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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횡무진 서양사 - 4부, 4장 하늘 하나에 땅 여럿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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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횡무진 서양사 - 4부, 4장 하늘 하나에 땅 여럿

건방진방랑자 2022. 1. 1. 1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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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장 하늘 하나에 땅 여럿

 

 

그리스도교 대 그리스도교

 

 

게르만의 민족이동과 노르만의 민족이동은 여러 가지로 닮은꼴이다. 둘 다 북쪽에서 남하해 기존의 유럽 세계를 재편성했다. 게르만족은 로마 말기에 이동을 시작해 지중해 세계 중심의 로마 문명을 더 북쪽, 유럽의 심장부로 전파하는 역할을 했다. 그 결과 정치적으로는 서유럽 세계의 원시적 형태를 형성했고, 문명적으로는 로마 문명을 이어받아 로마-게르만 문명, 즉 유럽 문명(서양 문명)으로 키워냈다. 또 노르만족은 게르만족이 시작한 모든 것을 완성하는 역할을 했다. 정치적으로는 서유럽 세계를 완성했고, 문명적으로는 서양 문명의 폭을 유럽 전역으로 확대했다. 그 두 가지 변화가 종합적으로 작용해 서양 문명의 뿌리(로마 문명)는 줄기(중세 문명)로 자라날 수 있었다.

 

중세 문명의 성격은 크게 그리스도교와 봉건제로 압축된다. 두 가지 가운데 역사적으로 더 중시되는 것은 봉건제이지만, 사실 그보다 더 근원적인 것은 그리스도교다. 또한 로마 문명이 중세 문명의 뿌리로 자라날 수 있었던 이유도 두 문명이 기본적으로 그리스도교를 공유했기 때문이며, 게르만족과 노르만족의 민족이동이 서양 중세를 형성하는 역할을 할 수 있었던 이유도 바로 그들이 그리스도교로 개종했기 때문이다.

 

클로비스, 샤를마뉴, 오토로 이어지는 서유럽의 정복 군주들은 하나같이 정복 활동과 더불어 그리스도교의 전파에도 열심이었다. 심지어 그들보다 이름값이 떨어지는 영국의 앨프레드까지도 그랬다. 왜 그랬을까? 물론 그게 그들에게 이익이었기 때문이다.

 

정치권력과 종교권력을 모두 손에 쥔 비잔티움 황제와는 달리 서유럽에서는 신성의 황제(교황)와 세속의 군주들이 자연스럽게 역할 분담을 이루었다. 하늘은 교황의 것이지만 땅은 군주들의 것이었다. 따라서 서유럽의 군주들은 피정복지를 그리스도교로 개종| 시키는 작업이 정치적 통합을 이루는 데 도움이 되면 되었지 결코 손해가 아니었다. 어차피 그들이 정복하고 다스리는 것은 하늘이 아니라 땅이었으니까.

 

 

고딕 성당 11세기를 넘어서면서부터는 서방교회의 힘이 서서히 동방교회를 앞서기 시작한다. 그 점은 복잡하고 화려한 궁륭과 뾰족한 첨탑으로 유명한 고딕 건축물에서도 볼 수 있다(고딕이라는 말 자체가 고트족에서 나온 게르만 계통의 이름이므로 동방교회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 사진은 대표적인 고딕 성당인 프랑스의 샤르트르 대성당이다.

 

 

하늘 측에서 볼 때도 마찬가지였다. 비록 그리스도교 교회가 동과 서로 나뉘었다지만, 아직도 로마 가톨릭은 비잔티움 정교에 비해 힘이 약했다. 로마 가톨릭 교회가 독립 선언을 하고 스스로 분리되어 나온 격이니 교리상으로도 정통성이 뒤떨어질뿐더러 현실 정치적으로도 더욱 정교회에 미치지 못했다(비잔티움 제국은 당시 유럽 최강국이었다). 따라서 로마 가톨릭 교회는 비잔티움 정교회의 서방 분점정도에 불과했다. 비잔티움 황제가 로마 가톨릭의 교세 확장에 그다지 긴장하지 않았던 이유도 그 때문이다.

