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천 개의 얼굴 천 개의 목소리’
분출하는 은유
『열하일기』 곳곳에는 이국의 풍광과 정취가 매혹적으로 그려져 있다. 거대한 스케일과 무시로 변화하는 중원의 대자연을 포착하기 위해 그는 환상의 은유, 공감각, 돌연한 비약 등 화려한 수사학을 구사한다. “황대경씨의 글이 사모관대(紗帽冠帶)를 하고 패옥(佩玉)을 한 채 길가에 엎어진 시체와 같다면, 내 글은 비록 누더기를 걸쳤다 할지라도 앉아서 아침 해를 쬐고 있는 저 살아 있는 사람과 같다”고 자부했던 바대로, 그는 풀잎과 새의 울음, 별과 달의 움직임까지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기꺼이 ‘언어의 연금술사’가 된다. 그 이미지들은 때론 화려한 스펙터클로, 때론 그윽한 서정으로, 때론 공포의 어조로 변주되면서 은유와 환유의 퍼레이드를 펼친다.
먼저 그는 해가 뜨고 지는 순간 만들어지는 빛의 미세하고도 미묘한 변화를 정밀하게 감지한다. 주로 새벽에 떠나고 달빛을 타고 움직이는 습관 때문에 일출이나 월출의 변화를 생생하게 포착할 수 있었던 것이리라. “서쪽 하늘가에 짙은 안개가 문득 트이며 한 조각 파아란 하늘이 사풋이 나타난다. 영롱하게 구멍으로 비치는 것이 마치 작은 창에 끼어 놓은 유리알 같다. 잠시 울 안에 안개는 모두 아롱진 구름으로 화하여 그 무한한 광경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돌이켜 동쪽을 바라보니, 이글이글 타는 듯한 한 덩이 붉은 해가 벌써 세 발을 올라왔다.” 안개 속에 언뜻 보이는 한 조각 파아란 하늘, 안개바다, 이글거리는 붉은 해로 이어지는 빛의 변신술.
해뜨는 순간의 묘사는 다음에서 더 도드라진다.
달이 막 떨어지니 온 하늘에 총총한 별들이 깜박거리고 마을 닭들이 연이어 홰를 치기 시작한다. 몇 리 못 가 안개가 뿌옇게 내리자 큰 벌판이 삽시간에 수은 바다를 이루었다. 한 떼의 의주 장사꾼들이 서로 지껄이며 지나가는데, 그 소리가 너무도 몽롱하여 마치 꿈 속 같았다. 기이한 글을 낭송하는 듯 또렷하지 않아 사람 같아 보이지도 않았다.
月初落矣 滿天星顆互瞬 村鷄迭鳴 行不數里 白霧漫漫 大野浸成水銀海 一隊灣商相語而行 矇矓如夢中讀奇書 不甚了了 而靈幻則極矣
잠시 뒤, 하늘이 훤해지며 길에 늘어선 버드나무에서 매미가 일제히 울기 시작한다. 매미들이 저처럼 울부짖지 않아도 한낮의 더위가 몹시 뜨거운 줄 그 누군들 모르겠는가. 들에 가득했던 안개가 차츰 걷히자 먼 마을 사당 앞에 세워둔 깃발이 마치 돛대처럼 펄럭인다. 동쪽 하늘을 돌아보니 붉은빛 구름이 이글거리더니 한 개의 불덩이가 옥수수 밭 저편에 반쯤 잠기어 일렁거리고 있다. 차츰 솟아오르면서 요동벌 전체를 부드럽게 감싸 안는다. 땅 위의 오가는 말이며, 수레며, 나무며, 집이며, 털끝같이 보이는 것들이 모두 불덩이 속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성경잡지(盛京雜誌)」
少焉 天色向曙 萬柳秋蟬 一時發響 非渠來報 已知午天酷炎矣 野霧漸收 遠村廟堂前 旗竿如帆檣 回看東天 火雲滃潏 盪出一輪紅日 半湧半沉於薥黍田中 遲遲冉冉 圓滿遼東 而野地上 去馬來車 靜樹止屋 森如秋毫 皆入火輪中矣
새벽 안개가 자욱한 풍경을 ‘수은 바다’에 비유하는 것도 멋지거니와, 그 아련한 풍경 속에서 들려오는 장사꾼들의 몽롱한 지껄임도 자못 신비로운 무드를 자아낸다. 거기에 취해들 즈음, 돌연 매미의 울음소리로 장면을 전환한 뒤, 곧바로 한낮의 땡볕으로 이동한다. 그러면서 붉은 불덩이가 요동벌에 쫙 퍼지는 ‘와이드 비전’이 펼쳐진다. 오, 붉은 광야! 이렇게 이미지들의 각축을 따라가노라면, 마치 여러 시공간이 순식간에 겹쳐지는 듯한 착각에 빠질 지경이다.
변화무쌍한 시공간을 은유로 담다
그러나 중원의 풍경이 이렇게 매혹적이기만 할 리가 없다. 땅의 크기만큼이나 거대한 스케일로 움직이는 대기의 흐름은 종횡무진으로 구름과 비를 몰고온다. 특히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가공할 소낙비를 만났을 때, 그것은 일종의 경외감을 자아낸다. 이제묘(夷齊廟)에서 야계타(野雞坨)로 가는 도중 날씨가 찌는 듯하고 한점 바람기가 없더니 갑자기 사람들의 손등에 한 종지 찬물이 떨어지며, 마음과 등골이 섬뜩해지기에 사방을 둘러 보았으나 아무도 물을 끼얹는 이가 없다. 다시 주먹 같은 물방울이 모자와 갓 위에 떨어진다. 그제야 사람들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니,
해 옆으로 바둑돌만 한 구름이 나타난다. 맷돌 가는 소리가 들리더니, 삽시간에 지평선 너머 사방에서 자그마한 구름이 일어난다. 한줄기 흰 번갯불이 버드나무 위에 번쩍하더니 이내 해가 구름 속에 가려진다. 천둥치는 소리가 바둑판을 밀치는 듯 명주를 찢는 듯 요란하다. 수많은 버들잎에서 번갯불이 번쩍인다. 일제히 채찍을 날려 말을 달렸다. 등 뒤로 수많은 수레가 다투어 달리는 듯하다. 산은 미친 듯하고 땅은 뒤집힐 듯하다. 나무들은 노한 듯이 부르짖는다. 하인들은 서둘러 우장을 꺼내려 하나 손발이 떨려 선뜻 끈을 풀지 못한다. 비바람과 천둥번개가 동시에 휘몰아치니, 한치 앞도 분간하기 어려운 상태다. 「관내정사(關內程史)」
日傍有片雲 小如碁子 殷殷作碾磨聲 俄傾四面野際 各起小雲如烏頭 其色甚毒 日傍黑雲 已掩半輪 一條白光閃過柳樹 少焉日隱雲中 雲中迭響 如推碁局 如裂帛 萬柳沉沉 葉葉縈電 一齊促鞭而行 背後萬車爭驅 山狂野顚 樹怒木酗 從者手脚忙亂 急出油具 堅不脫帒 雨師風伯 雷公電母 橫馳並騖 不辨咫尺
바둑판 밀치는 소리, 맷돌가는 소리, 까마귀 소리, 명주 찢는 소리 등 청명한 하늘에 돌연 천둥번개가 휘몰아치는 과정이 역동적으로 포착되어 있다. 마치 공포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듯 손에 땀을 쥐게 한다. 이 소낙비의 위력이 얼마나 굉장했던지, “말은 모두 사시나무 떨 듯하고 사람은 숨길이 급할 뿐이어서 할 수 없이 말머리를 모아서 삥 둘러섰는데 하인들은 모두 얼굴을 말갈기 밑에 가리고 섰”고, “가끔 번갯불에 비칠 때 살펴보니, 노군이 새파랗게 질리어 두 눈을 꼭 감고 숨이 곧장” 넘어갈 지경이다.
연암의 연금술적 능력이 고도로 발휘된 대목은 특히 「야출고북구기(夜出古北口記)」이다. 최초로 『열하일기』를 출간한 구한말의 문장가 김택영(金澤榮)은 이 글을 『삼국사기』의 ‘온달전’과 함께 조선 5천년래 최고의 문장으로 꼽았다 한다. 대체 어떤 글이길래? 물론 내 능력으론 그 진면목의 그림자도 엿보기 어렵다. 다만 이 글이 내뿜고 있는 분위기가 예사롭지 않다는 것만을 확인할 수 있을 뿐.
고북구는 거용관(居庸關)과 산해관(山海關)의 중간에 있어 장성의 험난한 요새로 손꼽히는 곳이다. 몽고가 출입할 때는 항상 그 목구멍이 되는 까닭에 겹으로 된 난관을 만들어 그 요새를 누르고 있다. 연암은 배로 물을 건너 밤중에 고북구를 빠져나가면서 이 험준한 전쟁터 특유의 분위기를 예리하게 포착한다.
“때마침 상현(上弦)이라 달이 고개에 드리워 떨어지려고 한다. 그 빛이 싸늘하게 벼려져 마치 숫돌에 갈아놓은 칼날 같았다[時月上弦矣, 垂嶺欲墜, 其光淬削, 如刀發硎].” 칼날 같은 초승달, 그 싸늘함에 등골이 서늘하다. 잠시 뒤 “달이 고개 너머로 떨어지자, 뾰족한 두 끝을 드러내면서 갑자기 시뻘건 불처럼 변했다. 마치 횃불 두 개가 산에서 나오는 듯했다[少焉月益下嶺, 猶露雙尖, 忽變火赤, 如兩炬出山].” 칼날에서 횃불로, 거기다 밤은 더욱 깊어 “북두칠성의 자루 부분은 관문 안쪽으로 반쯤 꽂혔다. 벌레 소리가 사방에서 일어나고 긴 바람이 싸늘하다. 숲과 골짜기도 함께 운다[北斗半揷關中, 而蟲聲四起, 長風肅然, 林谷俱鳴].” 이 음산한 숲에 전쟁의 기억들이 사방에서 출몰한다. “짐승같이 가파른 산과 귀신같이 음산한 봉우리들은 창과 방패를 벌여놓은 듯하고, 두 산 사이에서 쏟아지는 강물은 사납게 울부짖어 철갑으로 무장한 말들이 날뛰며 쇠북을 울리는 듯하다[其獸嶂鬼巘, 如列戟摠干而立, 河瀉兩山間鬪狠, 如鐵駟金鼓也].” 창과 방패, 말발굽과 북소리가 뒤엉키면서 괴괴함이 한층 고조된다.
물론 이게 끝이 아니다. 마지막 한 문장이 아직 남아 있다.
하늘 저편에서 학 울음소리가 대여섯 차례 들려온다. 맑게 울리는 것이 마치 피리소리가 길게 퍼지는 듯한데, 더러는 이것을 거위 소리라고도 했다.
天外有鶴鳴五六聲淸戛, 如笛聲長★口+弱, 或曰: “此天鵞也.”
전쟁터의 광경이 어지럽게 묘사되다가 맑고 투명한 학의 울음소리로 긴 여운을 이끌며 글을 마무리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이 글은 그 명성에 걸맞게 한 글자, 한 문장도 빈틈이 없다. 마치 글자 하나하나가 살아서 꿈틀대는 듯 생생하다. 시종일관 손에 땀을 쥐게 하고, 등골을 서늘하게 하는 이 흡인력의 정체를 대체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지. 나의 내공(!)으로는 그저 불가사의할 따름.
