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한반도 르네상스
새로운 학풍
정치 행정이 정상화되고 제도가 정비되었다고 해서 저절로 왕국이 되는 것은 아니다. 건물의 골조가 튼튼해지고 외관이 다듬어졌다면 실내 인테리어도 그에 어울리도록 꾸며야 할 것이다. 당당한 왕국의 면모를 갖춘 새 조선에 어울리는 인테리어 작업이란 바로 학문, 지식, 예술 등의 문화 부문을 강화하는 일이다.
사실상의 재건국이라는 중요한 시기의 왕이라면 무엇보다 카리스마와 다재다능이 필요할 터이다. 이 두 가지 재질에서 영조(英祖)는 과연 시대적 요구에 정확히 부응하는 군주였다. 그는 권력과 권위로도 사대부를 확실히 제압했을 뿐 아니라 학문에서도 결코 여느 사대부(士大夫)에 뒤지지 않았다. 조선의 역대 어느 왕보다도 경연을 많이 실시했다는 게 그 점을 말해준다【경연의 기록은 후대의 왕들까지도 포함해서 영조(英祖)가 최다 횟수를 자랑한다. 이것은 단지 그의 재위 기간(52년)이 역대 최장이었기 때문은 아니다. 그는 모두 3400여 회의 경연을 개최했는데, 연평균 횟수로도 단연 으뜸이다. 또 한 가지 그가 세운 기록은 역대 왕들 중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가장 길다란 존호를 가졌 다는 점이다. 무려 50자에 달하는데, 궁금한 사람을 위해 소개하자면 이렇다. 영종지행순덕영모의열장의홍륜광인돈희체천건극성공신화대성광운개태기영요명순철건건곤녕익문선무희경현효(英宗至行純德英謨毅烈章義弘倫光仁敦禧體天建極聖功神化大成廣運開泰基永堯明舜哲乾健坤寧 翼文宣武熙敬顯孝). 좌우간 뜻이 좋은 글자들은 다 들어 있다고 보면 된다. 물론 이런 거창한 존호를 그 자신이 지은 것은 아니지만, 사실상 신하들에게 압력을 가해서 짓게 했으니 자신이 만들어 붙인 거나 다름없다. 왕권 강화책의 일환이라고 해도 좀 심한 게 아닐까?】. 더구나 원래 경연이란 신하가 왕에게 강의하는 것을 뜻하지만, 영조는 오히려 경연을 이용해 조정 대신들에게 자신의 학식을 과시하는가 하면 심지어 거꾸로 그들에게 직접 학문을 강의하기도 했다.
국왕부터 이럴 정도라면 사회 전반의 학문적 분위기는 충분히 짐작되고도 남는다. 16세기 후반의 사단칠정 논쟁에 이어 성리학에서 두번째로 철학적인 논쟁이 벌어진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17세기 후반의 예송논쟁은 철학 논쟁이 아니므로 빼도 되겠다). 하지만 분위기만으로 논쟁이 촉발될 수는 없는 법, 따라서 여기에는 성리학 내부의 동기도 크게 작용했다.
앞서 말했듯이 사단칠정 논쟁은 원래 정치 이데올로기로 출발한 성리학의 태생적 결함을 극복하기 위해 성리학에 철학적 옷을 입히는 과정이었다. 따라서 논쟁의 결론보다는(실은 결론이라 할 만한 것도 없었지만) 성리학자들 간에 그런 철학적 논쟁이 처음으로 전개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150년이 지나는 동안 성리학의 현실적 토대인 중화세계는 크게 변했다. 대륙의 주인이 바뀌었고 조선이 세계적으로 유일하게 남은 중화세계가 된 것이다. 이런 엄청난 변화를 수용하지 못한다면 성리학은 더 이상 발전하기는커녕 존립 자체가 불확실해질 수도 있다. 그래서 이번 논쟁은 사단칠정 논쟁과 같은 철학적 면모를 유지하면서도, 그것처럼 현실과 동떨어진 공허한 측면에 치우치지 않고 훨씬 ‘현실적인 문제’를 쟁점으로 채택하게 된다. 이것이 이른바 인물성동론(人物性同論)과 인물성이론(人物性異論) 간의 논쟁이다【중화세계의 변화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점에서 이 논쟁은 예송논쟁과 맥락을 같이 한다. 그런데 18세기 초반 영조(英祖)의 치세에 다시 철학 논쟁이 벌어진 이유는 그밖에도 한 가지가 더 있다. 오랜 당쟁이 영조의 탕평책(蕩平策)으로 어느 정도 마무리 된 탓에 이제 그들에게는 다툴 거리가 없어진 것이다. 조선의 사대부(士大夫)에게 본업인 당쟁 이외에 달리 할 일이 있었던가? 물론 심심해서 철학 논쟁을 벌였다고 말한다면 좀 심한 이야기겠지만, 어쨌든 권력으로부터 멀어진 사대부들이 뭔가 당쟁을 대신할 쟁점을 찾았던 것은 분명하다. 그래서 이번 논쟁은 당파 간이 아니라 노론 세력 내부에서 벌어진다】.
