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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부 왕정복고 - 2장 한반도 르네상스, 경계를 넘지 못한 실학 본문

역사&절기/한국사

10부 왕정복고 - 2장 한반도 르네상스, 경계를 넘지 못한 실학

건방진방랑자 2021. 6. 21. 1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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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계를 넘지 못한 실학

 

 

실학이라는 용어는 18세기에 새로 등장한 학풍을 가리키지만, 원래는 19세기말과 20세기 초 일제의 조선 침략이 노골화되던 무렵에 민족 주체성을 고취하기 위해 학자들이 만들어낸 말이다(그러므로 당대에는 실학이라 부르지 않았다). 물론 실학이라는 용어는 예로부터 있었고 한반도만이 아니라 중국과 일본에서도 두루 쓰던 말이다. 그러나 그 의미는 시대에 따라 다르다. 이를테면 고려시대에는 불교에 대해 유학을 가리켜 실학이라 했고, 조선 초에는 원시 유학, 즉 육경학이나 사장학(詞章學)에 대해 성리학을 실학이라고 불렀다. 이렇게 의미는 달라도 여러 용례에서 공통점은 찾을 수 있다. 즉 실학이라는 이름은 언제나 기존의 학풍에 대해 새롭고 진보적인 학풍을 가리키는 용어였던 것이다.

 

호락논쟁(湖洛論爭)에서 진보적인 측은 인물성동론이었으니 이 입장이 실학과 관련되는 것은 당연하다. 실제로 홍대용(洪大容, 1731~83)박지원(朴趾源, 1737~1805) 같은 북학파(北學派)의 학자들이 바로 인물성동론을 계승한 실학자들이다. 하지만 이들이 실학의 선구자였던 것은 아니다. 18세기 실학의 기원은 1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실학이라고 하면 흔히 공허한 논쟁을 일삼았던 유학과 질적으로 다른 학문인 것처럼 여기지만, 실학의 뿌리는 원래 성리학에 있다. 이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중화세계에서 유학이 어떤 지위를 지니고 있는지를 다시금 확인할 필요가 있다. 흔히 유교라고도 불리듯이 유학은 단순한 학문이 아니라 종교와 비슷한 지위다. 그런 점에서 유학은 서양의 그리스도교와 비교할 수 있다. 그리스도교의 세계라고 하면 누구나 중세의 유럽을 연상할 것이다. 당시의 그리스도교란 오늘날과 달리 하나의 종교에 불과한 게 아니라 유럽 사회의 모든 부분을 관장하는 세계관이었다. 모든 학문의 바탕에는 신학이 있었고, 학자들은 어느 누구도 이 신학의 색안경을 벗을 수 없었다. 근대에 와서 모든 학문의 기본이 되는 철학조차 당시에는 신학의 시녀였다는 사실이 중세 그리스도교의 위력을 말해준다.

 

중세 유럽에서 그리스도교가 누렸던 지위는 바로 동북아의 중화세계에서 유학이 차지하는 위치와 똑같다. 오늘날에는 유학이 대학의 일개 학문 분과 중에서도 하나의 과목에 속하지만(이를테면 동양철학과의 유학 전공), ‘유학이 지구를 지배했을 때의 유학은 하나의 학문 분야가 아니라 바로 학문 전체였고 총체적인 세계관이었다. 지금의 학문 구분으로 말한다면 철학이나 역사학은 물론이고 법학, 경제학, 나아가 의학, 공학 등의 자연과학까지도 모두 유학의 테두리 안에서 연구되고 논의되는 유학의 분과들이었다. 따라서 사회를 성립시키고 발전시킨 것도, 또 그 사회에 정체와 침체를 가져온 것도 유학일 수밖에 없다. 심지어 그 유학을 비판하고 대안을 제시한 것도 유학인데, 그게 바로 실학이다이 점에서 유학과 그리스도교차이를 보인다. 유학이 그랬듯이 중세 유럽을 건설하고 지배했던 그리스도교도 중세 후기에 접어들면서부터는 도덕적 타락과 사회적 정체의 근본 원인이 되었다. 여기서 실학의 역할을 한 것은 수도원 운동이다. 수도원은 그리스도교를 전면적으로 부정하지 않으면서 내부 개혁을 통해 교회가 본래의 기능을 회복할 수 있도록 지원했다(종횡무진 서양사, 줄기5장 참조).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이미 시대에 뒤처진 교회를 되살릴 수 없었기에 결국 종교개혁이라는 대대적인 수술이 이루어졌으며, 그 결과로 유럽 세계는 사회의 기틀이 송두리째 뒤바뀌고 인간 이성이 신의 노예에서 풀려나게 되는 르네상스를 맞이했다. 그러나 유학의 경우에는 그리스도교보다도 더 근본적인 수술이 필요한 상황에서 실학이라는 미적지근한 처방이 투약됨으로써 여러 가지로 아쉬움을 남겼다.