덧붙이자면, 연암은 전쟁의 은유를 즐겨 구사한 인물이다. 앞에서 이미 보았듯, 「소단적치인(騷壇赤幟引)」에서는 글쓰기를 전쟁의 용병술에 비유한 바 있고, 「일야구도하기(一夜九渡河記)」에서도 놀란 파도와 성난 물머리와 우는 여울과 노한 물결에 대해 “휘감아 거꾸러지면서 울부짖는 듯, 포효하는 듯, 고함을 내지르는 듯 사뭇 만리장성을 깨뜨릴 기세다. 1만 대의 전차와 1만 명의 기병, 1만 문의 대포, 1만 개의 전고(戰鼓)[犇衝卷倒, 嘶哮號喊, 常有摧破長城之勢. 戰車萬乘, 戰騎萬隊, 戰砲萬架, 戰鼓萬坐]”로 비유하고 있다. 전쟁의 메타포가 지니는 역동성을 십분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니체가 말했던가? 인간은 ‘은유적 동물’이라고, 니체의 의도는 인간의 말은 ‘원초적으로’ 대상에서 끊임없이 미끄러질 수밖에 없음을 말하고자 함이었다. 그렇다면 수사학이란 언어의 본래적 특질이 가장 빛나는 영역이라고 해야 할 터, 이처럼 연암은 변화무쌍한 중원의 시공간을 가로지르며 ‘은유적 동물’로서의 능력을 맘껏 발휘했던 것이다.
▲ 고북구의 망루
고북구는 천연의 요새다. 망루 위에서 바라보면 사방으로 장성이 뻗어 있다. 불후의 명작 「야출고북구기(夜出古北口記)」가 바로 여기에서 탄생되었다.
예기치 않은 사건 속을 경쾌히 질주하다
정진사ㆍ조주부ㆍ변군ㆍ내원, 그리고 상방 건량판사(乾粮判事)인 조학동 등과 투전판을 벌였다. 시간도 때우고 술값도 벌자는 심산이다. 그들은 내 투전 솜씨가 서툴다면서 판에 끼지 말고 그저 가만히 앉아서 술만 마시란다. 속담에 이른바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으라’는 격. 슬며시 화가 나긴 하나 어쩔 도리가 없다. 그렇지만 옆에 앉아 투전판 구경도 하고 술도 남보다 먼저 먹게 되었으니 그리 나쁜 일만은 아니다.
與鄭進士 周主簿 卞君 來源 趙主簿 學東 上房乾粮判事 賭紙牌以遣閒 且博飮資也 諸君以余手劣 黜之座 但囑安坐飮酒 諺所謂‘觀光但喫餠’也 尤爲忿恨 亦復柰何 坐觀成敗 酒則先酌也 非惡事
벽 저쪽에서 가끔 여인의 말소리가 들려온다. 가냘픈 목청에 교태 섞인 하소연이 마치 제비나 꾀꼬리가 우짖는 소리 같다. 아마 주인집 아가씨겠지. 필시 절세가인일 게야. 이런 생각을 하면서 장난삼아 방 쪽으로 들어가보았다.
時聞間壁婦人語 聲嫩囀嬌愬 燕燕鶯鶯 意謂主家婆娘 必是絶代佳人 及爲歷翫堂室
그런데 쉰 살은 넘어 보이는 부인이 평상에 기대어 문 쪽을 향해 앉아 있었다. 생김새가 볼썽사나운 데다 추하기 짝이 없다. 나를 보더니 인사를 건넨다. “어르신, 안녕하세요?” “주인께서도 복 많이 받으십시오.” 대답을 하면서도 짐짓 머뭇거리며 차림새를 살폈다. 쪽을 찐 머리엔 온통 꽃을 꽂고, 금팔찌 옥귀걸이에 붉은 분을 살짝 발랐다. 검은색의 긴 옷을 걸치고 은단추를 촘촘히 달아서 여몄다. 발에 풀ㆍ꽃ㆍ벌과 나비를 수놓은 신발을 신고 있다. 「도강록(渡江錄)」
一婦人五旬以上年紀 當戶據牀而坐 貌極悍醜 道了“叔叔千福” 余答道“托主人洪福” 余故遲爲 玩其服飾制度 滿髻揷花 金釧寶璫 略施朱粉 身着一領黑色長衣 遍鎖銀紐 足下穿一對靴子 繡得草花蜂蝶
『열하일기』와 관련해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부분이다. 투전판에서 ‘왕따’를 당하는 모습도 흥미롭지만, 가날픈 여인의 목소리에 혹해서 은근슬쩍 접근했다가 완전히 좌절(?)하고 마는 과정은 마치 ‘얄개 시리즈’를 연상시킨다. ‘쉰’도 넘어 보이는 여인네와 주고받는 어색한 인사말하며, 그 와중에도 곁눈으로 머리에서 발끝까지 샅샅이 훑어보는 치밀한(?) 관찰력하며, 연암의 모습은 여지없이 여드름 덕지덕지한 사춘기 ‘얄개’의 그것이다.
이 장면은 스토리가 그 다음날로 이어진다. 다음날 “하루가 1년이나 되는 듯 지루하다. 저녁 무렵이 되자 더위가 더욱 기승을 부리는 데다 잠까지 쏟아진다. 옆방에서는 투전판이 벌어져 한창 떠들썩하다[日長如年 向夕尤暑 不堪昏睡 聞傍炕方會紙牌 叫呶爭鬨].” 전날 ‘왕따’를 당했던 연암은 한걸음에 달려가 자리에 끼어 연거푸 다섯 번을 이겨 백여 닢을 따 술을 사서 실컷 마셨다. 그 전날의 수치를 깨끗이 씻은 것이다. 의기양양한 연암이 “이 정도면 항복이지[今復不服否]?”하며 으스대니, 자존심이 상한 조주부와 변주부가 “요행으로 이긴 거죠[偶然耳]”라고 대꾸한다. 서로 크게 웃었다. 하지만 변군과 내원이 직성이 풀리지 않았음인지 다시 한판 하자고 조르나, 연암은 발을 뺀다. 특유의 고상한 문자로 여운을 남기며, “뜻을 얻은 곳에는 두 번 가지 않는 법, 만족함을 알면 위태롭지 않다네[得意之地勿再往 知足不殆]!”
여행이 주는 재미는 이처럼 일상을 탈출하여 놀이에 빠질 수 있다는 사실에 있다. 특히 연암처럼 비공식적 동행자일 경우, 임무수행의 의무로부터 벗어나 다양한 장소, 상이한 그룹에 끼여들 기회가 적지 않다. 일상의 시공간적 리듬을 벗어난 데서 오는 긴장과 이완, 이질적인 습속들 사이의 충돌 등 예기치 않은 사건들의 발생도 바로 그때 일어난다. 연암은 이 ‘자유의 공간’ 위를 경쾌하게 질주한다.
벽돌과 돌과 잠
그는 타고난 장난꾸러기다. 사람들 사이의 장벽을 터주면서 동시에 자신 또한 기꺼이 그 사이를 가로지르며 사건들마다 ‘유쾌한 악센트’를 부여하는 악동!
새벽에 길을 떠나면서 보니 지는 달이 땅 위에서 몇 자 안 되는 곳에 걸려 있다. 푸르고 맑은 기운이 감도는데, 모양은 아주 둥그렇다. 계수나무 그림자가 짙게 드리웠고, 옥토끼와 은두꺼비가 가까이서 어루만져질 듯하다. 항아의 고운 비단 옷자락에 살포시 흰 살결이 내비친다. 나는 정진사를 돌아보며 말했다. “참 이상도 하이. 오늘은 해가 서쪽에서 뜨네그려.” 정진사는 처음엔 달인 줄도 모르고 나오는 대로 응수한다. “늘상 이른 새벽에 여관을 떠나다 보니 동서남북을 분간하기가 정말 어렵구만요.” 일행이 모두들 웃음을 터뜨렸다. 「일신수필(馹汛隨筆)」
曉發 落月去地數尺 蒼凉完完 桂影扶踈 玉兎銀蟾 如可撫弄 而姮娥氷紈 旖旎映膚 余顧鄭曰 恠事 今日自西而昇 鄭初未覺其月也 隨答曰 每自宿店初發 實難辨東西南北也 諸人皆大笑
달이 하도 밝아 해로 착각한 것이다. 설악산에 갔을 때 정말 이런 상황을 직접 겪은 적이 있다. 한계령에서 7시간 정도 능선을 타고 중청봉에 이르기 직전 일몰이 시작되었다. 한참 일몰이 연출하는 장엄한 분위기에 젖었다 다시 오르기 시작했는데, 중청산장에 도달하는 순간, 월출이 시작된 것이다. 그때 일행 중 눈치없는 누군가 “어? 해가 또 뜨네?”하는 바람에 일제히 배꼽을 잡았다. 그날이 보름이었기 때문에 달이 정말 해처럼 밝았던 것이다. 때를 놓칠세라, 나는 『열하일기』에도 그 비슷한 에피소드가 있다며 나의 ‘고전교양’을 과시하는 쾌거(?)를 올렸다. 연암 같으면 그 순간에 기상천외의 농담으로 대청봉까지 웃음이 물결치게 했을 테지만.
물론 그 자신이 이런 ‘농담따먹기’에 당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한낮 불볕이 내리쬐는 탓에 숨이 막혀 더 오래 머물 수가 없어서 결국 길을 떠났다. 정진사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다가, 정진사에게 중국이 성을 쌓는 방식이 어떻더냐고 물었다. 정진사가 대답한다. “벽돌이 돌만은 못하겠지요.” “자네가 몰라서 하는 말일세. 우리나라는 성을 쌓을 때 벽돌을 쓰지 않고 돌을 쓰는데, 이건 좋은 계책이 아니야. 일반적으로 벽돌이란(길게 이어지는 벽돌론)” (중략)
日方午天 火傘下曝 悶塞不可久居 遂行 與鄭進士或先或後 余謂鄭曰 “城制何如” 鄭曰 “甓不如石也” 余曰 “君不知也 我國城制不甎而石 非計也 夫甎
내가 예전에 박제가(朴齊家)와 성에 대해서 이야기한 적이 있었거든. 그때 어떤 사람이 벽돌이 “단단하다 한들 돌만 하겠어요?”하자 박제가가 버럭 소리를 지르면서, “벽돌이 돌보다 낫다는 게 어찌 벽돌 하나에 돌 하나를 비교하는 것이겠소?”하는 거야. 정말 맞는 말 아닌가? 벽돌 한 장의 단단함이야 돌만은 못하겠지만, 돌 한 개의 단단함이 벽돌 만 개의 단단함에는 못 당하지. 그렇다면 벽돌과 돌 중 어느 편이 더 이롭고 편리한지 쉽게 구별할 수 있지 않은가? 「도강록(渡江錄)」
余嘗與次修論城制 或曰 ‘甓之堅剛安能當石’ 次修大聲曰 ‘甓之勝於石 豈較一甓一石之謂哉’ 此可爲鐵論 大約石灰不能貼石 則用灰彌多 而彌自皸坼 背石卷起 故石常各自一石 而附土爲固而已 甎得灰縫如魚膘之合木 鵬砂之續金 萬甓凝合 膠成一城 故一甎之堅 誠不如石 而一石之堅 又不及萬甎之膠 此其甓與石之利害便否 所以易辨也
대충 짐작하겠지만, 정진사도 장복이와 창대 못지않게 앞뒤가 막힌 인물이다. 그런데 연암은 그런 인물을 대상으로 벽돌예찬론을 장황하게 펼치고 있는 것이다. 독백보다는 낫다고 여겼으리라. 하지만 안 그래도 날씨는 무덥고 갈 길은 먼데 연암의 말이 귀에 들어올 턱이 없다. 당연히 정진사는 잠든 지 오래다. 얼마나 깊이 잠들었는지 “몸이 꼬부라져서 말등에서 떨어질 지경이었다[鄭於馬上傴僂欲墮].”
