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령의 여인과 경허
이제 마지막으로 한 소식만 더 하고, 나도 이 버거운 깨달음의 이야기들을 벗어날까 합니다.
동학혁명의 열기도 가라앉고, 해월이 교수형을 당한 무술년(1898) 겨울 어느 날, 찬바람이 무섭게 불어제치고 희끗희끗한 눈발이 날리는 저녁 무렵 천장사를 찾아든 젊은 여자가 하나 있었습니다. 얼굴을 보자기로 감싼 이 묘령의 여인은 두 눈만 보일 듯 말 듯 내놓은 채, 그 초라한 행색이 걸인에 다름없었습니다. 경내를 몇 번 살피다가 두리번거리더니 경허의 방문을 두드렸습니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거 밖에 누가 왔느냐?”
“여보세요, 문 좀 열어주세요.”
경허가 방문을 여니 여자는 온몸을 떨며 서있었습니다.
“스님 제발 저를 방안으로 좀 들어가게 해주세요. 추워서 얼어 죽을 것만 같아요. 스님.”
경허는 선뜻 방안에 들어오도록 허락합니다. 그런데 시봉을 들던 사미승이 그 광경을 보고 말았습니다. 눈이 솔방울만 해져서 만공에게 달려갔습니다.
“스님 스님 저 좀 보십시오.”
“뭔 일이냐? 조실스님께서 날 찾으시든?”
“그게 아니옵고 ……”
“그럼 무슨 일인데 그러느냐?”
“이 말씀을 드려야할지 어떨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
출가한 수도자가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이 여색이요 애욕이며, 수도의 가장 무서운 장애가 성욕이라는 것은 초기 승단의 계율로서 대대로 강조되어온 것입니다. 그런데 묘령의 여인이 경허의 방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으니 이는 결코 불문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무슨 일인데 그러느냐. 어서 말해보도록 하여라.”
“저어 ~ 조실스님 방에 손님이 한 분 들어가셨는데요. 실은 그 손님이 좀 이상한 손님이라서요.”
“이상한 손님이라니 그게 뭔 말이냐?”
“여자분이십니다.”
“뭣! 여자?”
“쉿, 조실스님 방에까지 들리겠습니다.”
“아니 그게 정말이냐? 틀림없이 보았단 말이냐?”
“제 눈으로 똑똑히 보았습죠. 치마를 입고 얼굴은 보자기로 가린 젊은 여자였습니다.”
“네가 뭘 잘못 봤겠지. 설마 조실스님께서 여자를 방에 들이시기야 하겠느냐?”
“못 믿으시겠거든 직접 가보시면 알 것 아닙니까?”
“이 말을 누구에게도 발설치 말 것이다.”
만공은 설마 하는 마음으로 경허의 방으로 살며시 다가가 귀를 기울였습니다. 인기척에 민감한 경허가 먼저 소리칩니다.
“밖에 누가 와있으렷다!”
“소승이옵니다. 손님이 오신 것 같다기에.“
”내 그러지 않아도 부르려던 참이었다. 가까이 오너라.”
“예. 차라도 끓여 올릴까요?”
“차는 필요없다. 빨리 저녁상을 봐와야 할 것이니라.”
“알겠습니다. 스님.”
“그리구 내가 미리 일러둘 것이 있으니 명심해서 어김이 없어야 할 것이니라.”
“분부만 내리십시오.”
“내가 따로 허락하기 전에는 내 방에 들어오지 말 것이며, 방문 앞에서 기웃거리지도 말 것이며, 방안에서 하는 이야기를 엿듣지도 말아야 할 것이니라.”
“스님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오늘 공양상이 준비되었거든 방문 앞에 놓고 돌아갈 것이요, 매일 아침상은 겸상으로 차려서 가져와야 할 것이니라.”
“하오면 스님, 손님께서는 오늘밤 여기서 묵고 가시게 되옵니까?”
“그러기에 아침공양을 준비하라 이르지 않았느냐?”
“아, 죄송합니다.”
