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미안한 마음에 조문행렬에 참여하다
지난 토요일에 도보여행을 끝마치면서 전혀 믿기지 않는 소식을 듣고 일요일엔 서울에 온 김에 조문을 하러 대한문에 찾아갔다가 사람들도 너무 많고 경찰이 여기 통제를 하는 바람에 시간이 많이 지체되어 그냥 돌아왔다. 어차피 전주에서도 분향소는 있으니 거기서 해도 된다는 계산이 깔려 있었다. 물론 그건 합리화였고 핑계의 일종이었다. 애도하려는 마음보다 현재 하고 싶은 일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으니 말이다.
▲ 노무현(1946년 9월 1일 ~ 2009년 5월 23일)
맘은 원이로되 행동은 굼뜨니
그렇게 25일 월요일에 전주행 버스를 타고 내려왔다. 한 달을 넘게 했던 여행이 끝났기에 마무리 짓고 오로지 공부에만 전념하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마음먹은 순간부터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는 나와는 아무 상관없는 일이 되어 버렸다.
하지만 마음을 먹었다고 생각이나 의식이 맘처럼 되는 것은 아니었다. 아침마다 배달되어 온 신문을 읽으며, 인터넷에 뜬 그의 추모 UCC를 보면서 나도 모르게 자꾸 눈물이 나왔다. 그 때부터 마음 깊은 곳엔 소용돌이가 일기 시작했다. 그래서 더 이상 이렇게 가만히 있을 순 없다고 생각했다. 평온한 척 공부에만 매진하려 해도 마음이 동요되어 공부는 되지 않고 여러 생각들이 올라왔다. 봉하마을에 가볼까, 노제에 가볼까, 아니면 추모카페에서 활동해볼까 하는 생각들 말이다. 하지만 선뜻 실행하지는 못했다.
그렇게 며칠을 고민했나보다. 시간이 지날수록 추모객이 늘어나는 기현상(?)을 보면서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봉하마을에 혼자 가기엔 좀 어색하고 조문은 전주에서도 할 수 있으니, 노제에 참석하자고 맘을 먹은 것이다.
▲ 웃는 얼굴에 우린 침을 뱉었고, 오히려 깔보았다. 그런 미안함이 맘 속에 남아 있다.
끝없는 조문 행렬은 미안함의 표시다
28일엔 전주 오거리에 있는 분향소에서 조문을 했다. 5시 정도에 갔는데 마지막 날이라 그런지 많은 사람이 있었다. 하지만 많이 밀리는 건 아니었다. 5분 정도만 기다리면 바로 할 수 있는 정도였으니 말이다. 환하게 웃고 있는 그 분의 영정 사진을 볼 땐 마음이 무너져 내렸다.
그 미소를 지켜줄 수 없었다는 건가. 아니 지켜주긴 커녕 인정조차 하지 못했다는 것인가.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고 했는데 우린 그 얼굴에 거침없이 침을 뱉어 왔던 것이다.
분향소엔 수많은 글귀가 써져 있었는데, 자주 눈에 띄는 글귀는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라는 거였다. 그를 죽게 만든 건, 그 웃는 얼굴조차 가만히 놔두지 못했던 건 현 정권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떳떳하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방조죄’ 아니 오히려 제대로 먼지털이 하라고 ‘부추긴 죄’가 있으니 말이다. 우린 누굴 탓하거나 비판할 수 없을 정도로 같았다. 그런 마음이 지금, 미안한 마음으로 표출되는 것일 뿐이다.
내일 새벽에 일어나 서울에 노제를 지내러 가기 위해서 서둘러 조문을 마치고 집에 왔다. 그런데 막상 집에 오니 어머니께서 갑자기 조문하러 가자시는 게 아닌가. 어머니에게도 그와 같은 안타까움이 있는 것을 확인하니, 어찌나 놀랐던지 모른다. 그래서 금방 조문을 하고 왔음에도 어머니와 함께 다시 조문하러 갔다.
그땐 사람이 많아서 1시간 가까이 기다려야 했는데, 오히려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고 있다고 느껴지니 훈훈하고 기분도 좋았다. 이렇게 뜻하지 않게 두 번 조문을 오게 되었는데, 두 번이나 왔다며 그가 혼을 내진 않겠지.
▲ 뜻하지 않게 두번이나 조문을 드리게 됐다. 전주사람들의 마음을 볼 수 있었다. (사진 출처: 서당봉 )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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