내가 부채로 그의 옆구리를 꾹 찌르며 큰 소리로 야단을 쳤다. “어른이 말씀하시는데 어째서 잠만 자고 듣질 않는 건가[長者爲語 何睡不聽也]!” 정진사가 웃으며 말한다. “벌써 다 들었지요. 벽돌은 돌만 못하고, 돌은 잠만 못하다는 거 아닙니까[吾已盡聽之 甓不如石 石不如睡也]?” “예끼! 이 사람아!” 나는 화가 나서 때리는 시늉을 하고는 함께 한바탕 크게 웃었다.
이게 그 유명한 벽돌과 돌, 잠의 에피소드다. “벽돌은 돌만 못하고, 돌은 잠만 못하다[甓不如石 石不如睡也].”는 정진사의 ‘봉창 두드리는 소리’는 『열하일기」를 대표하는 명언(^^) 중의 하나다. 앞에서 장황하게 이어지는 벽돌론은 그 자체로 한편의 중후한 에세이지만, 한참 논변이 무르익는 와중에 느닷없이 정진사의 잠꼬대가 이어지면서 기묘한 변박을 만들어낸다. 이런 식의 패턴은 『열하일기』만이 구사할 수 있는 독특한 화음이다. 왜냐하면 누구도 이런 식의 언표배치를 상상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진지한 글쓰기와 유쾌한 콩트가 엄격하게 구획되어 있는 지금도 그 점에선 크게 다르지 않다.
호모 루덴스(Homo Rudens)
그러니 이런 악동의 눈에 길 위에서 마주치는 모든 사건이 유쾌한 이야깃거리가 된다. 한번은 길에서 소낙비를 만나, 비를 피하느라고 점포에 들러 차대접을 받고 있었다. 점포의 앞마루에 여인네들 다섯이 부채에 붉은 물감을 들여 처마 밑에 말리고 있는데 별안간 말몰이꾼 하나가 알몸으로 뛰어들었다. “머리에 다 해어진 벙거지를 쓰고, 허리 아래에 겨우 한 토막 헝겊을 가릴 뿐이어서 그 꼴은 사람도 아니요, 귀신도 아니고 그야말로 흉측했다.” 마루에 있던 여인들이 왁자그르 웃고 지껄이다가 그 꼴을 보고는 모두 일거리를 버리고 도망쳐버리고 말았다. 주인이 화가 치밀어 팔을 걷어붙이고는 뺨을 한 대 때렸다. 말몰이꾼의 말인즉슨, “말이 허기가 져서 보리찌꺼기를 사러 왔는데 당신은 왜 공연히 사람을 치오” 한다. 주인은, “이 녀석, 예의도 모르는 녀석. 어찌 알몸뚱이로 당돌하게 구는 거야” 하자, 말몰이꾼이 문 밖으로 뛰어나가버린다. 주인은 분이 풀리지 않아 비를 무릅쓰고 뒤를 쫓아 나가자, 말몰이꾼도 ‘열받아서’ 주인의 가슴을 후려친다. 주인은 그만 흙탕 속으로 나가떨어지고, 온몸이 진투성이가 되어 비틀거리며 돌아온다. 분풀이할 곳을 찾고 있던 차 말몰이꾼과 동행인 연암과 눈이 마주쳤다. 사태를 계속 주시하고 있던 연암은 흡친 위기감을 느낀다. 여차하면 한 대 맞을 수도 있는 상황인 것이다. 연암의 전략은?
먼저, 넌지시 눈을 내리뜨고 얼굴빛을 가다듬어 늠름히 범하지 못할 기세를 보인다. 일단 분위기로 기선을 제압하겠다는 심사다. 그 다음 ‘얼굴빛을 부드럽게’ 하면서 정중하게 사과한다. “하인이 매우 무례해서 이런 일을 저질렀습니다만 다시 마음에 두지 말으시지요.” 우아하게 감동시킨다는 속셈이다. 과연 작전이 적중했다. 주인이 곧 노염을 풀고 웃으며 “도리어 부끄럽습니다. 선생, 다신 그 말씀 마십시다” 한다. 위기탈출! 순발력과 의뭉함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또 한번은 동관역에 머무를 때 얼치기 점쟁이와 만난 적이 있다. 복채나 건지려고 연암에게 접근했는데, 연암은 사주나 관상 같은 걸 허망하다고 여기는 터라 사주를 내어주지 않았다. ‘썰렁한’ 대화를 주고받다 점쟁이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방 안에 역대 유명한 인물들의 사주를 적어놓은 책자가 있는 걸 보고 연암이 열심히 베끼기 시작했다. 도중에 돌아와 그걸 본 점쟁이는 종이를 빼앗아 찢으면서, “천기를 누설하면 안 돼”하며 노발대발이다. 연암은 한 번 껄껄 웃고 일어나 사관으로 돌아왔다. 여기까지는 그냥 평범한 이야기다. 그런데 대미(?)를 장식하는 마지막 문장이 이어진다. “손에는 오히려 찢긴 나머지 종이쪽이 있었다.” 그러니까 점쟁이가 종이를 찢을 때, 연암도 안 빼앗기려고 힘깨나 쓴 것이다. 천기누설이라는 점쟁이의 말도 어이없지만, 찢어진 종이를 챙겨오는 연암의 행동은 또 얼마나 황당한지!
솔직히 말하면, 이런 이야기는 굳이 기록될 필요가 없다. 아마 이전에 연행을 다녀간 사대부들도 이 비슷하게 적잖은 트러블을 경험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언표체계에는 이런 식의 삽화가 들어 설 자리가 없다. 경험과 문자 사이의 엄청난 괴리. 그러나 연암의 연행록에는 이런 사건들이 어엿하게 중심을 차지하고 있다. 그는 진심으로 이런 농담과 해프닝들을 즐겼고, 게다가 한술 더 떠 가감ㆍ첨삭ㆍ윤색까지 시도했다. 따라서 누군가 『열하일기』를 이렇게 규정한다 해도 지나친 과장이라고 탓할 수는 없으리라. ‘호모 루덴스(Homo Rudens, 놀이하는 인간)가 펼치는 개그의 향연’이라고.
이용(利用)ㆍ후생(厚生)ㆍ정덕(正德)
‘이용(利用)’이 있은 뒤에야 후생(厚生)이 될 것이요, 후생이 된 뒤에야 정덕(正德)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이롭게 사용할 수 없는데도 삶을 도탑게 할 수 있는 건 세상에 드물다. 그리고 생활이 넉넉지 못하다면 어찌 덕을 바르게 할 수 있겠는가. 「도강록(渡江錄)」
利用然後可以厚生 厚生然後正其德矣 不能利其用而能厚其生 鮮矣 生旣不足以自厚 則亦惡能正其德乎
이게 그 유명한 ‘이용후생’이라는 테제가 담긴 문장이다. 연암을 실학자 중에서도 ‘이용후생파’라고 분류하는 건 이런 명제들에 근거한다. 근데 어째서 ‘정덕’이라는 항은 생략되었을까? 덕을 바로 잡는다는 게 너무 추상적이어서 ‘헛소리’처럼 느껴진 건가? 아니면 너무 지당한 말이라 ‘하나마나’ 하다고 간주한 탓일까? 깊은 논의는 뒤로 미루고, 일단 여기서는 이용후생이라는 명제 뒤에 ‘정덕’이라는 항목이 있었음을 새겨두는 정도로 그치자.
화려한 수사학자이면서 타고난 ‘유머본능’, 그런데 그러한 재기발랄함의 베이스에는 거장의 도도한 웅변술이 자리잡고 있다. ‘분출하는 수사’와 ‘종횡무진 개그’의 앞과 뒤, 혹은 그 바로 인접한 곳에는 이용후생을 설파하는 거장의 중후한 오케스트라가 울려퍼진다.
그 관현악의 연주도 말할 수 없이 다채롭다. 섬세한가 하면 화려하고, 장중한 스펙터클이 펼쳐지는가 싶으면 돌연 감미로운 선율이 뒤를 잇는다. 물론 이 모든 것은 사사로운 분별을 떠난 탁월한 통찰력에 힘입고 있다. 그는 다른 이들이 돌아보지 않는 사물들을 치밀하게 살펴보는 능력을 타고났다.
번화하고 부유함이 비록 연경이라 한들 이보다 더할까 싶었다. 중국이 이처럼 번화하다는 건 참으로 뜻밖이다. 좌우로 늘어선 점방들은 휘황찬란하다. 아로새긴 창문, 비단으로 잘 꾸민 문, 그림을 그려 넣은 기둥, 붉게 칠한 난간, 푸른빛 주련(柱聯), 황금빛 현판 등. 「도강록(渡江錄)」
繁華富麗 雖到皇京 想不更加 不意中國之若是其盛也 左右市廛 連互輝耀 皆彫牕綺戶 畵棟朱欄 碧榜金扁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가? 그들은 어떻게 살고 있는가? —— 이것이 그가 중화문명을 보는 유일한 잣대다. 소중화(小中華) 주의에 찌든 사대부들이 오로지 오랑캐의 야만을 발견한 곳에서 문명의 풍요로움을
발견할 수 있는 힘이기도 하다. ‘있는 그대로’ 보는 것, 그것이야말로 인식의 출발이자 토대였던 것이다. 그런 연암의 눈에 가장 눈부시게 다가온 것은 화려한 궁성이나 호화찬란한 기념비가 아니었다. 구체적인 일상을 끌어가는 벽돌과 수레, 가마 등이었다.
그의 벽돌예찬은 가히 못 말릴 수준이다.
이곳에서는 벽돌만을 사용해서 집을 짓는다. 벽돌의 길이는 한 자, 넓이는 다섯 치. 벽돌 두 개를 나란히 놓으면 두께 두 치짜리 정방형이 된다. 네모난 틀에서 찍어 낸 벽돌이지만 한쪽 귀라도 떨어지거나, 모가 이지러지거나, 바탕이 뒤틀린 것은 사용하지 않는다. 만일 벽돌 한 개라도 이런 것을 사용하면 집 전체가 틀어진다. 그러므로 같은 틀로 찍어냈지만 오히려 어긋난 놈이 있을까 걱정하여 반드시 굽자[曲尺]로 재고, 자귀나무를 깎아 다듬는 연장으로 깎고, 돌로 갈아낸다. 이토록 애써 가지런히 만드니 수많은 벽돌들이 그림자처럼 똑같다.
爲室屋 專靠於甓 甓者甎也 長一尺 廣五寸 比兩甎則正方 厚二寸 一匡搨成 忌角缺 忌楞刓 忌軆翻 一甎犯忌 則全屋之功左矣 是故 旣一匡印搨 而猶患參差 必以曲尺見矩 斤削礪磨 務令匀齊 萬甎一影
벽돌을 쌓는 방법은 한 개는 세로, 한 개는 가로로 놓아서 저절로 감(坎)ㆍ이(離)와 같은 괘 모양이 만들어지게 하는 것이다. 그 틈서리에는 석회를 종잇장처럼 얇게 발라 붙인다. 벽돌이 겨우 붙을 정도라서 그 흔적이 실밥처럼 가늘다. 회를 이길 때는 굵은 모래를 섞지도 않고 진흙과 섞지도 않는다. 모래가 너무 굵으면 잘 붙지 않고, 흙이 너무 차지면 쉽게 터진다. 그래서 반드시 곱고 보드라운 검은 흙을 회와 섞는데, 그렇게 하면 그 빛깔이 거무스름하여 마치 새로 구워 놓은 것 같다.