“내가 왜 이렇게 엄히 분부하는지 짐작을 하겠는가?”
“그저 조실스님 분부대로 지키기만 하겠사옵니다.”
“내 방에는 지금 젊은 여자가 손님으로 와있느니라. 그리 알고 내가 이른 대로 어김 없이 시행해야 할 것이니라. 알겠느냐?”
제자 만공은 경허의 말을 듣는 순간, 눈앞이 캄캄해졌습니다. 아아~ 이 일을 어찌 하면 좋단 말인가! 술을 드시지 않나, 아무 앞에서나 옷을 훨훨 벗어던지시질 않나, 이번에는 또 여색까지 범하실 모양이니 대체 이를 어찌 하면 좋단 말가!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계율을 파하는 경허의 파격은 너무 과격하여 만공의 탄식은 깊어만 갔습니다. 경허가 여자를 방에 들여놓고 여러 날이 지나자, 자연 절식구들이 모두 그 사실을 알게 되었고, 있어서는 아니 될 일을 지켜보던 대중들은 마음이 흔들렸습니다. 마침내 이 사실을 알게 된 주지스님은 크게 노하였습니다.
“조실스님, 아침 공양상 갖다 놨습니다.”
“알았으니 거기 놓았거든 물러가 있어야 할 것이니라.”
“조실스님 ―”
“내 말이 들리지 않았느냐?”
“잘 듣고 있사옵니다.”
“그러면 애당초 내가 이른 말을 벌써 다 잊었단 말인가?“
“하오나 스님, 주지스님의 저 독경소리가 들리지 않사옵니까?”
“독경소리가 뭐가 어쨌다는 것이냐?”
“조실스님 방에 여자가 있다는 것을 주지스님도 알고 계십니다. 주지스님만 알고 계시는 것이 아니라, 여러 대중들도 다 알게 되었습니다.”
“잘하는 짓들이구나! 기왕이면 홍주는 물론 호서 일대에 소문을 쫘악 퍼뜨리지 그랬느냐, 천장사 경허가 망령이 들어 계율을 어기고 여색까지 탐하고 있다고 말이다.”
“하오나 스님.”
“듣기 싫으니 썩 물러가거라.”
“스님께서 노여워하실 일이 아닌 줄 아옵니다. 조실스님께서 아무리 경계를 넘으셨고 무애의 만행을 하신다 해도 이번 일은 백번 지나치신 것 같사옵니다. 혜량하여 주시옵소서.”
만공의 애원에도 불구하고 경하는 여자를 내보내지 않았습니다. 이런 가운데 열흘이 지나자 제자들은 도저히 더 이상 참을 수 없다 하여 분기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스님 스님 큰일났습니다.”
사미승이 달려와 애원하듯 경허를 부릅니다.
“왜 그러느냐?”
“큰일났습니다. 대중들이 몰려오고 있습니다. 방안에 있는 여자를 내쫓지 않으면 조실스님까지 내쫓겠다고 합니다.”
“여자를 내치지 않으면 날 내쫓겠다고?”
경허가 문을 열고 내다보니 대중들이 몰려오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습니다.
만공이 경허에게 간곡하게 청합니다.
“스님 제발 부탁이오니 이제 그만 여자를 밖으로 내치시옵소서.”
“그래 내치지 않겠다면 날 이 절에서 내쫓겠다?”
“그러하옵니다. 스님.”
어느새 몰려든 제자들 중의 한 명이 경허에게 따져 물었습니다. 그
묻는 태도가 여간 당당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조실스님이시지만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립니까? 술 마시는 것만 해도 파계행위이거늘 이젠 여색까지 범하시다니 세상에 이게 출가사문이 할 짓입니까?”
두 눈을 지그시 감은 경허는 제자들 앞에 우두커니 서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때였습니다. 방안에 있던 묘령의 여자, 바로 그 여자가 밖으로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응~ 바로 이 여자였구만 그래! 응~”
대중들은 혀를 차며 웅성거렸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 스님네들, 제가 바로 스님 방에서 열흘 넘게 신세를 진 바로 그 여자이옵니다.”
