주적인 학문적 경향(이를테면 실학)과 예술적 조류(이를테면 진경산수화와 판소리)가 탄생했다는 것은 역사의 장난이다.
▲ 두 개의 실록 못난 왕은 복도 많다. 그저 오래만 재위했을 뿐 한 일이 없었는데도 선조는 죽어서 『선조실록』(위쪽)과 『선조수정실록』 (아래쪽)의 두 가지 실록을 받았다. 두 차례의 대형 전란을 치르고서도 여전히 정신을 못 차린 사대부(士大夫)들은 집권 당파에 따라 실록을 달리 만들었는데, 이 새로운 전통은 경종 때까지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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