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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5부 내부에서 외부로 외부에서 내부로 - 2장 세 개의 첨점: 천하ㆍ주자ㆍ서양, 옥시덴탈리즘(occidentalism) 본문

문집/열하일기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5부 내부에서 외부로 외부에서 내부로 - 2장 세 개의 첨점: 천하ㆍ주자ㆍ서양, 옥시덴탈리즘(occidentalism)

건방진방랑자 2021. 7. 11. 0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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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시덴탈리즘(occidentalism)

 

 

열하에서 곡정과 필담할 때 담배가 화제에 오른 적이 있다.

 

 

이 담배는 만력 말년에 절동(浙東)과 절서(浙西) 지역에 널리 유행했습니다. 이 물건은 사람들의 가슴을 막히게 하고 취해 쓰러지게 하는 천하의 독초이지요. 먹어서 배가 부른 것도 아니건만 천하의 좋은 밭에서 나는 귀한 곡식과 이문이 같고, 부녀자와 어린아이에 이르기까지 고기보다 더 즐기며 차나 밥보다 더 좋아합니다. 쇠붙이와 불을 입에 당겨 대니, 이 또한 세상 운수라 해야 할지. 아무튼 이보다 더 큰 변괴가 어디 있겠습니까. 태학유관록(太學留館錄)

萬曆末 遍行兩浙間 猶令人悶胸醉倒 天下之毒草也 非充口飽肚 而天下良田 利同佳糓 婦人孺子 莫不嗜如蒭豢 情逾茶飯 金火迫口 是亦一世運也 變莫大焉

 

 

그러자 연암은 만력 연간에 일본에서 들어와, 지금은 토종이 중국 것과 별 차이가 없습니다. 청나라가 아직 만주에 있을 때에 담배가 우리나라에서 중국으로 들어갔지요. 그 종자는 본디 일본에서 왔기 때문에 남초(南草)라 이릅니다[自萬曆間 從日本入國中 今土種無異中國 皇家在滿洲時 此草入自敝邦 而其種本出於倭 故謂之南草].” 하니, 곡정은 본시 일본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서양 배편으로 온 겁니다. 서양 아미리사아(亞彌利奢亞, 아메리카)의 임금이 여러 풀을 맛보다가 마침내 이 풀을 얻어 백성들의 입병을 낫게 했다는군요. 인간의 비장은 토()에 속하므로 허하고 냉하여 습기가 차면 벌레가 생기고, 그것이 입에까지 번지면 바로 죽습니다. 이에 불로써 벌레를 쳐 목()을 이기고 토를 도와 해로운 기운을 이겨내고 습기를 제거하여 신통한 효과를 거두었으므로 영초(靈草)라 일컬은 것이지요[此非出日本 本出洋舶 西洋亞彌利奢亞王 甞百草 得此以醫百姓口癬 人脾土虛冷而濕 能生虫口蠧 立死 於是火以攻虫 剋木益土 勝瘴除濕 卽收神效 號靈草 余曰 吾俗亦號南靈草].”

 

연암은 순진하게 그 말을 곧이 듣고 만약 이 풀이 아니었다면, 천하 백성이 모두 입병으로 죽었을지 누가 알겠습니까[誠非此草 四海之人 安知不擧皆口瘡而死乎]?” 한다. 그러자 곡정은 서양 인종들이 대체로 허황하여 이익을 낚는 재주가 교묘하니, 어찌 그 말을 다 믿을 수 있겠습니까[西人類多誇誕 巧於漁利 安知其言之必信然否也]?”하고 되받아친다.

 

근대 이전 담배에 대한 풍속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도 주목되지만, 무엇보다 동양과 서양의 접속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자료이다. 담배는 아메리카에서 일본을 거쳐 조선으로, 다시 조선에서 만주로, 중원으로 퍼져갔던 것이다.

 

기하와 알파벳에 대한 언급도 눈에 띈다. 망양록(忘羊錄)에서 윤가전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서양 사람들은 역법(曆法)에 정통하고, 그들의 기하학의 학술은 정미하고 세밀하여, 무릇 물건은 모두 기하학을 응용하여 만들었습니다. 거기에 비해 우리 중국이 기장 낟알을 포개어 길이를 재는 따위는 도리어 거칠고 조잡한 짓입니다. 게다가 그들의 문자는 소리를 뜻으로 삼는 표음문자여서 새나 짐승의 소리와 바람과 비의 소리조차 귀로 분변하고 혀로 형용하지 못하는 것이 없답니다.

