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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철학 삶을 만나다, 제2부 친숙한 것들을 낯설게 만들기 - 1장 사랑 그리고 가족 이데올로기, 방법론적 고독의 필요성 본문

책/철학(哲學)

철학 삶을 만나다, 제2부 친숙한 것들을 낯설게 만들기 - 1장 사랑 그리고 가족 이데올로기, 방법론적 고독의 필요성

건방진방랑자 2021. 6. 29. 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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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법론적 고독의 필요성

 

 

헤겔은 사랑이 하나를 지향하기 때문에 가족으로 완성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카프카는 가족속에서 사랑이란 결국 유기체로서의 가족 자신의 생존 논리에 불과한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이 점에서 카프카는 바디우에 앞서 이미 하나라는 통일의 원리를 문제 삼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바디우에 이르러 헤겔의 하나라는 이념은 가장 결정적인 타격을 입게 됩니다. 바디우는 사랑이 가능하도록 하는 조건으로서 이란 공리를 제안하기 때문입니다. 그의 말이 옳다면 우리는 사랑의 주체로 머물기 위해서 이란 공리를 끈덕지게 유지해야만 합니다. 그렇다면 사랑이라는 사건에 충실해야 한다는 바디우의 말은, 결국 우리에게 을 지키겠다는 의지와 결단을 촉구하는 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 의지와 결단을 방법론적 고독(methodological solitude)’ 이라고 부르도록 해봅시다. 데카르트방법론적 회의(methodological doubt)방법론적 회의는 다른 명제에 의해 설명될 필요가 없는, 그 자체로도 충분히 명확한 명제를 찾으려고 한 데카르트의 시도를 말한다. 그는 감각적 지식, 수학적 지식도 의심의 여지가 있다고 생각하여 차례로 거부한다. 최종적으로 그가 조금의 의심도 없다고 생각한 것은 바로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명제였다. 이처럼 조금도 의심할 수 없는 명제를 찾으려는 시도를 방법론적 회의라고 부른다가 생각하는 사유 주체를 정초했던 것처럼, ‘에 충실하려는 방법론적 고독은 사랑의 주체를 가능하게 해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의 만남을 전제로 하는 사건입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관계에서는 고독이 불가피할 것입니다. 이것은 사랑에 빠진 주체가 사랑하는 타자 속에서 일종의 무한성(infinité)경험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사랑 속에서 경험하는 무한성 앞에서 유한한 우리는 항상 고독과 좌절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마치 기도하는 자가 신의 침묵 속에서 그런 감정을 갖게 되는 것처럼 말이죠. 이 점에서 사랑의 진리를 생산해내는 과정 자체가 바로 무한성과 유한성의 지속적인 조우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 정말 좋아하는 것은 무엇일까?’ ‘내가 키스하면 그()는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는 왜 나의 진심을 몰라 줄까?’ 우리는 계속 그()의 심연을, 그 무한성을 더듬게 됩니다. 그러나 바로 이런 과정에서 우리는 이 아닌 하나라는 착각에 일순간 빠지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일종의 오만이지요. ‘! ()는 키스를 좋아하는구나!’ 내가 이렇게 생각하는 그 다음 순간, ()는 키스를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어느 순간 나의 키스를 허용했다고 해서 그()가 계속 그러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오만입니다. 그리고 이 순간부터 우리는 사랑에서 점점 멀어지게 됩니다. 더구나 그()도 만약 내가 키스를 좋아한다고 생각해서 타성적으로 키스에 응해준다면 상황은 더욱 좋지 않게 변할 것입니다. 이처럼 타자를 이제 완전히 알았다는 생각, 타자와 이제 하나가 되었다는 생각은 기본적으로 사랑에 대한 죄악이자 배신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타자와 하나가 된다는 것은 타자로부터 무한성을 제거하는 것이며, 따라서 의 공리를 어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방법론적 고독은 타자에 대한 나의 생각, 사랑에 대한 나의 생각이 유아론적인 것이 아닐까라는 회의를 언제나 수반하게 됩니다. 이 점에서 방법론적 고독은 헤겔의 자기의식과는 반대 방향으로 작동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헤겔은 우리가 타자와 나의 통일을 자각함으로써 나의 자기의식을 획득한다고 말했지만, 사랑의 고독 속에 있는 우리는 타자 가운데서 나 자신을 인식하거나 획득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헤겔의 경우라면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는 것은 자식을 사랑하기 때문이고, 남편이 자식을 사랑하는 것은 아내를 사랑하기 때문이며, 나아가 남편이 아내와 자식을 사랑하는 것은 자신을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이렇다면 결국 그에게 있어 가족이란 논리는, 가족 성원을 환각적이고 몽환적인 사랑의 악무한(惡無限)악무한은 일종의 무한 소급과 같은 의미이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신주는 무엇인가?”라고 질문을 했다고 해보자. 이 경우 우리는 신주는 민정과 같다라고 대답할 수 있다. 그렇다면 상대방은 민정은 무엇인가?”라고 다시 질문하게 된다. 이 경우는 다시 민정은 광동과 같다라고 대답할 수 있다. 이와 같이 결정적인 대답이 주어지지 않고 무한히 계속되는 사태를 악무한이라고 말한다속에 빠뜨리는 덫이 되는 셈입니다. 그는 이런 식으로 변증법적 원환, ‘하나를 지향하는 사랑과 가족의 논리를 고안했습니다. 이처럼 헤겔의 자기의식은 오로지 하나만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이와는 달리 방법론적 고독은 을 끈덕지게 유지하려는 운동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방법론적 고독이란 우리가 나의 바깥에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사람에 대해 내가 아는 것이 전혀 없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합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침묵 속에서 나의 외부에 있다는 사실, 그래서 만약 그 사람이 나를 사랑한다면 그것은 기적과도 같은 축복이자 은총이라는 사실, 이것이 바로 사랑의 진리이자 의 진리인 것입니다.

