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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12부 식민지ㆍ해방ㆍ분단 - 1장 가해자와 피해자, 때늦은 저항(정미7조약, 국채보상운동, 안중근) 본문

역사&절기/한국사

12부 식민지ㆍ해방ㆍ분단 - 1장 가해자와 피해자, 때늦은 저항(정미7조약, 국채보상운동, 안중근)

건방진방랑자 2021. 6. 22. 1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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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때늦은 저항

 

 

 조선의 왕위 교체가 무의미해진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니까 순종이 즉위했다고 해서 하등 달라질 건 없다. 오히려 일본으로서는 나이든 고종(高宗)보다 젊은 순종(純宗)이 훨씬 다루기 쉽다. 고종은 40년간이나 재위하면서 조선 국왕으로서의 상징성이 굳어진 데다 러시아와의 친분도 두터울 뿐 아니라 드물긴 하지만 나름대로 실권을 행사한 경험도 있으니 아무래도 껄끄러운 데가 있지만, 순종은 조선 국민들에게 인지도도 비교적 약하고 외국과의 별다른 인맥도 없으니 과도기에 써먹기 딱 좋은 바지저고리다(게다가 그는 을미사변(乙未事變) 때 하마터면 일본 깡패들의 손에 죽을 뻔한 적도 있으니 기합이 잘 들어 있었을 터이다).

 

과연 순종이 즉위하면서부터 통감부의 프로그램은 한층 탄력을 받는다. 즉위한 지 불과 나흘 만에 조인된 정미 7조약이 바로 그 즉각적인 성과다(1907년이 정미년이기에 그런 이름이 붙었는데, 고종이 더 버티었더라면 무신 7조약이나 기유 7조약이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토의 사랑스런 수족인 이완용은 순종의 재가를 얻어 전권대신이 된 뒤 이토의 집(통감 사택)에서 둘이 사이좋게, 조선의 군대를 해산하고 사법권과 경찰권마저 통감부에 위임한다는 엄청난 내용의 조약을 체결했다. 이제 일본은 조선에게서 독립국으로서의 권리(외교권, 군사권)만이 아니라 속국으로서의 권리마저도 모조리 빼앗았다. 남은 절차는 일본의 공식적인 식민지로 만드는 것뿐인데, 곧바로 그 절차를 밟지 못한 이유는 조선 국민들의 저항 때문이었다. 그것도 왕실이나 조정의 일부 대신들처럼 소극적 저항이 아니라 무력을 이용한 저항, 즉 의병(義兵)이었으니 일본으로서는 무엇보다 급한 문제였던 것이다.

 

사실 의병은 이미 2년 전인 1905년부터 활발히 일어나고 있었다. 처음 의병이 일어난 것은 을미사변(乙未事變)단발령(斷髮令)이 있었던 1895년 무렵이지만 그때는 사안이 일회성인 탓으로 의병도 얼마 안 가서 사그러들었다. 그러나 을사조약은 국가의 존망이 걸린 사건인 탓에 이번의 의병은 규모에서나 강도에서나 전에 비할 바가 아니다. 그런 데다가 고종(高宗)이 반강제로 퇴위당하고 군대가 해산되는 사태에 이르자 을사의병은 자연히 정미의병으로 이어지면서 한층 치열해졌다. 왕고참에 해당하는 유인석을 비롯해서 박창로(朴昌魯, 1846~1918)와 정운경(鄭雲慶, ?~1908) 등 강원도와 충청도를 무대로 활약한 의병장들이 주축을 이루었으며, 그밖에 경기도의 여주, 양평, 영남의 경주, 영덕 등지에서도 의병들이 구름처럼 들고 일어났다. 구국을 모토로 삼은 만큼 의병에는 신분 차별도, 나이 구분도 없었다. 민종식(閔宗植, 1861~1917) 같은 민씨 세도가의 인물이 있는가 하면 신돌석(申乭石, 1878~1908)과 같은 평민 의병장도 있었고, 정환직(鄭煥直, 1843~1907)과 같은 노인이 있는가 하면 이은찬(李殷瓚, 1878~1909)과 같은 젊은이도 있었다.