 

그러나 노르만의 민족이동으로 로마 가톨릭이라는 하늘 아래 모인 땅들이 크게 늘어나자 상황은 달라졌다. 무엇보다 크게 달라진 점은 그 땅이 여러 나라로 분열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하늘은 하나인데 땅은 여러 개인 상황이다. 당연히 로마 교황의 힘과 영향력은 상대적으로 커졌다. 그가 직접 관할하는 영토는 교황령뿐이었으나 그의 하늘 아래에는 중소 지주들이 많았다. ‘대지주였던 샤를마뉴의 시대에는 세속 군주의 힘이 교황을 훨씬 능가했으므로 교황은 그의 그늘 아래 기생하는 존재에 불과했다. 그러나 대제의 시대가 가고 고만고만한 군주들이 판치는 시대가 오자, 교황령은 늘어나지 않았어도 교황의 세속적 권력은 눈에 띄게 확대되었다. 바야흐로 가톨릭은 말 그대로 보편 종교가 된 것이다가톨릭이라는 말은 원래 보편적이라는 뜻이다).

 

로마 가톨릭의 힘이 비약적으로 커지자 비잔티움 교회도 생각이 달라졌다. 어차피 서유럽은 로마 교회의 몫이니까 욕심을 낼 수 없으므로 대신 경쟁적으로 동유럽의 포교에 힘쓴 것이다(비잔티움 측에서는 아직도 서유럽을 변방으로 여겼다). 때마침 노르만족의 남하로 비잔티움 북방에는 슬라브족의 인구밀도가 높아져 있었다. 863년 비잔티움 황제 미카일 3세는 모라비아(지금의 체코 동부 슬로바키아)에 전도사를 파견해 대성공을 거두었다당시 모라비아에 파견된 전도사들은 키릴루스(Cyrilus)와 메토디우스(Methodius)라는 형제였다. 그들은 현지 언어로 예배를 드리고 그리스 문자를 본떠 슬라브 알파벳을 만들었다. 이것은 형의 이름을 따서 키릴 문자라고 부르는데, 지금도 슬라브어를 표기하는 데 사용되고 있다. 또한 동생의 이름은 18세기 영국의 전도사인 존 웨슬리가 북아메리카의 모라비아교도를 선교하면서 종교사에 남게 되었다. 영국교회의 한 교파로 출발한 감리교의 영어명은 바로 Methodism이다.

 

모라비아라면 서유럽의 관문, 따라서 이번에는 로마 가톨릭이 긴장할 차례였다. 교세 확장 경쟁에 나선 로마 가톨릭은 재빨리 폴란드의 슬라브인들을 개종시켰고, 달마치야의 크로아티아인들까지 개종시키는 데 성공했다. 집안 단속에 나선 비잔티움 교회는 서둘러 세르비아인을 끌어들였다서로 접경하고 있는 크로아티아와 세르비아가 다른 종교권에 속하게 되었다는 문제는 두고두고 말썽을 일으킨다. 결국 이 문제는 20세기까지 이어져 발칸 반도를 1차 세계대전의 도화선으로 만들었고, 20세기 말에는 동유럽권이 와해되면서 민족 문제까지 겹쳐 다시 이 지역을 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밀어 넣게 된다. 아일랜드 문제와 더불어 종교적 갈등이 얼마나 뿌리 깊은지 보여주는 사례다.

