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가 아닌 사회를 꿈꾸며
국가는 수탈과 재분배라는 역동적 교환관계로 유지되는 기구입니다. 그러나 국가의 핵심은 재분배라기보다 압도적 폭력을 바탕으로 하는 수탈이라고 말해야겠지요. 문제는 이렇게 수탈되고 있는 대다수 국민이 스스로 국가 없는 사회를 꿈꾸지 못한다는 데 있습니다. 이미 우리는 너무나 길들여져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 스톡홀름 증후군에 걸린 환자인 셈이지요. 국가의 폭력을 두려워하다가 어느 사이엔가 국가의 폭력이 나를 지켜주는 보호막이라는 착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맑스는 『자본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깊이 통탄했던 것이지요.
어떤 인간이 왕이라는 것은 다만 다른 인간들이 신하로서 그를 상대해주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들은 그가 왕이기 때문에 이제 자기들이 신하가 아니면 안 된다고까지 믿고 있다. 『자본론』
저는 지금 여러분에게 스스로 왕이 되라고 충고하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왕이나 신하라는 차별 구조, 즉 수탈자와 피수탈자의 원초적 차별 구조가 어떻게 발생하는지를 보여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우리가 그런 차별적 위계 관계를 벗어난 삶을 영위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스스로 강해져야만 합니다. 여러분의 소중한 자유를 양도해버리고 국가 권력에 복종하기 시작한다면, 그리고 그런 메커니즘에 완전히 적응하게 된다면, 여러분은 자신이 자유인이라는 사실을 망각하게 될 겁니다.
여러분이 또 하나 잊어서는 안 될 것이 있습니다. 국가가 자유인을 죽일 수는 있어도, 그 자유인으로부터 자유를 빼앗을 수는 없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 문제와 관련해 클라스트르(Pierre Clastres, 1934~1977)【클라스트르는 젊었을 때 철학을 공부했지만, 뒤에 남아메리카 인디언의 사회와 문화를 연구하는 인류학자가 되었다. 그는 인디언 사회가 결코 야만 사회가 아니라 문명사회였으며, 오히려 진정한 야만 사회는 우리가 살고 있는 국가라고 주장한다. 클라스트르의 연구를 통해서 우리는 국가나 권력의 문제, 그리고 인간 자유의 문제를 숙고할 수 있는 계기를 얻게 된다. 주요 저서로 『국가에 대항하는 사회」, 『폭력의 고고학』 등이 있다】라는 인류학자처럼 인디언들의 삶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은 지배자와 피지배자, 주인과 하인, 왕과 신하라는 차별 구조를 막기 위해 삶을 어떻게 영위해야 하는지를 이해했던 소수의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고대적 사회, 각인의 사회는 국가가 없는 사회, 국가에 대항하는 사회이다. 모든 신체에 똑같이 새겨진 각인은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즉 “너희들은 권력의 욕망을 지니지 않을 것이고 복종의 욕망을 지니지 않을 것이다”라고, 우리와 분리되지 않는 이 법은, 분리되지 않는 공간, 즉 신체 그 자체 이외의 어느 곳에도 새기는 것이 불가능할 것이다. 이미 이 모든 것을 알고 있었고, 끔찍한 참혹함을 대가로 그보다 더 끔찍한 참혹함이 출현하는 것을 막고자 한 이 야생인들(인디언들)의 감탄을 금할 수 없는 심오함, 그것은 바로 신체에 새겨진 법은 망각할 수 없는 기억이라는 점이다.
『국가에 대항하는 사회(La Société Contre l'Etat)』
클라스트르에 따르면 인디언들은 사회에서 독립적인 자유인으로 인정받기 위해서 아주 잔혹한 통과의례를 거쳐야만 했다고 합니다. 그것은 거의 고문에 가까운 것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어느 부족에서는 의례를 집행하는 사람이 의례를 거치는 사람의 어깨나 가슴의 살을 1인치 이상 잡아당겨 칼로 그 살을 뚫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경우 당사자는 결코 어떤 소리도 내서는 안 됩니다. 그 고통을 감당하지 못하는 것은 용기 없는 행위로 간주되었으니까요.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인디언 사회에서 독립적인 성원으로 인정받은 모든 사람이 이런 상처를 예외 없이 가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이 경우 칼로 뚫린 상처는 강한 자가 약한 자에게 가하는 고문은 아닌 셈이지요. 그렇다면 인디언들은 왜 이런 고통을 서로에게 주었던 것일까요? 왜 그들은 사회의 모든 성원의 육체에 동일한 흉터를 각인시켜놓으려고 했던 것일까요?
인디언들은 국가로 대표되는 권력관계나 차별 관계를 ‘문명’이라고 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에게 국가라는 것은 억압되어야 할 ‘자연’, 눌러서 억제해야 할 인간의 탐욕스런 ‘권력욕’을 나타내는 것이었지요. 그들에게 있어 진정한 ‘문명’이란 어떤 차별도 존재하지 않는 독립적인 자유인들의 공동체였습니다. 이 점에서 그들의 통과의례라는 것은 ‘자연’으로부터 ‘문명’으로의 이행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살 속으로 칼이 깊숙이 뚫고 들어올 때 어떤 신음 소리도 내지 않는 것은 ‘문명인’으로서 살아가겠다는 데 대한 동의를 드러내는 것이지요. 몸에 권력욕이 배어들지 않게 하려면, 타인을 얕보고 무시하며 궁극적으로는 노예로 삼고자 하는 야만스런 심성이 생기지 않게 하려면, 누구나 반드시 이런 고통을 겪어야 한다고 보았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현재 우리가 영위하고 있는 삶은 그들과 어떻게 다른지 한번 생각해보세요. 자신보다 힘이 약하다고, 자신보다 지능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우리는 얼마나 많은 차별을 다른 사람에게 가하고 있습니까? 처음에는 인디언들도 마찬가지였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런 욕구가 들 때마다 자신의 살에 새겨진 흉터, 그리고 각인된 고통스러웠던 기억을 떠올리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진정한 문명인으로 남겠다는 각오를 다지게 되었을 겁니다. “나는 권력의 욕망을 지니지 않을 것이고, 복종의 욕망도 지니지 않을 것이다!”
인디언들에게는 약하다고 해서 강한 자에게 복종하고, 강하다고 해서 약한 자를 지배하는 것은 문명이 아니라 자연, 혹은 야만이었습니다. 사실 약육강식의 논리는 동물의 세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이지 않습니까? 인간이 다른 동물과 차이가 나는 이유는 그럼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요? 그것은 강한 사람에게 복종하지도 않고 약한 사람을 지배하려고도 하지 않는 자유인의 의지일 것입니다. 자신을 죽일 수는 있어도 자신의 자유를 빼앗지는 못할 것이라는 용기와 확고한 자유정신 말입니다. 이 점에서 클라스트르가 찾아가 보았던 인디언들의 사회는, 아주 오래된 사회임에도 불구하고 가장 문명이 발달했던 사회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야만적인 지배와 복종의 욕구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사회였으니까요. 그렇다면 지금의 우리는 어떤 삶을 영위하고 있습니까? 약자 앞에서는 한없이 강해지고, 강자 앞에서는 한없이 약한 채로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아직 많은 사람이 이런 야만의 상태를 문명의 상태라고 오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익숙한 것이라고 해서 항상 올바른 것은 결코 아니겠지요.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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