원래 이 논쟁은 송시열(宋時烈)의 수제자인 권상하의 제자들이 시작했다. 그 가운데 한원진(韓元震, 1682~1751)은 호서(湖西), 즉 충청도 출신이었고, 이간(李柬, 1677~1727)은 낙하(洛下), 즉 서울 출신이었기에 출신지의 머릿글자를 따서 호락논쟁(湖洛論爭)이라고도 부른다. 물론 그 내용은 이름만큼 호락호락하지 않다. 인물성동론은 인과 물, 즉 사람과 사물의 본성이 서로 같다는 것이고 인물성이론은 그 반대다. 호론(湖論)은 인물성이론의 입장이고 낙론(洛論)은 인물성동론을 취한다. 그런데 사람과 사물의 본성이 왜 새삼스럽게 문제가 되는 걸까? 그 논쟁에서 말하는 ‘사물’이 단지 일반적인 사물만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는 점을 이해하면 알기 쉽다. 그 사물에는 물론 동물도 포함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로 ‘오랑캐’도 포함된다는 점이다.
성리학에서 말하는 ‘사람’이란 예절을 알고 도덕을 실천하는 사람, 즉 중화세계에 사는 사람을 가리킨다. 중화세계의 바깥에 사는 무식하고 야만적인 종족들은 모두 ‘인(人)’이 아닌 물(物)에 속한다. 따라서 인물성동론과 인물성이론의 쟁점은 현재 중국을 지배하고 있는 만주족 오랑캐를 어떻게 볼 것이냐는 것이 된다. 그들을 똑같은 사람으로 대우한다면 인물성동론의 입장이고, ‘한번 오랑캐면 영원한 오랑캐’라고 본다면 인물성이론의 입장이다. 그렇다면 어느 쪽이 더 보수적인지, 즉 성리학적 전통에 충실한 입장인지 쉽게 알 수 있다. 바로 인물성이론이다.
호론은 600여 년 전 주희(朱熹)가 정립한 화이론(華夷論)에 입각해서 세상만물이 중화(中華)와 이적(夷狄)으로 구분되며, 중화만이 인간이고 나머지는 모두 이적이라는 논지를 전개한다. 따라서 이 입장에서는 오랑캐나 짐승이나 서로 다를 바 없다. 반면에 낙론은 사람이나 사물이나 똑같이 오상(五常, 인ㆍ의ㆍ예ㆍ지ㆍ신의 유교 도덕)을 지니고 있으므로 오랑캐라고 해서 본성이 다르다고 구분할 수는 없다면서 맞선다. 양측 모두 맹자(孟子)와 주희(朱熹) 등 옛 유학자들의 고전에서 나름대로 근거를 인용하고 있으나, 아마 낙론의 바탕에는 이제 세상이 달라졌다는 것을 현실적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믿음이 깔려 있었을 것이다.
호론(湖論) | 낙론(洛論) |
한원진(韓元震) | 이간(李柬) |
호서(湖西) 출신 | 낙하(洛下) |
인물성이론(人物性異論) | 인물성동론(人物性同論) |
청나라를 오랑캐로 본다 | 청나라를 사람으로 본다 |
화이론(華夷論)에 따른 중화(中華)와 이적(夷狄) 엄격히 구분 | 사람이나 사물이나 오상(五常)을 지녔기에 모두 같다 |
중화가 아니라면 사람도 아니다? 이런 호론의 주장은 그게 과연 18세기의 사상인지조차 의심스러울 정도로 원시적이고 야만적인 사상이지만(그 시기에 서유럽에서는 인간 이성을 예찬한 계몽사상이 발달했다), 정작 그것을 주창한 성리학자들은 오히려 오랑캐를 원시적이고 야만적으로 봤으니 여러 가지로 웃기는 일이다. 물론 그 배경에는 앞서의 예송논쟁과 마찬가지로 소중화(小中華) 이념이 있다. 비록 현실적인 힘에서는 오랑캐가 앞서지만, 문화적인 측면에서는 중화세계의 적통인 조선이 우위에 있다는 터무니없는 생각이다. 이런 변형된 중화 이념은 곧이어 자민족 중심주의로 발전하면서 예술에도 영향을 미쳐 진경산수화라는 기묘한 미술 장르를 낳는다.
