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장 14. 앎과 행동의 세 가지 스타일
或生而知之, 或學而知之, 或困而知之, 及其知之, 一也. 或安而行之, 或利而行之, 或勉强而行之, 及其成功, 一也. 혹은 태어날 때부터 이것을 알고, 혹은 배워서 이것을 알고, 혹은 어렵사리 이것을 아는데, 그 아는 데 이르러서는 하나다. 혹은 쉽게 이것을 행하고, 혹은 이득을 따져서 이것을 행하고, 혹은 싫은 데도 어거지로 이것을 행하는데, 그 공을 이루는 데 있어서는 하나다. 知之者之所知, 行之者之所行, 謂達道也. 以其分而言, 則所以知者知也, 所以行者仁也. ‘지지(知之)’라는 것의 아는 것과 ‘행지(行之)’라는 것의 행하는 것은 달도(達道)를 말한다. 그것을 나누어 말하면 알도록 하는 것은 지(知)이고 행하게 하는 건 인(仁)이다. 所以至於知之ㆍ成功而一者, 勇也. 以其等而言, 則生知ㆍ安行者知也, 學知ㆍ利行者仁也, 困知ㆍ勉行者勇也. 그것을 알거나 공을 이룸에 이르러선 하나라고 하는 건 勇이다. 그걸 등급으로 말하면 생지(生知)와 안행(安行)은 지(知)이고, 학지(學知)와 리행(利行)은 인(仁)이며, 곤지(困知)와 면행(勉行)은 용(勇)이다. 蓋人性雖無不善, 而氣稟有不同者, 故聞道有蚤莫, 行道有難易. 대저 사람의 본성은 선하지 않음이 없으나 기품(氣稟)이 같지 않기 때문에 도를 들음에 빠름과 느름이 있고 도를 행함에 어렵고 쉬운 게 있다. 然能自强不息, 則其至一也. 그러나 스스로 힘써 멈추질 않을 수 있다면 이르게 되는 곳은 하나인 것이다. 呂氏曰: “所入之塗雖異, 而所至之域則同, 此所以爲中庸. 여씨가 말했다. “들어가는 길은 비록 다르지만 도착하게 되는 영역은 같다. 이것이 중용이 된 까닭이다. 若乃企生知ㆍ安行之資爲不可幾及, 輕困知ㆍ勉行謂不能有成ㅡ 此道之所以不明不行也,” 만약 생지(生知)와 안행(安行)의 자질을 바라면서도 거의 미칠 수 없다고 여기고 곤지(困知)와 면행(勉行)을 가벼이 여겨 이룰 수 없다고 말한다면 이것이 도(道)는 밝아지지 않고 행하여지지 않는 이유다. |
이 문장은 지(知)와 행(行)의 구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왕양명의 ‘지행(知行)’의 문제가 여기에 들어 있어요. 중용(中庸)의 위대한 점은 인간에 차등을 둔다는 점입니다. 지행(知行)에 있어서 인간은 동일할 수가 없는 것이죠. 인간은 퀄리티가 다 다르지 않습니까?
앎의 차등
‘생이지지(生而知之)’한 인간은 나면서부터 자연스럽게 아는 것을 말합니다. 나는 ‘생이지지(生而知之)’하질 못해서 평생을 골탕 먹은 놈인데, 나는 머리가 참 나빠요! 그래서 호(號)도 도올(檮杌), 돌대가리가고 한 거 아닙니까.
‘학이지지(學而知之)’라는 것은 힘써 배워서 아는 것이고,
‘곤이지지(困而知之)’라는 것은 꽉 막힌 상태[困]이라는 글자는 좌우상하로 꽉 막혀 있는 답답한 모습을 시각적으로 보여주고 있다)에서 곤혹스럽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생고생해서 아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이 같은 것을 알아도 이렇게 여러 가지 스타일이 있는 거예요. “생지(生知), 학지(學知), 곤지(困知)한다. 그런데 급기지지 일야(及其知之 一也), 앎에 여러 가지 스타일이 있으나, 그러나 알았다고 하는 데는 하나다!” 유교의 평등주의가 여기에 있습니다. 나는 영재교육을 인정하지 않아요. 무엇을 다섯 살 때 안들 어떻고, 또 열 살 때 안들 스무 살 때 안들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안다고 하는 데 있어서는 하나인 거예요. 언제 어떻게 알았든 안다고 하는 것은 하나이기 때문에, 생지(生知)했다고 으시대지 말고, 학지(學知)했다고 뽐내지 말고, 곤지(困知)했다고 서러워 말 것입니다. 여기에 중용(中庸)의 인간평등관이 있는 것이죠.
행동의 차등
‘혹안이행지(或安而行之)’ 행할 적에도 어떤 사람은 편안하게 자연스럽게 행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혹리이행지(或利而行之)’ 어떤 사람은 그것을 하면 좋다는 것을 깨달아야 하는 경우가 있고,
‘면강이행지(勉强而行之)’ 어떤 사람은 하기 싫은 데도, 예를 들면 도올서원에 가기 싫은 데도 선배가 ‘너는 거기에 가서 공부해야 사람된다’고 억지로 끌어다 앉혀 놓아야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우리말 ‘공부하다‘의 일본말인 ‘벤교(勉强, べんきょう)’가 여기서 나왔다).
‘안행(安行)·리행(利行)·면강행(勉强行)’ 이러한 삼단계가 있는데, 그러나 ‘급기성공일야(及其成功一也)’ 어떻게 행하였든지 간에 그 공(功)을 이루는 데 있어서는 하나다! 여기서 ‘성공(成功)’이라는 말은 석세스(Success)의 의미가 아닙니다. 우리말의 성공은 사회적 출세를 이르는 말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 ‘공부[功]을 이룬다[成]’는 말입니다. 바둑에 달인(達人)이 되면, 그것은 ‘성공(成功)’, 즉 공(功)을 이루었다는 것입니다. 사회적인 출세는 입신양명이지 성공이 아닙니다. ‘지행(知行)’에서 행(行)은 공(功)이다, 행(行)은 공(功)을 이루는 것이다!
‘성론(誠論)’으로 들어가기 위한 뜸을 지독하게 들이고 있죠?.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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