其築法 一縱一橫 自成坎離 隔以石灰 其薄如紙 僅取膠貼 縫痕如線 其和灰之法 不雜麤沙 亦忌黏土 沙太麤則不貼 土過黏則易坼 故必取黑土之細膩者 和灰同泥 其色黛黧 如新燔之瓦
벽돌들은 일반적으로 너무 차지거나 버석거리지 않으며 빛깔도 부드럽다. 거기다가 어저귀 따위의 풀을 터럭처럼 가늘게 썰어서 섞는데, 이는 우리나라에서 초벽하는 흙에 말똥을 섞는 것과 같은 이치다. 질겨서 터지지 않도록 하려는 것이다. 또 동백기름을 넣어서 젖처럼 번들거리고 매끄럽게 하여 떨어지거나 갈라지는 걸 막으려는 것과도 같은 이치다. 「도강록(渡江錄)」
葢取其性之不黏不沙 而又取其色質純如也 又雜以檾絲 細剉如毛 如我東圬土 用馬矢同泥 欲其靭而無龜 又調以桐油濃滑如乳 欲其膠而無罅
이런 글을 읽을 때마다 나는 좀 당혹스럽다. 벽돌을 직접 찍어내고, 집을 지어본 사람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이다지도 세밀할 수가 있단 말인가. 이것이 연암의 천재성에서 나오는 것인지, 아니면 앎의 배치에 관한 시대적 차이에서 기인하는 것인지는 판단할 길이 없지만, 어쨌든 연암의 지적 체계와 우리들의 그것 사이에 엄청난 심연이 있는 것만은 틀림없다.
기와나 온돌법에 대한 논변도 마찬가지다. 거기서도 고도의 전문적 지식과 장인적 숙련성이 동시에 느껴지는 분석이 장황하게 이어진다. 연암이 이렇게 주거환경에 집착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조선의 여건이 너무도 열악하기 때문이다. 그는 생각한다. “우리나라에서는 가난한 집안에 글 읽기를 좋아하는 수많은 형제들이 오뉴월에도 코끝에 항상 고드름이 달릴 지경이지. 이 방식을 배워 한겨울 그 고생을 덜면 어떨까[吾東家貧 好讀書 百千兄弟等鼻端 六月恒垂晶珠 願究此法 以免三冬之苦]?”라고.
그가 보기에 조선의 온돌제도는 결함투성이다. “우리나라 온돌에는 여섯 가지 문제점이 있는데 아무도 이걸 말하는 사람이 없단 말이야. 내 한번 얘기해볼 테니 떠들지 말고 조용히 들어보게나.” 마치 판소리 광대가 ‘허두가(虛頭歌)’를 할 때처럼 구수하다. 이어지는 논변도 운문처럼 매끄럽다.
진흙을 이겨서 귓돌을 쌓고 그 위에 돌을 얹어서 구들을 만들지. 그 돌의 크기나 두께가 애초에 가지런하지 않으니 조약돌로 네 귀퉁이를 괴어서 뒤뚱거리지 않게 할 수밖에 없지. 그렇지만 불에 달궈지면 돌이 깨지고, 발랐던 흙이 마르면 늘상 부스러지네, 그게 첫 번째 문제점이야.
泥築爲塍 架石爲堗 石之大小厚薄 本自不齊 必疊小礫 以支四角 禁其躄蹩 而石焦土乾 常患頹落 一失也
구들돌 표면이 울퉁불퉁해서 움푹한 데는 흙으로 메워서 평평하게 하니, 불을 때도 골고루 따뜻하지 못한 게 두 번째 문제점이야.
石面凹缺處 補以厚土 塗泥取平 故炊不遍溫 二失也
불고래가 높은 데다 널찍해서 불길이 서로 맞물리지 못하는 게 세 번째 문제점이지.
火溝高濶 焰不相接 三失也
또, 벽이 부실하고 얇아서 툭하면 틈이 생기지 않나? 그 틈으로 바람이 새고 불이 밖으로 내쳐서 연기가 방 안에 가득하게 되는 게 네 번째 문제점이야.
墻壁踈薄 常苦有隙 風透火逆 漏烟滿室 四失也
불목이 목구멍처럼 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불길이 안으로 빨려 들어가
지 않고 땔감 끝에서만 불이 타오르는 게 다섯 번째 문제점이네.
火項之下 不爲遞喉 火不遠踰 盤旋薪頭 五失也
또 방을 말리려면 땔감 백단은 때야 하는 데다 그 때문에 열흘 안에는 입주를 못하니, 그것이 여섯 번째 문제점일세.
其乾爆之功 必費薪百束 一旬之內 猝難入處 六失也
그에 반해, 중국 온돌의 구조를 보게나. 자네와 함께 벽돌 수십 개만 깔아 놓으면, 웃고 떠드는 사이에 벌써 몇 칸 온돌이 만들어져서 그 위에 누워 잘 수도 있을 걸세. 어떤가? 「도강록(渡江錄)」
何如與君共鋪數十甎 談笑之間 已造數間溫堗 寢臥乎其上耶
‘온돌타령’이라고 이름붙여도 손색이 없는 장면이다. 듣고 있노라면 심오한 통찰에 감탄할뿐더러, 리드미컬하게 주워섬기는 말솜씨에 또 넋을 뺏긴다. 참, ‘온돌이 기가 막혀’.
▲ 산해관(山海關)의 벽
연암은 벽돌을 그 나라 문명의 수준을 재는 한 척도로 삼았다. 물론 산해관은 진 나라 때부터 지어진 것이기 때문에 청나라 문명의 수준을 보여준다고 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이런 정교함과 치밀함이 면면히 이어져 청나라 문명의 토대를 이루었던바, 연암의 감탄과 부러움은 결코 과장이 아니었던 것이다.
수레와 의학을 통한 이용후생
그의 관심은 이렇게 벽돌, 가마, 온돌에서 시작하여 수레, 말로 이동한다. 수레와 말은 공간적 한계를 가로지를 수 있는 이동수단이기 때문이다. “대개, 수레는 천리로 이룩되어서 땅 위에 행하는 것이며, 물을 다니는 배요, 움직일 수 있는 방이다. 나라의 쓰임에 수레보다 더한 것이 없으니” “시급히 연구하지 않을 수 없는 문제이다.”
조선에도 수레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가 보기에 조선의 수레는 바퀴가 온전히 둥글지 못하고 바퀴자국이 틀에 들지 않으니, 이는 수레 없음과 마찬가지다. 그런데도 사대부들은 “우리나라는 길이 험하여 수레를 쓸 수 없다”고 한다. 언어도단! 수레를 쓰지 않으니 길이 닦이지 않는 것인데, 사태를 거꾸로 왜곡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결론은 “사방이 겨우 몇 천 리밖에 안 되는 나라에서 인민의 살림살이가 이다지 가난함은, 한마디로 국내에 수레가 다니지 못하는 까닭”이다. 물산과 자원이 서로 통하지 않고 막혀 있으니, 물량이 달리면 융통할 길이 도무지 없는 것이다.
연암의 이용후생은 대략 이런 정도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구체적 일상에 관한 연암의 관심은 그 스펙트럼이 꽤나 드넓은 편이다. 의학에 관한 것도 그 좋은 예가 된다.
「구외이문(口外異聞)」에는 흥미롭게도 『동의보감』에 관한 진술이 나온다. “우리나라의 책으로 중국에 들어가 다시 출판된 경우는 매우 드물다. 오직 『동의보감』 25권만이 성행을 하였는데, 판본이 매우 정밀하고 오묘하다[我東書籍之八梓於中國者 甚罕 獨東醫寶鑑二十五卷盛行 板本精妙].”하고, 그 다음에 능어(凌魚)라는 청나라 학자가 쓴 서문이 실려 있다. 능어에 따르면, 『동의보감』의 체계는 “옛날 사람이 이루어 놓은 법을 좇되 능히 신령스럽게 밝히고, 두 나라의 부족한 부분을 보충하여 사람 몸에 온화하고 따뜻한 빛이 퍼지게 하였다[循古人之成法 而能神而明之 補缺憾於兩間 播煕陽於四大].” 동아시아 의학사에서 『동의보감』이 차지하는 위상을 가늠하기에 충분한 언급이다.
이어지는 연암의 말은 좀 서글프다. “우리 집안에는 훌륭한 의서(醫書)가 없어서 매양 병이 나는 사람이 있으면 사방 이웃에서 빌려서 보았는데, 지금 이 『동의보감』 판본을 보자 구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그러나 책값 문은(紋銀) 닷 냥을 마련키 어려워, 못내 아쉽고 섭섭하지만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余家無善本 每有憂病則四借鄰閈 今覽此本 甚欲買取 而難辦五兩紋銀 齎悵而歸].” 조선에서 나온 책인데 정작조선의 선비는 돈이 없어서 구입하지 못하는 아이러니!
조선시대는 의사도, 병원도, 약도 부족한 시대였다. 그래서 역설적이게도 모두가 스스로의 몸을 조절 관리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흥미롭게도 여행하는 동안 내내 단골로 출연하는 물건이 하나 있다. 바로 ‘청심환’이다. 뭔가를 부탁하거나 호의를 표시할 때, 청심환을 주면 ‘효과만점’이다. 이쪽에서 주지 않으면, 오히려 중국인들 쪽에서 은근히(혹은 협박조로) 요구하기도 한다. 열하에서 돌아오는 길에 한 관내에 들렀을 땐, 중들이 청심환을 얻기 위해 연암을 도둑으로 몰기도 했을 정도다. 이 정도면 화폐이자 증여물로서 손색이 없다. 대체 중국인들은 왜 청심환에 그토록 열광하는 걸까? 이유인즉, 중국에도 청심환이 없는 건 아니지만 짝퉁이 수두룩한 데 비해, 당시 조선은 국가가 청심환 조제를 독점하고 있었기 때문에 조선 청심환이야말로 ‘진짜배기’였다는 것.
아울러 연암이 자가요법으로 질병을 다스리는 대목들도 흥미롭다. 예컨대, 「일신수필(馹汛隨筆)」의 한 대목에선 더위를 잔뜩 먹은 날, “잠자리에 들 때 큰 마늘을 갈아 소주에 타서 마셨더니 그제야 배가 가라앉아 편안히 잘 수 있었다[臨臥時 磨大蒜頭 燒酒和服 腹始平穩睡].” 병의 치료는 전적으로 의사와 약물에만 의존하는 지금의 우리와는 아주 다른 일상의 메커니즘이 있었던 것이다. 의학 지식에 대한 남다른 애착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열하에 있을 때, 연암은 윤가전 등 중국 선비들에게 의서들을 추천해달라고 부탁한다. 그러나 사정이 여의치 못해 의서를 구하지 못하고, 다른 책들에 들어 있는 의학 부분을 초록하여 「금료소초(金蓼小抄)」라 이름 붙였다. “내가 살고 있는 연암협 산중에는 의학서적이 없을 뿐 아니라 마땅한 약재도 없다. 이질이나 학질에 걸려도 대체로 어림짐작으로 치료를 하였는데, 때때로 우연히 맞아떨어지는 경우도 있었기에, 지금 그 아래에 부록으로 함께 기록하여 보충함으로써 산속에 사는 경험 처방으로 삼는다[余山中無醫方 倂無藥料 凡遇痢瘧 率以臆治 而亦時偶中 則今倂錄于下以補之 爲山居經驗方].”는 것이 그의 명분이었다.