 

 

 

 

그렇다면 실학은 성리학이 위기에 처했을 때 생겨났을 것이다. 과연 최초의 실학이라 할 만한 연구가 나온 시기는 바로 비중화세계가 중화의 본산인 중국을 정복했을 때와 일치한다. 1634년 이수광(李睟光, 1563~1628)의 두 아들은 아버지가 20년 전에 쓴 원고를 정리해서 지봉유설(芝峰類說)이라는 일종의 백과사전을 펴냈는데, 이것이 사실상 최초의 실학서다. 광해군(光海君)인조(仁祖)의 두 시대에 걸쳐 정부 요직을 맡았다면 얼마나 영악한 인물이겠느냐고 여기겠지만, 실상 이수광은 눈치빠른 모리배와는 거리가 먼 강직하고 신실한 사람이었다. 그랬기에 그는 험난한 시대에도 참된 선비로서의 자세를 잃지 않았으며, 참된 선비였기에 편협한 중화적 세계관에 물들지 않고 중국에 가서 천주실의(天主實義)(이탈리아의 선교사인 마테오 리치가 한문으로 쓴 그리스도교 개설서)를 비롯한 여러 가지 서양의 문물을 가져와서 조선에 최초로 소개했다(그런 점에서 이수광소현세자의 선배격이 된다).

 

그에 뒤이어 17세기 후반에는 재야학자 유형원(柳馨遠, 1622~73)이 토지와 법, 관직 임용 등 조선의 제반 제도들을 분석하고 대안을 제시한 연구를 남긴다. 유형원은 평생 관직 생활을 하지 않은 탓에 자신의 제안들이 실제 정책에 반영되는 것을 보지는 못했지만, 죽은 뒤에는 공식적으로 실학의 선구자라는 영예를 누리게 된다. 1769년에 영조(英祖)가 그의 연구 성과를 정리해서 책으로 간행하라고 명한 것이다. 죽은 지 100년이나 지나긴 했으나 그래도 국왕에 의해 인정된 덕분에 그의 책 반계수록(磻溪隧錄)은 최초의 정부 공인실학서가 될 수 있었다【『지봉유설의 지봉과 반계수록의 반계는 모두 지은이의 호다. 앞서 말했듯이 조선시대에 편찬된 문헌들은 동의보감(東醫寶鑑)처럼 특수한 것을 제외하면 거의가 다 특정한 지은이가 없고 대표 편찬자가 지은이처럼 간주된다(이를테면 정초의 농사직설이나 성현의 악학궤범). 일부 선비들의 개인 문집 같은 책들만 그 선비의 사후에 간행되면서 지은이의 호가 제목에 붙는 식이었다[이를테면 조광조(趙光祖)정암문집(靜庵文集)이나 이이의 율곡전서(栗谷全書)], 그런데 실학서도 그런 문집과 같은 제목을 취한 이유는 우선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편찬한 책이 아니고(조선시대에 서적이란 일반인을 독자로 겨냥한 게 아니라는 점을 상기하라), 내용이 백과사전식으로 잡다하기 때문이다(이는 곧 학문이 체계적으로 분류되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하지만 누가 최초의 실학자고 무엇이 최초의 실학서냐는 것은 문헌학자가 아니라면 관심을 가질 이유가 없다. 중요한 것은 이수광(李睟光)과 유형원에게서 향후 실학이 나아갈 두 가지 방향을 읽을 수 있다는 점이다. 성리학에 토대를 두고 조선의 현실을 개혁한다는 취지에서는 모든 실학자들이 마찬가지지만 개혁의 방향은 그 두 사람이 각기 제시한 두 갈래 길이다. 우선 이수광이 보여준 길은 서양 문물을 수용함으로써 조선이 취할 대안을 모색하는 방향이다. 그런데 조선은 서양과 독자적으로 교류할 루트도, 권한도 없으니까 이 노선을 채택할 경우에는 청나라를 통해 서양 문물을 도입할 수밖에 없다. 당시 청나라에서는 서양 문물을 서학(西學)이라 불렀는데, 청나라는 전통적으로 조선의 북방에 근거지를 가지고 있던 민족이었던 탓에 조선에서는 그것을 북(北學)이라 불렀다. 북학파의 이름은 여기서 나왔다. 이 입장에서는 무엇보다 대외 교류가 중요하므로 북학파는 상업을 중시하고, 그 상업을 뒷받침할 공업을 진흥하고, 화폐경제 제도를 도입하자는 정책 대안을 제시하게 된다.