 

이런 노력 끝에 10세기 후반 비잔티움 정교는 마침내 대어를 낚게 된다. 988년 러시아가 정교 신앙을 받아들인 것이다. 당시 권력이 불안정했던 비잔티움 황제 바실리우스 2세는 필요한 물리력을 바깥에서 확보할 마음을 먹었다. 키예프의 왕 블라디미르 1(viadimir , 956년경~1015)는 바실리우스의 요청을 선뜻 받아들여 황제에게 군사 원조를 해주는 대가로 황제의 누이동생을 아내로 맞아들이고 비잔티움 정교를 받았다. 그는 비잔티움 황실과 혈연을 만드는 게 자신의 권력 기반을 안정시키는 데도 큰 도움이 되리라고 여겼을 것이다. 이리하여 러시아 정교회가 탄생했는데, 이후 15세기에 비잔티움 제국이 멸망한 뒤부터는 러시아가 동방정교회의 수장이 된다(나중에 보겠지만 러시아는 모스크바를 3의 로마라고 부르게 된다. 물론 2의 로마란 콘스탄티노플을 가리킨다).

 

 

교회 분열 동방교회(동방정교)와 서방교회(로마 가톨릭 교회)가 분립하자 유럽 세계는 그리스도교적 동질성을 점차 잃어갔다. 두 교회가 치열한 경쟁을 벌이게 되면서 초점으로 떠오른 지역은 로마와 콘스탄티노플 사이에 위치한 중부 유럽이었다. 지도는 두 교회가 이 지역을 놓고 쟁탈전을 벌이는 형세를 보여준다.

 

 

 게르만 전통이 낳은 봉건제

 

 

중세를 형성한 것은 로마-게르만 문명이었다. 로마가 중세에 남긴 유산이 그리스도교라면 게르만 전통은 중세에 무엇을 물려주었을까? 그것은 바로 봉건제다. 물론 봉건제가 성립한 데는 로마의 전통도 적지 않게 연관되어 있지만, 봉건제는 기본적으로 게르만 전통에 따른 사회체제라고 할 수 있다.

 

봉건제는 정치적인 측면과 경제적인 측면으로 나누어볼 수 있는데사회경제사를 강조하는 마르크스주의 계열의 역사학자들은 봉건제의 경제적 측면을 특히 강조하는데, 여기에는 문제가 있다. 그들은 중세 후기, 그러니까 자본주의의 맹아가 숙성할 무렵의 봉건제를 중시한 탓에 그런 입장을 취하는 것이지만, 중세 초기에 봉건제를 낳은 동인은 주로 정치적인 데 있었으며, 중세 내내 봉건제의 이런 성격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물론 정치와 경제가 칼로 무 자르듯 구분될 수는 없다. 그러나 봉건제의 경제적 의미를 지나치게 강조하면 봉건제를 단순히 자본주의로 이행하는 데 따르는 하나의 과정으로만 해석하기 쉽다. 역사에서는 모든 것을 시간순으로 설명해야 하며, 실제로 그것이 얼마든지 가능하다. 특정한 사건이나 제도를 그 이후의 전개 과정과 억지로 결부시키려 하면 목적론에 빠질 위험이 있다, 후자의 요소들은 이미 로마 시대부터 형성되어 있었다. 로마의 콜로나투스(소작제)가 그 원형이다(262쪽 참조). 지중해를 정복한 뒤 노예 공급이 끊기자 로마에는 콜로누스라는 소작농이 출현해 라티푼디움에 필요한 노동력을 제공했는데, 이것이 중세 농노(serif)의 기원이 된다. 그러나 봉건제에서 더 중요한 것은 그런 경제적 측면보다 정치적 측면이다. 봉건제(feudalism)라는 말 자체가 봉토를 뜻하는 라틴어 ‘feodum’에서 나왔듯이, 봉건제는 군주가 가신들에게 봉토를 주고 충성을 약속받은 것에서 비롯되었다.

 

봉건제의 직접적인 기원은 종사제(從士制, comnitatus)와 은대지제(恩貸地制, beneficium). 종사제란 군주와 가신 간에 일종의 주종관계를 맺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동양식 군주-신하 관계와는 달리 쌍무적이라는 특징이 있다. 즉 가신은 당연히 군주에게 충성을 바칠 의무를 가지지만, 군주 역시 가신을 보호할 의무를 가진다. 이것은 로마적 전통의 피호 관계(181쪽 참조)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갈리아와 게르만 사회에서도 예로부터 존재하던 관습이었다.

