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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열하일기의 길을 가다(2003년 봄) - 사람이 살고 있었네 본문

문집/열하일기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열하일기의 길을 가다(2003년 봄) - 사람이 살고 있었네

건방진방랑자 2021. 7. 11. 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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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살고 있었네

 

 

산해관을 지나서도 바람은 그치지 않았다. 차창 밖에서는 한겨울의 칼바람 같은 굉음이 들려오고, 고속도로 위의 나무들은 날아갈 듯 휘청댄다. 사진을 찍기 위해 차 밖으로 나설라치면 머리가 사방으로 곤두서고 다리가 꺾일 정도다. 맑은 하늘을 본 게 언제더라? 그래, 거기에 가면 좀 쉴 수 있겠지, 숲도 있고, 물도 있을 테니, 수양산 이제묘를 찾아갈 때의 심정은 대략 이랬던 것 같다.

 

아득한 고대, 은나라 고죽군(孤竹君)의 두 아들 백이(伯夷)와 숙제(叔齊)는 아버지인 왕이 세상을 떠나자 형님 먼저, 아우 먼저하며 군주의 자리를 양보했다. ‘, 훌륭한 덕을 갖춘 군자들이로군주나라 무왕이 은나라를 정벌할 때 말고삐를 잡고 만류했으나 듣지 않자 수양산에 숨어서 고사리를 캐먹다 죽었다. 은의 주왕(紂王)은 만민이 치를 떨었던 폭군 중 폭군이다. 근데, 왜 말려? 힘을 합쳐 싸우지는 못할망정.

 

폭력에 폭력으로 맞서는 건 인이 아니란다. 치열한 비폭력주의일까? 아니면 인텔리의 고지식한 결벽증일까? 사마천(司馬遷)사기』 「열전에서 이 고사리 형제를 일순위로 올리면서 한껏 띄워주는 바람에 동아시아 유학자들은 이 문제를 끌어안고 오랜 세월 골머리를 앓는다. 하긴 성삼문은 한술 더 떠 주려 죽을지언정 고사리는 왜 먹었냐고따졌으니, 조선의 선비들이 그 방면에 있어서는 한수 위인 셈.

 

물론 연암의 수양산 스케치에는 그런 비장감보다는 특유의 위트가 넘친다. 관습에 따라 고사리 넣은 닭찜을 얻어먹었는데, 일행 가운데 한 말몰이꾼이 배탈이 나, 숙제를 숙채(熟菜, 삶은 나물)로 잘못 알아듣고 백이, 숙채가 사람 죽인다[伯夷熟菜殺人]”고 한바탕 소동을 벌였다나. 어떤 엄숙한 테마도 경쾌한 놀이로 변환하는 호모 루덴스’, 연암!

 

헌데, 고속도로를 벗어나 꼬불꼬불한 황토길을 꽤나 갔는데도 도무지 수양산이 나타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하교길인지 황토바람을 뚫고 청소년들이 무리지어 지나간다. 답답한 심정에 저만치 홀로 자전거를 타고 가는 청년을 붙들어 세웠다. 해맑은 표정이 마치 황무지에 핀 야생초 같다. 학생이 아니라 그곳 고등학교 역사선생이란다. , 이렇게 반가울 데가!

 

그는 한참 설명을 듣더니 바로 지척을 가리킨다. 거기에 나무는커녕 풀 한 포기 없는 황토더미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맙소사! 저게 수양산이라고? “백이, 숙제가 고사리를 먹다 죽은 게 아니라, 고사리도 못 먹어서 굶어 죽은 게 아닐까요?” 누군가 유머랍시고 구사했으나 아무도 웃지 않는다. 청년의 자상한 설명이 계속 이어진다. 이제묘는 사라졌고, 그 위에 강철공장이 들어섰다는.

 

휑한 가슴을 추스르며 좀더 들어갔더니, 건너편 기슭에서 시뻘건 불을 내뿜는 강철공장이 몰골을 드러낸다. 마치 애니매이션 공포물에 나오는 악마의 소굴같다. 그 아래, 연암이 맑은 빛이 거울같다고 했던 난하(灤河)’는 말라 비틀어져 형체만 덩그라니 남아있다. 황토바람에 공장의 매연이 뒤섞여 눈을 제대로 뜰 수가 없어 한참을 허둥대고 있는데, 한 농민이 노새가 끄는 마차를 타고 태연하게 지나간다. 순간, 시야가 뿌예지면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설움이 북받쳐 오른다.

 

, 이런 곳에서도 사람이 살고 있구나! 여기에 사는 사람들도 이 황량한 산하를 고향이라는 이름으로 추억할까? 또 정치적 이유로 실향민이 된다면, 일평생 이곳을 그리워하며 돌아오기 위해 몸부림칠까? 탄광촌 막장에서도 마주치기 어려운, 숨쉬기조차 힘든 이 지옥 같은 풍경들을, ‘이미지의 몰락’, ‘역사의 덧없음따위를 떠올리는 것조차 유치한 감상이 되어버리는 표상의 외부지대’! 고향이라는 의미로 결코 담을 수 없는 아, 모진 목숨들의 거처. 수양산은 없다! 백이, 숙제도 없다! 다만, 거기엔 사람이 살고 있을 뿐.

 

돌아 나오는 길, 차창 밖엔 어둠이 짙게 깔렸다. 흙먼지를 뒤집어쓴 채 자전거를 타고가는 야생초 청년의 뒷모습이 눈동자에 오롯이 박힌다. 그는 지금 어디로가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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