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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도올선생 중용강의 - 13장 본문

고전/대학&학기&중용

도올선생 중용강의 - 13장

건방진방랑자 2021. 9. 17. 1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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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 도는 가까이 있다

 

 

子曰: “道不遠人. 人之爲道而遠人, 不可以爲道.
공자가 말하기를 도()는 사람에게서 멀리 있는 것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사람이 도()를 행할 때는 그것이 멀리 있는 것처럼 한다. 그렇게 해가지고는 도()를 실천할 수 없다.
 
道者, 率性而已. 固衆人之所能知能行者也, 故常不遠於人.
()라는 것은 본성을 따를 뿐이다. 진실로 여러 사람이 알 수 있고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항상 사람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것이다.
 
若爲道者, 厭其卑近以爲不足爲, 而反務爲高遠難行之事, 則非所以爲道矣.
그런데 만약 도를 행하는 사람이 비근함을 싫어하여 행하기에 부족하다고 생각하여 도리어 고원하여 행하기 어려운 일에 힘쓴다면 도를 행할 수가 없다.

 

()’을 보통 타동사로 멀리하다로 하는데, 여기에서는 자동사적인 용법으로 멀리 있다로 해석합니다.

 

인지위도원인(人之爲道遠人)’사람이 도()를 실천함에 있어서 사람으로부터 멀리 있게시리 한다. , 자꾸만 도()는 사람에게서 멀리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요원한 것을 추구한다.’는 것이죠.

 

학문을 하든, 무엇을 하든 도()의 현실은 불원(不遠)이나, 위도(爲道), 유독 사람이 도()를 행할 때 그것이 멀리 있는 것처럼 한다는 지적이죠. ‘도불원인(道不遠人)’의 도()는 현실적인 도(), ‘인지위도이원인(人之爲道而遠人)’의 도()는 인간이 생각하는 도()입니다. ‘불가이위도(不可以爲道)’

 

주자 주에 도자솔성이의(道者率性而己)’, 또 중용(中庸) 1장에 천명지위성 솔성지위도(天命之謂性 率性之謂道)’를 보면 도()라는 것은 그 본성을 따르는 것이죠? 그러니까 ()’, 본성이라는 것은 나에게 내재하는 겁니다. ‘()라고 하는 것은 본성을 따르는 것이고, 뭇 사람이 다 가지고 있고, 원래 있는 것, 능히 알 수 있고, 능히 행할 수 있는 것이다[道者率性而己 固衆人之所能知能行者也].’라고 주자(1130-1200)가 이야기를 했지만, 왕양명(1472-1528)양지양능설(良知良能說)’에서 그 사상이 더욱 강조되었습니다.

만약 도()를 행하는 자가 가까이 있고() 일상적인 것()을 싫어하여 이는 족히 할 것이 못 된다 하고[若爲道者厭其卑近 以爲不足爲]’

그리고 높고 멀고 행하기 어려운 일만 일삼는다면 도()를 행하는 까닭이 될 수가 없는 것이다[而反務爲高遠行之事 則非所以爲道矣].’

 

첫 시간에 중용(中庸)을 한 마디로 한다면 뭐라고 했죠? ‘똥을 잘 싸는 것이다!’라고 했는데, 사람들은 오히려 그렇게 비근(卑近)한 게 도()가 될 수 있느냐고 반문할 겁니다. 그게 도()를 먼 곳에서 찾는 사람들이 흔히 저지르기 쉬운 오류죠. 헤겔은 인류역사란 절대정신을 구현한다는 데에 그 목적이 있다고 했는데, 하지만 김용옥의 중용(中庸)의 역사관으로 말하면, 첫 시간에 말한 대로 인류의 역사는 영원히 똥을 잘 싸는데 달려 있다 이 말입니다. 중용론(中庸論)이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니지만, 그 사상을 꿰뚫을 수만 있다면, 나는 이 중용론(中庸論)이야말로 인류역사를 지배할 가장 위대한 사상이고, 근세 계몽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사상이라고 생각합니다.