내용들이 아주 재미있다. 예컨대 “산속에서 길을 잃을 염려가 있을 때 향충 하나를 손에 쥐고 가면[山行慮迷 握嚮虫一枚于手中則不迷矣]” 된다거나, “비둘기를 방에 많이 두고 길러, 맑은 새벽에 어린아이로 하여금 방문을 열고 비둘기를 날려 보내게 해 비둘기의 기운을 얼굴에 쪼이면 감질(疳疾)의 기운이 없어진다[淸晨令兒開房放鴿 其氣著面則無疳氣]”거나, “양기를 돋우는 데는 가을잠자리를 잡아 머리와 다리, 날개를 떼어버리고 아주 곱게 갈아서 쌀뜨물에 반죽하여 환을 만들어 먹는다. 세 홉을 먹으면 자식을 생산할 수 있고, 한 되를 먹으면 노인도 젊은 여자와 사랑을 나눌 수 있다[壯陽方 取秋蜻蜓去頭翅足 硏極細 泔水和丸 三合 能生子 一升 老人能媚少姬]”거나, 기타 등등, 지금의 시선으로 보면 황당해 보이지만, 인간의 신체를 자연 및 우주와의 연속성 위에서 파악하고 있는 중세의학의 패러다임을 엿볼 수 있는 소중한 자료이다. 아울러 그의 이용후생이 얼마나 견고한 일상의 지반 위에서 구축되고 있는지를 확인하기에도 부족함이 없다.
▲ 노새와 수레
중국의 거리에는 탈것들이 정말 다양하다. 자전거를 비롯하여, 인력거, 삼륜거, 수레 등등. 특히 노새와 당나귀가 끄는 수레들이 어엿하게 도로 한가운데를 가로지르고 있다. 그래서 참, 재미있다. 그에 비하면 우리나라의 도로는 너무나 획일적이다.
부와 권력에 눈 먼 이들에게
다시 서두의 논의로 돌아가면, 그에게 있어 이용과 후생은 정덕을 위한 교량이다. 정덕(正德)이란 무엇인가? 한마디로 그건 삶의 지혜이다. 이것이 뒷받침되지 않는 부와 편리함이란 무의미하다. 그런 점에서 연암이 추구한 문명론을 ‘근대주의적’ 관점에서 해석하는 것은 온당하지 않다. 오히려 그의 문명론은 물질과 부를 향해 맹목적으로 달려가는 근대적 패러다임과는 전혀 다른 방향을 취한다. 따라서 이용후생학자로서 연암을 다룰 때, 반드시 그가 ‘삶의 지혜’를 설파하는 목소리에도 귀를 기울여야 한다.
「장대기(將臺記)」와 「황금대기(黃金臺記)」가 좋은 텍스트다. “만리장성을 보지 않고서는 중국이 얼마나 큰지 모를 것이고, 산해관을 보지 않고는 중국의 제도를 알지 못할 것이며, 관 밖의 장대를 보지 않고는 장수의 위엄을 알기 어려울 것이다[不見萬里長城 不識中國之大 不見山海關 不識中國之制度 不見關外將臺 不識將帥之威尊矣].” 「장대기(將臺記)」의 서두이다. 장대가 얼마나 높은 탑인지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연암은 일행들과 꼭대기에 올랐다. 사방을 두루 살펴보니 “장성은 북으로 내달리고 창해는 남으로 흐르고, 동쪽으론 큰 벌판이 펼쳐 있으며 서쪽으로는 산해관 안이 내려다 보였다. 오, 이 대(臺)만큼 사방을 조망하기 좋은 곳도 다시 없으리라[長城北走 滄溟南盈 東臨大野 西瞰關裏 周覽之雄 無如此臺]”. 그러나 막상 내려오려하니 문득 사람들이 ‘고소공포증’에 기가 질린다. “벽돌 쌓은 층계가 높고 가팔라 내려다보기만 해도 다리가 후들후들 떨릴 지경이다. 하인들이 부축하려고 해도 몸을 돌릴 곳조차 없어 몹시 허둥지둥하였다[甎級岌嶪 俯視莫不戰掉 下隷扶擁 無回旋之地 勢甚良貝].” 연암은 “서쪽 층계로 먼저 간신히 내려와서 대 위에 있는 사람들을 쳐다보니, 모두 벌벌 떨며 어쩔 줄 모르고 있었다[余從西級下立於地 仰視臺上諸人 皆兢兢莫知所爲].”
올라갈 땐 멀쩡하다 갑자기 왜? 연암의 설명은 이렇다. “올라갈 때엔 앞만 보고 층계 하나하나를 밟고 오르기 때문에 위험하다는 걸 몰랐는데, 내려오려고 눈을 들어 아래를 굽어보니 현기증이 절로 일어난다. 그 허물은 다름 아닌 눈에 있는 것이다[蓋上臺時 拾級而登 故不知其危 欲還下 則一擧目而臨不測 所以生眩 其崇在目也].” 눈, 곧 시각이 분별심을 일으키고, 그 순간 두려움에 그달리게 된다. 그가 보기에 인생살이 또한 이와 다르지 않다.
벼슬살이도 이와 같아서, 위로 올라갈 때엔 한 계단 반 계단이라도 남에게 뒤질세라 더러는 남의 등을 떠밀며 앞을 다투기도 한다. 그러다가 마침내 높은 자리에 이르면 그제야 두려운 마음을 갖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땐 외롭고 위태로워서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고, 뒤로 물러서자니 천 길 낭떠러지라 더위잡고 내려오려고 해도 잘 되지 않는 법이다. 이는 오랜 세월 두루 미치는 이치다.
仕宦者 亦若是也 方其推遷也 一階半級 恐後於人 或擠排爭先 及致身崇高 懾心孤危 進無一步 退有千仞 望絶攀援 欲下不能 千古皆然
맞다! 이 심오한 인생철학은 시대를 가로질러 되새겨야 할 교훈이다. 특히 부와 명성을 향해 질주하는 눈먼 현대인들에겐 더더욱.
‘황금대(黃金臺)’는 “조양문(朝陽門)을 나서 못을 따라 남쪽 방향으로 가면 두어 길 되는 허물어진 둔덕[出朝陽門 循壕而南 有數丈頹阜]”을 말한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연나라 소왕이 여기에다 궁전을 지은 뒤, 축대 위에 천금을 쌓아놓고는 천하의 어진 선비들을 맞이하여 당시 최고의 강대국인 제나라에 맞서 원수를 갚고자 하였다[燕昭王築宮 置千金于臺上 招延天下之士 以報强齊].” 연암은 이 유서깊은 장소에서 황금에 대한 인간의 탐욕, 그 참혹한 유래를 곰곰이 되짚어본다. 중간에 삽입된 세 도적 이야기는 일종의 ‘엽기드라마’다. 무덤 하나를 파서 금을 도적질했는데, 서로 욕심을 내다 모두 죽어버렸다. 사연인즉, 한 명이 독약이 든 술을 사왔는데 나머지 두 명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둘은 술을 먹다 죽었다는 것이다. “이 금은 반드시 길가에 굴러다니다가 또 다시 누군가의 손에 들어갔을 것이다. 우연히 그 금을 얻은 자는 가만히 하늘에 감사를 드렸으리라. 그렇지만 이 금이 남의 무덤에서 훔친 물건인지, 독약을 먹은 자들의 유물인지, 또 이 금 때문에 몇 천 몇 백명이 독살되었는지는 감히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是金也必將宛轉于道左 而必將有人拾而得之也 其拾而得之者 亦必將默謝于天 而殊不識是金者 乃塚中之發而鴆毒之餘 而由前由後 又未知毒殺幾千百人].”
문득 이 대목에서 나는 ‘자본은 머리에서 발끝까지 피를 묻히고 출현한다’는 맑스의 전언이 떠올랐다. 연암이 보기에도, 돈이란 원초적으로 피투성이를 한 유령의 화신이었던 것이다. 부에 대한 연암의 메시지는 이렇다.
원컨대, 천하의 인사들은 돈이 있다 하여 꼭 기뻐할 일도 아니요, 없다고 하여 슬퍼할 일도 아니다. 오히려 아무런 까닭 없이 갑자기 돈이 굴러올 때는 천둥처럼 두려워하고 귀신처럼 무서워하며, 풀섶에서 뱀을 만난 듯 오싹하며 뒤로 물러서야 할 터이다.
我願天下之人 有之不必喜 無之不必悲 無故而忽然至前 驚若雷霆 嚴若鬼神 行遇草蛇 未有不髮竦而卻立者也
나는 이 대목을 읽을 때마다 복권이나 증권으로 대박을 터뜨린 사람들이 떠오른다. 사람들은 그들의 행운을 부러워하기 바쁘지만, 그들을 기다리는 건 결코 행복이 아니다. 가정파탄에 섹스와 마약, 거의 모두 이 코스를 밟아나간다. 그것은 바로 자본 자체가 그런 운명을 타고났기 때문이다. 연암이 말하고자 하는 바도 바로 그것이다. 느닷없이 돈이 굴러올 때는 뱀을 만난 듯이 조심하라. 가히 부귀를 달관한 자만이 설파할 수 있는 ‘잠언’이 아닌가.
▲ 천하제일관, 산해관
요동벌판이 끝나고 중원이 시작되는 곳. 험준한 산세가 천연의 요새를 이루고 있다. 이토록 견고한 장성을 쌓았건만, 유목민 오랑캐의 준동은 끊이지 않았다. 그래서 참, 역설적이다. 이 관을 보고 제국의 위엄에 압도당해야 하는 건지 아니면 수시로 여기를 넘어 중원의 지축을 뒤흔든 유목민의 위력에 탄복해야 하는 건지 헷갈린다는 점에서.
판타지아(fantasia)
등불이 노끈에 이어져 저절로 불이 붙어 타오른다. 노끈을 따라 타면서 또 다른 등불로 이어진다. 4~50등이 일시에 타면서 주위가 환하게 밝아진다. 1천여 명의 미모의 남자들이 비단 도포에 수놓은 비단 모자를 쓰고 늘어섰다. 각각 정자 지팡이 양쪽 끝에 모두 조그만 붉은 등불을 달고 나갔다 물러섰다 하여 군진(軍陳) 모양을 하더니 순식간에 삼좌(三座) 오산(鼇山, 자라 등 위에 얹혀 있었다는 바닷속 산으로 신선이 산다고 함)으로 변했다가 다시 일순, 변해서 누각이 되고, 또 졸지에 네모진 진형으로 바뀐다. 황혼이 되자 등불빛은 더욱 밝아지더니 갑자기 ‘만년춘(萬年春)’이란 석 자로 변했다가 갑자기 ‘천하태평(天下太平)’ 네 글자로 변한다. 이윽고 두 마리 용이 되어 비늘과 뿔과 발톱과 꼬리가 공중에서 꿈틀거리면서 경각 사이에 변환하고 ‘헤쳐 모이되’ 조금도 어긋남이 없이 글자획이 완연한데, 다만 수천 명의 발자국 소리만 들릴 뿐이다. 열하에서 황제와 함께 관람한 연극의 한 장면이다. 당시 청나라의 화려한 무대와 연기수준을 짐작케 해주는 좋은 자료이다. 「산장잡기(山莊雜記)」 「만년춘등기(萬年春燈記)」에 나오는 내용이다.
