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종명의장(開宗明義章) 제일(第一)
불감훼상의 우주적 스케일
중니(仲尼)께서 댁에서 한가롭게 거(居)하고 계실 때에 증자(曾子)가 시중들며 곁에 앉아 있었다. 이때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삼(參)【자(字)가 아닌 증자의 이름[名], 공자가 제자를 애칭하는 방식】 아! 우리가 살고 있는 문명을 만드신 선왕(先王)들께서는 지덕(至德: 지극한 덕. 효덕孝德)과 요도(要道: 도의 요체. 효도孝道)를 몸에 지니고 계셔, 그것으로써 천하(天下) 사람들을 가르치셨다. 백성들은 그 지덕과 요도로 인하여 화목(和陸)하게 되었고, 사회의 윗 계층과 아랫 계층이 서로 원망하는 일이 없었다. 아가, 너 그것을 아느냐?” 仲尼閒居, 曾子侍坐. 子曰: “參, 先王有至德要道, 以順天下. 民用和睦, 上下無怨. 女知之乎?” 증자가 공손히 일어나 자리를 비키며 아뢰었다: “제가 불민(不敏)하기 그지 없사온대, 어찌 그것을 알리오리이까?” 曾子避席曰: “參弗敏, 何足以知之乎?”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대저 효(孝)라는 것은 인간의 모든 덕성의 근본이며, 교화(敎化)가 모두 그로 말미암아 생겨나는 것이다. 아가, 네 자리로 돌아가 앉거라! 내가 정식으로 너에게 가르침을 주겠노라. 다음의 말들을 가슴 깊이 새기어라. 너의 몸통(신身)과 사지(체體), 그리고 머리카락(발髮)과 피부(부膚)가 모두 부모로부터 받은 것이다. 그것을 감히 훼상(毁傷: 다치거나 못쓰게 함)하지 아니 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효의 시작이다. 몸을 반드시 세우고(立身: 떳떳한 인간으로 성장함) 인생의 정도를 걸어가는 것(行道), 그렇게 하여 아름다운 이름을 후세에 떨치는 것, 그리고 내 이름으로 부모님까지 영예롭게 만드는 것, 이것이야말로 효의 종착이다. 대저 효라는 것은 어려서부터 부모님을 섬기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사회에 나아가서는 임금을 섬기는 것으로 진행되다가, 결국은 자기 몸을 반듯이 세우는 것으로 완성되나니라. 『시경』 대아(大雅) 「문왕(文王)」 노래에 이런 구절이 있나니라: ‘그대의 선조들을 항상 잊지 말아라. 선조들의 덕을 이어 그것이 한층 빛나도록 몸을 닦아라.’” 子曰: “夫孝, 德之本也, 敎之所繇生也. 復坐. 吾語女. 身體髮膚, 受之父母, 不敢毁傷, 孝之始也. 立身行道, 揚名於後世, 以顯父母, 孝之終也. 夫孝, 始於事親, 中於事君, 終於立身. 「大雅」云: ‘亡念爾祖, 聿脩其德.’” |
‘개종명의(開宗明義)’란 종지(宗旨)를 열고, 대의(大義)를 밝힌다는 뜻으로 『효경』 전체의 총론이라는 뜻이다.
‘증자(曾子)’라는 표현은 증삼을 높인 말인데, 증자학파에 소속되는 증자문인들이 자기 선생을 부를 때 쓰는 표현이다. 공자 앞에서 당연히 낮추어 불러야 함에도 불구하고 ‘증자’라고 부른 것은 증자학파의 형식주의나 권위주의가 좀 개재되어 있을 수도 있다.
‘피석(避席)’ ‘복좌(復坐)’는 자리의 예법인데, 여기 석(席)이라는 것은 마루바닥 위에 일본사람들 다다미(たたみ, 疊)처럼 생긴 방석이 있는 것이다.