 

 

 

 

132. 동양의 교육론

 

 

詩云: ‘伐柯伐柯, 其則不遠.’ 執柯以伐柯, 睨而視之, 猶以爲遠. 故君子以人治人, 改而止.
시경(詩經)에서 말하기를: ‘아 도끼자루를 만들지 도끼자루를 만들지, 그런데 그 법칙이 먼 데 있는 게 아니구나!’라고 했다. 도끼자루를 잡고 (도끼질하여) 도끼자루를 깍고 있으니, 그냥 한번 흘깃 보면 그 모양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멀리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군자가 사람으로써 사람을 다스릴 때 고치기만 하면 그만두어라.
 
, 豳風伐柯之篇. , 斧柄. , 法也. , 邪視也.
()빈풍벌가의 편이다. ()는 도끼자루다. ()은 법칙이다. ()는 흘려본다는 것이다.
 
言人執柯伐木以爲柯者, 彼柯長短之法, 在此柯耳. 然猶有彼此之別, 故伐者視之猶以爲遠也.
사람이 도끼자루를 잡고 나무를 베어 도끼자루를 만드는데 저 도끼자루 길이의 법칙이 이 도끼자루에 있을 뿐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오히려 저것 이것엔 분별이 있다고 생각해서 벌목하는 사람이 그것을 보고도 오히려 멀리 있다고 생각한다.
 
若以人治人, 則所以爲人之道, 各在當人之身, 初無彼此之別.
사람으로 사람을 다스린다는 것은 사람됨의 도가 각각 마땅히 사람의 몸에 있어 처음엔 저것과 이것의 분별이 없다.
 
故君子之治人也, 卽以其人之道, 還治其人之身. 其人能改, 卽止不治.
그렇기 때문에 군자가 사람을 다스리는 것은 곧 그 사람의 도로써 하여 다시 그 사람의 몸을 다스리는 것이다. 그러다가 그 사람이 고쳐졌다면 곧바로 그쳐 다스리지 않는다.
 
蓋責之以其所能知能行, 非欲其遠人以爲道也.
대개 그가 알 수 있고 할 수 있는 것으로 책임 지움이요, 사람에게 먼 것으로 도를 실천하도록 하는 건 아니다.
 
張子所謂, ‘以衆人望人則易從,’ 是也.
장자가 말한 보통 사람을 보듯 사람을 바라보면 따르기 쉽게 된다.’라는 게 이것이다.

 

 

 

시경의 해석학적 문제

 

이것은 시경(詩經)의 구절은 빈풍(豳風)편에 나오는 벌가(伐柯)’ ()인데, 해석을 하기 전에 먼저 시경(詩經)이 갖고 있는 해석학적 문제에 대해서 말을 하겠습니다. 시경(詩經)은 원래 고대인들의 천진난만한 인간의 세계를 담고 있는 것인데, 그게 상당히 왜곡되어 버렸어요. 시경(詩經)사무사(思無邪)’라고 하는데, 그게 생각에 사특함이 없다는 도덕적인 명제로만 해석되고 있습니다.

 

지난 여름에 논어(論語) 강의를 하면서 몇 편 보았지만, 공자시대만 해도 이미 왜곡이 상당히 심했어요. , 공자가 이해한 시경(詩經), 중용(中庸)에 주를 달면서 주자가 해석해 놓은 시경(詩經)이 다릅니다. 물론 시대를 반영하고 개인의 의지를 반영하는 차이겠지만, 원래는 무엇을 의미했었느냐 하는 것은 밝혀내야죠. 그러나 그게 쉽지 않아요. 특히 이 벌가(伐柯)’ ()은 더 그렇습니다. 내 책 나는 불교를 이렇게 본다(304p)에 원효가 이 벌가(伐柯)’ ()을 인용하는 내용이 나오는데, 주자의 해석과는 아주 달라요. 몰가부(沒柯斧)라고 그랬죠. “도끼 자루가 없는 도끼를 누가 나에게 주겠느냐. 나는 그 도끼로 하늘의 기둥을 깎겠다.”라고 해석을 합니다. 그러나 나는 주자가 해석한 대로 하겠어요. 그리고 다음에 최영애 교수를 모셔다가 시경(詩經)을 들을 때 더 자세히 하도록 합시다.

