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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1부 “나는 너고, 너는 나다”, 3장 우발적인 마주침 열하 - 마침내 중원으로! 본문

문집/열하일기

1부 “나는 너고, 너는 나다”, 3장 우발적인 마주침 열하 - 마침내 중원으로!

건방진방랑자 2021. 7. 8. 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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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장 우발적인 마주침 열하

 

 

마침내 중원으로!

 

 

회우기(會友記)를 보냅니다. 제가 평상시 중원을 대단히 흠모해왔지만 이 글을 보고 나서는 다시 걷잡을 수 없이 미친 사람이 되어 밥을 앞에 두고서는 수저 드는 것을 잊고, 세숫대야를 앞에 두고서는 얼굴 씻는 것을 잊을 지경입니다. 아아! 정녕 이곳이 어느 땅이란 말입니까? 그 땅이 조선 땅일까요? 제가 보니 절강이고 서호입니다. 그곳은 남북으로 멀기도 하고 좌우로 광활하기 때문에 도로의 이수(里數)를 계산하지 못할 정도로 호호탕탕(浩浩蕩蕩) 광대무변의 땅입니다.

 

 

그러나 소와 말도 분간하지 못하는 무리들은 은연중 이 조선만을 실재하는 세상으로 생각하며 수천 리 우리 안에서 나서 늙고 병들어 죽는 생애를 영위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과연 중원의 존재를 알 수 있을까요, 없을까요? (중략)

 

담헌 홍대용(洪大容) 선생이 하루아침에 저 천애(天涯) 먼 곳에서 지기를 맺어 그 풍류와 문묵이 멋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사권 사람들은 모두 풍모가 의연하여 지난날 서책에서 본 듯한 인물이고, 주고받은 말은 모두 제 마음속에 또렷하게 담겨 있던 것입니다. 그러니 저분들이 비록 이 조선과 천리 멀리 떨어져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해도 우리가 저분들을 사모하고 사랑하며 감격하여 울면서 의기투합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박제가(朴齊家), 회우기여서관헌상수(會友記與徐觀軒常修)

 

 

회우기는 홍대용이 연경에서 절강성 출신 선비 세 명과 나눈 필담을 정리한 것이다. 박제가는 그것을 본 소감을 감격어린 어조에 실어 이렇게 표현했다. 조선이라는 편협한 땅에 대한 한탄, 당시 조선인들의 고루한 풍토에 대한 신랄한 냉소, 국경을 넘는 우정과 교류에 대한 열망 등이 생생하게 전해진다.

 

여기 담긴 생각이 어찌 박제가만의 것일까. 연암 또한 그러했다. 더구나 앞서 연행을 체험한 벗들로부터 청문명의 번화함을 전해들었던 연암으로서는 중원에 대한 동경이 더할 나위 없이 무르익던 터였다. 그런 연암에게 마흔넷, 생의 한 고비를 넘어가는 길목에서 마침내 중원 천하에 발을 디딜 기회가 주어졌다.

 

홍국영(洪國榮)의 실각과 더불어 연암은 다시 서울로 돌아온다. 그러나 화근은 사라졌지만 옛친구들은 거의 다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분위기가 싹 변해 옛날 같지 않았다. 박제가(朴齊家)의 표현을 빌리면, ‘풍류는 지난날에 비해 줄어들고, 얼굴빛은 옛날의 그것이 아니었으니, ‘벗과의 교유도 참으로 피할 수 없는 성쇠(盛衰)가 있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정치적 위기는 해소되었지만, 쓸쓸한 귀환이었던 셈.

