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의 절정 ‘백탑청연(白塔淸緣)’
에피쿠로스, 스피노자, 이탁오(李卓吾), 연암 —— 이들의 공통점은? 정답은 ‘우정의 철학자’, 20대의 맑스가 박사논문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 자연철학의 차이』(고병권 옮김)에서 재조명한 에피쿠로스는 ‘우정의 정원’으로 유명하고, ‘내재성의 철학’을 통해 기독교적 초월론을 전복한 스피노자 역시 우정과 연대를 윤리적 테제로 제시한 바 있다. 명말 양명좌파(左派)의 기수였던 이탁오는 ‘스승이면서 친구가 될 수 없다면 진정한 스승이 아니다. 친구이면서 스승이 될 수 없다면, 그 또한 진정한 친구가 아니다’라며 배움과 우정의 일치를 설파한 중세 철학의 이단자다. 이처럼 시공간을 넘어 주류적 사상의 지형에서 탈주한 이들의 윤리적 무기는 언제나 우정이었다.
연암에게 있어서도 우정론은 윤리학의 ‘알파요 오메가’였다. 이미 『방경각외전(放璚閣外傳)』의 「마장전(馬駔傳)」 서에서 ‘벗이 오륜(五倫)의 끝에 자리를 잡은 것은 결코 낮은 위치여서가 아니라, 마치 흙이 오행 중에서 끝에 있으나, 실은 사시의 어느 것에 흙이 해당치 않음이 없는 것과 같을 뿐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부자가 친함이 있고, 군신이 정의를 지니고, 부부가 분별이 있고, 장유가 차례가 있다 하더라도 붕우의 믿음이 없다면 아니될 것이다. 그리고 오륜이 제자리를 잃었을 때에는 오로지 벗이 있어서 그를 바로잡아 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벗의 위치가 비록 오륜의 끝에 있으나 실은 그 넷을 통괄할 수 있는 것[友居倫季 匪厥疎卑 如土於行 寄王四時 親義別叙 非信奚爲 所以居後 廼殿統斯]’이라고, 연암 특유의 우정론을 펼친 바 있다. 이 우정론은 단순한 우정예찬이 아니라, 우도(友道)를 중심으로 나머지 사륜(四倫)의 위계를 전복한다는 점에서 파격적이다.
이후 그의 우정론은 한결 깊고 넓어진다. 「회성원집발(繪聲園集跋)」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벗이란 ‘제2의 나[第二吾]’다. 벗이 없다면 대체 누구와 더불어 보는 것을 함께하며, 누구와 더불어 듣는 것을 함께하며, 입이 있더라도 누구와 함께 맛보는 것을 같이하며, 누구와 더불어 냄새 맡는 것을 함께하며, 장차 누구와 더불어 지혜와 깨달음을 나눌 수 있겠는가? 아내는 잃어도 다시 구할 수 있지만 친구는 한 번 잃으면 결코 다시 구할 수 없는 법, 그것은 존재의 기반이 송두리째 무너지는 절대적 비극인 까닭이다.”
그러므로 그는 우정의 성리학적 표상인 ‘천고의 옛날을 벗삼는다[尙友千古]’는 말을 조문하고, ‘아득한 후세에 나를 알아주는 이를 기다린다’는 형이상학적 명제를 비웃는다. 즉 그가 말하는 바 ‘우도’란 초월적 원리에 종속된 도덕적 규범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의 생을 능동적으로 구성하는 것이자 ‘나’의 경계를 넘어 끊임없이 다른 것으로 변이되는 능력의 다른 이름이다.
당연한 일이지만, ‘친구에 살고 친구에 죽는’ 이런 윤리는 연암 만의 것이 아니다. 연암그룹에 속한 인물들은 하나같이 이런 실천적 우정론에 공명했다. 특히 이덕무(李德懋)의 다음 글은 동서고금을 관통하여 ‘친구’에 관한 가장 아름다운 아포리즘(aphorizm)에 속한다.
만약 한 사람의 지기를 얻게 된다면 나는 마땅히 10년간 뽕나무를 심고, 1년간 누에를 쳐서 손수 오색실로 물을 들이리라. 열흘에 한 빛깔씩 물들인다면, 50일 만에 다섯 가지 빛깔을 이루게 될 것이다. 이를 따뜻한 봄볕에 쬐어 말린 뒤, 여린 아내를 시켜 백 번 단련한 금침을 가지고서 내 친구의 얼굴을 수놓게 하여 귀한 비단으로 장식하고 고옥(古玉)으로 축을 만들어 아마득히 높은 산과 양양히 흘러가는 강물, 그 사이에다 이를 펼쳐 놓고 서로 마주보며 말없이 있다가, 날이 뉘엿해지면 품에 안고서 돌아오리라. 『선귤당농소』
若得一知己, 我當十年種桑. 一年飼蠶, 手染五絲, 十日成一色, 五十日成五色. 曬之以陽春之煦, 使弱妻, 持百鍊金針, 繡我知己面. 裝以異錦, 軸以古玉 高山峨峨, 流水洋洋, 張于其間, 相對無言, 薄暮懷而歸也.