‘복좌(復坐). 오어여(吾語女).’는 그냥 상식적인 행동이 아니고 학문을 전수할 때 말하는 작법으로서 고례(古禮)로부터 내려온 것이다(『논어한글역주』 「양화」 8의 설명을 참고할 것).
마지막의 『시경』 인용은 대아(大雅)의 「문왕(文王)」에 있는 구절인데, 원래적 맥락은 피정복의 은나라 유민들을 겁주면서 하는 말로써, ‘조상들의 비극을 생각하면서 부지런히 덕을 닦아라[亡念爾祖, 聿脩其德]’는 의미이다. 그러니까 『효경』의 인용방식이 단장취의(斷章取義)라고 할 수 있다.
‘신체발부, 수지부모, 불감훼상(身體髮膚 受之父母 不敢毁傷)’이라는 메시지는 몸철학(Philosophy of Mom)의 대원리로서 나의 존재의 연대성과 관계성, 그리고 생명의 온전성에 대한 존중(Reverence for Life)을 의미한다. 그리고 나의 몸에 대한 존중은 타인의 몸에 대한 존중을 똑같이 수반한다는 사실을 꼭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타인의 몸도 나와 똑같이 ‘수지부모(受之父母)’한 것이기 때문이다. 즉 나의 신체발부나 타인의 신체발부가 공통된 효의 원리 속에서 똑같이 존중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전통적으로 ‘신체발부, 수지부모, 불감훼상’이라는 이 구절은 많은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구절을 해석하는 데 있어서 우리는 문자의 일면만을 보아서는 아니 된다. 그 배면에는 반어적(反語的)인 역동성이 숨어 있는 것이다. ‘불감훼상(不敢毁傷)’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머리카락도 함부로 자를 수 없었다. 그래서 조선조에서는 남아(男兒)도 더벅머리를 길게 따서 늘어뜨리는 관습이 생겨났던 것이다. 나의 아버지는 살아 생전에 손톱을 자르시고도, 그 손톱을 모아두었다가 꼭 화단에 묻곤 하셨는데, 부모님의 유체를 아무 곳에나 방기할 수 없다는 생각이 있으셨던 것이다.
이러한 삶의 형태는 매우 보수적인 체제순응적 인간을 길러낸다고도 말할 수 있겠지만, 구한말의 단발령(斷髮令)에 반발한 유자들이, 한결같이 『효경』의 이 구절을 인용하여 ‘내 목을 자를 수 있을지언정 내 머리카락은 자를 수 없다’고 목숨으로 항거한 것은 이러한 가치관의 또다른 측면을 보여주는 것이다. 단발의 수용이 개화의 정당한 길이냐 아니냐를 따지기 전에, 그것은 일본의 정치적 압력에 대한 굴복이었고, 삶의 ‘일본화’를 상징하는 것이었으며, 인륜을 파괴하여 문명인을 야만인으로 전락케 하는 비열한 행동이었다. 그러한 피상적 강요는 국정개혁을 결실시킬 수 있는 대중적 지지기반을 상실케 할 뿐이었다. 을미사변(乙未事變, 일본인에 의한 민비시해사건) 3개월 후에 선포된 단발령에 대한 전 국민의 항거는 결국 단발령을 철회하게 만들었으며, 단발령으로 촉발된 국민들의 격노는 거센 의병운동의 도화선이 되었다. 조선왕조의 비극적 종말을 막아볼려고 노력한 반일ㆍ반정부의 의병운동이라도 없었더라면 우리가 과연 조선왕조의 노블리스 오블리쥬(noblesse oblige)를 말할 수 있을까? 부끄러운 역사만 우리에게 남았을 것을 생각하면 『효경』의 ‘신체발부, 수지부모, 불감훼상’의 사상이야말로 우리민족의 영원한 ‘항거의 활화산’이라는 생각이 든다.
