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   2024/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Archives
Today
Total
관리 메뉴

건빵이랑 놀자

1부 “나는 너고, 너는 나다”, 2장 탈주ㆍ우정ㆍ도주 - 연암이 ‘연암’으로 달아난 까닭은? 본문

문집/열하일기

1부 “나는 너고, 너는 나다”, 2장 탈주ㆍ우정ㆍ도주 - 연암이 ‘연암’으로 달아난 까닭은?

건방진방랑자 2021. 7. 8. 12:16
728x90
반응형

 연암이 연암(燕巖)으로 달아난 까닭은?

 

 

연암은 타고난 집시(vagabond)’였다. 과거를 포기한 뒤로, 서로는 평양과 묘향산, 남으로는 속리산과 가야산, 화양동과 단양 등 여러 명승지를 발길 닿는 대로 떠돌아 다녔다. 과거를 포기한 젊은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즐거움이 유람 말고는 달리 없었던 것이다.

 

1765년 가을 금강산 유람 때의 일이다. 유언호와 신광온(申光蘊)이 나란히 말을 타고 와 금강산 유람을 제의하자, 연암은 부모님께서 계시니 마음대로 멀리 갈 수가 없다고 거절했다. 두 친구가 먼저 떠난 뒤, 연암의 조부가 명산에는 인연이 있는 법이거늘 젊을 적에 한번 유람하는 게 좋다[汝何不共往? 名山有緣, 年少一遊, 好矣]’고 허락했다. 하지만 노자가 없었다. 그때 한 지인이 들렀다 나귀 살 돈 100냥을 쾌척하여 돈은 마련되었는데, 데리고 갈 하인이 없었다. 이에 어린 여종으로 하여금 골목에 나가 이렇게 소리치게 했다. “우리집 작은 서방님 이불짐과 책상자를 지고 금강산에 따라갈 사람 없나요[有能從吾家小郞, 襆被擔笈, 入金剛山者乎]?” 마침 응하는 사람이 몇 명 있었고, 이에 새벽에 출발해 의정부 가는 길에 있는 다락원에 이르러 먼저 떠난 두 벗을 만났다. 뛸 듯이 기뻐하는 친구들. 그의 빼어난 시 총석정에서 해돋이를 보고[叢石亭觀日出]가 이때 지어졌다.

 

그가 연암골을 발견한 것도 전국을 정처없이 유람하던 이 즈음이었다. 협객 백동수와 합류한 어느 날 백동수는 그를 이끌고 개성에서 멀지 않은 금천군 연암으로 향했다. 연암골은 황해도 금천군에 속해 있었고 개성에서 30리 떨어진 두메산골이었다. ‘연암(燕巖)’은 제비바위라는 뜻으로, 평계(平溪) 주위에 있는 바위 절벽에 제비 둥지가 많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처음 화장사(華藏寺)에 올라 동쪽으로 아침 해를 바라보니 산봉우리가 하늘에 꽂힌 듯했다. 시내를 따라 거슬러 올라가니 기이한 땅이 있었는데, 언덕은 평평하고 산기슭은 수려했으며 바위는 희고 모래는 깨끗했다. 검푸른 절벽이 깎아지를 듯 마치 그림 병풍을 펼쳐놓은 듯했다. 고려시대에는 목은 이색(李穡)과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 등 쟁쟁한 명망가들이 그곳에 살았지만 당시에는 황폐해져 있었다. 그래서 두 친구가 찾았을 때는 화전민들만 약초를 캐고 숯을 구우며 살고 있었다. 둘은 갈대숲 가운데서 말을 세우고 채찍으로 높은 언덕배기를 구획지으면서 말했다. “저기라면 울타리를 치고 뽕나무를 심을 수 있겠군. 갈대에 불을 질러 밭을 갈면, 한 해에 조를 천 석은 거둘 수 있겠네.”

 

시험삼아 쇠[]를 쳐서 바람을 타고 불을 놓으니, 꿩은 깍깍대며 놀라 날고, 새끼 노루가 앞으로 달아났다. 팔뚝을 부르걷고 이를 쫓다가 시내에 막혀 돌아왔다. 둘은 서로 돌아보고 웃으며 말하였다. “백 년도 못 되는 인생을 어찌 답답하게 목석같이 살면서 조나 꿩, 토끼를 먹으며 지낼 수 있겠는가?”

