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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스무살 반야심경에 미치다, 3장 싯달타에서 대승불교까지 - 득도와 화두 본문

고전/불경

스무살 반야심경에 미치다, 3장 싯달타에서 대승불교까지 - 득도와 화두

건방진방랑자 2021. 7. 13. 1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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득도와 화두

 

 

생각해보세요! 여기 스님이 한 분 있다고 합시다. 왜 이 사람을 스님이라고 우리가 존경을 할까요? 우선 스님이 됐다고 하는 것은 수계(受戒)’를 의미합니다. 즉 계를 받아야 스님이 되는 것입니다. 스님이 된다는 것은 계율을 지키는 것입니다. 인간은 섹스를 좋아하고 올가즘에 도달했을 때의 쾌감을 양보할 수 없는 인생의 도락으로 엔죠이합니다. 그런데 이토록 참기 어려운 쾌락의 향유를 근원적으로 포기한다, 왜 그럴까요? 득도를 위해, 깨달음을 얻기 위해? 하여튼 보통 사람이 실천하기 어려운 매우 근원적인 금욕을 실천하는 사람, 그 고통을 감내하기 때문에 우리는 스님이나 신부를, 비구니나 수녀를 존경하게 되는 것이죠. 스님이 색이나 밝히고 돌아다닌다고 한다면 우리가 왜 그들을 존경해야 할까요? 계율은 스님을 스님다웁게 만드는 기본적 덕목입니다.

 

경허가 과연 막행막식의 인간일까요?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에게는 반계율적 행위라고 하기보다는 초계율적 행동 같은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행위에서 나는 인간에 대한 무한한 연민, 매우 심오한 슬픔 같은 것을 느낍니다. 경허는 슬퍼요! 그러나 경허만큼 자기 디시플린(discipline, 기강)이 확실한 사람도 없어요.

 

내가 명진 스님을 친구로 대하는 것도 그에게는 계율이 있기 때문입니다. 남들이 지키기 어려운 계율을 초연히 지키기 때문이죠. 일상적 삶에서 자기 디시플린이 확실한 사람이죠. 정의로운 언행 때문에 승적까지 박탈당했으면서도 꿋꿋하게 깨끗하게 살고 있습니다.

 

내가 말하려는 것은 스님이 스님이 되려고 하면 반드시 계ㆍ정ㆍ혜의 삼학을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초기불교에서부터 확고히 규정된 것입니다. 선불교라는 것이 따로 독립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계ㆍ정ㆍ혜의 정()이 곧 선입니다. 이 선정을 철저히 행하는 사람들이 남겨놓은 삶의 일화들이 화두(話頭)’일 뿐이죠. 화두를 통해서 득도를 한다? 나는 간화선(看話禪)? 그따위 것은 개밥통에나 집어넣어라! 그렇게 말합니다.

 

는 그냥 이야기입니다. ‘머리라는 뜻이 아니죠. 백화적 용법으로 별 의미가 없는 접미사예요. 나무만 해도 (mu)’라 하면 될 것을 木頭(mutou)’라 하고, ‘(shi)’라 하면 될 것을 石頭(shitou)’라 하거든요. 그러니까 화두(huatou)’는 그냥 (hua)’, 즉 이야기일 뿐예요. 거기에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게 아니죠. 그냥 구라. 조금 더 리얼하게 말하면 개구라. 선을 많이 했다고 하는 선사들이 삶의 굽이굽이에서 내뱉는 개구라죠. 그 개구라를 받아서 득도를 한다? 웃기는 얘기죠. 득도라는 것은 오직 자기 삶의 느낌에서 나오는 것이고, 그 느낌의 심화는 의 공부에서 생기는 것이지 간화(看話)’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다. 삼학에 이미 선종과 교종이 다 들어있는 것이죠. 뿐만 아니라 대장경이 다 들어있는 것이죠.

 

 

 

 

인용

목차

반야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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