 

그에 비해 유형원이 안내한 길은 말하자면 내부 개혁 노선에 해당한다. 전통적으로 조선의 산업이라면 단연 농업이므로 개혁의 기본 방향은 농업을 육성하는 데 있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토지제도가 바뀌어야만 한다. 그래서 이 입장을 취하는 실학자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전제 개혁을 부르짖는다. 그 모델은 중국의 옛 주나라 때 시행되었다고 전해지는 정전법(井田法)이다(정전법이란 토지를 자 모양의 아홉 구획으로 나누어 한가운데 토지의 생산물을 조세로 내고 나머지를 경작자들이 가진다는 이상적인 제도다). 토지를 경작자들에게 균등하게 분배하자는 유형원의 균전론(均田論)이나, 토지 보유 상한선을 정해 대지주들을 제한하자는 이익(李翼, 1681~1763)의 한전론(限田論)은 모두 정전법(井田法)에 뿌리를 두고 있다.

 

 

안팎의 길 실학이라니까 뭔가 참신한 느낌을 주지만, 실은 위기에 처한 체제를 개혁하자는 유학의 자기반성에 불과하다. 개혁의 길은 두 가지, 즉 안과 바깥이다. 위쪽은 바깥의 길을 상징하는 서학의 교과서인 천주실의의 번역본이고, 아래쪽은 내부 개혁의 길을 제시한 유형원의 반계수록이다. 그러나 이 두 가지 방책은 집권 기득권층의 강력한 보디체크에 밀려 결국 이론으로만 그치고 만다.

 

 

북학파가 중상학파라면 내부 개혁론자들은 중농학파라고 부를 수 있다. 또한 당시에 중국에서 유행했던 용어를 빌려 말하면 이용후생(利用厚生)과 실사구시(實事求是)를 중시하는 학자들이 중상학파에 해당하고, 경세치용(經世致用)을 주창하는 학자들은 중농학파에 해당한다고 구분할 수도 있다(강조점은 약간씩 다르지만 이용후생, 실사구시, 경세치용은 모두 현실적이고 실천적인 고민을 하자는 뜻이다).

 

북학파 내부 개혁론자
중상학파(重商學派) 중농학파(重農學派)
이용후생(利用厚生)
실사구시(實事求是)
경세치용(經世致用)
박지원, 박제가 이익, 정약용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름이나 이론이 아니다. 중상이든 중농이든 다 좋다. 이용후생이든 경세치용이든 다 잘 해보자는 이야기다. 문제는 실학자들이 내놓은 대안들이 현실의 정책으로 채택되지 못했다는 점이다. 그 이유는 뭘까?