 

피호 관계가 성립하던 시기, 그러니까 공화정 시대 초기의 로마는 아직 정체성이 확고하지 않은 때였으므로 갈리아나 게르만 사회와의 구분이 명확치 않았다. 따라서 당시에는 딱히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종사의 관습이 널리 퍼져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제정이 성립하고 평민층의 일부(에퀴테스)가 점차 지배 세력으로 편입된 로마에 비해 게르만 사회에서는 종사의 관습이 훨씬 더 원형 그대로 보존되었으므로 종사제는 기본적으로 게르만 전통이라고 봐야 한다(더욱이 로마의 북방 정복이 있을 때마다 게르만 종사제는 막강한 로마 군단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막아낸 원동력이 되었다).

 

 

중세의 기사 기사의 근원은 로마의 에퀴테스에서 찾을 수 있겠지만, 게르만의 종사적 전통과도 무관하지 않다. 위의 그림은 중세 기사의 전형적인 무장을 보여준다. 그림은 십자군 시대의 기사인데, 이런 기사의 모습은 중세가 끝날 때까지도 그다지 변하지 않았다.

 

 

생존이 힘들었던 고대에는 단순히 자신을 보호해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충성을 바칠 수 있었다(물론 그 보호에는 생계를 해결해주는 것도 포함된다). 그러나 사회가 어느 정도 발달하자, 그 정도의 대가로만 군주에게 충성을 바칠 가신은 없었다. 따라서 종사제가 유지되려면 뭔가 오가는 게 있어야 했는데, 그것을 설명해주는 개념이 바로 은대지제다. 은대지제란 군주가 자기 가신들에게 좋은 조건으로 토지를 대여해주는 것을 말한다(그래서 용어에 은혜라는 뜻이 들어가 있다). 이것도 역시 거슬러 올라가면 로마 시대의 프레카리유(precarium)이라는 토지 대여 관습에서 기원을 찾을 수 있지만, 널리 성행하게 된 것은 8세기 무렵 프랑크 왕국에서 종사제와 결합되면서부터다특히 샤를 마르텔이 이슬람군을 물리칠 때는 이 은대지제가 톡톡히 한몫을 했다. 그는 이슬람군을 상대하기 위해 기존의 보병 대신 기병들을 육성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기병은 돈이 많이 들었다. 우선 말이 있어야 하고 그에 따르는 각종 마구와 무기도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르텔은 돈이 있는 자들에게 자비로 말과 무장을 갖추도록 권했다. 그 대가로 그는 기병들에게 은대지를 주었다. 로마 제국이 전 유럽을 석권하는 것을 종사제가 막았다면, 은대지제는 이슬람 세력의 진출을 막았다. 결국 봉건제는 게르만의, 게르만에 의한, 게르만을 위한 훌륭한 제도였다.

 

9세기에 이르러 은대지라는 말이 봉토라는 말로 바뀌면서(남부 프랑스가 먼저였다) 본격적인 봉건제가 실시되기 시작했다. 물론 단순히 이름만 바뀌었다고 해서 사회체제가 바뀔 수는 없었다. 은대지와 봉토의 차이는 토지 소유 관계에 있다. 은대지는 군주가 충성의 대가로 가신들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이므로 일회적인 성격이 강했고, 토지를 아예 준다기보다는 빌려주는 의미가 컸다. 따라서 전쟁을 앞두고 단기적으로 직접적인 충성이 필요한 경우에 적절한 제도였다. 자동차는 전기 배터리의 힘으로 시동을 걸지만, 주행할 때는 가솔린의 힘이 필요하다. 마찬가지로 나라를 세울 때와 유지할 때의 운영 원칙은 달라지는 법이다. 정복 전쟁이 끝나고 안정기에 접어들자 은대지는 더 이상 의미가 없어졌다. 이제는 나라를 유지하기 위해 장기적이고 항구적인 충성이 필요했다. 그래서 군주는 토지를 가신들에게 사실상 영구히 팔아넘기게 된다. 이것이 바로 봉토다.