 

()’라는 것은 ()’변이 들어가 있어서, 도끼자루 입니다. 도끼에 구멍이 있죠? 거기에 자루를 끼워서 지금 다른 하나의 새로운 도끼자루를 깎고 있는 겁니다. 상상이 됩니까? 그런데 도끼자루를 만드는 도구가 뭡니까? 도끼죠! 그러면, 도끼자루를 만드는 데 소용되는 도끼자루의 법칙, 사이즈라든가 굵기라든가, 이런 것은 자기가 도구로 쓰고 있는 도끼의 자루를 보면 알거 아니겠습니까? 다시 봅시다. 그러니까 주자는 이 벌가(伐柯)’ ()()가 가까운 데 있는 것을 모르고 밖에서 구한다라는 것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을 했는데, 정말 그랬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옛날에 도끼자루를 만드는 것으로 앞 절의 내용을 상징화시키는 그런 비유를 과연 했을까도 싶고, 오히려 도끼의 구멍에 박아 넣을 도끼자루를 깎아 낸다는 것이 성()과 관련되어서, 여자를 정복한다든가 하는 그런 의미가 아니었을까카노오 요시미쯔加納喜光詩經 上pp.512-513 참조.하는 생각도 들지만, 중용(中庸)에 나타나 있는 벌가(伐柯)’ ()에 대한 해석은 주자의 해석 밖에는 없어서 그렇게 읽을 수밖에 없습니다.

 

 

 

방임적 교육과는 다른 동양의 교육론

 

고군자 이인치인 개이지(故君子 以人治人 改而止)’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개이지(改而止)’입니다. 주자 주를 보세요. ‘그 사람이 잘못을 고치면 즉시 그치고 다스리려 하지 말라. 그것은 그가 능히 알 수 있고 능히 행할 수 있는 바로써 책하는 것이며, 사람을 멀리 하여 도()를 행하고자 함이 아니다. 장재(張載)가 말하기를 중인(衆人)으로써 사람을 바라보면 사람들이 따르기 쉽다고 한 것이 이것이다[其人能改 卽止不治 蓋責之以其所能知能行 非欲其遠人以爲道也 張子所謂以衆人望人則易從 是也].’

 

개이지(改而止)’ 사람을 다스릴 때에는 그 사람이 잘못을 고치면 그 다스리는 것을 스톱(Stop)해라, 더 이상 꼬치꼬치 지적해 가면서 다스리려고 하지 마라!

 

