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변기의 비중화세계④
나이가 많아봤자 사십대이고 주류가 삼십대인 유신 정부의 관료들은 젊은 나이에 어울리게 청렴했고 의욕적이었다. 그들은 48명의 사절단을 1년 동안이나 미국과 유럽에 파견해서 서양의 모든 제도와 문물을 적극적으로 도입했으며, 그 결과 교육, 군사, 철도, 체신, 사법 등 사회의 거의 모든 분야에서 단기간에 전면적인 서구화를 이루었다. 서양에서 수백 년씩 걸린 일을 불과 십수 년 만에 해치우는 초고속적인 압축 행정을 보여준 것이다.
그러나 그 엄청난 속도의 이면에는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의 군사적 성격이 동력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유신정부가 모델로 삼은 서양 열강을 빠른 속도로 따라잡으려면 모든 근대화 과정을 군대식 편제와 절차에 따라 추진해야만 한다. 게다가 실제로 개혁의 내용에서도 언제나 군사 부문이 최우선의 고려 사항이다. 이처럼 서양을 모델로 삼되 군대식으로 근대화를 추진하는 게 유신의 기본 노선이라면 어떤 결과물이 나올지는 뻔하다. 일단 서양식 근대화니까 일차 결론은 제국주의다. 그러나 여기에 일본 특유의 군대식 형식과 내용이 가미되면 이차 결론이자 최종 결론이 나온다. 그것은 다름아닌 ‘일본식 제국주의’, 즉 군국주의다.
알다시피 제국주의라면 식민지가 필요하다. 그런데 일본이 타깃으로 삼을 식민지 후보라면 한반도의 조선 이외에 또 있을까? 과연 유신의 성과로 어느 정도 자신감을 얻게 되자 유신 정부에서는 즉각 정한론(征韓論)이 제기된다. 말할 것도 없이 한반도를 정복하자는 주장인데, 당시 유신 세력이 정신적 지도자로 여겼던 요시다 쇼인(吉田松陰, 1830 ~ 59)의 말에 따르면 이런 논리다. “러시아, 미국과 화의가 맺어지면 우리로서는 비록 오랑캐와의 약속일지라도 신의를 지켜야 한다. 우리는 그 사이에 국력을 배양하여 손쉬운 상대인 조선, 만주, 중국을 취함으로써 교역에서 러시아와 미국에게서 잃은 것을 보충해야 한다.” 제국주의 열강에게 입은 손해를 식민지에 전가하라, 이 탁월한 아(亞)제국주의적 가르침은 곧바로 유신 정권의 대외 진출을 위한 기본 노선이 된다.
조선이 신미양요(辛未洋擾)의 혼란에 빠져 있던 1871년 일본은 중국과 수호통상조약을 맺었다. 그 내용은 그리 중요한 게 아니었으나 이 조약은 유사 이래 최초로 일본과 중국이 대등한 입장에서 맺은 외교 관계라는 점에서, 작지만 엄청난 한 걸음이었다. 이제 일본은 조선의 종주국인 중국과 같은 위상이므로 조선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고 행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런 일본의 구상은 5년 뒤에 현실로 드러난다.
▲ 진정한 극일을 위해 중화세계가 몰락하고 비중화세계가 떠오르는 상황에서 쇄국이란 곧 정치적 자폐와 같았다. 사진은 17세기 광해군(光海君) 시대에 만들어진 일본어 학습서인 『첩해신어(捷解新語)』인데, 자폐증에서 벗어나려는 당시의 노력은 결국 사대부(士大夫) 정권의 빗장수비에 걸려 빛을 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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