 

이때부터 봉토는 가신들의 집안에서 대대로 세습되기 시작한다. 특히 게르만 전통에 따라 맏아들에게 토지가 세습되었는데, 이 점은 나중에 십자군 전쟁을 유발하는 중요한 원인이 된다(앞서 샤를마뉴와 이레네의 결혼 계획에서 보았듯이, 게르만족은 전통적으로 가부장제와 장자상속제를 취하고 있었다).

 

 

중세의 성 기사와 더불어 가장 중세적인 특색을 잘 보여주는 것이 성이다. 사진은 영국 웨일스의 캐필리 성인데, 전형적인 중세의 성을 보여준다(영국은 비교적 전란이 적었으므로 중세의 성곽이 잘 보존되어 있다). 성을 뜻하는 게르만어인 부르크(burg)’에서 나중에 중세 해체기에 부르주아(boargeois)라는 말이 탄생하게 된다.

 

 

 장원의 왕과 세 가지 신분

 

 

영주들은 자신의 영지 내에서 왕으로 군림했다. 초기에 은대지를 받았을 무렵에는 원래의 땅 주인인 상급 영주에게 세금(일종의 토지 이용료)을 내야 했으나 은대지가 봉토의 개념으로 바뀌면서 영주들은 불입권(immunity)을 가지게 되었다. 불입권이란 원래 로마 시대에 황제가 설정한 면세지에서 비롯된 제도지만, 영주들이 은대지가 아니라 봉토를 소유하게 되면서부터는 면세만이 아니라 광범위한 자치권을 뜻하는 개념이 되었다. 따라서 상급 영주라 해도 하급 영주의 권한을 직접적으로 침해하지는 못했다. 물론 전쟁이라는 방식을 통해 제압할 수는 있었지만.

 

봉건 영주들이 이렇게 독립적인 지위를 확보할 수 있었던 데는 경제적인 원인도 있었다. 그들은 자기 영지 내의 농민(농노)들을 사실상 소유하면서 자급자족적인 경제를 꾸렸던 것이다. 이것을 장원(manor) 경제라고 부른다이렇게 장원 경제가 자리 잡을 수 있었던 이유 역시 게르만적 전통과 무관하지 않다. 로마 시대에 반농반목 생활을 하던 게르만 민족들은 로마의 영향을 받으면서 점차 정착 농경 생활을 하게 된다. 유목 생활을 청산하지 못한 민족이 새로운 정복지를 얻게 되었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당연히 성을 쌓아 그 안에서 살면서 피정복지의 농민들을 지배하고 그들에게서 세금을 받으려 할 것이다. 그래서 로마 제국 시대에도 그 북쪽의 게르만 민족들은 모두 사실상 장원 경제나 다름없는 정치ㆍ경제 구조를 취하고 있었다. 영주는 성 안에 살면서 바깥의 농민들에게서 각종 세금을 받았다. 장원 내에는 농노와 농토를 비롯해 방앗간, 대장간, 양조장 등의 공동 시설이 갖추어져 있었고, 물론 교회도 있었다. 자신의 장원에서 식량과 무기 등 온갖 필요한 물자를 조달할 수 있으니 아쉬울 게 없었다. 이런 경제적 자립이 대외적으로 정치적 자립을 유지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던 것이다. 비록 장원들 간에 교역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기본적으로는 자급자족이 원칙이었다. 중세 경제의 오랜 침체는 바로 여기에 원인이 있다.

 

 

기사 서임 에스파냐의 카스티야에서 제작된 이 14세기 채식 필사본의 삽화에는 두 명의 중세 기사가 서임을 받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영국의 법학자 헨리 드 브랙턴은 영국의 법률과 관습법론에서 기사들이 서임식 때 어떠한 맹세를 했는지 이야기하고 있다. “군주여, 들으소서. 하느님과 이 신성한 유물이 도움을 주신다면 당신의 삶과 당신의 손발, 당신의 몸, 당신의 재산과 당신의 세속적인 영광에 충성을 바칠 것을 맹세합니다.”