삐아제(J. Piaget)니 니일(A.S. Neil)섬머힐(Summerhill)이니 몬테소리(M. Montessori)니 그런 것들이 방임주의적 교육인데, 난 그런 걸 좋아하지 않습니다. 섬머힐 같은 데서는 애들이 피아노 위에 올라가서 놀아도 그냥 두죠. 자기가 피아노 위에서 뛰어 놀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자각할 때까지 내버려둔단 말이요. 이건 완전히 개판입니다. 돈 많은 새끼들의 지랄이라고. 주자 주에 나와 있는 고친다[]’는 것의 의미는 자유방임이 아니라, 그들이 능히 알 수 있고, 능히 행할 수 있는 바를 가지고서 왜 그 능한 바에 못 미치느냐고책망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본성 속에 내재하고 있는 것을 깨닫게 해주면 된다는 것입니다. 교육의 목적이란 그 사람을 도()에서 멀게 하려는 게 아니고, 그 본성에 가지고 있는 능지능행으로 돌아가게 하는 데에 있습니다. 그게 교육하는 목적이라고! 그것으로 방향을 틀면 그 순간에 ‘stop’하는 것을 개이지(改而止)’로 표현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동양의 교육이라고 하면 서당에 앉아서 하늘 천, 따 지 ~’하면서 한문 외우는 것을 먼저 쉽게 연상하게 되어서 그런지, 교육론 자체를 주입식이나 군대식으로 보는데 그건 너무도 어이없는 넌센스죠, 넌센스! 이런 식의 사고 자체에 오류가 있는 게, 동양과 서양을 비교할 때 서로 다른 기준을 들이 댄다는 것입니다. 서양을 말할 때는 몬테소리나 섬머힐의 타락적 측면에 주목하기보다는 슬쩍 지나쳐 버리고 그것의 좋은 측면만을 가지고 구라를 피는 반면에, 동양을 말할 때는 유교의 타락적 측면만을 가지고 씹어대기 바쁜데,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동양 교육론에서 중요한 것은 이러한 양지양능 사상이 뚜렷이 있다는 점입니다. 특히 양명학에서는 이런 기준이 아주 명료하게 서 있어서, 몬테소리고 섬머힐이고 양지양능설(良知良能說)과 비교하게 되면 이야기할 건덕지가 없는 것입니다. 양지양능설(良知良能說)에 다 있는 것이니까. 동양에는 생각보다 그런 래디칼(radical)한 사상이 많습니다. 하다못해 양명 좌파인 이탁오(李卓吾) 같은 사람은 인류의 진리는 동심(童心) 하나 밖에 없다는 사상을 펼쳤거든요. ‘모든 것은 동심으로 돌아가라. 동심의 발현을 방해하는 모든 행위는 사기이고 허위이다.’ 이 말은 이탁오의 유명한 스테이트먼트(Statement)로서, 진시황을 높이는 등 모든 역사적 판단을 뒤엎어 버렸는데, 결국은 그 사화에서 견디지 못하고 감옥에 갇혀 죽습니다. 그것도 그냥 죽지 않고 칼로서 자기 모가지를 팍 자르고 죽었어요. 멋있게 산 인생이죠. 그래서 나는 이탁오를 좋아합니다. 이탁오가 당대의 지식사회의 위선에 항거했던 그 정신을 사랑합니다.

 

주자주에 장자(張橫渠)가 말하기를, (사람을 바라볼 때 얼마나 거룩한 존재인가 하고 고고한 잣대를 들이대어 볼 게 아니라) “평범한 중인(衆人)으로 사람을 바라보라.” 양심선언할 적에 내가 보통사람이 되기를 원한다고 그랬는데, 교육의 목적이라는 게 특별한 사람 만드는 게 아니고 중인으로서 쉽게 따르게 하는 것이지요.

 

 

 

 

 

 

 

133. 인간은 열려 있는 존재

 

 

忠恕違道不遠, 施諸己而不願, 亦勿施於人.
충서는 도()로부터 멀지 않다. 자기에게 베풀어 보아 원하지 않으면 역시 남에게 베풀지 말아라
 
盡己之心爲忠, 推己及人爲恕.
자기의 마음을 다하는 것을 충()이라 하고 자기를 미루어 남에게 미치는 것을 서()라 한다.
 
, 去也, 春秋傳齊師違穀七里之違. 言自此至彼, 相去不遠, 非背而去之之謂也. , 卽其不遠人者是也.
()는 거리이니, 춘추전에서 제나라 군대가 으로부터 7리 떨어져 있다라고 할 때의 위(). 이것으로부터 저것까지의 서로의 거리가 멀지 않다는 뜻이지, 등지고서 떠났다는 말은 아니다. ()가 곧 사람에게서 멀지 않다는 게 이것이다.
 
施諸己而不願, 亦勿施於人, 忠恕之事也. 以己之心度人之心, 未嘗不同, 則道之不遠於人者 可見.
施諸己而不願, 亦勿施於人은 충서(忠恕)의 일이다. 자기의 마음으로 타인의 마음을 헤아려 일찍이 같지 아니함이 없으면 도가 사람에게서 멀지 않다는 것을 볼 수 있다.
 
故己之所不欲, 則勿以施於人, 亦不遠人以爲道之事.
그렇기 때문에 자기가 하고자 하지 않는 것을 남에게 베풀지 않으니, 또한 사람으로서 도를 행하는 일이 멀지 않은 것이다.
 