 

 

 

 

일본의 조선 침략을 자본 진출을 통한 예속화쯤으로 착각한 애국적 부자들이 이른바 국채보상운동(國債報償運動)이라는 명목으로 차관을 갚자는 캠페인을 벌일 무렵물론 국채보상운동도 구국운동의 일부가 아니라고 할 수는 없으나, 그 운동을 주도한 민족자본가들은 일본의 진정한 의도가 어디에 있는지를 몰랐으므로 별로 저항의 의미는 없다고 하겠다. 당시 일본은 조선에 네 차례에 걸쳐 대규모 차관을 제공했는데, 주로 조선을 식민지화하기 위한 자금 용도였다. 그런 만큼 일본은 차관을 반환받을 의지가 전혀 없었으므로 채권자의 의도와 무관한 채무보상운동은 무의미했던 것이다. 그래도 이 캠페인은 무장투쟁보다는 참여하기가 쉬웠던 탓에 전국민적인 호응을 얻었으며, 그 때문에 통감부는 이 운동을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를 탄압하고 운영자인 영국인 베델과 양기탁(梁基鐸, 1871~1938)을 잡아들여야 했다 각지의 의병들은 나라를 되찾기 위해 그야말로 목숨을 걸고 싸웠다. 그러나 그 치열함에 비해 효과는 별로 없었다. 자연발생적이고 비조직적인 의병은 훨씬 우수한 화력으로 무장한 일본 정규군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더욱이 통탄스러운 일은 의병의 비밀조직을 색출하는 데 조선인들이 앞장섰다는 사실이다. 친일 민간단체인 일진회(一進會)가 특히 그악스럽게 굴었는데, 일본군의 통역을 맡은 송병준(宋秉畯, 1858~1925)이라는 자가 창립한 유신회(維新會)를 기반으로 하고 이완용의 지령을 받은 단체였으니, 그 이름은 아마도 조선의 식민지화를 위해 일로매진한다는 뜻이었을까?

 

비록 때늦은 저항이라 하더라도 의병의 의의는 적지 않다 해야겠지만, 의병운동은 근본적인 한계가 있다. 자주 독립의 취지만큼은 높이 살 수 있으나 기본적으로는 위정척사의 이념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유인석도 그렇지만 실제 의병 활동은 보잘것없던 최익현이 의병운동의 상징적 구심점으로 널리 받아들여졌던 이유도 거기에 있다. 그래서 의병들의 공격 대상에는 침략자 일본과 그 앞잡이들은 물론이고 개화 사상을 가진 인물들까지 포함되어 있었으며, 이념적 목표도 외세를 완전히 배제하고 옛날의 제도를 부활하는 것에 두고 있었다의병운동이 그런 오해를 피하려면 사실 독립협회(獨立協會)가 해산될 때도 일어났어야 했다. 의병운동이 진정 구국을 목적으로 삼고 있었다면 조선이 존망의 위기에 처했을 때 일어났어야 할 텐데, 그것은 바로 자주국권을 기치로 내세운 독립협회가 탄압을 받은 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구국보다는 수구를 이념으로, 민족보다는 왕실과 유학 체제의 보존을 목표로 삼았기에 정작 그런 위기에서는 의병이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유림 세력은 을사조약으로 조선 왕실이 위기에 처하고 정미조약으로 고종(高宗)이 퇴위된 사건에서 자극을 받아 의병을 일으킨 것이니, 그것을 순수한 민족운동이나 애국운동으로 볼 수는 없다.

 

40년 전의 위정척사 운동이 그랬듯이 의병운동 역시 성리학적 세계관을 동력으로 하는 시대착오적이고 수구적인 몸부림에 지나지 않았다. 외세의 침략에 반발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중국이나 러시아의 침략보다도 일본의 침략에 특히 민감하게 반발한 배경에는 전통적으로 중국을 섬기고 일본을 오랑캐로 경멸해 온 중화 이데올로기가 있었다. 결국 그토록 오랫동안 조선의 발목을 잡아 온 그 질곡은 조선이 망할 때까지도 그 발목을 놓아주지 않았던 것이다.

 

 

마지막 전쟁포로 일본 검찰 앞에서 안중근이 유언을 남기고 있는 장면이다. 당시까지 아직 조선 합병되지 않았으므로 안중근은 어디까지나 자신이 밝힌 것처럼 전쟁포로. 그러나 나라를 빼앗긴 뒤에 활약한 독립투사들은 불행하게도 법적으로 테러리스트의 지위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

 

 

그러나 식민지화 일정이 가시화되자 의병 이외에 또다른 형태의 저항 방식이 생겨난다. 그것은 바로 테러다. 어쩌면 일본과 친일파들은 의병보다 그것을 더 두려워했을지도 모른다. 유학을 이념으로 삼고 유림에서 출발한 보수적 의병운동은 일본의 탄압이 심해지자 위축되었으나, 전통적 이데올로기에 물들지 않은 새로운 저항 세력은 점차 중국의 만주와 러시아의 연해주로 거점을 옮겨 본격적인 무장투쟁을 전개하기 시작한다. 그런 항일운동가들 중에 안중근(安重根, 1879~1910)이 있었다.