 

 

불입권으로 정치적 안정을, 자급자족으로 경제적 안정을 확보한 영주에게 가장 큰 걱정은 군사적 측면이었다. 물리력이 없으면 대외적으로는 물론 대내적으로도 장원 체제를 유지할 수 없다. 그래서 영주는 장원 내에 사병(私兵) 조직을 거느렸는데, 그 군대에서 장교의 역할을 담당한 게 기사였다. 기사는 신분상으로 귀족 바로 아래에 속했지만, 신분적인 개념만 가진 것은 아니었다. 귀족이 아닌 평기사 이외에도 봉건 영주의 아들은 어릴 때부터 아버지의 상급 영주에게로 가서(인질의 의미도 있었다) 각종 교육과 기사 훈련을 받고, 스무 살이 되면 기사 서임을 받았다(상급 영주의 부인은 기사가 섬기는 레이디가 된다), 이 과정에서 훗날 기사도라고 불리는 예절과 덕목이 생겨났다.

 

대영주일수록 당연히 많은 기사를 거느렸는데, 여기에는 또 다른 이유도 있었다. 하급 영주의 아들이라도 맏아들일 경우에는 상급 영주의 성에 갔다가도 나중에 아버지의 토지를 물려받으러 자기 영지로 돌아갔으나 차남 이하들은 그대로 눌러앉는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그러자 점차 기사들을 거느리는 데도 문제가 생겨났다. 하나는 충성의 대가를 지불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임무를 할당하는 것이다. 봉급과 업무가 없는데 누가 기사 직위를 맡으려 할까? 그나마 할 일이 없는 것은 그런대로 군사훈련으로라도 때울 수 있으나(이 때문에 토너먼트라고 불리는 마상 시합이 성행했다) 봉급이 없는 것은 좀 더 큰 문제였다. 봉건제가 안정되면서 영토의 분봉이 일단락된 다음에는 기사들에게 충성의 대가로 나누어줄 게 없었다. 아무리 영지가 넓고 재산이 많은 대영주라 해도 감당하기 어려운 문제였다. 그래서 영주들은 하급 영주들이 반발의 기색이라도 보이면 그것을 빌미로 삼아 전쟁을 벌였다. 기사들로서는 임무도 생기고 전리품도 챙기는 기회였고, 영주로서는 그 두 가지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하는 일석이조의 효과였다. 물론 소규모 전쟁이 계속 이어지려면 운도 따라야 했다(을 억지로 만들기 위해 나중에 십자군이 기획된다)중세 서양의 기사들과 중세 일본의 무사들은 닮은 데가 많다. 일본의 무사들은 흔히 사무라이라고 불리는데, 한자로 , 옆에서 받드는 자라는 뜻이다. 다이묘(大名)라고 불리는 중세 일본의 영주들은 무사들을 사병으로 거느리고 서로 치열한 전쟁을 벌였다. 일본에서도 역시 맏아들에게 재산과 토지를 물려주었으므로 차남 이하는 가진 것도, 딱히 할 일도 없는 신세였다. 그래서 이들은 자기들끼리 패거리를 이루어 약탈을 일삼았는데, 당시 다이묘들은 이들을 아쿠토(惡黨)라고 불렀다. 또한 일본의 무사들에게도 서양의 기사도와 비슷한 무사도가 있었다(물론 무사도에는 레이디가 없었다). 기사들의 불만을 처리하기 위한 통로로 십자군 전쟁이 기획되듯이, 일본의 전국시대가 끝나자 할 일이 없어진 무사들의 불만을 해소하기 위해 일본의 바쿠후(幕府) 정권은 대외 전쟁을 기획하는데, 그것이 바로 임진왜란이다.