張子所謂以愛己之心愛人則盡仁,” 是也.
장자가 자기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남을 사랑한다면 인()을 다한다라는 게 이것이다.

 

충서위도불원(忠恕違道不遠)’는 공자의 핵심적 사상으로서 공자사상을 한 마디로 말하면 충서일 뿐이다라고 했었죠. ()이라는 것은 중()에 심(), 즉 자기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것입니다. ()는 타인의 마음[]과 내 마음[]이 같아지는 것[]으로 그래야 용서가 가능해져요. ()을 로열티(Loyalty)로 해석을 하는데, 그것은 내 마음 가장 깊은 데서 우러나오는 감정을 옛날에 신하와 임금에 대한 마음으로 오해해서 그런 것이지만, 사실 그 관계도 원래의 충()의 의미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로얄티도 내면적인 관계에서 생기는 것이지 형식적이거나 지위 때문은 아니니까요.

 

동양윤리는 매우 내면적인 것이라 형식에서 출발하지는 않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베버(M. Weber)동양사상은 내면성이 없다고 한 주장은 아주 잘못된 것입니다. 동양사상은 내면성이 아주 깊습니다. 사실은 그래서 과학 문명을 만들지 못한 것만이 한이지, 내면적 덕성으로 들어가면 서양이 당해낼 수가 없어요.

 

주자 주를 보면, ‘()는 거리라는 뜻이니 곡()나라로부터 7()의 거리다. 이 말은 여기로부터 저기에 이름에 거리가 멀지 않음을 말한 것이다[違 去也 違穀七里之違 言自此至彼].’라는 내용이 있는데, 이 말은 ()는 위배하다는 뜻이 아니고 로부터라는 단순한 전치사이니, 과하게 해석하지 말라.”는 문법적인 설명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프롬(from)’으로 해석하라!” 주자 주는 이렇게 치밀합니다.

 

충서는 도()로부터 멀지 아니 하니, 그것을 자기에게 베풀어 봐서, 원치 아니하면, 남에게도 역시 베풀지 말아라[施諸己 不願 亦勿施於人].” 이 구절은 논어(論語) 위령공(衛靈公)의 다음 구절과 같은 맥락입니다. “其恕乎 其所不欲 勿施於人

 

 

 

 

문법적인 것 또 하나 보죠. 자기라는 말을 쓸 때는 ()’를 쓰지 않고 ()’를 씁니다. ()’은 사람이란 뜻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자기를 제외한 타인을 말하는 것입니다(영어로 말하면 (man)’이 아니라 아더(other)’에 해당). 갑골문에서 ()’이라는 글자를 살펴보면 옛 사람인으로 되어 있는데, 이것은 척추가 아직 덜 굽은 고대 원시인의 걸어가는 옆모습을 나타낸 것으로서, 사람을 옆에서 본다는 것은 자기를 빼 놓은 타인을 말하는 것이지, ‘사람이라는 보편적 용법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거든요. 다시 해석을 해보죠. “자기에게 베풀어 보아서, 자기가 원하는 것이 아니면 남에게도 베풀지 말아라!”

 

여기에 동양인의 훼밀리즘으로서의 보편주의가 있는 것입니다. 무조건 보편적 덕목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의 구체적인 체험을 바탕으로 하는 한편, 또 자기에서 끝나버리는 자아개념이 아니라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의 란 말이죠. 그런데 이게 왜 자꾸 오해되느냐 하면, 내가 삼국통일과 한국통일에서 강조하고, 또 함재봉 교수가 한 이야기지만, 근대 서구 인간관의 가장 큰 맹점은 데카르트로부터 절대적 자아를 형성했다는 데에 있는데, 그것은 개인을 이야기할 때 타인과의 교섭이 완벽하게 끊어진 절대적 자아가 확보될 때에만 그렇다는 것입니다. 이건 미친놈들의 이야기예요! 그런 것은 동양사상에는 없습니다. 라이프니쯔가 모나드이론(monadology), 단자론을 펴면서 개인은 윈도우레스(windowless)’라고 표현했죠.