가슴 깊이 사무치지만 결코 ‘센티멘털’에 떨어지지 않는 이 오롯한 ‘친구 사랑’! 이덕무(李德懋)의 섬세한 필치와 감각이 한껏 발휘된 이 글에는 연암그룹의 윤리적 지향점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실제의 삶에 있어서도 그러했다. 연암의 생애에서 가장 빛나는 대목은 의기투합하는 벗들과 서로 어울려 뒹굴던 때였다. 이름하여 ‘백탑(白塔)에서의 청연(淸緣)’! 백탑은 파고다(탑골) 공원에 있는 원각사지 10층석탑을 말한다. 당시 연암과 그의 벗들이 이 근처에서 주로 살았기 때문에 생긴 명칭이다. 1772년에서 1773년 무렵 연암은 처자를 경기도 광주 석마의 처가로 보낸 뒤 서울 전의감동에 혼자 기거하면서 이 모임을 주도하게 된다. 박제가(朴齊家)가 쓴 「백탑청연집서(白塔淸緣集序)」에는 당시 연암의 풍모 및 이 그룹의 분위기가 마치 영화처럼 생생하게 담겨 있다.
지난 무자(戊子), 기축(己丑)년 어름 내 나이 18, 9세 나던 때 미중(美仲) 박지원 선생이 문장에 뛰어나 당세에 이름이 높다는 소문을 듣고 탑 북쪽으로 선생을 찾아 나섰다. 내가 찾아왔다는 전갈을 들은 선생은 옷을 차려 입고 나와 맞으며 마치 오랜 친구라도 본 듯이 손을 맞잡으셨다. 드디어 지은 글을 전부 꺼내어 읽어보게 하셨다.
往歲戊子己丑之間, 余年十八九, 聞朴美仲先生文章超詣有當世之聲, 遂往尋之于墖之北. 先生聞余至, 披衣出迎, 握手如舊. 遂盡出其所爲文而讀之.
이윽고 몸소 쌀을 씻어 다관(茶罐)에다 밥을 안치시더니 흰 주발에 퍼서 옥소반에 받쳐 내오고 술잔을 들어 나를 위해 축수(祝壽)하셨다. 뜻밖의 환대인지라 놀랍기도 하고 기쁘기도 한 나는, 이는 천고에나 있을 법한 멋진 일이라 생각하고 글을 지어 환대에 응답하였다.
於是親淅米炊飯于茶罐, 盛以𣲝甆, 庋之玉案, 稱觴以壽余. 余驚喜過望, 以爲千古之晟事, 爲文以酬之.
신분도 다르고, 나이도 거의 제자뻘 되는 친구를 극진한 정성을 다해서 맞이하는 연암의 풍모를 보라! 당시 이덕무(李德懋)의 사립문이 그 북쪽에 마주 서 있고, 이서구의 사랑(舍廊)이 서쪽 편에 있었으며, 수십 걸음 떨어진 곳에 서상수(徐常修)의 서재가 있었다. 또 북동쪽으로 꺾어진 곳에 유금, 유득공(柳得恭)의 집이 있었다. 기묘하게도 이들은 그 시절 같은 구역에 살고 있었는데, 이 글은 박제가(朴齊家)가 이 그룹에 합류하게 되는 순간을 담은 것이다. 이후 그는 한번 이곳을 방문하면 집에 돌아가는 것을 잊고 열흘이고 한 달이고 머물면서 시문(詩文)과 척독(尺牘) 편지글을 짓고, 술과 풍류로 밤을 지새곤 했다. 얼마나 이 교유(交遊)에 몰두했던지 아내를 맞이하던 날, 박제가가 삼경이 지나도록 여러 벗들의 집을 두루 방문하는 ‘해프닝’이 일어났을 정도다.
이들은 매일 밤 모여 한곳에선 풍류를, 다른 한편에선 명상을, 또 한쪽에선 세상의 이치를 논하는 모임을 이어갔다. 연암의 「취답운종교기(醉踏雲從橋記)」가 그 생생한 리포트다.
어느 날 밤, 한 떼의 벗들이 연암의 집을 방문했다. 미리 온 손님이 있어 연암과 담소를 나누자, 이들은 일제히 거리로 나와 산책하며 술을 마신다. 손님을 보내고 뒤따라 나온 연암도 함께 술을 마시고 운종가로 나와 달빛을 밟으며 종각 아래를 거닐었다. 밤은 깊어 이미 삼경. 거리 위에선 개떼들이 어지러이 짖어대고 있었는데, 오견(獒犬)이라 불리는 몽고산 개가 동쪽으로부터 왔다. 이 개는 사나워서 길들이기가 어렵고 아무리 배고파도 불결한 음식은 먹지 않는다. 사람 뜻을 잘 알아, 목에다 붉은 띠로 편지를 매달아주면 아무리 멀어도 반드시 전해주는 명견이다. 혹 주인을 만나지 못하더라도 반드시 주인집 물건을 물고서 돌아와 신표로 삼는다고 한다. 해마다 사신을 따라 들어오지만, 대부분 적응하지 못하고 굶어 죽는다.