‘불감훼상’의 논리가 과거에는 ‘왕조형법의 저촉’을 발생시키지 않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정언명령처럼 해석되어, 왕조체제순응형의 인간을 길러내는 데 크게 기여한 것도 사실이다. 독재정권의 불의에 항거하여 경찰곤봉에 머리가 깨지고 피가 나는 데모대열의 대학생들에게 ‘신체발부, 수지부모, 불감훼상’을 외치면서 그들의 행동을 저지하려는 보수언론의 논객들도 있겠지만, 오히려 ‘불감훼상’의 논리가 항거(抗拒)의 원동력이 되고 있다는 역설을 우리는 기억하지 않으면 안 된다. ‘너희들이 무엇인데, 감히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이 몸을 훼상시킨단 말이냐’하고 정의로운 데모의 불꽃은 더욱 치성하게 타오를 수 있다. 서슬퍼런 간언을 일삼고 당당하게 사약을 들이키는 과거 유생들의 절개로운 삶은 부모에게 대효를 완수했다는 안도감의 전율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더구나 과거 왕조의 형법중심의 법률체계와는 달리 민법이 발달한 현대사회에서는 이 ‘불감훼상’의 논리는 인간개체의 존엄성과 거의 본능적으로 연계되어 있다.
존 록크(John Locke, 1632~1704)는 인간은 국가가 제정한 실정법과 관련없이 태어나면서부터 자연적으로 불가침(不可侵)ㆍ불가양(不可讓)의 자유와 평등의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현실의 사회생활에 있어서의 국가지배는 개인의 이러한 권리에 대한 ‘지배계약’에 의거하지 않으면 안된다. 따라서 지배자가 이 계약에 위반하여 개인의 생명ㆍ자유ㆍ재산ㆍ행복을 침해할 때에는 개인은 여기에 대하여 대항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한다.
이것이 소위 자연법(自然法, Natural Law)에 기초한 천부인권설(天賦人權說, The Theory of Natural Rights)이다. 왕권신수설(王權神授說)의 신권통치(Theocracy)의 허구에 치명적 타격을 가한 사상이며, 이 사상은 영국의 권리장전(the Bill of Rights, 1689)의 기초가 되었고, 버지니아 인권선언(the Virginia Declaration of Rights, 1776)으로 채용되었으며, 미국의 독립선언문(the American Declaration of Independence, 1776)의 뼈대가 되었다. 그리고 향후 불란서혁명(French Revolution)에 엄청난 영향을 주었다.
이러한 근세적 인권설(Human Rights)이 우리나라 헌법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그리고 타생적이든지, 자생적이든지를 불문하고 현재 우리나라의 민주 법질서는 이러한 인권설에 기초한 성공적인 관례들을 축적시켜 나가고 있다. 이러한 성공의 배면에는 ‘신체발부, 수지부모, 불감훼상’이라는 『효경』 사상이 깔려있다는 엄연한 현실을 우리는 기억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한국인의 ‘인권’ 개념은 신부(神賦)도 아니요, 천부(天賦)도 아니다. 그것은 친부(親賦)인 것이다. 내 몸(Mom)이야말로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지존의 권리이며 천자(天子)라도 훼상시킬 수 없는 지고한 가치라는 생각이 한국인의 인권개념을 정립시키고 있는데 이것을 친부인권설(親賦人權說, the Theory of Mom's Intrinsic Rights)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이 친부인권설이야말로 바로 록크적인 천부인권 개념에 잘 맞아 떨어진 것이다. 『효경』의 불감훼상은 결코 과거의 가치로서 이해될 것이 아니라 미래적 가치로서 더욱 존중되어야 한다.