연암은 호기심의 제왕이다. 뭐든 그의 시선에 걸리면 그냥 무사히 넘어가지 못한다. 왕성한 식욕의 소유자처럼 대상들을 먹어치우는 것이다. 위의 장면만 해도 그렇다. 화려한 스펙터클을 자랑하는 축하쇼를 마치 손에 잡힐 듯이 생생하게 재현하고 있다. 특별한 의미가 있건 없건 신기하고 새로운 건 무조건 기록하지 않고는 못배기는 것이다. 그가 이름난 유적이나 역사적 기념비 못지않게 장터를 즐겨 다닌 것도 그 때문이다. 장터야말로 그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들로 그득하다. 그는 장터의 활기와 무드를 충분히 즐기면서도 세심하게 그 이면을 읽어낸다.
예컨대 「도강록(渡江錄)」 「관제묘기(關帝廟記)」에는 장터에서 광대패를 만난 경험이 기록되어 있다. 광대패 수천 명이 왁자하게 떠들면서 혹은 총과 곤봉을 연습하기도 하고, 혹은 주먹놀음과 씨름을 시험하기도 하며, 혹은 소경말, 애꾸말을 타는 장난들을 하고 있다. 그중에 한 사람이 앉아서 『수호전』을 읽는데, 뭇 사람이 삥 둘러앉아서 듣고 있다. 연암이 가까이 가서 보니 읽고 있는 곳은 분명 「화소와관사(火燒瓦官寺, 『수호전』의 한 장의 대목)」인데, 외는 것은 뜻밖에 『서상기(西廂記)』였다. 까막눈이었던 것이다.
한편, 형부 앞을 지나다 불쑥 들어가서 죄인에게 따귀를 때리는 형을 가하는 장면을 목격하기도 하고, 또 시장을 돌아다니다 최고위급 관리들이 직접 시장에 나와 물건을 흥정하는 장면을 보고 놀라워하기도 한다. 조선의 사대부들에게는 상상하기 어려운 습속이기 때문이다.
‘장터의 스피노자(Spinoza, 1633~1677)’ 연암, 그가 마주친 것 가운데 가장 멋진 스펙터클은 요술세계이다. 「환희기(幻戱記)」 「환희기서(幻戲記序)」에 나오는 이야기다. 그는 어느 날 광피사표패루(光被四表牌樓)를 지나다 수많은 사람들이 둘러서서 요술을 구경하는 장면을 목도한다. 유학자로서 요술에 대해 비판적이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연암은 경직된 도덕의 수호자가 아니라, 일단 신기한 것은 보고 즐기는 ‘호모 루덴스’ 아닌가. 좀 캥길 때는 명분을 내세워 정당성을 확보해두는 치밀함도 갖추고 있다. 누군가 “이런 요술하는 재주를 팔아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본래 나라의 법 밖에서 활동하는 것인데도 그들을 처벌하여 멸절시키지 않음은 무슨 까닭입니까[售此術以資生 自在於王法之外而不見誅絶何也]?” 하고 묻자, 연암은 이렇게 답한다.
중국의 땅덩어리가 워낙 광대해서 능히 모든 것을 포용하여 아울러 육성할 수 있기 때문에 나라를 다스리는 데 병폐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만약 천자가 이를 절박한 문제로 여겨서 요술쟁이들과 법률로 잘잘못을 따져서 막다른 길까지 추격하여 몰아세운다면, 도리어 궁벽하고 눈에 띄지 않는 곳으로 꼭꼭 숨어 때때로 출몰하면서 재주를 팔고 현혹하여 장차 천하의 큰 우환이 될 것입니다.
所以見中土之大也 能恢恢焉並育 故不爲治道之病 若天子挈挈然與此等較三尺 窮追深究 則乃反隱約於幽僻罕覩之地 時出而衒耀之 其爲天下患大矣
그래서 날마다 사람들로 하여금 요술을 하나의 놀이로서 보게 하니, 비록 부인이나 어린애조차 그것이 속이는 요술이라는 것을 알아서 마음에 놀라거나 눈이 휘둥그레지는 일이 없습니다. 이것이 임금 노릇 하는 사람에게 세상을 통치하는 기술이 되는 것입니다.
故日令人以戱觀之 雖婦人孺子 知其爲幻術 而無足以驚心駭目 此王者所以御世之術也哉
얼마나 노회한 논리인가.
어찌됐든 이렇게 해서 연암은 이상하고 신기한 ‘요술나라’로 들어간다. 스무 가지가 넘는 요술이 펼쳐지는 「환희기(幻戱記)」는 한마디로 ‘판타지아’ 그 자체이다.
먼저, 워밍업에 해당하는 묘기부터.
요술쟁이가 자기 손에 아무것도 없는 것을 보인 다음 왼손 엄지와 둘째 손가락으로 환약을 만지듯 살살 비비니 갑자기 좁쌀만 한 물건이 생겼다. 이것이 녹두알 → 앵두알 → 빈랑(檳榔) → 달걀 → 거위알 수박 → 다섯 말들이 크기의 제공(帝工, 눈, 코 없는 주머니처럼 생긴 귀신새,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험프티 덤프티’를 떠올리면 될 듯)으로 바뀌다 부드럽게 쓰다듬으니 점점 줄어들어 두 손가락으로 비비다가 한 번 튀기니 즉시 사라진다.
종이 몇 권을 큰 통 물 속에 집어넣고 손으로 종이를 빨래하듯 저으니 물 속에 섞였다가 다시 종이를 건져내는데 종이가 서로 이어져 처음의 모습과 똑같고, 물은 깨끗하다.
이것이 시각적 판타지라면, 다음 것들은 좀더 입체적인 판타지에 해당된다.
종이를 나비 날개처럼 수십 장을 오리고 손바닥 속에서 비벼 여러 사람들에게 보이고는 한 어린아이에게 눈을 감고 입을 벌리라 하고 손바닥으로 입을 가리우니 어린이는 발을 구르면서 운다. 요술쟁이가 웃으면서 손을 떼니 어린이는 울다가 토하고 또 울다가 토하는 데, 청개구리 수십 마리를 토한다.
손을 보자기 밑에 넣어 사과 세 개를 끄집어내어 조선 사람에게 사라고 청한다. 그러자 “네가 전일에 항상 말똥으로 사람을 희롱한단 말을 들었거든[聞汝往日 常以馬矢戱人].”하며 거절한다. 여러 사람들이 다투어 사먹는 걸 보고서야 조선 사람이 비로소 사자고 청하니 요술쟁이는 처음에는 아끼는 듯하다가 얼마 뒤에 한 개를 집어준다. 한입 베어 먹고는 바로 토하는데, 말똥이 한 입 가득 차 있다. 이어지는 폭소. 조선인의 완고함과 오만함에 대한 통렬한 풍자!
섬뜩한 장면도 있다. 요술쟁이가 칼을 던져 입을 벌리니 칼 끝이 바로 입 속에 꽂힌다. 칼을 삼키는데 병을 기울여 무엇을 마시듯 목과 배가 서로 마주 응하는 것이 성난 두꺼비 배처럼 불룩하다. 칼고리가 이에 걸려 칼자루만 남자, 요술쟁이는 네 발로 기듯이 칼자루를 땅에 쿡쿡 다져 이와 고리가 맞부딪쳐 딱딱 소리를 낸다. 또 다시 일어나서 주먹으로 칼자루 머리를 치고서 한 손으로 배를 만지고 한 손으로는 칼자루를 잡고 내두르니 뱃속에서 칼이 오르내리는 것이 살가죽 밑에서 붓으로 종이에 줄을 긋는 듯하다. 사람들은 가슴이 섬뜩하여 똑바로 보지 못하고, 어린애들은 무서워 울면서 안 보려고 엎어지고 기어 달아난다. 이때에 요술쟁이는 손뼉을 치고 사방을 돌아보며 천천히 칼을 뽑아 두 손으로 받들어 들으니 칼 끝에 붙은 핏방울에는 아직도 더운 기운이 남아 있다.
놀랍기는 하지만, 여기까지는 요즘 요술쟁이들도 어느 정도 따라할 법하다. 정말 믿기지 않는 건 다음 대목이다. 요술쟁이는 탁자 위를 깨끗이 닦고 도서를 진열하고 조그만 향로에 향불을 피우고 흰 유리 접시에 복숭아 세 개를 담아 두었는데, 복숭아는 모두 큰 대접만 했다. 탁자 앞에 바둑판과 검고 흰 바둑알을 담은 통을 놓고 초석을 단정하게 깔아 놓았다. 잠깐 휘장으로 탁자를 가렸다가 조금 후에 걷으니, 구슬관에 연잎 옷을 입은 자도 있고, 신선의 옷차림을 한 자도 있으며, 나뭇잎으로 옷을 해입고 맨발로 있는 자도 있고, 혹은 마주 앉아 바둑을 두기도 하며, 혹은 지팡이를 짚은 채 옆에 서 있기도 하고, 혹은 턱을 고이고 앉아서 조는 자도 있어 모두가 수염이 아름답고 얼굴들이 기이했다. 접시에 있던 복숭아 세 개가 갑자기 가지가 돋고 잎이 붙고 가지 끝에 꽃이 피니, 구슬관을 쓴 자가 복숭아 한 개를 따서 서로 베어 먹고, 그 씨를 땅에 심고 나서 또 다른 복숭아 한 개를 절반도 못 먹었는데 땅에 심은 복숭아 나무는 벌써 몇자를 자라서 꽃이 피고 열매를 맺었다. 갑자기 바둑 두던 자들의 머리가 반백이 되더니 이윽고 하얗게 세어버렸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애니메이션도 아니고, 영화의 특수효과도 아닌데, 어떻게 그런 일이?
마술이 예지가 되는 순간
다음은 ‘판타지아’ 「환희기(幻戱記)」의 클라이맥스이자 대단원이다. 요술쟁이는 큰 유리 거울을 탁자 위에 놓고 시렁을 만들어놓는다. 거울을 열어 모두에게 구경시키니, 여러 층 누각과 몇 겹 전각이 단청을 곱게 칠했다. 관원 한 사람이 손에 파리채를 잡고 난간을 따라 서서히 걸어 간다. 아름다운 계집들이 서넛씩 짝을 지어 보검을 가지고 혹은 금병을 받들고, 혹은 봉생을 불고 혹은 비단 공도 차며, 구름 같은 머리와 아름다운 귀걸이가 묘하고 곱기가 비할 데가 없다. 방 안에는 백 가지 물건과 수없는 보물들이 그득하여 참으로 부귀가 지극하니, 여러 사람들은 부러움을 참지 못하여 서로 구경하기에 바빠서 이것이 거울인 줄도 잊어버리고 바로 뚫고 들어가려 한다.
그러자 요술쟁이가 즉시 거울 문을 닫아 보지 못하게 한 후, 사방을 향하여 무슨 노래를 부르다가 문을 열어 다시 보게 한다. 전각(殿閣)은 적막하고 누사(樓榭)는 황량한데 세월이 얼마나 지났는지 아름다운 계집들은 어디로 가고 한 사람이 침상 위에서 옆으로 누워 자는데 손으로 귀를 받치고 이마 밑으로 김 같은 것이 연기처럼 솟아오른다. 잠자던 자는 기지개를 켜면서 깨려다가 또 잠이 드는데, 갑자기 두 다리가 두 수레바퀴로 화한다. 바퀴살이 아직 덜 되었는데도 구경꾼들이 징그럽고 끔찍하여 모두 달아난다.
마치 ‘시뮬레이션’을 보듯 거울을 통해 한바탕 인생무상을 보여준 것이다. 연암도 이 장면에선 감탄을 금치 못한다. 아무리 눈속임에 사술(邪術)이라지만, 이 정도면 보통 내공이 아니지 않는가. 논평이 없을 수 없다.
