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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시네필 다이어리, 뷰티풀 마인드와 칼 구스타프 융(Carl Gustav Jung)[내 안의 메피스토펠레스와 사랑에 빠지다] - 15. 의식의 보호관찰을 거부하는 무의식: 조금씩 친밀해져야 할 내 안의 또 다른 .. 본문

책/철학(哲學)

시네필 다이어리, 뷰티풀 마인드와 칼 구스타프 융(Carl Gustav Jung)[내 안의 메피스토펠레스와 사랑에 빠지다] - 15. 의식의 보호관찰을 거부하는 무의식: 조금씩 친밀해져야 할 내 안의 또 다른 ..

건방진방랑자 2021. 7. 24. 1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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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의식의 보호관찰을 거부하는 무의식: 조금씩 친밀해져야 할 내 안의 또 다른 나를 돌보다

 

 

어느 랍비에 관한 오래된 훌륭한 이야기가 있다. 그의 제자가 와서 이렇게 물었다. “옛날에는 하느님을 대면하여 본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왜 그렇지 못합니까?” 랍비가 대답했다. “오늘날에는 그럴 정도로 허리를 깊이 굽힐 줄 아는 사람이 더 이상 없기 때문이다.”

-칼 융, 조성기 역, 기억, , 사상, 김영사, 2007, 623.

 

 

비밀로 인해 전전긍긍(戰戰兢兢)하느라 황폐해지는 영혼이 있다면, 비밀로 인해 더욱 풍요로워지는 영혼이 있다. 내쉬가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무의식으로부터 끊임없이 도피했다면, 융은 무의식조차 자신의 응원군으로 삼았다. 무의식의 선연한 존재를 좀 더 일찍 의식의 수면 위로 끌어올렸던 융은 무의식의 폭발적인 잠재력을 예감했다. 그는 부모에게도 친구에게도 스승에게도 좀처럼 이해받지 못한 어린 시절부터 이미 무의식의 또 다른 자아를 양육하기 시작했다. 일곱 살에서 아홉 살 사이에 이미 나 자신과의 불화거대한 세계 속에서의 불확실성을 느꼈다고 하니, 이 아이는 조숙하다 못해 조로했던 셈이다.

 

초등학교 시절 융은 프록코트와 높은 모자에 광택 나는 검정 구두를 신은 길이 6센티미터 정도의 남자 인형을 만들었다. 인형을 잉크로 까맣게 칠하고 필통을 인형의 집으로 삼았으며 인형 침대까지 만들었다. 인형 옆에는 라인강에서 주워온 매끄러운 검은 돌을 놓아두었다. 소년 융은 앙큼하게도 자기만의 비밀스러운 세계를 준비했는데, 말하자면 1의 인격이 위로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2의 인격이 남몰래 숨 쉴 수 있는 공간을 따로 만든 셈이었다. 그 인형이 출입 금지되어 있는 다락방, 아무도 모르는 곳에 숨겨져 있다는 것이 중요했다. 그는 고독하고 침울해질 때마다 그 인형과 매끄러운 돌을 생각했다.

 

현실 속의 나는 상처받고 아파해도 그의 분신이었던 까만 인형은 든든하게 늘 그 자리에 있어준다는 사실이 뿌듯했다. 그에게 인형과 만나는 일, 인형이 잘 있을 거라고 상상하는 일, 인형의 집을 관리하는 일은 아직은 잘 알지 못하는 무의식의 자아를 돌보고 가꾸는 혼자만의 제의적 행위였다. 엄격한 목사였던 융의 아버지가 만약 이 일을 알았다면 노발대발했을 지도 모를 일이다. 이 아이의 인형 놀이는 다분히 밀교적이며 신비주의적인 분위기로 가득 차 있으니 말이다.

 

 

나는 어떤 사람도 그 필통을 거기서 발견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았다. 아무도 나의 비밀을 발견하여 망가뜨릴 수 없었다. 나는 안정감을 갖게 되었고 나 자신과의 불화로 인한 괴로운 감정은 사라졌다. (……) 나는 아무도 나를 보지 않는다는 확신이 들 때만, 보통 일주일 간격으로 종종 몰래 꼭대기 다락방으로 올라갔다. (……) 나는 미리 어떤 글을 써놓은 작은 종이 두루마리를 필통 속에 넣었다. 그 글은 내가 고안해낸 비밀 문자로 학교 수업시간에 적어둔 것이었다. 그것은 작은 종잇조각이었는데, 빽빽하게 글을 써서는 돌돌 말아서 그 남자 인형이 보관하고 있도록 그에게 전달되었다. 새로운 종이 두루마리 하나를 보탠다는 것은 항상 엄숙한 의식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고 기억된다.

-칼 융, 조성기 역, 기억, , 사상, 김영사, 49.

 

 

소년 융은 비밀 문자까지 만들어 자신의 소중한 메시지를 인형이 보관할 수 있도록 하는 의식을 치르며 마음의 평화를 얻었다. 까만 인형은 그에게 있어 무의식의 도서관을 관리하는 사서 역할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도 알지 못하며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그 무언가를 소유했다는 데서 오는 자신감과 충만함으로 소년 융은 행복했다. 융의 자신감의 원천이 바로 그 비밀 도서관, 즉 무의식의 각종 정보들로 가득 찬 데이터베이스에서 비롯된 셈이다. 까만 인형은 무의식의 비밀을 물질적으로 형상화하려는 최초의 시도였던 셈이다.

 

융에게 무의식은 기피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조금씩 친밀해져야 할 내 안의 또 다른 나였다. 그 까만 인형은 자기 내부의 분열된 자아를 물질화하고 그리하여 그것을 의식의 장에서 시각화하는 행위였다. 융은 해결되지 않은 무의식, 재활용조차 불가능해 보이는 버려진 무의식에 불현듯 역습을 당한 내쉬와 달리, 의식과 무의식 사이의 보이지 않는 칸막이를 천천히 닦아내어 조금씩 투명해진 칸막이 너머로 보이는 무의식의 무늬를 관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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