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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동양사, 섞임 - 9장 도발로 수미일관한 일본, 제국주의의 길: 제국주의의 명패를 달다(삼국간섭, 영일동맹, 러일전쟁) 본문

역사&절기/세계사

동양사, 섞임 - 9장 도발로 수미일관한 일본, 제국주의의 길: 제국주의의 명패를 달다(삼국간섭, 영일동맹, 러일전쟁)

건방진방랑자 2021. 6. 9. 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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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국주의의 명패를 달다

 

청일전쟁의 승리로 일본은 1000여 년이나 꿈꾸어온 동양의 패자가 되었다. 이제 일본은 중국과 대등한 관계를 넘어 중국을 압박하는 위치에 올랐다. 하지만 그것으로 일본이 서구 열강과 같은 반열의 명실상부한 제국주의 국가가 된 것은 아니다. 원조가 아니므로 어디까지나 후발 제국주의 혹은 아제국주의에 불과한 처지다. 이런 서러움은 당장에 현실로 나타났다. 원조가 텃세를 부린 것이다.

 

랴오둥 반도를 받는다면 일본은 대륙 침략에 교두보를 가지게 된다. 그러나 일본은 시모노세키 조약이 체결된 지 불과 6일 만에 단꿈에서 깨야 했다. 러시아와 프랑스, 독일이 함께 랴오둥을 청에 반환하라고 요구하고 나선 것이다. 이것을 삼국간섭이라고 부르는데, 실상 주도한 나라는 러시아였다. 겉으로 내세운 명분은 동양의 평화를 위해서라지만, 아무도 그것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다. 러시아 역시 중국과 한반도에 진출하려는 야심을 가졌으므로 일본을 최대한 견제해야 했던 것이다. 어쨌거나 공적 조약이 허무하게 취소된 데 억울해진 일본은 제국주의 열강의 우두머리 격인 영국에 호소했다. 당시 영국은 일본을 동방의 파트너로 눈여겨보고 있었으나 영국으로서도 열강 삼국의 단합된 요구는 감당하기 어려웠다. 결국 일본은 압력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새로 이사 온 동네의 텃세를 물리치려면 토박이 하나를 골라 싸워 이기는 수밖에 없다. 대상이 누군지는 명백하다. 바로 가장 텃세가 심한 러시아다. 더구나 러시아는 일본이 제국주의의 모델로 삼은 영국이 수백 년 동안 경계해오던 나라가 아닌가러시아는 18세기 초 표트르의 시대에 근대 국가 체제를 갖추고 제국주의로 노선을 정했다. 제국주의라면 해외 식민지가 필요하므로 러시아는 해외 진출에 필요한 부동항을 확보하기 위해 끊임없이 남하를 시도했는데, 그때마다 가로막은 게 영국이다. 유럽의 발트 해는 영국과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에 막혔고, 동유럽은 오스만튀르크가 장악하고 있었다(그 때문에 튀르크와 크림 전쟁도 벌인 것이다). 결국 러시아로서도 남은 곳은 동북아시아밖에 없었다. 러시아와 일본이 싸운다면 영국도 손대지 않고 코 푸는 격이니 일본을 지지해줄 것이다.

 

 

 

 

이래저래 일본에 미운 털이 박힌 러시아는 일본의 텃밭이나 다름없는 조선에서마저 일본과 대립했다. 당시 조선의 조정에서는 친일파와 친러파가 대립하고 있었다. 그러나 삼국간섭에서 일본이 굴복하는 것을 본 민씨 세력은 갑오개혁(甲午改革)을 주도한 친일 내각을 몰아냈다. 이에 맞서 일본은 1895을미사변(乙未事變)을 일으켜 명성황후를 살해하고 대원군을 옹립했다. 이 만행으로 신변의 위협을 느낀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가서 1년 가까이 머물렀다. 아관파천(俄館播遷)이라고 부르는 이 사건을 계기로 조선의 조정은 친러파가 장악했다.

 

이제 일본이 조선과 만주, 나아가 중국에서 발언권을 강화하려면 러시아와의 일전이 불가피하다는 사실이 명확해졌다. 그러나 러시아는 일본과 같은 체급이 아니다. 비록 유럽에서는 후발 제국주의에 속해 있지만 영국마저 어쩌지 못하는 강국이었다. 일단 일본은 조선과 관련된 모든 사안마다 러시아와 협정을 맺어가면서 버텼다.