 

그러나 동양의 자아는 아이덴티티(Identity)를 가지고는 있으면서도 ()’ 이기 때문에 타()와 항상 소통하는 자아라는 게 강조됩니다. 창문이 없는 게(windowless) 아니라 창문이 너무도 많아! , , , , 땀구멍 등등, 이게 모두 창문들이잖아요? 가장 명백한 창문은 몸 구멍들이고, 눈 떠서 보고 있다는 것, 눈이 있다는 것, 이것 자체가 교섭하는 존재임을 그냐ㅇ 말해 주고 있는데, 어떻게 절대적 자아가 있을 수 있습니까? 이렇게 단순한 사실을 관념화해서 무지몽매한 자아개념을 만들었던 것이 서양의 근대 리버럴리즘의 크나큰 오류입니다. 우리는 양면을 봐야죠. 인간 존재는 독립된 존재일 수 없고, 항상 관련된 전체로서의 개체인 것입니다.

 

 

 

 

134. 도덕의 일용성

 

 

君子之道四, 丘未能一焉: 所求乎子, 以事父, 未能也; 所求乎臣, 以事君, 未能也; 所求乎弟, 以事兄, 未能也; 所求乎朋友, 先施之, 未能也. 庸德之行, 庸言之謹, 有所不足, 不敢不勉, 有餘不敢盡. 言顧行, 行顧言, 君子胡不慥慥爾!”
군자의 도()에는 네 가지가 있는데 나는 한 가지도 능하지 못하였다. 자식에게 구하는 바로써 부모를 섬김을 능히 하지 못하였고, 신하에게 구하는 바로써 임금을 섬김을 능히 하지 못하였고, 아우에게 구하는 바로써 형을 섬김을 능히 하지 못하였다. 붕우에게 바라는 바를 먼저 그에게 베푸는 데에 능히 하지 못하였다. 평범한 덕을 행하며 평범한 말을 삼가고, 부족함이 있으면 감히 힘쓰지 아니 할 수가 없고 남는 바가 있어도 그것을 다하지 않는다. 말은 행동을 돌보아야 하고 행동은 항상 말을 되돌아보아야 한다. 그러니 군자가 어찌 독실하지 아니할 수 있겠는가.
 
, 猶責也. 道不遠人, 凡己之所以責人者, 皆道之所當然也. 故反之以自責而自修焉.
()는 요구한다와 같다. 도가 사람에게서 멀리 있지 않으니, 무릇 내가 남에게 요구하는 것이 모두 도의 당연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도리어 스스로에게 요구함으로 닦을 수 있다.
 
, 平常也. 行者, 踐其實. 謹者, 擇其可.
()은 평상이다. ()은 실제적인 것을 실천하는 것이다. ()은 할 수 있는 것을 고르는 것이다.
 
德不足而勉, 則行益力; 言有餘而訒, 則謹益至. 謹之至則言顧行矣, 行之力則行顧言矣.
덕이 부족한데도 부지런히 한다면 행동함에 더욱 힘을 받을 것이고, 말함에 남음이 있더라도 하지 않으면 삼감이 더욱 지극할 것이다. 삼감이 지극하면 말은 행동을 돌아보고, 행동함에 힘을 받으면 행동은 말을 돌아본다.
 
慥慥, 篤實貌. 言君子之言行如此, 豈不慥慥乎! 讚美之也. 凡此皆不遠人以爲道之事.
조조(慥慥)는 독실한 모양이다. 군자의 언행이 이와 같으니, 어찌 독실하지 않겠느냐는 말로 찬미한 것이다. 무릇 이것은 다 사람에게 도를 실천하는 일이 멀지 않다는 것이다.
 
張子所謂以責人之心責己則盡道,” 是也.
장자가 말한 사람에게 요구하는 마음으로 자기에게 요구하면 도를 극진히 한다.’라고 한 것이 이것이다.

