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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열하일기의 길을 가다(2003년 봄) - 낙타여! 낙타여! 본문

문집/열하일기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열하일기의 길을 가다(2003년 봄) - 낙타여! 낙타여!

건방진방랑자 2021. 7. 11.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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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타여! 낙타여!

 

 

찾았다!”

 

열하에서 돌아오는 길, 승합차 뒷좌석에서 L이 갑자기 소리쳤다. 그러고는 열하일기의 한 페이지를 내 코앞에 들이밀었다. 놀랍게도 거기엔 연암이 수천 마리의 낙타떼를 목격하는 장면이 또렷이 서술되어 있었다. 순간 등골이 오싹했다.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초판에서 연암이 낙타를 번번이 놓쳤다고 썼기 때문이다. 그간 열하일기를 수도 없이 읽어댔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텍스트 좀 제대로 읽으세요.”

 

L은 의기양양, 기고만장이다. , 안 그래도 여행 내내 건건사사 신경전을 벌이는 도중이었는데. 이 결정타 앞에서 나는 허무하게 무너지고 말았다. 쓰라린 가슴을 쓸어내리는데, 이건 또 어인 곡절인가. 가슴 저 밑바닥이 뭉클해진다. 전공도 다르고, 이번 여행 안내를 위해 처음 열하일기를 봤을 뿐인데도 저토록 세심하게 짚어내다니, 상처는 상처고, 그와는 별개로 내 삶의 일부가 되어버린 열하일기를 열심히 읽었다는 사실에는 그저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걸 쓰라린 감동이라고 하는 건가. 적과 동지는 한끗 차이라더니, 허참.

 

동물에 대한 연암의 관찰력과 애정은 각별하다. 그는 이국의 벗들과 중화문명의 정수를 접할 때와 똑같은 열정으로 동물들과 접속한다. 낙타와 코끼리를 비롯하여 사슴의 몸에 가는 꼬리가 있는 반양(盤羊), 사람의 말을 능히 알아듣는 납최조(蠟嘴鳥) 열하일기에는 웬만한 동물 다큐멘터리 뺨칠 정도로 이색적 동물들이 출몰한다. 연암에게 동물이란 단지 호기심의 대상이 아니다. 그는 동물을 통해 사유의 깊은 심해를 탐사한다. 당대 최고의 문장으로 손꼽히는 상기(象記)는 코끼리의 형상을 주역에 빗대어 서술한 것이고, 그 유명한 호질(虎叱)역시 호랑이의 눈을 통해 인간세계의 비루함을 갈파한 텍스트다. 들뢰즈/가타리는 말한다. ‘동물-되기란 인간과 동물이 서로를 횡단하면서 변용시키는 실재적 과정이라고. 그렇다면 연암은 가장 드높은 차원에서 동물-되기를 시도한 셈이다. 단순한 횡단이 아니라, 인간과 동물의 경계를 넘어 우주적 비전을 펼치고 있다는 점에서.

 

처음 베이징에 입성하자마자 동물원을 찾았던 것도 이런 맥락에서였다. 베이징 동물원에 간판스타인 팬더에서 아프리카 세렝게티의 누우, 인디언과 함께 아메리카 평원에서 사라진 버팔로 등 진기한 야생동물들로 그득했다. 특히 연암으로 하여금 경탄을 금치 못하게 했던 코끼리의 모습은 여전히 감동적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더이상 연암이 접속했던 그 동물들이 아니다. 자신의 고유한 특이성으로 인간을 변용시키는 존재가 아니라, 다만 인간화된 변종들일 뿐이다. 야생동물에 대한 인간의 완벽한 승리! 하지만 이 승리는 너무나 많은 걸 앗아갔다. 인간은 더 이상 동물과 감응하지도, 동물의 신체적 에너지와 분포를 확보하지도 못한다. 동물을 가두는 순간, 인간 역시 스스로의 감옥 안에 갇혀버린 것. 인간과 동물 사이의 이 철옹성을 부수지 않는 한, 우리의 삶과 사유는 결코 새로운 경계를 확보할 수 없으리라.

 

차창 밖으로 보이는 노새와 양떼들을 보며 우울한 상념에 빠져 있는데, 일행들이 저녁요리를 놓고 옥신각신한다. 순간, 내 눈꼬리가 올라간다. “아무거나 먹어! 사소한 일에 집착하기는.” 그러자 L이 즉각 그러니까 낙타를 놓쳤죠. 입 다물고 계세요.”하며 상처에 왕소금을 뿌려댄다. 나는 곧 침묵한다. , 낙타여! 낙타여!

 

 

 

 

 

인용

목차

열하일기

문체반정

박지원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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