 

밴텀급으로서 헤비급 선수와 맞서 싸워야 하는 일본에 필요한 무게를 실어준 것은 영국이었다. 1870년대부터 비스마르크 체제의 독일이 힘을 키우는 상황에서, 영국이 프랑스의 요청을 거부하면서까지 독일에 대해 수수방관으로 일관한 이유는 러시아 때문이었다. 유럽 각국이 활발하게 이리저리 동맹을 맺고 협상을 벌이는 어지러운 국제정세에도 영국은 19세기 말까지 어느 나라와도 동맹 관계를 맺지 않았다. 이것을 이른바 명예로운 고립(splendid isolation)’이라고 부르는데, 그토록 오만했던 영국은 1902년 드디어 동양에서 일본과 동맹을 맺었다. 오로지 러시아의 진출을 견제하기 위해서였다. 영일동맹으로 일본의 체급은 몇 계단을 뛰어넘어 기존의 제국주의 국가들에 꿀리지 않을 정도가 되었다.

 

영일동맹의 기본 내용은 조선과 청에서 열강과 관련된 분쟁이 일어날 경우 영국과 일본 양국은 각자 자국의 이익을 보호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당연한 상식이지만 다음 조항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영국과 일본 중 한 국가가 제3국과 전쟁을 벌이게 될 경우 나머지 국가는 중립을 취하기로 한 것이다. 그것도 그냥 중립이 아니라, 3국이 적국의 편에 가담할 경우에는 나머지 국가도 참전해 동맹국을 지원하기로 했다. 여기서 적국이란 누가 보아도 러시아이고, ‘3이란 삼국간섭에 나섰던 프랑스와 독일을 비롯해 제국주의 열강이다. 말하자면 일본이 러시아와 전쟁을 벌인다 해도 다른 나라는 간섭하지 말라는 것이다(물론 다른 나라가 개입한다면 영국도 일본을 지원하게 된다).

 

 

러시아의 조선 정부 조선 국왕 고종은 아내기 일본에 의해 살해당하자 신변의 위험을 느껴 러시아 공사관으로 도망쳤다. 시진은 이 공사관 앞에서 무리시위를 벌이며 고종의 환궁을 요구하는 일본군의 모습이다. 남의 나 비를 실해하는 만행을 저지른 일본군이나, 일국의 왕으로서 남의 나라 공사관으로 도망치 신민 보호를 요청하는 고종이나 모두 기억에서 지워버리고 싶은 장면일 것이다.

 

 

이것으로 일본은 삼국간섭의 치욕을 만회할 수 있는 멍석을 깔았다. 남은 일은 이 멍석 위에서 러시아와 한판 승부를 벌이는 것뿐이다. 때마침 러시아는 압록강 하구의 용암포를 강제로 조차했고, 만주에서도 일본과의 약속을 파기하고 군대를 철수하지 않았다. 청일전쟁에서처럼 상대방은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으나 일본은 이미 전쟁 준비를 완전히 갖추고 있었다. 그리고 청일전쟁에서처럼 일본은 190428일과 9일에 걸쳐 뤼순과 인천에 정박 중인 러시아 함대를 기습하고 다음 날에야 선전포고를 했다.

 

이렇게 시작된 러일전쟁은 10년 전의 청일전쟁과 달리 조선과 만주의 지배권을 놓고 두 제국주의 국가가 벌인 전형적인 제국주의 전쟁이었다. 그러나 러시아는 청과는 전혀 다른 강호였다. 서구 열강은 물론이고 멍석을 깔아준 영국조차 일본이 러시아의 상대가 되기는 어렵다고 보았다. 어차피 영국으로서는 제3국이 개입하지 못하게만 한다면 손해는 없을 터였다. 영국만이 아니라 프랑스와 미국도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일본 측에 전쟁 비용을 지원했다.