 

하기야 어찌 서글프지 않으랴. 아무리 풍광이 빼어난 곳일지언정, 젊은 날부터 뒷날 물러나 생계를 꾸릴 터전을 마련해놓아야 하다니. 하지만 연암은 연암골이 마음에 꼭 들었다. 마침내 이곳에 은거하기로 마음을 정하고 연암을 자신의 호()로 삼는다. 과정록(過庭錄)1에 나온다.

 

…… (前略)
此去叢石只十里 총석정은 예서 십리
正臨滄溟觀日昇 기필코 넓은 바다 마주하여 해돋이를 보리라
天水澒洞無兆眹 하늘과 물 잇닿아 경계가 없고
洪濤打岸霹靂興 성난 파도 벼랑에 부딪히니 벼락이 이는 듯
常疑黑風倒海來 거센 바람 휘몰아치니 온 바다 뒤집히고
連根拔山萬石崩 뿌리째 산이 뽑혀 바위더미 무너지는 듯
無怪鯨鯤鬪出陸 고래와 곤의 싸움에 육지 솟아난들 괴이할 것 없고
不虞海運値摶鵬 대붕이 날아올라 바다 옮겨간들 걱정할 것 없다네
…… (後略)

 

 

김홍도의 총석정도(叢石亭圖)

연암은 젊은 날 유람 중 총석정에서 해돋이를 보고 장시(長詩)를 남겼다. 워낙 시짓기를 꺼려했던 그로서는 매우 특이한 이력이다. 감동이 남달랐던가 보다. 자신도 이 작품이 흡족했던지 열하일기에도 전문을 다시 수록했다. 아래에 시의 몇 구절을 옮겨보니 김홍도의 화필과 함께 연암의 시적 정취도 음미해보시기를.

 

 

1778년 연암은 전의감동에서의 빛나는 밴드생활을 청산하고 황해도 연암동으로 떠난다. 그러나 이것은 젊은 날의 유쾌한 유람이 아니라 일종의 도주였다. 1776년 정조가 즉위하자, 정조의 왕위계승을 꺼려하던 인물들이 대거 숙청되면서 정조의 즉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홍국영이 정계의 실력자로 부상한다. 홍국영(洪國榮)의 세도정치가 시작된 것이다. 삼종형 박재원(朴在源)이 홍국영의 비위를 거슬러 파직되면서, 평소 홍국영에 대해 비판적인 언사를 삼가지 않았던 연암 주변에까지 점차 권력의 그물망이 조여들고 있었다. 위기를 감지한 친구들이 그에게 피신할 계책을 세우도록 재촉하는데, 이 장면도 한편의 드라마. 과정록(過庭錄)1에 나오는 이야기다.

 

홍국영 밑에 있는 협객들과 각별한 인맥을 가지고 있던 백동수가 먼저 정보를 입수하고선 급히 달려왔다. “서둘러 서울을 떠나야 하네. 한동안 연암골에 들어가 몸을 숨기고 죽은 듯이 지내는 것이 상책일 듯하이.” 마침 친구 유언호도 조정에서 돌아와 밤에 연암을 찾아왔다.

 

 

자네는 어쩌자고 홍국영의 비위를 그토록 거슬렀는가? 자네에게 몹시 독을 품고 있으니 어떤 화가 미칠지 알 수 없네. 그가 자네를 해치려고 틈을 엿본 지 오래라네. 다만 자네가 조정 벼슬아치가 아니기 때문에 짐짓 늦추어 온 것뿐이지. 이제 복수의 대상이 거의 다 제거됐으니 다음 차례는 자넬 걸세. 자네 이야기만 나오면 그 눈초리가 몹시 험악해지니 필시 화를 면치 못할 것 같네. 이 일을 어쩌면 좋겠나? 될 수 있는 한 빨리 서울을 떠나게나.

君何大忤洪國榮也? 啣之深毒, 禍不可測. 彼之欲修隙, 久矣, 特以非朝端人, 故姑緩之. 今睚眦幾盡, 次及君矣. 每語到君邊, 眉睫甚惡, 必不免矣. 爲之柰何? 可急離城闉

 

 

