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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1부 “나는 너고, 너는 나다”, 2장 탈주ㆍ우정ㆍ도주 - ‘연암그룹’ 본문

문집/열하일기

1부 “나는 너고, 너는 나다”, 2장 탈주ㆍ우정ㆍ도주 - ‘연암그룹’

건방진방랑자 2021. 7. 8. 0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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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암그룹

 

 

아버지(연암)는 늘 남들과 함께 식사하는 걸 좋아하셨다. 그래서 함께 식사하는 사람이 언제나 서너 사람은 더 됐다.

先君常喜與人合食, 合食者, 常不下三四人.

 

 

과정록(過庭錄)4에 나오는 참 재미있는 장면이다. 늘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는 연암의 일상을 잘 보여주기 때문이다. 지배적 코드로부터의 탈주는 한편으론 고독한 결단이지만, 다른 한편 그것은 늘 새로운 연대와 접속으로 가는 유쾌한 질주이기도 하다. 과거를 포기하고 체제 외부에서 살기로 작정했지만, 연암에게 고독한 솔로의 음울한 실루엣은 전혀 없다.

 

그는 세속적 소음이 끊어진 산정의 고고함을 추구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회적으로 부과된 짐을 훌훌 털어버리고서 온갖 목소리들이 웅성거리는 시정 속으로 들어갔다. 젊은 날 우울증을 치유하기 위해 저잣거리의 풍문을 찾아 헤맸던 것처럼, 그리고 거기에서 수많은 친구들을 만난다. 벗을 부르는 일이야말로 태양인 박지원의 타고난 능력 아니던가.

 

물론 십대에 이미 그러했듯 연암의 친구들은 재야 지식인, 서얼(庶孼), 이인(異人), 광사(狂士) 등 주류 바깥에 있는 소수자혹은 외부자였다. 그런 점에서 그의 우정은 삼강오륜의 위계적 규범을 깨는 것이면서 소수자들의 연대라는 윤리학적 실천의 의미를 지닌다.

 

그들은 그저 교양과 사교를 위한 사귐이 아니라, ‘매번 만나면 며칠을 함께 지내며, 위로 고금의 치란(治亂) 흥망에 대한 일로부터 제도의 연혁, 농업과 공업의 이익 및 폐단, 재산을 증식하는 법, 환곡을 방출하고 수납하는 법, 지리, 국방, 천문, 음악, 나아가 초목, 조수, 문자학, 산학에 이르기까지 꿰뚫어 포괄하지 아니함이 없는 새로운 지식인 집합체였다. 이름하여 연암그룹’! 구체적으로는 홍대용(洪大容)정철조(鄭喆祚), 서얼인 박제가(朴齊家)이덕무(李德懋), 유득공(柳得恭), 무인(武人) 백동수 등이 이 그룹의 핵심멤버다.

 

열하로 가는 길에도 이 친구들은 그와 함께한다. 연암은 여정 곳곳에서 자신보다 앞서 연행(燕行)을 체험한 홍대용, 이덕무, 박제가의 흔적을 계속 확인한다. 예컨대 피서록(避暑錄)의 한 대목을 보면, 풍윤성(豊潤城)에 올라 수염이 아름다운 한 선비를 만나는 장면이 있다. 그 선비가 연암에게 다가와 반갑게 인사를 나누면서, “당신은 필시 초정(楚亭) 박제가의 일가시죠[君豈非楚亭族親乎]?” 한다. 연암이 놀라 그 사연을 물으니, 그 전해 박제가가 이덕무와 함께 그 고을을 지나며 한 집의 벽에다 글을 남겼다는 것이다.

 

 

이에 변계함, 정진사 각과 더불어 함께 그 집을 찾으니 날이 벌써 어둑어둑하였다. 주인이 등불 넷을 켜서 벽을 밝혀주기에 그 시를 한 번 낭독하니 이것은 곧 우리 집이 전동(典洞)에 있을 때에 형암(이덕무)이 왔다가 지은 것이다.

遂同卞季涵鄭進士珏, 入其中堂, 日已昏黑. 主人爲張四燈, 照壁一讀, 乃余家典洞時, 炯菴在余作也.

 

泬㵳秋令樹先知 쓸쓸한 가을 소식 저 나무가 먼저 아네
任忘暄凉做白癡 춥고 더움 다 잊으니 바보되고 말았구나.