 

내 책 절차탁마대기만성에 보면, ()는 공자의 어렸을 적 이름이라는 설명이 나옵니다. ()처럼 평평하게 생긴 머리를 가진 짱구였단 말이죠. 그러니까 어렸을 때 공자의 이름은 공짱구였다는 겁니다. 보통은 공자왈하면서 시작하는데, 이 문장은 왜 라는 이름으로 시작하느냐 하면, 자기가 자기 이야기를 할 때는 항상 자기 이름을 부르는 방식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 “나 짱구는하면서 시작하는 거죠.

 

미능일언(未能一焉)” 이건 겸손의 표현이죠. 우리가 공자를 떠올릴 때, 형식에 너무 치우친 사람 같아서, 혹시 위선자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겠지만, 나는 공자를 느끼면 느낄수록 참으로 인간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따뜻하고 섬세해요. 나도 예전에는 공자를 굉장히 싫어하고 노자를 좋아했었는데, 노자는 아직도 좋지만 지금은 공자도 좋아집니다. 공자에 비하면 맹자(孟子)는 모가 좀 났어요. 공자보다 후대 사람으로서, 패기만만한 위상을 가진 사람이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하여튼 논쟁(argument)을 좋아하고 아주 공격적이에요. 그래서 아무래도 공자보다는 격이 하나 떨어지는 느낌이 강합니다. 그러나 맹자(孟子)도 좋지요. 맹자(孟子), 제후국들의 패도정치를 막고 이상적인 왕도정치를 펼칠 원대한 꿈을 가진, 불타는 정열의 사나이라면, 공자는 세상풍파를 다 겪고 인생의 본질을 꿰뚫은 원숙의 사나이입니다.

 

논어(論語) 헌문(憲問)을 보십시오. “子曰 君子道者三 無我能焉 仁者不憂 知者不惑 勇者不懼중용(中庸)에서는 군자의 도()가 네 가지였는데 논어(論語)에서는 세 가지로 나와 있습니다. 그러니까 논어(論語)의 지()ㆍ인()ㆍ용() 삼도(三道)와 중용(中庸)의 군자지도사(君子之道四)와는 같은 프라그먼트(Fragment, 파편)로 볼 수 있는 거죠.

 

13장 본문을 해석하면, “군자지도는 네 가지가 있는데, 나 짱구는 하나도 능하지 못하다. 자식에게서 구하는 바로써 부모를 섬기는 데에 아직 능하지 못하다.” 일반적인 용법으로는, 여기에서 ()’자의 위치가 소구호자(所求乎子)’ 앞으로 가야 하는데 뒤에 있습니다. 해석할 때 조심하십시오. ‘()’아직 하지 못하였다로 해석하는데, 아직이라는 의미가 아직 시작조차 못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아직 도달하지 못하였을 뿐이지 계속해서 능()하려고 노력한다는 뉘앙스가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1에서 중()이라는 것은 대본(大本)이고, ()라는 것은 달도(達道)라고 했죠? 중용(中庸)이라는 것은 달도(達道)의 세계, 즉 도달하려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세계의 모습입니다.

 

성자천지도야 성지자인지도야(誠者天之道也 誠之者人之道也)”라는 구절이 20에 나오는데, 이 구절이 중용(中庸)이원론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구절입니다. 문법적으로 ()’의 해석이 중요한데, 이것을 제대로 하는 사람 없는 것 같아요. 1 천명지위성(天命之謂性)’()’()’을 동사화시키는 기능을 갖고 있다고 했죠?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그것의 진행형을 말하는 겁니다. 끊임없이 그런 과정에 있는 것을 강조하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거죠. ‘성자(誠者)’는 하나의 대본(大本)의 세계이고, ‘성지자(誠之者)’는 대본(大本)을 향하여 나아가는 세계란 말이예요. 또한 성자(誠者)’는 그 자체가 하늘의 도()이고, ‘성지자(誠之者)’ 성해지려고 노력하는 것이 사람의 도리(道理)라는 뜻입니다. 중용(中庸)에 대한 텍스트 크리틱(Text critic) 시간에 이야기 했지만, 20장이 1장과 통하는 연결고리가 바로 이 ()’의 개념에 있는 겁니다. 대본(大本)ㆍ달도(達道)의 이원론과 성자(誠者)ㆍ성지자(誠之者)의 이원론에는 능해지려고 노력하는 인간의 행위가 중요한 개념으로 깔려 있어요.