사실 이것도 미스터리 가운데 하나다. 관직에 뜻이 없고, 당파와 어울리지도 않았고, 그저 의기투합한 친구들과 놀기에 바쁜 일개 문인이 최고 세도가의 표적이 될 수 있다니. 지인들의 말대로, 평소 의론이 곧고 바른 데다 명성이 너무 높았던 게 화를 부른 원인이었을까? 남아 있는 연암의 글에는 당대의 중앙정계를 직접 겨냥한 언술은 거의 없다. 앞에서도 말했듯, 그는 태생적으로 비정치적인물이었을 뿐 아니라, 남을 비판하는 것을 즐겨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대체 권세가들이 그를 꺼려한, 아니 두려워한 이유가 무얼까? 그 상세한 내막이야 알 길이 없지만, 다만 분명한 건 연암의 움직임 자체가 상상하는 것 이상의 정치적 파급력을 지니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어쨌든 정국은 연암에게 불리하게 돌아갔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가정형편 역시 좋지 않았다. 1777년 그의 정신적 지주이기도 했던 장인 이보천이 별세하고, 그 다음해(1778) 가족의 생계를 담당하던 형수마저 병사하자 연암은 스스로 생계를 마련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말하자면 먹고 살기위해서도 연암은 연암골로 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는 실제로 연암동에서 초가삼간을 짓고, 손수 뽕나무를 심었다. 열하일기』 「동란섭필(銅蘭涉筆)에는 이 즈음으로 추정되는 일을 회상하는 장면이 하나 나온다.

 

 

나 역시 성질이 재물을 좋아하지 않으므로 이렇게 가난하게 되었으나, 평생에 베낀 책을 점검해보니 불과 열 권이 차지 못하고, 연암 골짜기에 손수 심은 뽕나무가 겨우 열 두 포기이다. 그나마 긴 가지라는 것이 겨우 어깨에 닿을지 말지 하매 일찍이 슬픈 한탄을 금할 수 없었던 바, 이번에 요동벌을 지나오면서 밭가에 둘린 뽕나무 숲을 바라보다가, 끝없이 넓은 것을 보고는 망연자실할 따름이었다.

余亦性不好貨, 故以至貧乏, 然點檢平生所寫書, 不滿十卷, 燕巖手所種桑纔十二株. 其長條纔得及肩, 甞不禁惋歎, 今經遼野護田桑林, 一望無際, 則又茫然自失矣.

 

 

물론 그렇다고 그가 완전히 변방에서 잠수한 건 아니다. 연암골로 도주하자, 친구 유언호가 개성유수를 자임한다. 그의 주선으로 연암은 개성 부근 금학동 별장으로 거처를 옮기고, 인근 지방의 젊은이들 가르치는 일을 담당한다. 유언호는 뒤탈을 막기 위해 조정에 들어가 짐짓 연암에 대해 가족을 이끌고 떠돌다가 그만 부잣집에 눌러앉아 늙은 훈장 노릇을 하고 있다는군요[其挈家流離, 來作松京富人家老學究也]’했더니, 홍국영(洪國榮)참으로 형편없이 됐으니 논할 것도 없구려[眞腐矣! 無足論也]’라고 했다나. 위기 탈출!

 

19세기 방랑시인 김삿갓이 말해주듯, 조선 후기 지식인의 광범위한 분화 속에서 촌학구(村學究, 시골 글방 스승)란 지식인이 다다를 수 있는 일종의 막장같은 것이었다. 그러니 홍국영(洪國榮)으로서도 마음을 놓을밖에. 그러나 연암은 이 기회를 제도권 밖에서 지식의 전수를 실험하는 일종의 열린 교육터로 활용한다. 즉 그는 오로지 과거시험밖에 몰랐던 변방의 젊은이들에게 학문하는 즐거움을 가르친다. “선생님의 가르침을 듣고서야 비로소 과거 공부 이외에 문장 공부가 있고, 문장 공부 위에 학문이 있으며, 학문이란 글을 끊어 읽거나 글에다 훈고(訓詁)를 붙이는 것만으로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요[及聞先生敎誨, 始知功合之外, 有文章, 文章之上, 有學術, 學術不可但以句讀訓詁爲也].” 말하자면 연암은 입시 공부에 시달리는 학인들에게 사색하는 법, 토론, 분변(分辨)하는 법을 가르쳤던 것이다. 과정록(過庭錄)1에 나오는 이야기다.