 

백로지 두 폭을 붙여서 쓴 것인데, 글씨 자태가 물 흐르듯 하고 한 글자의 크기가 마치 두 손바닥을 맞대어 놓은 것 같다. 전날에 우리들이 중국 일을 이야기할 때에 부질없이 그리워만 하다가 이 몇 해 사이에 차례로 한 번씩 구경하였을 뿐 아니라, 이렇게 먼 만리 타향에서 이 시를 읽으매 마치 친구의 얼굴을 보는 듯싶었다.

聯白鷺紙二幅, 筆態流動, 一字恰如兩掌大. 先是, 吾輩談說中原, 空費艶羡, 數年之間, 取次一游, 又况萬里異鄕, 如逢故人一面哉.

 

 

이런 식으로 연암의 친구들은 열하일기곳곳에서 얼굴을 드러낸다. 이들이 나눈 우정의 파노라마는 별도로 책을 엮어야 할 정도로 다채롭지만, 여기서는 간략한 스케치 정도로 만족하기로 한다.

 

 

 

 

먼저 담헌(湛軒) 홍대용(洪大容)은 연암보다 여섯 살 위지만 평생 누구보다 도타운 우정을 나누었다. 그 또한 과거를 폐하고 재야 지식인의 길을 갔는데, 특히 과학과 철학에서 천재적 재능을 발휘했다. 연암은 홍덕보(홍대용의 자) 묘지명[洪德保墓誌銘]에서 다음과 같이 격찬했다.

 

 

율력에 조예가 깊어 혼천의(渾天儀) 같은 여러 기구를 만들었으며, 사려가 깊고 생각을 거듭하여 남다른 독창적인 기지가 있었다. 서양 사람이 처음 지구에 대하여 논할 때 지구가 돈다는 것을 말하지 못했는데, 덕보는 일찍이 지구가 한 번 돌면 하루가 된다고 논하니, 그 학설이 오묘하고 자세하여 깊은 이치에 닿아 있었다.

尤長於律曆, 所造渾儀諸器, 湛思積慮, 刱出機智. 始泰西人諭地球, 而不言地轉, 其說渺微玄奧.

 

 

홍대용 또한 연암에 앞서 연행(燕行)의 행운을 누렸다. 특히 북경에서 엄성(嚴誠), 육비(陸飛), 반정균(潘庭筠) 등 절강성 출신 선비들과 만나 뜨거운 우정을 나눈다. 이른바 천애(天涯)의 지기들을 만난 것. 그의 연행록을 보면, 이들 사이의 뜨거운 사귐과 홍대용의 단아하면서도 명석한 품성이 생생하게 담겨 있다(한문판이 담헌연기, 한글판 버전이 을병연행록이다). 아울러 홍대용은 음률의 천재였기 때문에 구라철사금(歐羅鐵絲琴, 양금洋琴)’을 해독하여 사방에 퍼뜨리거나, 풍금의 원리에 대해 명쾌하게 변론하는 등 음악사적으로도 탁월한 자료를 많이 남겼다. 홍대용(洪大容)이 죽은 뒤 연암이 집에 있는 악기들을 버리고 한동안 음악을 듣지 않았던 것도 그 때문이다. 홍대용이 영천군수로 있을 무렵, 연암협에 은거하고 있던 연암에게 얼룩소 두 마리, 농기구 다섯 가지, 줄 친 공책 스무 권, 2백 냥을 보내며, “산중에 계시니 밭을 사서 농사를 짓지 않을 수 없을 테지요. 그리고 의당 책을 저술하여 후세에 전해야 할 것이외다라고 했다. 친구에 대한 자상한 배려가 돋보이는 대목이다.

 

석치(石癡) 정철조(鄭喆祚)는 담헌에 비하면 지명도가 아주 낮지만, 그 또한 뛰어난 재야 과학자였다. 기계로 움직이는 여러 기구, 무거운 것을 들어올리는 인중기, 물건을 높은 데로 나르는 승고기, 회전장치를 한 방아, 물을 퍼올리는 취수기 등을 손수 제작했으나 지금은 남은 것이 없다고 한다. 열하일기』 「알성퇴술(謁聖退述)편에 보면 북경의 관상대에 올라 혼천의를 비롯한 천문기구들을 보면서 정철조를 떠올리는 장면이 나온다.