그리고 『효경』의 ‘불감훼상’ 논리는 ‘나’의 ‘몸’이라는 서구적 개인존엄의 가치에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사실도 꼭 기억할 필요가 있다. 나의 몸은 나의 부모의 몸의 연장태로서 ‘천지동포’와의 화엄적 연계성을 확보하는 것이다. 따라서 나의 몸이라는 개체에 한정될 때 그것은 ‘인권(人權)’이 되지만 그것을 천지동포로 확대시킬 때는 그것은 ‘물권(物權)’이 된다. 산천초목에도 친자의 관계는 존재한다. 나무도 어미와 새끼가 있다. 그것이 ‘효도’라는 의식적 활동으로 연계되고 있지는 않지만, ‘신체발부, 수지부모, 불감훼상’이라는 논리는 엄연히 고수되고 있다. 산천초목이라 할지라도 부모에게서 받은 몸(Mom)을 온전하게 유지하려는 노력을 한다. 그런데 그것을 인간이 마구 톱질해대는 것은 매우 불효(不孝)한 일이다. 그들이 온전한 모습과 환경을 유지하고자 노력하는 물권(物權)을 묵살하는 죄악이다.
『효경』의 자매편이며 동일한 사상 패러다임을 표현하고 있는 『대대례기』의 「증자대효(會子大孝)」 편, 그리고 『예기』의 「제의」 편에는 다음과 같은 충격적 명언이 있다. 바로 악정자춘이 발목을 삔 이야기 이후에 연(連)하여 나오고 있다.
산천초목도 반드시 그 때를 따라 베어야 한다. 금수도 반드시 그 때에 맞추어 죽여야 한다. 그래서 공자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었다: “나무 한 그루를 베는 것도, 짐승 한 마리를 죽이는 것도, 자연의 때를 따라 공경히 하지 않으면 그것은 불효이다.”
草木以時伐焉, 禽獸以時殺焉. 夫子曰: “伐一木, 殺一獸, 不以其時, 非孝也.”
‘불감훼상’의 몸철학의 논리는 바로 전 우주적 스케일로 확대되고 있는 것이다. ‘몸’과 ‘효’와 ‘불감훼상’은 인권이라는 협애한 개념에 국소화되지 않는다. ‘몸’은 기(氣)의 사회(Society of Qi)이며, 그 기의 사회는 모든 생명체와 연계되어 있는 것이다.
「증자대효」의 사상은 우리나라 동학의 2대교조인 해월(海月)의 ‘이천식천(以天食天)’ 사상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하느님이 하느님을 먹을 수 있는 것은 하느님이 하느님을 봉양할 때만이 허락된다는 것이다. 나무 한 그루도 하느님이요, 짐승 한 마리도 하느님이다. 공자가 말하는 “벌일목(伐一木), 살일수(殺一獸)’는 바로 ‘이천식천’의 행위를 지칭하는 것이다. 그것은 반드시 최소한의 요구에 따라 최적의 자연리듬에 따라 행하여질 때만이 효(孝)가 된다는 것이다. 효는 동방인의 에콜로지(Ecology) 관념의 근간을 형성하는 것이며, 알버트 슈바이쳐(Albert Schweitzer, 1875~1965)가 말하는 ‘생명외경(Reverence for Life)’ 사상과 상통하는 것이다.
‘신체발부, 수지부모, 불감훼상’은 평상시에는 나의 삶의 고결함을 의미한다. 그것은 극기절제의 양생(養生)철학의 구현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우주적 스케일로 확대될 때는 온 생명의 온전함에 대한 경외감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사회적 개체로서 인식할 때는 부모에게 받은 몸(Mom)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이미 존엄한 개체로서 살아가게 된다. 그것은 서구인들이 자기 몸을 신의 은총으로서만 생각하던 중세기적 사유보다 훨씬 앞서서, 그리고 근세적 개인주의의 존엄성을 확보하기 훨씬 이전부터, ‘나’를 존엄한 신체발부로서 인식하고 당당하게 대장부(大丈夫)로서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든 것이다. 효는 나의 몸의 효인 동시에 천지자연의 몸의 효이다. 그러한 생명 공동체의 효야말로 모든 신성(Divinity)의 궁극적 의미인 것이다.
‘수지부모(受之父母)’가 인치본에는 ‘수우부모(受于父母)’로 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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