 

 

 

 

이후 연암은 연암협과 서울을 오가면서 지내는데, 이 시절의 모습이 잘 그려진 자료가 있다. 먼저 제자 이서구가 쓴 하야방연암장인기(夏夜訪燕巖丈人記). 5월 그믐밤 이서구가 연암댁을 찾는다. 골목으로 접어들어 집 들창을 살펴보니 등불이 비치고 있었다. 문으로 들어서자, “어른께서는 벌써 사흘째 끼니를 거르고 계셨다. 마침 맨발에 맨상투로 창턱 위에 다리를 걸치고서 문간방의 아랫것과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는 중이었다[丈人不食已三朝矣, 方跣足解巾, 加股房櫳, 與廊曲賤隸相問答].” 이서구가 온 것을 보고서는 옷을 고쳐 입고 앉은 뒤, “고금의 치란과 당대 문장명론(文章名論)의 파별동이(派別同異)”를 자세히 논했다. 밤은 삼경을 지나고 은하수가 등불에 흔들리는 속에서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이 이어진다.

 

이런 내용이 담긴 편지를 받은 뒤, 연암은 답장을 쓴다. 소완정의 하야방우기에 화답하다[酬素玩亭夏夜訪友記]가 그것. 그때의 상황이 좀더 상세하다. 그의 말에 따르면, ‘식구들은 이때 광릉에 있었, 그는 평소에 살이 쪄서 더위를 괴로워하는 데다 또 푸나무가 울창해서 여름 밤이면 모기와 파리가 걱정되고, 논에서는 개구리가 밤낮 쉴새없이 울어대는 까닭에, 매번 여름만 되면 항상 서울 집으로 피서를오곤 했다. 그런데 당시 홀로 계집종 하나가 집을 지키다가 갑자기 눈병이 나서 미쳐 소리지르며 주인을 버리고 떠나가 버려 밥지어줄 사람이 없었, 그래서 행랑채에 밥을 부쳐 먹다보니 자연히 가까이 지내게 되었. 이서구가 방문할 당시 과연 사흘 아침을 굶고 있었는데, 행랑채의 아랫것이 지붕 얹어주는 일을 하고 품삯을 받아와 밤에야 비로소 밥을 지어 먹게 되었다. 식사를 마치고 곤하여 누웠는데, 행랑채의 어린 것이 밥투정을 하자 그 아비가 화가 나서 밥 주발을 엎어 개에게 던져주며 욕을 해대는 걸 듣고는 이런저런 비유로 타이르는 장면을 연출하게 된 것이다. 이런 정황 설명에 이어 당시 자신의 일상사를 그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고요히 앉아 한 생각도 뜻 속에 두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더욱 성글고 게으른 것이 몸에 배어 경조사도 폐하여 끊었다. 혹 여러 날을 세수도 하지 않고, 열흘이나 두건을 하지 않기도 하였다. 손님이 이르면 말없이 가만히 앉아 있기나 하고, 혹 땔감이나 참외 파는 자가 지나가면 불러다가 더불어 효제충신과 예의염치를 이야기하며 정성스레 수백 마디의 말을 나누곤 하였다.

靜居無一念在意. 時得鄕書, 但閱其平安字. 益習疎懶, 廢絶慶弔. 或數日不洗面, 或一旬不裹巾. 客至或黙然淸坐, 或販薪賣瓜者過, 呼與語孝悌忠信禮義廉恥, 款款語屢數百言.

 

 

말하자면 제 집에 있으면서 객처럼 지내고 아내가 있으면서 중처럼[其在家爲客, 有妻如僧]’ 사는 식이었던 것이다. 마치 흥부처럼 다리 부러진 새끼 까치에게 밥알을 던져주기도 하고, ‘자다가 깨면 책을 보고, 책을 보다간 또 잠을자는데, 아무도 깨우는 이가 없고 보니, 어떤 때는 하루 종일 쿨쿨 자기도 했다. 간혹 글을 지어 뜻을 보이기도 하고, 칠현금을 배워 몇 곡조 뜯기도 하고, 혹은 술을 보내주는 이가 있으면 기쁘게 마시기도 했다. 그러나 이 한없는 유유자적함에는 깊은 적막과 쓸쓸함이 배어 있다. ‘금년에 마흔도 못 되었는데 이미 터럭이 허옇게 세었, ‘이미 병들고 지쳐서 기백이 쇠락하여 담담히 세상에 뜻이 없다고, 그는 토로한다. 그 허허로운 목소리와 함께 열정어린 젊음의 뒤안길을 헤쳐나온 쓸쓸한 중년 박지원의 모습이 클로즈업된다.

 

 

 

 

인용

목차 / 박지원

열하일기 / 문체반정

미스터리(mistery)

분열자

연암그룹

생의 절정 백탑청연

연암이 연암으로 달아난 까닭은?

 
728x90
반응형
그리드형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