 

 

뜰 한복판에 놓여 있는 물건들은 내 친구 정석치의 집에서 본 것들과 비슷했다. 그러나 이튿날 가보면, 기계들을 모두 부서뜨려 더볼 수가 없었다.

而庭中所置, 亦有似吾友鄭石癡家所見者. 石癡甞削竹手造諸器, 明日索之, 已毁矣.

 

언젠가 홍대용(洪大容)과 함께 그의 집을 찾아갔는데, 두 친구가 서로 황()ㆍ적도(赤道)와 남()ㆍ북극(北極) 이야기를 하다가 머리를 흔들기도 하고,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였다. 나한테는 그 이야기들이 아득하기만 하여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나는 자느라고 듣지 못하였지만, 두 친구는 새벽까지 어두운 등잔을 마주 대하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甞與洪德保共詣鄭, 兩相論黃赤道南北極, 或擺頭, 或頤可. 其說皆渺茫難稽, 余睡不聽, 及曉, 兩人猶暗燈相對也.

 

 

홍대용과 정철조(鄭喆祚), 두 친구는 머리를 맞대고 황도, 적도, 남극, 북극 등 지구과학에 대해 열나게 토론하고 있는데, 옆에서 꾸벅꾸벅 졸다 잠을 청하는 연암의 모습이 한 편의 시트콤이다. 하지만 이때 주워들은 이야기로 뒷날 열하에서 중국 선비들한테 온갖 장광설을 늘어 놓으며 우쭐댔으니 참, 연암처럼 친구복을 톡톡히 누린 경우도 드물다.

 

 

 

 

앞에 나온 박제가(朴齊家)이덕무(李德懋)유득공(柳得恭)과 함께 모두 서얼 출신으로, 연암의 친구이자 학인들이다. 정조가 왕권 강화책의 일환으로 세운 아카데미인 규장각의 초대 검서관이라는 공통점도 있다. 흥미로운 건 이들 모두 정조가 끔찍이 싫어했던 소품문을 유려하게 구사한 작가들이라는 점이다. 특히 이덕무(李德懋)18세기를 대표하는 아포리즘(aphorizm)의 명인이다. 이목구심서(耳目口心書)선귤당농소(蟬橘堂濃笑)에는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쏘는’ ‘청언소품(淸言小品)’들로 흘러넘친다. 서얼 출신인 데다 자신을 간서치(看書痴)’, 곧 책만 읽는 멍청이라고 부를 정도로 책벌레였던 그는 가난과 질병을 숙명처럼 안고 살았다. 유득공 역시 그 점에서는 마찬가지였을 터, 여기 두 사람의 눈물겨운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내 집에 좋은 물건이라곤 단지 맹자(孟子)일곱 편뿐인데, 오랜 굶주림을 견딜 길 없어 2백 전에 팔아 밥을 지어 배불리 먹었소. 희희낙락하며 영재 유득공에게 달려가 크게 뽐내었구려. 영재의 굶주림 또한 하마 오래였던지라, 내 말을 듣더니 그 자리에서 좌씨전(左氏傳)을 팔아서는 남은 돈으로 술을 받아 나를 마시게 하지 뭐요.

家中長物, 孟子七篇, 不堪長飢, 賣得二百錢, 爲飯健噉, 嬉嬉然赴冷齋大夸之. 冷齋之飢 亦已多時, 聞余言, 立賣左氏傳, 以餘錢沽酒以飮我.

 

이 어찌 맹자가 몸소 밥을 지어 나를 먹여주고, 좌씨가 손수 술을 따라 내게 권하는 것과 무에 다르겠소. 이에 맹자와 좌씨를 한없이 찬송하였더라오. 그렇지만 우리들이 만약 해를 마치도록 이 두 책을 읽기만 했더라면 어찌 일찍이 조금의 굶주림인들 구할 수 있었겠소. 그래서 나는 겨우 알았소. 책 읽어 부귀를 구한다는 것은 모두 요행의 꾀일 뿐이니, 곧장 팔아치워 한번 거나히 취하고 배불리 먹기를 도모하는 것이 박실(樸實)함이 될 뿐 거짓 꾸미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오. 아아! 그대의 생각은 어떻소?