인간 세상에서 벌어지는 오만 가지 일들, 즉 아침에 무성했다가 저녁에 시들고 어제의 부자가 오늘은 가난해지고 잠깐 젊었다가 갑자기 늙는 따위의 일들이 마치 ‘꿈 속의 꿈’ 이야기를 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죽거나 살거나, 있거나 없는 일들 중에 무엇이 참이고, 무엇이 거짓이리오.
一切世間 種種萬事 朝榮暮枯 昨富今貧 俄壯倐老 夢中說夢 方死方生 何有何亡 孰眞孰假
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 그러면 어떻게 살아야 하나?
세상에 착한 마음을 지닌 사내와 보살심을 지닌 형제들에게 말한다. 환영인 세상에서 몽환 같은 몸으로 거품 같은 금과 번개 같은 비단으로 인연이 얽어져서 기운에 따라 잠시 머무를 뿐이니, 원컨대 이 거울을 표준 삼아 덥다고 나아가지 말고, 차다고 물러서지 말며, 지금 가지고 있는 돈을 흩어서 가난한 자를 구제할지어다.
寄語世間 善心善男 菩蕯兄弟 幻界夢身 泡金電帛 結大因緣 隨氣暫住 願準是鏡 莫爲熱進 莫爲寒退 齊施錢陌 濟此貧乏
몸과 금과 비단은 잠시 머무르는 것일 뿐이니, 헛된 집착을 버리고 세상을 위해 두루 베풀라는 것이다.
연암은 요술이 기본적으로 눈속임이라고 간주했다. 자신의 눈을 전적으로 믿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거기에 속아 넘어간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거야말로 ‘인생이 환(幻)’이라는 것을 말해주는 훌륭한 교사가 아니겠는가. 기막힌 역설 혹은 아이러니, 연암의 사유는 이렇듯 막힘이 없다. 판타지아를 맘껏 즐길 수 있었던 것도, 그것을 삶의 예지로 변환할 수 있었던 것도 그 덕분일 터이다.
흰 수건과 대보법왕
먼저 다음 장면부터 음미해보자. 때는 2001년 여름쯤이고, 장소는 인도의 북부 다람살라에 있는 티베트 망명정부의 궁전 앞이다.
궁을 나섰을 때 나는 정말 놀랐다. 궁으로부터 보드가야의 대탑에 이르는 연도에는 수천수만의 티베트 군중들이 달라이라마를 한번 뵙기 위해서 간절한 마음으로 두 손 모아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더더욱 나에게 충격을 준 것은 그 순간에 전개된 군중들의 모습이다. 달라이라마와 내가 궁을 나서는 순간, 갑자기 온 거리가 정적에 휩싸였다. 영화의 뮤트 슬로우 모션처럼. 온 세계가 너무도 조용해진 것이다. 미동의 소리도 없었다. 그들은 달라이라마를 육안으로 쳐다보는 그 감격을 가슴으로, 눈빛으로만 표현했다. (중략)
달라이라마는 그들의 군주였고, 다르마의 구현체였다. 그는 21세기 벽두에 우뚝 서 있는 왕이었다.
김용옥, 『달라이라마와 도올의 만남』 3권, 통나무, 2002년 강조는 필자
나는 이 장면을 처음 접했을 때, 순간 가슴이 뭉클했다. 한갓 난민촌의 수장이 어떻게 이토록 막강한 카리스마를 내뿜을 수 있단 말인가? 수많은 군중을 침묵하게 하는 그 힘은 대체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왕이면서 동시에 진리의 구현체인 존재가 이 첨단과학의 시대에도 여전히 가능하단 말인가? 누구도 이 질문들에 명쾌하게 답할 수 없으리라. 그렇다. 우리의 이 협소한 인식의 수준에선 달라이라마는 존재 자체가 ‘불가사의’다.
연암의 시대에도 그러했다.
대저 그들이 하는 말들은 모두 놀랍고 이상하여, 활불을 칭찬하는 것 같기도 하고 조롱하는 것 같기도 하며, 괴상하고 기이하며 속임수 같고 거짓말 같아서 다 믿을 수 없다. 그래서 끌어 붙여서 이를 기록하고, 잡된 내용을 모아서 서술하여 문득 「황교문답(黃敎問答)」 한 편을 완성한 것이다. 신령스럽고 환상적이며, 거대하고 화려하며, 밝고도 섬세하여 아주 특이하고 이색적인 글이 되었다. 이른바 활불의 술법이나 내력을 갈고리로 후벼 파내고 더듬어서 찾아낼 수 있을 뿐 아니라, 연암이 만나서 이야기한 사람들의 성격이나 학식 및 용모와 말버릇까지 모두 펄펄 살아서 뛸 듯 환하게 드러난다.
大抵皆是可驚可異 似譽似嘲 瑰奇譎詭 莫可盡信 而第爲之牽聯而書之 叢雜而述之 便成一篇 靈幻鉅麗 空明纖妙 異樣文字 不特所謂活佛者 法術來歷 可以鉤距探取 卽晤語諸人之性情學識容貌辭氣 躍躍然都顯出來
이것은 연암의 처남 이재성(李在誠)의 평어(評語)다. 무슨 평어가 이렇게 알쏭달쏭한가? 대체 어떤 글이길래? 바로 「황교문답(黃敎問答)」에 대한 것이다. 황교란 티베트 불교를 뜻하는 것으로, 평어에 나오는 활불, 곧 판첸라마의 내력을 다룬 글이다. 당시 조선인들에게 티베트와의 만남은 마치 ‘낯선 우주’와의 충돌만큼이나 엄청난 것이었다. 그러니 그에 대한 서술이 단순명료할 리가 없다.
실제로 『열하일기』 전체에서 가장 ‘튀는’ 부분을 꼽으라면, 단연 연암이 판첸라마를 만나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판첸라마는 명목상으로는 대법왕 달라이라마를 잇는 소법왕이지만, 서로 번갈아 가며 통치하기 때문에 사실상 같은 위상을 지닌 존재이다. 결국 요즘으로치면 연암은 달라이라마를 만난 셈이다! 연암과 달라이라마의 만남이라? 이 대목은 내용도 기이할 뿐 아니라, 조선시대 전체를 통틀어 티베트 불교에 관한 유일한 기록이라는 점에서 단연 독보적이다.
신기하게도 이 내용들은 별다른 물의를 일으키지도 않았고, 특별한 주목을 받지도 않았다. 문체반정(文體反正)에서도 이 부분은 거론조차 되지 않았다. 조선 후기의 사상적 배치와는 너무 거리가 멀어서였을까? 아니면, 그저 먼나라의 ‘괴담’ 정도로 간주되었기 때문일까? 어쨌든 「찰십륜포(札什倫布)」, 「황교문답(黃敎問答)」, 「반선시말(班禪始末)」로 이어지는 대목들은 열하일기』라는 큰 대양 위에 떠 있는 ‘섬’, 그것도 신비로운 산호초와 기암괴석으로 가득한 절해고도(絶海孤島)처럼 느껴진다.
달라이라마를 접견할 때 항상 수반되는 예식이 하나 있다. 하얀 비단천으로 된 수건을 달라이라마께 바치면 달라이라마가 다시 그것을 그 사람의 목에 걸어주는 것이 그것이다. 이 흰 수건을 ‘카타’라고 하는데, 이것을 받으면 전생과 금생의 업장(業障)이 모두 소멸된다고 한다.
「반선시말(班禪始末)」에 바로 이 예식의 유래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한 선비에게 전해들은 바에 따르면, 판첸라마는 서번(西番) 오사장(烏斯藏)의 대보법왕으로 전신은 파사팔(巴思八)이다. 파사팔은 토파(土波)의 한 여인이 새벽에 나가서 물을 긷다가 수건이 물 위에 떠 있는 것을 보고 그것을 주워 허리에 둘렀는데, 얼마 후 그것이 점점 기름으로 엉키며 이상한 향기가 나면서 잉태되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흰 수건은 판첸라마를 세상에 태어나게 한 상징적 매개물인 셈이다. 그는 나면서부터 신성하여 『능가경(楞伽經)』 등 1만 권을 능히 외울 수 있었다. 원세조(元世祖)가 그 소문을 듣고 사신을 보내어 맞아오니 과연 지혜가
있고 명랑한 데다, 전신이 향기롭고 걸음걸이는 천신 같으며, 목소리는 율려(律呂)에 맞는지라 대보법왕(大寶法王)이란 호를 하사했다. 그 뒤 원제국에선 파사팔교(巴思八敎)가 번성하여 황제와 후비, 공주들이 열렬히 그 예식에 참여하곤 했다.
▲ 찰십륜포의 황금전각
찰십륜포는 순전히 판첸라마 6세를 위한 궁전이다. 황금전각 안에 들어가면 거대한 규모로 만들어진 판첸라마 6세의 좌상 및 만수절 행사 행렬도를 비롯하여 각종 기록들이 남아 있다. 건륭제의 만수절과 판첸라마의 행차가 당시 세계사적 이벤트였음을 짐작하게 해준다.
환생과 이적
잘 알고 있듯이, 달라이라마는 관세음보살의 환생으로 간주된다. 연암은 윤회와 환생의 차이를 집요하게 물고 늘어진다. “법왕이 남의 몸을 빌려 태어나는 것과 윤회는 어떻게 다릅니까[余曰目今法王投胎奪舍之法 非輪回之證耶]?” 윤형산의 대답은 이렇다. “그것은 몸을 바꾸는 것이나 같은 것입니다.” “밝게 빛나는 지혜와 금강의 보체(寶體)는 본디 젊지도 늙지도 않는 것입니다. 장작 하나가 다 타고 나면 다른 나무로 불이 옮겨 붙는 것과 같은 이치이지요[維此光明信識 金剛寶體 固無童耄 薪盡火傳].” “비유컨대, 천 리를 가는 자가 집을 짊어지고 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라, 반드시 숙소를 옮겨 가면서 길을 가는 것과 같은 이치라 할 수 있습니다. 비록 천하에 다정한 사람이라 해도 주막집에 정이 들었다고 그대로 눌러 앉았다는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譬如適千里者 未有負家而行 必遞宿傳舍 雖天下有情人 未聞顧戀傳舍].” 요컨대 환생이란 윤회와 달리 ‘깨달음을 얻은 이’가 스스로 다음 생을 선택하는 것이다.
‘달라이라마’란 ‘지혜의 바다’란 뜻으로 특정 개인을 지칭하는 말이 아니라, 일종의 제도적 명칭이다. 달라이라마가 단순히 종교적 지도자가 아니라, 통치권자로 임명된 것은 명나라 때부터인데, 그것이 계속 이어질 수 있었던 건 환생이라는 믿음이 제도적으로 승인되었기 때문이다.
연암이 수집한 정보에 따르면, 이 제도가 운용되는 방식은 이렇다. 티베트의 다른 지역에는 승왕들이 처자를 거느리고 있었지만, 오사장에서만은 법승들이 서로 이어가며 통치를 했다. 명나라 중엽부터 중국으로부터 봉호를 받지 않고, 항상 대법왕(달라이라마), 소법왕(판첸라마)이 있어 대법왕이 죽을 때는 소법왕에게, ‘아무 데 아무개의 집에 아이가 태어날 때 이상한 향기가 날 것이니 그것이 곧 나다’하고 예언을 한다. 대법왕이 죽고 나면 과연 그 아이가 태어나게 되고, 그러면 궁중에서 온갖 예물을 갖추어 그 아이를 수건에 싸서 맞아온다. 그 아이가 성장해서 왕위에 오를 때까지는 소법왕이 대신 통치를 한다. 그런 식으로 계속 그 제도가 이어져왔다는 것이다. 참고로 지금 달라이라마인 텐진 가쵸는 14대째로, 그 또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여러 가지 시험을 거쳐 13대 달라이라마의 환생자로 결정되어 5살 때 왕위에 올랐다. 「쿤둔」이라는 영화에 그 과정이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이처럼 밀교적 신비주의에 감싸여 있는 탓에 눈부신 이적(異蹟)들 도 적지 않다. 연암이 수집한 신비로운 삽화 몇 가지만 들어본다. 하나는 티베트에만 있다고 하는 천자만년수(天子萬年樹)라는 나무인데, 이 나무는 뒤덮은 가지가 모두 천자만년이란 글자 모양을 지니고 있다. 꽃은 열두 잎으로 꽃봉오리가 처음 터지는 것으로써 초하루인 것과 달이 밝아지는 것을 알게 되고, 꽃이 하루 한 잎씩 피어 열두 잎이 다 피고 보면 보름인 것과 달이 이그러지는 것을 알게 되며, 꽃이 하루 한 잎씩 말려 들어가 꼬투리가 떨어지면 그믐이 된 것을 알 수 있다.
