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국가라는 가장 오래된 신화
국가를 문제 삼기가 어려운 이유
여러분은 ‘스톡홀름 증후군(Stockholm Syndrome)’이란 말을 들어 보았나요? 이것은 1973년 스웨덴 스톡홀름의 어떤 은행에서 일어났던 인질·강도 사건에서 생긴 용어입니다. 당시 강도들에게 잡힌 인질들이 오히려 강도들에게 협조하고, 반대로 자신들을 구하려는 경찰들에게 극도의 적대감을 보였었지요. 경찰에 포위된 인질범들이 인질들에게 인간적인 대우를 해줌으로써 이와 같은 병적인 심리 상태가 더욱 강화되었다고 합니다. 사실 사람들은 강한 스트레스를 받게 되면 자기 나름대로 그 상황에 적응하기 위한 방어기제를 작동시키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인질로 잡힌다는 것은 인간이 겪을 수 있는 가장 강력하고 심각한 스트레스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인질범들로부터 빠져나오지 못한다면 결국 자신의 생명이 위태로워질 수 있기 때문이지요. 더구나 이런 위험 상황을 통제해줄 수 있는 힘이 경찰에게 없다면, 인질들의 스트레스는 더욱 가중될 것이 분명합니다.
인질범들에게 잡힌 이런 위기 상황에서 인질들은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인질들은 자신들을 도울 수 없는 경찰이나 사회보다는 오히려 자신들을 억류하고 있는 인질범들의 편을 들 수 있습니다. 심리학자들에 따르면 인질들이 빠지게 되는 ‘스톡홀름 증후군’의 메커니즘은 다음과 같은 세 단계로 진행됩니다.
우선 인질들은 자신들의 생사를 결정할 수 있는 인질범들이 자신들을 해치지 않는 것을 고마워하며, 결국 그들에게 온정을 느끼기 시작한다고 합니다. 다음으로 인질들은 자신들을 구출하려고 하는 경찰들에게 오히려 반감을 느끼게 됩니다. 경찰들이 자신들과 인질범들 간의 우호적인 관계를 파괴함으로써 오히려 자신들의 생명을 위협할 수도 있기 때문이지요. 마지막으로 인질범들도 인질들에게 긍정적인 감정을 느끼게 됩니다. 억류시킨 인질들이 자신들이 아니라 오히려 경찰들에 대해 반감을 가지기 때문입니다. 결국 인질들과 인질범들은 함께 고립되어 비슷한 두려움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서 인질들과 인질범들 사이에 ‘우리’라는 기묘한 믿음의 공간이 생겨나게 되는 것이지요.
스톡홀름 증후군 메커니즘 | 1 | 인질범들이 자신들을 해치지 않는 것을 고마워함. |
2 | 자신들을 구출하려고 하는 경찰들에게 오히려 반감을 느낌. | |
3 | 인질범들도 인질들에게 긍정적인 감정을 느낌 |
역사적으로 모든 국가는 위기에 빠지면 항상 전쟁을 통해서 국내의 불만을 잠재우려고 했습니다. 왜 그랬던 것일까요? 그것은 국민을 일종의 ‘스톡홀름 증후군’에 빠뜨리려는 책략이 작동했기 때문이지요. 통치 계층에게 불만을 가진 국민도 이런 위기 상황에서는 통치 계층과 자신들이 동일한 운명 공동체, 즉 ‘우리’라고 착각하게 됩니다. 우리가 국가라는 문제를 근본적으로 파헤치기 어려운 이유는, 바로 우리가 일정 정도 스톡홀름 증후군에 빠져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국가는 분명 자신이 지배하는 국민에 대해 압도적인 힘의 우위를 가지고 있는 기구입니다. 다시 말해 공권력이라는 명분으로 폭력적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수단을 가진 기구라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 국가는 우리를 모조리 죽일 수 있는 잠재적 폭력 자체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국가는 왜 우리를 죽이지 않을까요? 아니 죽이려고 하기는커녕 오히려 우리를 위해 많은 정책적 배려를 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생각해보면 고마운 일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마치 인질들이 인질범들에게 동질감을 갖듯이 국가에 대해 우호적인 감정을 갖게 됩니다. 만약 누군가가 국가를 문제 삼으면, 우리의 마음은 무척 불편해집니다. 인질들이 자신들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서 경찰들이 인질범들을 자극하는 것을 극히 싫어하는 것처럼 말이지요.