진경(眞景)이라면 ‘진짜 경치’, 즉 조선의 경치를 뜻한다. 조선 화가가 조선 경치를 그리겠다는 게 왜 중화 이념일까? 그것은 조선의 사대부(士大夫)들처럼 화가들도 이제 조선이 유일한 중화세계, 즉 진정한 인간 세계라고 여긴 데서 나왔기 때문이다. 금강산의 모습을 그린 「금강
전도(金剛全圖)」와 인왕산의 경치를 화폭에 담은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의 화가 정선(鄭敾, 1676~1759)이 첫 테이프를 끊고 이후 김홍도(金弘道, 1745~?)와 신윤복(申潤福, 1758~?) 등으로 이어진 진경산수화 운동은 우리 역사상 가장 주체적인 예술 사조였으나 그 바탕에는 병적인 소중화(小中華) 이념이 자리잡고 있었다.
아닌 게 아니라 그 전 시대의 조선 화가들은 모두 종처럼 높이 솟은 중국식 산과, 계곡 사이를 구비쳐 흐르는 중국식 강을 그렸다. 게다가 그림에 조그맣게 그려진 누각이나 인물에서도 중국의 양식과 복식, 심지어 중국식 상투의 모습까지 볼 수 있었다(이는 그림의 주제를 주로 중국의 고사에서 따왔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진경산수화는 예술의 중심을 조선으로 가져온 주체적이고 혁명적인 전환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지나침은 모자람만 못한 법이다. 우리의 산천만이 ‘진경’이라면 다른 나라의 자연은 모조리 ‘가짜 경치’가 되는 걸까? 그렇게 생각한다면 이미 주체성의 범위를 넘어선 소아병적 관점이다. 실제로 소중화(小中華) 이념은 이후 민족 주체성을 확립하는 데 기여한다기보다는 편협한 국수주의적 관점을 사회 전반에 퍼뜨리는 데 기여하게 된다【이런 관점은 사실 오늘날에도 드물지 않다. 흔히 말하는 ‘우리 것이 좋은 것’이라는 생각도 지나치면 위험해진다. 예를 들어 사물놀이를 본 외국인들은 무조건 엄청난 감동을 받으리라고 생각한다든가, 금강산을 외국인들에게 보여주면 누구나 입을 다물지 못하리라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일뿐더러, 자칫하면 관광 정책에도 큰 차질을 빚게 된다. 미국의 로키산맥을 구경하고 나서 기껏 한다는 말이, “산은 역시 물이 있어야 진짜 산이지”라면 세상의 넓음을 알지 못하는 무지의 소치다. 비록 우리의 자연에는 없지만, 이 세상에는 물이 없으면서도 경치가 좋은 산도 많고 심지어 불모의 사막조차 얼마든지 좋은 경치가 될 수 있으니까】.
어쨌든 진경산수화는 예술의 영역이니까 그럴 수 있다치더라도 인물성이론의 입장은 철학이라는 외피까지 걸쳤기에 더더욱 황당하고 터무니없는 것이었다. 누가 봐도 논쟁은 인물성동론의 승리로 끝났어야 마땅한데도 명확한 승패는 나지 않았다.
예송논쟁이 극명하게 보여주듯이 원래 사대부(士大夫)들의 논쟁이란 한쪽이 권력을 장악하면서 승리를 선언해야 할 텐데, 조선이 왕국으로 컴백한 이상 그게 불가능했기 때문에 무승부로 귀결된 것이다(굳이 승패를 따지자면 대세가 대세인 만큼 인물성동론의 우세승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기존의 성리학에서 상당히 벗어난 인물성동론의 입장은 곧이어 대단히 중요한 새로운 학풍을 낳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다. 그것은 바로 후대에 실학이라 불리게 되는 학풍이다.
▲ 진짜 경치? 소중화(小中華) 사상이 자리를 잡으면서 조선사회에서는 기묘한 철학 논쟁과 기묘한 화풍이 자리잡았다. 오랑캐도 인간이라고 할 수 있는가가 쟁점으로 부각되고, 우리 산천의 경치만이 진짜 경치라고 여기게 된 풍조는 얼핏 보면 대단히 주체적인 세계관인 듯하지만 실은 성리학의 가장 근본적인 경지, 즉 병적인 자기중심주의의 소산이다. 물론 그렇다 해도 정선이 인왕산의 어느 여름날을 화폭에 담은 「인왕제색도」의 가치를 폄하할 수는 없겠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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