 

안중근은 열여섯 살 때 그리스도교에 입문해서 세례까지 받은 데다 유학의 굴레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황해도 출신이다. 그런 만큼 그는 전통적 이념의 굴레에 얽매이지 않았으므로 진보와 보수를 논하기 전에 민족을 먼저 생각할 수 있었고 개화와 척사를 따지기 전에 먼저 자주를 바라볼 수 있었다. 정미조약이 체결되자 그는 연해주로 넘어가서 그곳에 부대를 가지고 있던 이범윤(李範允, 1863~?)의 휘하로 들어가 함경도 일대에서 무장투쟁을 전개한다. 1909년 봄 동지들과 함께 단지회(斷指會)를 결성한 안중근은 새끼손가락을 자르는 데 그치지 않고, 조선 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앞으로 3년 이내에 암살하지 못하면 조선 국민에게 자결로 속죄하겠다고 맹세한다.

 

그 기회는 3년이 아니라 반 년 만에 왔다. 만주와 연해주의 항일 세력을 처리하는 문제로 그 해 1026일 하얼빈에 온 이토는 러시아 장교단을 사열한 뒤 군중 속에서 뛰쳐나온 안중근의 총탄을 세 발 맞고 죽는다. 젊은 시절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의 주역이었고 일본을 제국주의 국가로 발돋움시킨 일본의 영웅이 조선의 식민지화를 추진하다가 조선 청년의 저격을 받고 이국 땅에서 숨을 거두었으니, 과연 죽는 것도 다섯 가지 복 가운데 하나라는 이야기가 실감나는 장면이다실제로 일본의 역사에서 이토는 근대화의 초석을 놓은 위대한 인물로 큰 존경을 받지만 우리 역사에서는 조선 침략을 주도한 원수일 뿐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안중근도 역시 조선에서는 항일투쟁의 상징적 영웅이며 어린이 위인전에 등장하는 단골 멤버지만 일본에서는 민족의 영웅을 살해한 테러리스트일 뿐이다. 이렇게 한 인물에 대한 평가도 나라와 민족에 따라 엇갈릴 수밖에 없다면, 역사에서 객관적인 관점이란 대체 뭘까?.

 

이 사건이 단순한 테러가 아니라는 점은 사건 직후 안중근이 직접 밝힌 거사 동기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러시아 검찰관의 예비 심문에서 그는 개인적인 동기로 거사한 게 아니라 대한의용군 참모중장이라는 자격으로 조선의 독립주권을 침탈한 적을 쏘아죽인 것이므로 자신을 전쟁포로로서 취급해 달라고 당당하게 요구했던 것이다. 자신의 행위를 테러가 아닌 전쟁이라고 밝힌 것은 그가 의병운동과 항일운동의 본질적 차이를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의병운동은 조선의 왕실과 옛 체제를 부활시키려 했지만, 항일운동은 왕국으로서의 조선에 집착하지 않고 주권국가로서의 조선을 내세우는 것이었다. 이렇게 국가 대 국가의 관점을 취해야만 겉으로 테러처럼 보이는 사건도 전쟁에 포함시킬 수 있다.

 

안중근은 죽을 때까지 당당한 태도와 소신을 굽히지 않을 수 있었지만, 불행히도 그의 논리는 그가 죽은 뒤 몇 개월 만에 근거를 잃게 된다. 전쟁이 가능하려면 무엇보다 국가가 행위의 주체여야만 하는데, 19108월에는 조선이라는 국가 자체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후에 일어난 독립투사들의 의거는 안중근의 경우처럼 전쟁이 되지 못하고 적어도 실정법상으로는 테러에 그치고 만다. 안중근으로서는 그런 꼴을 보지 않고 죽었다는 게 차라리 다행이라 할까?

 

 

근정전에 나부끼는 일장기 근정전이라면 국왕이 신하들의 조례를 받고 왕명을 반포하는 곳이다. 일본이 일장기를 근정전에 내걸었다는 것은 명백히 근정전의 상징성을 이용하려는 의도다.

 

 

인용

목차

동양사 / 서양사

식민지를 환영한 자들

때늦은 저항

진정한 치욕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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