경하는 그 여자를 바라보며 허허롭게 웃습니다.
“내가 지은 복이 이것밖에 되질 않으니 면목이 없소이다.”
“아니옵니다. 스님! 제가 열흘 동안 스님께 입은 은혜는 제 생애에서 다 갚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경하는 방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습니다. 툇마루에 서있던 여인은 머리에서부터 덮어 얼굴을 가리고 있던 보자기를 벗겨 내렸습니다. 그 순간, 앗차, 그 여자의 문드러진 코와 이지러진 눈썹이며 짓무른 살은 형체를 분간키 어려웠으며 손가락도 다 뭉그러져 있었습니다. 나병 말기환자였던 것입니다. 여자의 곁은 심한 악취로 인해 아무도
다가갈 수조차 없었습니다.
“아니 세상에 이럴 수가!”
“아니 스님, 이게 대체 어찌 된 일이오니이까?”
여자를 내쫓고자 몰려온 제자들은 순간 할 말을 잊고 말았습니다.
“보시다시피 저는 몹쓸 병에 걸려 얼굴도 짓물러 터지고 코도 손가락도 발가락도 뭉개져버린 이런 여자입니다. 춥고 배가 고파 구걸을 나가도 모두 더럽고 징그럽다고 기피할 뿐 어느 누구도 찬밥 한 덩이 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생각다 못해 스님 방까지 두드리게 되었습니다. 스님께서는 제 언 몸을 녹여주시고 밥을 손수 먹여주셨으며 냄새나는 고름과 진물을 닦아주셨습니다. 평생 이런 호강은 처음입니다.”
말을 하던 여자는 끝내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습니다.
“스님, 저 세상에 가서라도 이 큰 은혜는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여자가 눈물을 흘리며 흐느끼며 천장사를 떠난 뒤 제자들은 경허의 방문 앞에서 무릎을 꿇었습니다. 제자들은 어깨를 들썩이며 하염 없이 뜨거운 눈물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드디어 방문이 열리고 경허가 밖으로 나왔습니다. 한 손에는 주장자(柱杖子), 등에는 걸망 하나 걸머진 모습이었습니다.
“스님, 이 어리석은 중생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인연 없는 중생은 백년을 함께 살아도 아무 소용이 없느니라.”
“스님, 떠나시면 아니 되옵니다. 스님 저희들이 미망에 사로잡혀 잘못했사오니 차라리 저희들을 죽여주시옵소서, 스님!”
애처롭게 땅바닥에 무릎 꿇고 비는 제자들의 회한도 스님의 발걸음을 돌릴 수는 없었습니다. 경허 스님은 이렇게 천장사를 떠났습니다.
그리고 다시 돌아오시지 않으셨습니다.
이상 경허에 관한 기술은 내가 많은 책을 참고하였지만 다음의 3권만은 언급해두어야겠다.
1. 윤청광 지음, 「BBS 고승열전 11. 경허큰스님』, 서울: 우리출판사, 2011.
2. 일지 글, 「술에 취해 꽃밭에 누운 선승, 서울: 민족사, 2012.
3. 경허성우선사법어집간행회, 『鏡虛法語』, 서울: 인물연구소, 1981.
경허의 대화구성에 관하여 나는 윤청광 선생의 책을 많이 활용하였다. 매우 명료하게 그 맥락을 잡아 설명한 그의 언어는 사계에 공헌한 바 크다 하겠다.
그러나 경허의 삶에 관해서는 어차피 정밀한 크로놀로지(Chronology, 연대기)의 기술이 불가능하다는 것만을 부기해둔다. 일지는 나의 애제자였는데, 그만 46세의 젊은 나이로 입적하였다. 해맑은 그의 웃음과 얼굴이 항상 나에게 그리움을 불러일으킨다. 정밀한 학식의 소유자였고 선의 경지도 비범하였다. 이 자리를 빌어 그를 기억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과 함께 애도의 뜻을 전한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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