西人皆精曆法 其幾何之術 爭纖較忽 凡所製造 皆用此法 中國累黍反屬麤莽 且其文字 以聲爲義 鳥獸之音 風雨之響 莫不審於耳而形于舌

 

 

담배를 논할 때와는 또 다른 태도를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흔히 서구와 동양의 충돌이라면 19세기 말 20세기 초를 떠올리지만, 이미 그 이전에도 서구와 동양은 다양한 루트를 통해 문명 간 교류를 시도하고 있었다. 물론 그때의 관계는 20세기 초의 그것과는 아주 다른 것이었다. 20세기가 기술의 압도적 우위를 배경으로 서구가 동양을 지배하는 시대라면, 근대 이전은 힘의 우열이 선명하지 않았기 때문에 문명적 차이와 이질성이 훨씬 중시될 수밖에 없었다. 서양에 대한 일련의 표상을 일러 옥시덴탈리즘이라고 하면 어떨까. 오리엔탈리즘이 도래하기 이전의 옥시덴탈리즘.

 

중국이나 조선의 선비들에게 있어 서양이란 과학기술과 천주교 두 가지 코드로 인지되었다. 이 가운데 전자에 대해서는 대개 호기심(好奇心)과 포용력(包容力), 동경(憧憬) 등의 태도를 보인 반면, 후자에 대해서는 입장에 따라 상당한 편차가 있었다. 명나라 때 마테오 리치가 서학을 전파한 이래 중국에서는 천주교 신자가 날로 늘어났다. 조선에서도 남인(南人) 경화사족(京華士族)을 중심으로 급속하게 세를 확산해갔다. 신앙으로 수락한 이들의 편에서 본다면 천주교는 구원의 종교지만, 그것을 단지학적 호기심의 차원에서 받아들이는 편에서 보자면 그것은 하나의 신종 이단에 불과할 따름이다. 연암과 그의 친구들은 후자쪽이었다.

 

연암은 천주당의 방문을 연행의 중요한 코스로 잡는다. 한번은 열하에서 자신의 심정을 이렇게 토로하기도 했다. “저는 만 리 길을 걸어서 귀국에 관광하러 온 신세입니다. 이 참에 서양인을 꼭 한번 만나고 싶었습니다. 갑자기 열하로 들어오는 바람에 아직 천주당을 구경하지 못했[鄙人萬里閒關 觀光上國 敝邦可在極東 歐羅乃是泰西 以極東泰西之人 願一相逢 今遽入熱河 未及觀天主堂 (鵠汀筆談)]”으니 한스럽기 그지 없노라고, 천주당을 방문하는 목적은 풍금이나 망원경, 기타 기계들의 표본 및 역법을 보기 위해서다. 물론 아직 서구 과학기술의 수준은 소박하다. 그렇기 때문에 기술문명의 도입이라는 거창한 명분보다는 단순한 지적 호기심의 성격이 훨씬 강하다. 흔히 지전설, 지동설 따위를 서구과학의 영향으로 간주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이미 연암이나 홍대용(洪大容)의 수준에서도 선취되고 있던 바였다. 요컨대 연암을 둘러 싼 동양의 엘리트들에게 있어 서구는 나름대로 과학적 진보를 이룬, 그러나 아직 그것이 동양보다 월등한 위력을 발휘할 수준은 아닌 낯선 문명권 정도로 인지되었다.

 

서구제국의 입장에서 시급한 목표는 기술보단 천주교의 포교였다. 문명의 충돌은 언제나 종교를 통해 이뤄진다는 점에서 이는 지극히 당연한 것이기도 하다. 천주교를 땅끝까지전파하는 소명을 위해 선교사들은 머나먼 이국땅을 밟았던 것이다. 과학이나 기술은 포교를 위한 부차적 사안에 지나지 않았다. 물론 20세기에 들어서면 이 두 가지는 정확히 역전된다. 선교사를 보내 정지작업을 한 뒤에는 반드시 총과 대포가 뒤따라왔던바, 어디까지나 목표는 후자였다.

 

그러나 근대 이전 지식인들에게 있어 천주교는 철학적 측면에서 볼 때, 한참 낮은 것으로 취급되었다. 옹정제(雍正帝, 미야자키 이치사다 지음)라는 책을 보면 아주 재미있는 기록이 있다. 당시 서양은 국왕과 교회의 권위에 비판의 시선을 돌리기 시작한 터라, 유럽의 지식인은 세계의 동쪽 끝에 종교의 예속을 받지 않는 문명국이 있다는 것을 알고 놀라워하기도 하고 의아해하기도 하였다. 또 개중에는 중국과 같은 군주정치체제야말로 이상적인 정치방식이라고까지 격찬하는 사람도 있었다. 즉 적어도 이 시기는 서양이 동양을 바라보는 처지였던 것이다. 옹정제(雍正帝)의 아들인 건륭제 치세하에서 천주교의 영향은 한층 커졌고, 서양 역시 과학의 진보가 두드러진 때이긴 했으나, 아직 힘의 배치가 크게 바뀔 정도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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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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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원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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