 

졸지에 유럽 열강을 대표해 러시아와 싸우게 된 일본은 예상외로 선전했다. 랴오둥에서 러시아의 뤼순 요새를 함락시킨 뒤, 남만주철도를 따라 북진해 19053월에는 만주 봉천(奉天, 선양의 옛 이름)에서 러시아의 주력군을 격파했다. 해군 역시 유명을 떨치던 러시아의 극동함대를 격파하고 황해 일대의 제해권을 확보했다. 하긴 일본에게는 사활이 걸린 전쟁이고 러시아에게는 극동이 전체 전선의 일부에 지나지 않았으니 전쟁에 임하는 태도가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전쟁의 상대도 그랬지만 전쟁의 진행 과정도 과거 청일전쟁과는 달랐다. 서구 열강의 지원까지 받았으나 개전 후 1년이 지나자 일본은 더 이상 전쟁을 수행할 능력이 없었다. 전 국민이 전시 체제에 동원된 데다 흉작까지 겹쳐 전쟁 비용이 고갈된 것이다. 전투에서는 사력을 다해 연전연승을 거두었지만, 더 지속될 경우 전쟁에서 질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예상 밖의 승리 청일전쟁의 승리를 계기로 자신감을 얻은 일본은 조선과 만주 침략의 걸림돌인 강대국 러시아와 일전을 불사한다. 일본은 이 전쟁에서 승리해 서구 열강을 깜짝 놀라게 했다.

 

 

일본을 사지의 구렁텅이에서 건져준 것은 러시아의 내부 사정이었다. 19세기 후반부터 활발해진 러시아의 혁명운동은 러일전쟁으로 더욱 고조되었다. 실은 일본의 메이지 정부가 청일전쟁으로 숨통을 텄듯이 러시아의 차르 정부도 국내의 정정 불안을 전쟁으로 타개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그러나 뜻하지 않게 일본에 밀리자 혁명운동이 위축되기는커녕 오히려 차르 정부의 무능함만 드러났다. 급기야 1905122일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군대가 시위대에 발포하는 피의 일요일사태가 일어났다. 이로써 러시아 내부 정세는 걷잡을 수 없는 상태로 빠져들었다.

 

사태가 급변하자 전쟁을 바라보는 열강의 태도도 변했다. 이제는 군국주의 일본의 성장보다 러시아의 혁명운동이 더 큰 위협이었다. 그래서 열강은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의 주선으로 일본과 러시아의 강화를 유도했다. 19059월에 미국의 포츠머스에서 열린 강화 회담에서 러시아는 한반도와 만주의 모든 권리를 일본에 양도하고, 애써 얻은 사할린마저 일본에 넘겨주는 굴욕적인 조약을 맺었다.

 

아슬아슬했던 일본의 승리는 전 세계에 큰 충격을 가져다주었다. 서구 열강은 물론 인도의 간디와 중국의 쑨원 같은 식민지ㆍ종속국의 민족운동가들도 일본이 당시 세계 최대의 육군을 자랑하는 러시아에 승리했다는 소식에 충격과 자극을 받았다(이를 계기로 쑨원이 일본을 발전의 모델로 삼게 되었음은 앞에서 본 바 있다). 그러나 일본은 수십 년 전처럼 피억압 민족의 선두 주자가 아니라 제국주의를 꿈꾸는 신흥 세력일 뿐이었다. 전쟁의 승리로 일본은 새끼제국주의에서 성숙한제국주의로 탈바꿈했다.

 

완전한 제국주의 국가의 자격을 획득한 일본은 이제 아무런 거리낌 없이 조약에서 양도받은 권리를 행사했다. 러일전쟁의 최대 전리품, 그것은 바로 조선이었다. 청일전쟁으로 수천 년 동안 한반도에 영향력을 행사해온 전통의 종주국을 물리쳤고, 러일전쟁으로 신흥 종주국마저 제압했다. 이제 일본은 한반도의 새 종주국이 된 걸까? 그러나 일본은 종주국의 지위를 누리려 하지 않고 아예 한반도를 소유하는 방법을 택했다. 그것이 바로 1910년의 한일합병이다.

 

 

피의 일요일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군대의 발포로 쓰러진 군중의 모습이다. 러일전쟁 중에 러시아 수도에서 일어난 피의 일요일 사건 덕분에 일본은 가까스로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인용

목차

한국사 / 서양사

대외 진출은 늘 침략으로

유신의 결론은 군국주의

300년 만의 재도전

제국주의의 명패를 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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