 

 

열하로의 여행은 이런 그에게 느닷없이 다가온 행운이었다. 1780, 울울한 심정에 어디론가 멀리 떠나기를 염원하고 있던 차, 삼종형 박명원(朴明源)건륭황제(乾隆皇帝)의 만수절(70) 축하 사절로 중국으로 가게 되면서 그를 동반하기로 한 것이다. 17805월에 길을 떠나 6월에 압록강을 건넜으며 8월에 북경에 들어갔고, 곧이어 열하로 갔다가 그 달에 다시 북경으로 돌아와 10월에 귀국하게 되는 5개월에 걸친 대장정은 이렇게 해서 시작되었다. 참고로 인조 15(1637) 이후 조선조 말에 이르는 250여 년 동안 줄잡아 500회 이상의 사행(使行)이 청국을 다녀왔고, 그 결과 100여 종이 넘는 수많은 연행록이 쏟아져 나왔다. 일종의 연행 붐이 일었던 것이다. ‘한류열풍이 중국대륙을 강타하고, 많은 한국인들이 북경을 휘젓고 다니는 요즘과 단순 대비하기란 어렵겠지만, 어떻든 중국대륙에 대한 꿈은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계속되고 있는 셈이다.

 

연행 붐이 일긴 했지만, 사행단의 기본 관점은 어디까지나 북벌론(北伐論)’에 입각해 있었다. 청나라는 만주족 오랑캐이고, 병자호란의 수치를 안겨준 원수이기 때문에 반드시 복수해야 한다는 것이 북벌론의 핵심요지다. 명의 멸망으로 이제 진정한 중화문명은 조선으로 옮겨왔다는 소중화(小中華)’ 사상이 그 안에 자리하고 있다. 인조와 효종 이후 북벌론은 소중화주의와 서로 상승작용을 하면서 실질적으로 청을 향하기보다 내부를 향한 통치 이데올로기로 기능하였다. 이것을 묵수하는 한, 청문명을 직접 접한다 해도 그것을 통해 새로운 사상사적 모색이 감행될 가능성은 별로 없다.

 

북벌이라는 견고한 요새에 균열을 일으키고, 북학으로 방향을 선회하도록 이끈 것은 바로 연암그룹에 의한 연행록 시리즈였다. 김창업의 연행일기를 비롯하여 홍대용(洪大容)담헌연기(湛軒燕記, 한글판은 을병연행록건정동필담(회우록)이 나왔고, 뒤이어 1778년 중국을 다녀온 이덕무(李德懋)박제가(朴齊家)에 의해 각각 입연기(入燕記)북학의(北學議)가 제출된다. 박제가의 북학의는 연행록은 아니지만, 북학의 논리와 방법론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계열에서 주요한 위상을 점한다. 이 일련의 시리즈는 분명 기존의 연행록의 지평에서 벗어난 새로운 계열이다. 이 계열은 청문명의 역동성을 있는 그대로 제시함으로써 소중화(小中華)라는 도그마에 찌든 당대 지성사에 북학의 호흡을 불어넣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연암 역시 이러한 무드속에서 중원에 대한 꿈을 고양해갔음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연암의 연행기는 이 이질적인 계열 내에서도 또 하나의 변종이다. 열하일기는 그 무엇에 견주기 어려운 지층들을 내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그의 연행은 여행이라기보다 하나의 사건’(!)이었다.

 

 

▲ 「연행도(숭실대 박물관 소장)

조선 연행사들이 북경을 향해 출정하는 모습. 당시 청나라는 세계제국의 중심이었다. 따라서 연행은 단지 의례적인 외교행사에 그치지 않고, 선진문명을 흡수할 수 있는 유일한 창구이기도 했다. 행차가 거창해 보이기는 하나, 사실 이들의 앞날엔 고생문이 훤하다. 대략 6개월에 걸친 대장정이 앞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연행록 한편 한편에는 생사의 갈림길을 넘나드는 어드벤처와 서스펜스가 담겨 있다고 보아야 마땅하다. 연암은 비공식 수행원이었던 만큼 아마 이 행차의 끄트머리 어디쯤에서 따라갔을 것이다. 애마(!)를 타고 장복이와 창대, ‘환상의 고지식 커플과 함께.

 

 

인용

목차 / 박지원

열하일기 / 문체반정

마침내 중원으로!

웬 열하?

소문의 회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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