是何異子輿氏親炊飯以食我, 左丘生手斟酒以勸我? 於是頌讚孟左千千萬萬. 然吾輩若終年讀此二書, 何嘗求一分飢乎? 始知讀書求富貴, 皆僥倖之術, 不如直賣喫圖一醉飽之樸實而不文飾也. 嗟夫嗟夫! 足下以爲如何?

 

 

역시 연암그룹의 일원인 이서구(李書九)에게 보낸 편지다(與李洛瑞書). 오로지 책이 삶의 전부인 지식인이 책을 팔아 밥을 먹어야 하는 이 지독한 아이러니! 이덕무(李德懋), 그리고 그의 친구들의 아포리즘(aphorizm)은 이런 절대빈곤무소유의 한가운데서 솟구친 열정의 기록이었다.

 

백동수도 흥미로운 캐릭터 중의 하나다. 1789년 가을, 정조는 백동수를 박제가(朴齊家), 이덕무 등과 함께 불러들인다. 정조의 명령은 새로운 무예서를 편찬하라는 것. 이름도 미리 정해놓았다.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 곧 무예에 관한 실기를 그림과 설명으로 훤히 풀어낸 책이라는 뜻. 이덕무에게는 문헌을 고증하는 책임이, 박제가에게는 고증과 함께 글씨를 쓰는 일이, 그리고 백동수에게는 무예를 실기로 고증하는 일과 편찬 감독이 맡겨졌다. 당시 백동수는 40대 중반으로 국왕 호위부대인 장용영(壯勇營) 초관의 직책에 있었다. 일개 초관에 불과한 인물에게 조선 병서의 전범이 될 책의 총책임을 맡기다니! 그러나 그가 당대 창검무예의 최고수라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 그다지 놀랄 일만도 아니다.

 

장수 집안의 서자인 그는 십대부터 협객들을 찾아다니며 무예를 익혔다. 특히 당대 최고의 검객 김광택을 스승으로 모시고 검의 원리를 깨우쳤다고 한다. 최고의 경지에 올랐다고는 하나, 당시는 문반 엘리트가 판치는 세상이었다. 연암이 한 글에서 말했듯이, ‘임금에게 충성하고 나라를 위해 죽으려는 뜻은 사대부에게도 부끄럽지 않았건만, 시운은 그를 용납하지 않았다. 무인에다 서자, 결국 그 또한 조선왕조 마이너의 일원이었을 뿐이다. 그가 연암 그룹과 일찌감치 의기투합할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일 터이다. 이덕무와는 처남매부지간이자 평생의 지기였고, 박제가(朴齊家)와는 둘도 없는 친구였으며, 연암과도 역시 그러했다. 이들의 얼굴은 이 책 곳곳에서 마주치게 될 것이다. 마치 영화의 카메오처럼.

 

 

박제가(위쪽), 홍대용(洪大容, 아래쪽)의 초상

박제가 초상은 1790년 청나라 화가 나빙이 그린 것이다. 화질이 안 좋아 박제가의 풍모가 잘 드러나지는 않는다. 서자 출신이었지만 연암그룹의 핵심멤버였고, 북학파 가운데서도 급진파에 속했다. 청문명을 동경한 나머지 중국어 공용론을 펼치기도 했다. 홍대용은 연암의 가장 절친한 친구이자 18세기 사상사의 빛나는 별, 지전설, 지동설 등 당시로선 파천황적 이론을 펼친 뛰어난 과학자이기도 하다. 엄성이 그린 이 초상화의 우아하고 부드러운 터치가 홍대용의 풍모를 그대로 보여주는 듯하다. 엄성은 홍대용(洪大容)이 유리창에서 사귄 중국인 친구 중의 하나로, 죽을 때 홍대용이 보내준 먹과 향을 가슴에 품고서 숨을 거두었다. 그것만으로도 둘 사이의 우정이 얼마나 뜨겁고 절절했는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붓끝에 담긴 엄성의 사랑을 느껴보시기를!

 

 

인용

목차 / 박지원

열하일기 / 문체반정

미스터리(mistery)

분열자

연암그룹

생의 절정 백탑청연

연암이 연암으로 달아난 까닭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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