 

所求乎子 以事父 未能也 所求乎臣 以事君 未能也 所求乎弟 以事兄 未能也 所求乎朋友 先施之 未能也

 

반성이 많이 되죠, 다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도덕적인 자기성찰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게 유교 사회윤리의 대전제가 된다는 것 또한 아시겠습니까? , 효도를 하는 이유가 나는 이 정도로 부모에게 잘한다는 것을 남에게 나타내려고 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나의 효도하는 행위가 빼~앵 한 바퀴 돌아서 결국에는 나에게로 다시 온다는 믿음 위에 있다는 것이 바로 엄청난 보편주의입니다. 나의 행위가 저 사람과 나와의 관계에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관계와 관계가 이어져서 한 바퀴 돌게 되면 결국 나에게 돌아온다는 거죠. 중용(中庸)적 세계관의 핵심이 바로 이 관계론적인 관점, 즉 모든 것이 관계상의 맥락과 그물망 안에 있다는 겁니다. 또한 그 관계라는 것도 수직이나 수평 한 쪽이 아니라 자식과 부모, 신하와 군주, 형제에서 친구에 이르기까지 상하좌우로 중첩되어 있다는 것도 간과해서는 안 될 부분입니다.

 

용덕지행(庸德之行)’ 이것을 평범한 덕의 행동으로도 해석할 수는 있지만, ‘()’를 용덕(庸德)을 받는 지시대명사로 보고 ()’을 동사로 본다면, “용덕, 그것을 행하고라고 풀이되죠. 용덕(庸德)이라는 말은 우리가 행하고자 하는 모든 덕성으로, ()이라는 말의 뜻을 풀어서 다시 보면, 모든 평범한 것, 일상적인 것을 가리킵니다. 주자(朱子) () 제일 마지막을 보면, ‘장재(張載)가 말한 바, 남을 책망하는 마음으로 자기를 책하면 그 도리(道理)를 다하는 것이라고 한 말이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이다[張子所謂以責人之心 責己則盡道 是也].” , 수기치인(修己治人)의 원리와 상통하는 말입니다. 궁극적으로 모든 도덕의 원리는 나를 책망함에 내재한다는 이 말은 유교의 도덕성이 맑스 베버가 말하는 대로 외면적 치레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내면화하는 데서 완성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제마가 수세보원의 결론을 책심책기(責心責氣)’로 내린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치인에 앞서서 반드시 수기가 반추되어야 하며 그것은 일상적 언행의 장()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 장에 두드러진 것은 도덕의 일용(日用)(주역(周易)』 「繫辭의 말)이며, 비근성입니다. 이것이 바로 중용(中庸)의 추구하는 세계며 끝까지 양보될 수 없는 존재의 근거지요.

 

 

 

右第十三章. ‘道不遠人, 夫婦所能. ‘丘未能一, 聖人所不能. 皆費也而其所以然者, 則至隱存焉. 下章放此.
이상은 제13장이다. ()가 사람에게서 멀지 않다는 것은 부부가 능히 할 수 있는 것을 말한 것이고, 나는 하나도 능하지 못하다는 것은 성인(聖人)도 능히 할 수 없다는 말이다. 이 세계는 아주 명백하지만 그 본질은 지극히 은미(隱微)로운 데 있다. 아래 도 이와 같다.

 

()가 사람에게서 멀지 않다는 말은 부부, 즉 평범한 사람 누구나가 능히 할 수 있는 것을 이른 것이고, 공자께서 , 짱구는 하나도 능하지 못하다고 말씀하신 바는 성인(聖人)도 능하지 못하다는 경지에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세계는 전부 아주 명백하고도 흔한 세계이지만, (명백함)한 것을 하게 만드는 본질은 지극히 은미(隱微)로운 데 있다[皆費也而其所以然者 則至隱存焉].”

 

하장방차(下章放此)’ 이 다음의 장()들은 여기에 따라서 풀어헤쳐 간 것이라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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