또 하나는 판첸라마가 일찍이 황제와 함께 차를 마시다가 갑자기 남쪽을 향하여 찻물을 휙 뿌린 일이 있었다. 황제가 놀라서 그 연유를 물었더니 판첸라마가 공손히 대답하기를, 방금 700리 밖에서 큰불이 나서 1만 호나 되는 인가가 불타고 있는 것이 보이기에 비를 좀 보내 불을 끄는 것이라고 했다. 다음날 담당 신하가 아뢰기를, 정양문 밖 유리창(琉璃廠)에서 불이 나 망루까지 연소되어 인력으로는 끄지 못할 지경이었는데, 마침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에 졸지에 큰 비가 동북방으로부터 몰려와서 불을 껐다 하니, 차를 뿌려 비를 보낸 시각과 꼭 맞았다. 오, 놀라워라!
또 이런 예화도 있다. 한 불효막심한 자가 판첸라마를 한 번 보더니 갑자기 효심이 생겨 병든 아비를 위해 칼로 자기 왼쪽 옆구리를 베고 간의 한쪽 끝을 잘라서 구워 먹였다. 아비의 병이 즉시 나았음은 물론 불효자의 왼쪽 옆구리도 그대로 나아서 효자로 표창을 받았다. 또 산서성에 사는 한 거부(巨富)는 인색하기 짝이 없어 평생 한푼도 쓰지 않았는데, 길에서 판첸라마를 한 번 쳐다보고는 자비심이 일어나 즉각 10만금을 내어 부도(浮圖)를 세웠다고 한다.
동물을 감화시킨 경우도 있다. 한번은 강을 건너는데, 강 건너 저쪽 언덕에 큰 범 한 마리가 길에서 엎드려 꼬리를 흔들고 있었다. 황자(皇子)가 화살을 빼어 쏘려 하니, 판첸라마가 이를 말리면서 수레에서 내려 범을 쓰다듬어 주자 범은 그의 옷자락을 물고 남쪽으로 끌고 간다. 따라가 보니, 큰 바위 틈에 굴이 있는데 범 한 마리가 바야흐로 젖을 먹이고 있고, 머리 둘 달린 큰 뱀이 범의 굴을 둘러싸고서 범의 새끼를 집어삼키려 하고 있었다. 뱀의 한 머리는 젖먹이는 범과 겨루고, 뱀의 다른 한 머리는 숫범과 겨루고 있었는데, 범의 어금니로도 이것을 막을 도리가 없어 슬피 울다가 기진해버렸다. 판첸라마가 지팡이로 가리키면서 주문을 외니, 머리 둘 달린 뱀은 저절로 돌에 부딪쳐 죽었는데, 그 속에서 밤중에도 빛이 나는 진주가 한 개씩 나왔다. 구슬 한 개는 황자에게 바치고, 한 개는 학사에게 바쳤다. 그후, 범은 열흘 동안이나 판첸라마를 공손히 모시고 따라가다 조용히 사라졌다고 한다.
▲ 라마교 사원의 마니통
티베트 불교는 수행과 기원의 스케일이 엄청 크다. 향도 한두개가 아니라, 아예 다발로 사르고, 절도 만배가 기본이다. 또 이 ‘마니통(경전을 적어 넣은 통)’도 10만번을 돌려야,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10만 번? 천문학적인 숫자 아닌가. 그래도 ‘밑져야 본전’이라는 심정으로 우리는 열심히 돌리고 또 돌렸다.
달라이라마를 만나다!
청왕조는 판첸라마를 황제의 스승으로 모시는 한편, 피서산장 근처에 황금기와를 얹은 전각을 마련해두고서 극진히 대접했다. 이렇게 판첸라마를 떠받든 것은 티베트의 강성함을 억누르기 위한 정치적 방편이기도 했지만, 그 못지않게 티베트 불교의 신성함을 존중하는 유목민의 유연한 태도 역시 작용했다. 그럼, 조선의 사행단은 어떠했던가? 청나라조차 오랑캐라고 보는 마당에 ‘황당무계한’ 티베트법왕에게 머리를 숙일 리 만무했다. 열하에서의 ‘한바탕 소동’은 이렇게 해서 일어난 것이다. 이름하여, ‘판첸라마 대소동!’
「찰십륜포(札什倫布)」에서 나오는 이야기다. 예부에서 조선 사신들도 판첸라마에게 예를 표하라는 명령이 내려온다. 사신단은 “머리를 조아리는 예절은 천자의 처소에서나 하는 것인데, 어찌 천자에 대한 예절을 번승(番僧)에게 쓸 수 있겠소[拜叩之禮 行之天子之庭 今奈何以敬天子之禮 施之番僧乎]?”하며 거세게 항의한다. “황제도 역시 스승의 예절로 대우하는데, 사신이 황제의 조칙을 받들었을 적에야, 같은 예로 대우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느냐[皇上遇之以師禮 使臣奉皇詔 禮宜如之 ]”며 예부 역시 물러서지 않았다. 옥신각신하다, 결국은 현장까지 가긴 했으나 사신들은 당황한 나머지 ‘카타’를 바친 다음 절을 하지 않고 그냥 털썩 앉아버렸는데, 황제 옆에 있었던 군기대신 역시 황급하여 모른 체한다. 일행 중의 한 명이 일어나 팔뚝을 휘두르면서, “만고에 흉한 사람이로군. 제 명에 죽나 보자[萬古凶人也 必無善終理]”고 욕지거리를 해대자, 연암이 눈짓으로 만류한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판첸라마는 조선 사행단의 무사귀환을 기원하는 뜻으로 불상을 선물했다. 가지고 올 수도 없고, 버릴 수도 없는 진퇴양난의 형세! ‘꿀단지에 손 빠뜨린 격’이 된 것이다. “당시의 일이 창졸간이라 받고 사양하는 것이 마땅한지 않은지를 계교할 여가도 없었고[旣倉卒辭受當否 未暇計較]”, 게다가 “저들의 행사는 번개치고 별 흐르듯이 삽시간에 끝나버렸기 때문에[彼所擧行爀熻 倐忽如飛星流電]” 손쓸 틈이 없었다.
물러나와 한참 대책회의를 벌이는 중 인파가 주위에 몰려들었는데, 개중에 황제의 첩자가 끼어 있었다. 조선 사신단의 행동을 일일이 체크하고 있었던 것이다. 열하에서 돌아오는 길에 푸대접을 받은 것도 이 일로 인해 황제가 크게 언짢아했기 때문이다. 이 부분에선 불상을 상자에 넣어 압록강에 빠뜨리기로 결정하면서 사태가 수습된 것으로 나오지만, 실제로는 가지고 들어왔다가 성균관 유생들이 이에 항의하여 ‘권당(捲堂, 데모의 일종)’을 하는 등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다고 한다. 해프닝의 연속!
그럼 그로부터 많은 세월이 지난 지금은 어떤가? 1949년 중국은 티베트를 무력으로 점령했고, 수많은 인민을 학살했으며, 6천여개의 사원을 파괴하였다. 마침내 59년 인도의 다람살라로 망명을 단행한 뒤, 티베트 불교는 세계 속으로 퍼져 나갔고, 그 수장인 달라이라마는 근대 이성의 한계에 봉착한 세계인들에게 삶의 비전을 제시하는 ‘지혜의 스승’으로 우뚝 서게 되었다. 청왕조에선 스승의 나라로 추앙받았으나, 지금은 식민지 속국으로 가차없이 짓밟히는 것도 그렇지만, 바로 그 중국 제국주의로 인해 티베트 불교가 히말라야 고원지대에서 세계사의 한복판으로 걸어나가게 되었으니, 역사의 이 지독한 역전과 아이러니 앞에서 그저 망연할 따름이다.
그렇다면 그 사이 조선의 위치는 어떻게 달라졌던가? 한국은 중국과의 외교를 위해 달라이라마의 방문을 거부하고 있는 극소수 국가 중의 하나다. 연암 시대에는 황제가 강제로 절을 하도록 시켜도 거부하더니, 이제는 중국의 눈치를 보느라 달라이라마와의 만남을 아예 묵살하고 있다. 몇 년 전엔 달라이라마가 몽고로 가기 위해 한국의 창공을 경유해야 했는데, 아시아나 항공사 측에서 그것조차 거부한 적도 있었다. 맙소사!
누군가 말했다. 역사는 두 번 반복된다고. 한 번은 비극으로, 또 한 번은 희극으로, 그러나 이 경우엔 정확히 그 반대다. 열하에서의 ‘대소동’은 다분히 희극적이었지만,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정치적 상황은 음울하기 짝이 없는 비극이기 때문이다. 하긴, 전자가 ‘비장한 코미디’라면, 후자는 ‘코믹한 비극’이라는 점에서 상통하는 바가 아주 없진 않다.
연암은 과연 이런 상황을 예견하고 있었을까? 아니, 연암이라면 지금 이 상황을 어떻게 평가할까? 연암이 달라이라마를 다시 만난다면? 이 대목을 읽을 때마다 내 머릿속에는 숱한 물음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그것은 연암이 던지는 것이기도 하고, 또한 달라이라마가 던지는 것이기도 하다.
▲ 14대 달라이라마 텐진 가쵸
1959년 중국의 탄압을 피해 인도로 망명, 다람살라에 ‘티베트 망명정부’를 세웠다. 관음보살의 환생으로 간주된다. 따라서 연암이 열하에서 만난 판첸라마는 달라이라마의 전생에 해당되는 셈이다. 강연, 집필, 면담, 불교행사 주관 등이 그가 주로 하는 아르바이트다. 그 수입으로 다람살라에 몰려드는 난민들을 먹여 살려야 하기 때문이다. 무슨 왕의 팔자가 이런가? 하지만 최악의 상황인데도, 그는 터무니없을 정도로 낙천적이다. 세계의 모든 사람들과 친구가 되는 것이 소망이라나, 그래서 웃음과 유머가 한시도 떠나지 않는다. 연암과 쌍벽을 이룰 정도로 그 역시 유머의 달인이다. 그가 근대 이성의 한계에 봉착한 세계 지성인들에게 끊임없이 지혜를 나누어줄 수 있는 원천도 거기에 있을 것이다. 아는 사람은 알 터이지만, 달라이라마는 내게 있어 영적 안내자이자 지적 스승이다. 그러니 『열하일기』에서 연암이 ‘판첸라마’를 만나는 장면을 발견했을 때, 어찌 놀랍고 경이롭지 않았겠는가. 달라이라마께서 조선 사행단이 벌인 ‘판첸라마 대소동!’을 들으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생각만 해도 웃음이 절로 나온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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