 

 

토너먼트의 기원 전쟁이 없으면 기사가 할 일이 없다. 그래서 평상시에 기사들은 무예를 닦는 훈련을 겸해 마상시합을 자주 벌였다. 처음에는 훈련이었으나 점차 이것은 관중을 불러 모으는 구경거리가 되었다. 로마 시대 검투사의 역할을 중세에는 기사가 했다고 할까? 이것을 토너먼트라고 불렀는데, 이 말은 오늘날 운동경기의 대회 방식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십자군 시대가 열리면서 기사들에게는 토너먼트 대신 본격적인 업무가 주어진다.

 

 

영주와 기사 들은 자급에 자족했겠지만 농노들은 그렇지 못했다. 장원이 자급자족 경제라는 것은 곧 모든 것을 영주가 독점한다는 것을 뜻했다. 따라서 농노들은 방앗간을 한 번 이용하려 해도 높은 이용료를 내야 했으며, 도로나 부두 시설 등도 마찬가지였다. 상속세, 주민세는 물론이고 결혼할 때는 영주에게 혼인세까지 내야 했다. 게다가 농노는 정기적으로 영주를 위한 부역도 해야 했다. 고향에 발붙이고 살기 위해 농민들이 치러야 하는 고통은 몹시 심했다. 당시 농노들은 뿔 없는 소라고 불리기도 했으니, 로마 시대에 말하는 짐승으로 불린 노예보다 전혀 나을 게 없는 처지였다.

 

11세기 프랑스의 주교 아달베롱은 이렇게 말했다. “신의 집은 하나가 아니라 셋이다. 기도하는 사람, 싸우는 사람, 일하는 사람, 이 셋은 결코 헤어져서는 안 된다. 한 부분이 바치는 봉사가 다른 두 부분의 일을 위한 조건이 되는 것이다.” 이 말은 장원 내의 세 가지 신분 중에서 농노의 역할을 간명하게 정리하고 있다. 농노는 장원 경제만이 아니라 봉건 질서 전체를 떠받치는 축이었던 것이다.

 

 

노예 아닌 노예 중세의 지배 신분인 기도하는 사람(성직자), 지배하는 사람(영주), 싸우는 사람(기사)이 각자 제 할 일을 할 수 있으려면 농민들이 필요했다. 그들을 먹여 살리느라 농민들의 삶은 고통스러웠다. 농민은 노예가 아닌 엄연한 소작인이었으나 농노라고 불릴 만큼 사실상 로마 시대의 노예나 다를 바 없었다. 그림은 중세 농민의 생활을 묘사하고 있는데, 소가 아니라 말로 쟁기를 끄는 모습이 우리에게 낯설다.

 

 

 분권적 질서의 시작

 

 

봉건제의 두 가지 뿌리가 종사와 은대지의 관습인 데서 알 수 있듯이, 서양의 봉건제는 동양의 그것과 크게 달랐다. 중국의 봉건제도 충성의 대가로 군주가 가신들에게 토지를 하사한다는 점에서는 같았으나, 실제로는 서양의 경우보다 훨씬 수직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흔히 중국은 주나라 시대에만 봉건제가 있었다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최초의 통일 제국인 진의 군현제, 그 뒤를 이은 한의 군국제(郡國制), 당의 번진 등은 모두 봉건제의 성격을 보여준다. 드넓은 중국 대륙을 지배하려면 중앙 권력 하나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었다. 그래서 변방의 수비를 위해서는 그 지역의 영토와 자치권을 제후들에게 내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실제로 중국 황제는 변방을 국() 또는 군()이라 부르고 그 지역의 제후들에게 이라는 칭호를 부여했다(그에 따라 역대 한반도의 왕조들도 중국 황제로부터 백제군왕, 대방군왕[고구려 왕], 고려국왕, 조선국왕 등의 책봉을 받았다). 잠시 존속했던 군현제를 제외하면 주의 봉건제, 한의 군국제, 당의 번진은 점차 중앙집권이 강화되는 추세를 따랐지만, 봉건제적 성격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아무리 지역들이 나뉘어 있다고 해도 중국은 통합된 제국의 체제를 취했고 그만큼 황제의 권력은 절대적이었기 때문이다. 단적으로, 변방의 왕들이 황제의 명령을 거역하면 그것은 곧 반란으로 규정되었고, 진압 대상이 되었다. 중앙정부가 그것을 진압할 능력이 없으면 아예 새 제국으로 바뀌는 식이었다.

