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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횡무진 한국사, 11부 불모의 세기 - 2장 허수아비 왕들, 원범 총각, 한양에 가다②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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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횡무진 한국사, 11부 불모의 세기 - 2장 허수아비 왕들, 원범 총각, 한양에 가다②

건방진방랑자 2021. 6. 21. 2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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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범 총각, 한양에 가다

 

 

다행히 이광은 박복한 삶을 살았어도 자식복은 있었다. 그가 죽고 나서 얼마 뒤에 아들인 이원범(李元範)이 왕위에 오른 덕분에 그는 사후에라도 전계대원군(全溪大院君)으로 추존되는 영광을 얻었다(선조宣祖인조仁祖의 아버지에 이어 역사상 세 번째 대원군이다). 열여덟 살의 강화도 총각 이원범은 영문도 모르는 채 한양으로 가서 생면부지였던 할머니 순원왕후를 만나 헌종(憲宗)의 대를 잇는다. 그가 바로 조선의 25대 왕인 철종(哲宗, 1831 ~ 63, 재위 1849 ~ 63)이다.

 

순조(純祖)부터 비롯된 새로운 전통에 따르면 철종은 그냥 왕궁에서 놀면 될 뿐 아무런 할 일도 없다. 따라서 다시 수렴을 내리고 청정에 나선 순원왕후가 해야 할 주요 임무도 촌놈 손자를 왕실 법도에 맞게 처신하도록 다듬는 것, 즉 조선판 말괄량이 길들이기밖에 없다. 육순의 나이에 새삼스럽게 육아를 떠맡은 것은 좀 귀찮았겠지만.

 

강화도 총각이 왕실에 온 지 2년 뒤, 이제 좀 다듬어졌다 싶자 순원왕후는 손자에게 아내를 얻어준다. 철종에게 총각 딱지를 떼어준 것보다 더 중요한 의미는 그것으로 세도가문이 바뀌었다는 점이다. 새로 궁에 들어온 손주며느리는 순원왕후의 친정인 안동 김씨 집안이었던 것이다. 이로써 한동안 풍양 조씨에게 눌려 지내던 안동 김씨는 화려하게 컴백했다. 권력이 안정되자 그 이듬해인 1852년 왕후는 드디어 수렴을 접었고, 그와 동시에 철종(哲宗)의 장인인 김문근(金汶根, 1801 ~ 63)영은부원군(永恩府院君)으로서 국정을 도맡았다원래 부원군이라는 명함은 조선 초부터 있었다. 세조(世祖) 때 측근 공신들에게 내준 것인데, 곧 왕의 장인에게도 부여하는 직함이 되었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접어든 이 무렵에 부원군의 직함이 마치 새로운 것처럼 등장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조선이 왕국이던 시대와 사대부(士大夫) 국가이던 시대, 18세기까지 부원군은 단지 명예직에 불과했지만, 세도정치(勢道政治) 시대부터는 세도가문의 보스로서 막강한 권력을 쥐게 되기 때문이다. 세도정치의 초대 보스인 김조순(金祖淳)의 명함은 영안부원군(永安府院君)이었다.

 

자신이 빈농 출신이었던 만큼 철종(哲宗)은 다른 것은 다 몰라도 빈민구호에는 제법 열심이었다. 마침 선혜청이라는 좋은 이름의 관청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그는 선혜청의 국고를 부지런히 재해를 입은 가난한 백성들에게 나누어주게 한다. 그러나 국왕의 이런 시혜를 지방관들은 다르게 해석했다. 물론 빈민구호 때문만은 아니지만 아무튼 그로 인해 가뜩이나 어려운 국가 재정이 더욱 부실해지자 그들은 알아서 제 몫을 챙기라는 명령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더구나 그들에게는 삼정이라는 좋은 수탈의 도구가 있다. 세도정치(勢道政治) 시대 초기부터 가속화된 삼정의 문란이 극도에 달한 것은 이 무렵이다. 그와 더불어 지방관들의 탐학에 견디다 못한 백성들의 저항이 본격화된 것도 그 무렵이다.

 

 

 조선의 프롤레타리아 궁지에 몰린 사람이 팔 것은 제 몸밖에 없다. 사진은 1862년 어느 빈민이 자신과 아내는 물론 앞으로 태어날 아이까지 팔겠다고 약속한 문서다. 이것을 자매문기(自賣文記), 자신을 파는 문서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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