聖彥囊出五十錢沽酒. 少醉, 因出雲從衢, 步月鍾閣下, 時夜鼓已下三更四點. 月益明, 人影長皆十丈, 自顧凜然可怖. 街上群狗亂嘷, 有獒東來, 白色而瘦. 衆環而撫之, 喜搖其尾, 俛首久立. 甞聞獒出蒙古, 大如馬, 桀悍難制. 入中國者, 特其小者, 易馴. 出東方者, 尤其小者, 而比國犬絶大, 見恠不吠, 然一怒則狺狺示威. 俗號‘胡白’, 其絶小者, 俗號‘犮犮’, 種出雲南. 皆嗜胾, 雖甚飢, 不食不潔.
사람들은 이 개를 ‘호백(胡白)이’라고 부른다. 오랑캐 땅에서 온 흰둥이라는 뜻이다. 이덕무(李德懋)는 먼저 이름을 바꿔 주었다. 무관(이덕무)이 술에 취해 ‘호백(豪伯)’이라고 이름 붙여주었다. 잠시 후 어디 갔는지 알 수 없게 되자, 무관은 구슬프게 동쪽을 향해 서서 마치 친구라도 되는 듯이 ‘호백아!’하고 이름을 부른 것이 세 차례였다. 사람들이 모두 크게 웃었다. 시끄러운 거리의 개떼들이 어지러이 내달리며 더욱 짖어댔다.
懋官醉而字之曰: ‘豪伯’ 須臾失其所在, 懋官悵然東向立, 字呼豪伯, 如知舊者三, 衆皆大笑. 鬨街群狗, 亂走益吠.
‘호백이’의 고독한 모습에 자신들의 처지를 오버랩시킨 것일까? ‘호백(豪伯, 호탕한 녀석 혹은 멋진 놈)’이라는 ‘별명’에는 결코 불의와 타협하지 않겠다는 의미가 실려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해도 ‘호백이’를 부르는 소리에 왠지 서글픔이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개들이 짖어대는 소리를 들으며 그들은 운종교 위에서 이야기를 나누는데, 언젠가 다리 위에서 춤추던 친구, 거위를 타고 장난치던 친구 등의 이야기가 실타래처럼 펼쳐진다. 그러다 보면 새벽 이슬에 옷과 갓이 젖고, 개구리 소리와 함께 아침이 밝아온다. 이것이 이들이 함께 보낸 날들의 풍경이다.
내친 김에 하나 더. 이 ‘지식인 밴드’는 음악에도 조예가 깊어 이들의 모임에는 늘 음악이 함께했다. 홍대용(洪大容)의 탁월한 음률 감각은 이미 앞에서도 말했거니와, 그밖에도 이들 주변에는 풍류인들이 적지 않았다. 효효재(嘐嘐齋) 김용겸(金用謙) 역시 그중 한 사람. 그는 당시 도시 유흥의 번성을 주도한 예인들의 패트론 중 하나였다.
당시 거문고를 잘 연주하던 음악가로 김억(金檍)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새로 조율한 양금을 즐기기 위해 홍대용의 집을 방문했다. 마침 김용겸이 달빛을 받으며 우연히 들렀다가 생황과 양금이 번갈아 연주되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 그러자 김용겸이 책상 위의 구리쟁반을 두드리며 『시경』의 한 장을 읊었는데 흥취가 한참 무르익을 즈음, 문득 일어나 나간 뒤 돌아오지 않았다. 홍대용과 연암은 함께 달빛을 받으며 그의 집을 향해 걸었다. 수표교에 이르렀을 때 바야흐로 큰 눈이 막 그쳐 달이 더욱 밝았다. 아, 그런데 김용겸이 무릎에 거문고를 비낀 채 갓도 쓰지 않고 다리 위에 앉아 달을 바라보고 있는 게 아닌가. 그래서 다들 환호하며 술상과 악기를 그리로 옮겨 흥이 다하도록 놀다가 헤어졌다. 『과정록(過庭錄)』 1권에 나오는 이야기다.
이런 식으로 그들은 한 시절을 함께 보냈다. 그런 점에서 ‘백탑청연’은 연암 생애의 하이라이트이자 중세 지성사의 빛나는 ‘별자리’다. 그들은 체제와 제도가 부과한 삶으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윤리와 능동적인 관계를 구성했고, 그 안에서 자신의 욕망과 능력을 마음껏 발산했다. 북벌론(北伐論)에서 북학(北學)으로 사상사의 중심을 변환한 것도, 고문의 매너리즘에서 벗어나 다양한 문체적 실험을 감행한 것도 모두 이런 역동적 관계 속에서 가능했던 것이리라.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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