 

방법론적 고독으로부터 얻어진 통찰을 통해 우리는 가족 없는 가족’, 하나가 부재한 가족을 꿈꿀 수 있는 가능성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남자-여자자식이란 가족 형식에 둘의 공리를 관철시키려는 것입니다. 바디우의 지적이 옳다면 우리는 남편과 아내 사이의 사랑에서도, 아버지와 자식 사이의 사랑에서도, 그리고 어머니와 자식 사이의 사랑에서도 여전히 물을 지향해야 합니다. ‘남자-여자-자식이라는 오이디푸스 가족 구조를 결코 하나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가족은 남자와 여자라는 둘의 관계, ‘남자(아버지)와 자식이라는 의 관계, 그리고 여자(어머니)와 자식이라는 둘의 관계가 겹쳐져 있는 공동체를 의미한다고 보아야 합니다. 남편은 자식 속에서 자신이나 아내를 보려 해서는 안 됩니다. 또 아내도 자식 속에서 자신이나 남편을 보려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남편과 아내는 자식을 독립된 개체로, 의 요소로 보지 않으려고 합니다. 단지 그들은 자식으로부터 자신들 혹은 자신들이 보고자 하는 것만을 봅니다. 이것은 결국 나르시시즘(narcissism)나르시시즘은 자신을 마치 사랑하는 연인인 것처럼 사랑하는 자기애의 메커니즘으로, 정신분석학의 중심 개념 중 하나이다. 나르시시즘은 오비디우스의 변신에 등장하는 나르키소스, 즉 나르시스 이야기에서 유래한다. 복수의 여신 네메시스로부터 저주를 받은 나르시스는 물에 비친 자신의 얼굴이 너무 아름다워 넋을 잃고 바라보다가 물에 빠져 죽었다고 한다, 즉 전형적인 유아론에 불과한 것입니다. ‘하나라는 나르시시즘에 빠지면 우리는 남편으로서 아내를, 아내로서 남편을, 어머니로서 자식을, 아버지로서 자식을 진정 사랑할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라는 사랑의 진리를 반드시 배우고 몸에 익혀야 합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또 그들로부터 사랑받기를 원한다면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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