 

우선 그들의 제안이 대부분 탁상공론에 머물고 있다는 게 이유의 하나일 것이다. 실학자들은 머릿수만큼 다종다양한 개혁안을 내놓았으나 현실적으로 실현 가능한 것은 별로 없었다. 냉정하게 평가하면 그들이 이룬 가장 중요한 업적은 단지 저마다 책을 저술해서 실학 관련 문헌들만 늘려놓은 것에 불과하다. 그렇게 된 이유는 그들이 새로운 학풍을 주장하면서도 성리학의 기본 테두리에서 결코 벗어나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학문의 초보적인 분과조차 이루어지지 않은 성리학의 울타리 안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실학자들은 각자 나름대로 방법론을 정립하고, 마치 백화점에 물건을 늘어놓는 것처럼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자신의 의견을 개진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정책화할 만큼의 전문성을 갖춘 대안이 나오기란 어려웠던 것이다.

 

게다가 실학자들은 중앙정치 무대에 깊숙이 침투하지 못했다. 이론을 정책으로 만들려면 물론 이론도 좋아야 하지만 무엇보다 학문과 정치의 현실적인 연결 고리가 필요하다. 앞에서 학자 관료라는 표현을 썼듯이 유학의 유일한 장점이라면 학문적 성과가 곧바로 정책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인데, 실학자들은 현실 정치로부터 소외된 처지가 대부분이었기에 그들의 이론도 대부분 처음부터 정책화되지 못할 운명이었다(아마 이런 현실이 그들의 구상을 더욱 탁상공론으로 몰아갔을 터이다). 유형원도 재야인사였을뿐더러 중농학파의 태두였던 이익도 관직에 오르지 못했다는 사실은 실학의 그런 운명을 말해준다(그러나 이익은 그 자신도 학문의 대가였을 뿐 아니라 아들, 조카, 손자에 이르기까지 가문에서 많은 실학자들을 길러내 실학에 크게 기여했다).

 

 

 

 

실학자들이 자신의 이론을 현실적 정책으로 입안하고 실천할 수 있는 관학자(官學者)로 성장하지 못했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이었으나, 성리학의 테두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학문적 한계는 여러 가지로 아쉬움을 남긴다. 알다시피 참된 개혁을 이루려면 과거와 단절하는 아픔을 각오해야 한다. 그러나 마약을 끊는 고통을 고통이라 부르지는 않으며, 밖으로 나오기 위해 알 껍질을 깨는 아픔을 아픔이라 말하지는 않는다. 그런 점에서 실학자들은 현실안주적인 성향이 강했고 유럽의 종교개혁가들보다 과감하지 못했다. 새로운 학풍의 담당자라는 역할에 어울리지 않게 그들 역시 기존의 당파적 노선에 따르고 있었다는 사실에서도 그런 한계를 볼 수 있다.

 

영조(英祖)의 치세에 여당은 노론이고 야당은 남인이다. 북학파는 앞서 말했듯이 노론 내에서 호락논쟁(湖洛論爭)이 벌어진 결과로 탄생한 집단이므로 인맥상으로는 노론의 계열에 속한다. 반면 야당 혹은 재야에 있던 남인들은 그런 위치에 걸맞게 민생 문제에 주목했는데, 그들이 중농학파의 입장을 취하게 된 것도 그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들이 정전법(井田法)이라는 고대의 이상적인 토지제도를 모델로 삼은 이유도 명백하다. 예송논쟁에서도 드러났듯이 그들의 학문적 기반은 바로 성리학 이전의 원시 유학에 있었던 것이다. 탕평책(蕩平策)이 효과를 봤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실학자들마저 당파성을 버리지 못했을 정도라면 아직 조선 사대부(士大夫)들의 힘이 충분히 거세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게다가 탕평책을 지지한 사대부들을 탕평당이라 부를 정도였다면 당쟁의 불씨도 여전했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은 어떻게든 당쟁의 부활만은 막으려 하는 영조(英祖)의 소극적인 자세를 역이용해서 드디어 왕권에 재도전할 만큼 세력을 만회하게 된다. 불행한 일이지만 영조(英祖)의 왕정복고 실험이 실패로 돌아갈 조짐이 처음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첨단의 장비 조선의 대외 통로는 중국밖에 없었기 때문에 유럽의 문물도 모두 중국을 통해 수입되었다. 사진은 청나라에 가던 연행사들의 필수품인 나침반과 선글라스인데, 역시 청나라에서 수입된 첨단의 장비였다.

 

 

인용

목차

동양사 / 서양사

새로운 학풍

경계를 넘지 못한 유학

사대부의 거부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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