결국 이런 메커니즘으로 국가는 반드시 있어야만 하는 것, 즉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라는 착각이 발생하게 됩니다. 인질범들에게 향해진 총구를 스스로 막고서 인질범들을 변호하는 어느 인질들의 경우처럼 말이지요. 국가와 관련해서 우리나라 사람 대부분이 스톡홀름 증후군에 빠지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바로 박정희(朴正熙, 1917~1979)로부터 시작되는 군사독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4·19 민주혁명을 와해시키고 출현한 박정희 군사 독재 정권은 사실 우리 모두를 볼모로 잡은 인질범들과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현재 우리나라의 많은 사람들은 스톡홀름 증후군에 걸린 인질들처럼 박정희에 대한 아련한 향수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가 자행했던 억압과 탄압의 요소들은 대부분 잊고 있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그를 보릿고개를 없애준 사람, 한강의 기적을 이루어 우리 민족을 고질적 가난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준 사람으로 기억하려고만 합니다. 그만큼 우리는 박정희에게 인질로 사로잡혔던 아련한 기억을 스스로 미화하기에 여념이 없는 셈입니다.
그렇다면 박정희란 인물은 도대체 우리의 삶에서 어떤 작용을 했던 사람일까요? 최근에 불치의 병으로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정치학자 전인권(全寅權, 1957~2005)【전인권은 정치학자이며 동시에 미술평론가, 저술가로 활발히 활동하였다. 박정희에 대한 기존의 연구는 주로 그의 외적인 주장이나 행동들에 매몰되어, 그를 극도로 찬양하거나 아니면 폄하하는 양극단에 처해 있다. 반면 전인권의 연구는 어떤 가치 평가도 전제하지 않고 박정희와 그의 내면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도모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 『박정희 평전』, 『남자의 탄생』, 『아름다운 사람 이중섭』 등이 있다】은 박정희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자 합니다.
박정희의 국가사상은 궁극적으로 국가주의 사상으로 귀결된다. 그의 국가주의는 자신의 목가적인 정치적 이상을 국가기구를 중심으로, 폭력성과 지도성을 가미하여 조직화된 형태로 표현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민족의 생존은 국가가 보장해야 한다”고 말한다. 박정희의 국가주의적 신념들은 민족 개조, 국민 도의 함양, 국민 도의 확립 등과 같이 교육적·계몽적 태도를 취하기도 했다. 그 대표적인 예가 「국민교육헌장(國民敎育憲章)」이다. 「국민교육헌장」은 전체적으로 개인을 국가의 목표에 종속시키는 사고의 전형을 보여준다. 새마을운동 역시 일견 목가적이고 계몽적인 성격을 갖고 있지만, 그 내면으로 들어가면 국가 총력주의와 같은 사상이 근원적인 동기를 이루고 있다. 또한 ‘체력은 국력’이라는 표어가 유행한 적이 있는데, 여기서 개인의 체력은 국가의 국력으로 이해된다. 그래서 민족중흥과 같은 근대화 담론도 결국 국력 배양이란 국가주의적 사상의 실천 방향이 된다. 『박정희 평전』
전인권은 박정희의 정치사상을 ‘국가주의’ 사상이라고 간단하게 정리합니다. 여기서 국가주의는 그의 말대로 ‘개인을 국가의 목표에 종속시키는’ 생각, 즉 개인은 국가의 수단이며 국가는 개인의 목적이라는 생각입니다. 그렇다면 박정희에게서 우리는 단지 국가 발전을 위한 수단이나 도구 이상이 아니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는 국가 혹은 민족이야말로 절대적인 선,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절대적 권위였다고 할 수 있겠지요.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박정희의 생각이 옳다면 누구도 국가를 문제 삼고, 국가에 대해 회의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어떻게 우리가 지상 최대의 순수한 목적인 국가 자체에 대해 왈가불가할 수 있느냐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우리는 박정희의 국가주의를 맹목적으로 따라도 괜찮을까요? 아니면 국가에 대해 스스로 사유하기 시작해야 할까요? 박정희가 우리에게 각인시킨 국가주의라는 망령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혹은 국가에 대한 스톡홀름 증후군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국가를 사유할 때 발생하는 불편함과 불쾌함을 견딜 필요가 있습니다.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