 

그에 비해 서양의 봉건제는 훨씬 수평적이었다. 중국의 경우에는 황제가 지역을 지배하고 지역의 우두머리가 주민을 지배하는 방식이었으나 서양의 경우에는 상급 영주가 하급 영주를 지배하지 못할뿐더러 영주라 해도 중국의 지주가 하인을 소유하는 것처럼 농노를 소유하지는 못했다그래서 같은 착취라 해도 유럽과 중국은 착취의 형식이 달랐다. 중국의 지주는 명령과 권위에 의해 휘하 농민이나 하인을 착취했지만, 유럽 중세의 영주가 농노를 착취하는 방식은 방앗간, 양조장, 도로 등의 이용료라는 형식을 취했다(물론 착취의 정도는 지주나 영주의 인성이 크게 작용했으므로 어느 편이 더 심했다고 볼 수 없다). 그래서 서양에는 동양에 없는 rent의 개념이 있었다. 이 말을 흔히 지대(地代)라고 번역하지만 단순한 토지세라기보다는 영주가 소유한 시설의 이용료라는 의미였다.

 

사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중국식 제국에 비해서는 미약하지만 그나마 제국의 체제를 어느 정도 갖추었던 프랑크가 무너지면서 서유럽에는 두 번 다시 제국이라는 정치적 중심이 생겨나지 못했던 것이다(비잔티움 황제의 권력은 중국 황제에 못지않았으나 권력의 안정이라는 측면에서는 신하들의 절대적 충성을 확보한 중국 황제에 미치지 못했다). 따라서 서유럽의 군주들은 일종의 계약이라는 방식을 통해 자신의 권력 기반을 다지려 했다. 그 결과가 바로 봉건제다.

 

따라서 봉건제가 빚어낸 국제 질서는 분권적인 것일 수밖에 없었다. 서유럽의 중세 국가들이, 위상은 중국이나 일본의 제후국에 해당하면서도(일본에서도 영주들이 다스리는 영지를 이라고 불렀다) 독립국이나 다름없는 기능과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제국의 중앙정부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봉건 국가들의 수평적 구조는 중세가 끝날 무렵에 이르면 서유럽 세계에 다양한 국제 질서를 생성시키게 된다.

 

 

물론 상급 영주와 하급 영주가 존재했듯이, 모든 영주가 평등한 지위를 가진 것은 아니었다. 영주에게서 넓은 봉토를 받은 가신들은 또다시 자신의 가신들에게 봉토를 할당해주기도 했다. 이렇게 해서 위에 대한 충성과 아래에 대한 봉토로 짜인 방대한 권력의 그물이 펼쳐지게 되는데, 이것이 봉건적 국제 질서였다. 그러나 그 경사도는 중국의 제국 체제에 비해 워낙 완만했으므로 수평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심지어 누가 군주고 누가 가신인지 명확히 구분되지 않는 경우도 많았다. 상위 군주에 대해서는 가신이고, 휘하 가신들에 대해서는 군주였으니까. 그래서 서양의 봉건 군주들은 영주라는 독립적인 이름으로 부를 수 있는 것이다(가끔 제후라는 이름을 쓰기도 하는데, 이 용어는 신성 로마 제국의 봉건적 서열에만 적용될 뿐이다)이 영주들의 서열이 바로 작위 제도다. 영주들의 작위는 보통 공작, 후작, 백작, 자작, 남작의 순서를 따르는데, 관할 영지가 곧 권력의 크기나 다름없었으므로 그 서열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이를테면 자기 영지의 위치가 넓거나 경제적ㆍ군사적 요충지라면 남작이라 해도 실제의 권력은 공작을 능가할 수 있었다.

 

앞에서 프랑스·독일·영국 등의 원형이 생겨났다고 말한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다. 서유럽의 중세 국가들은 오늘날의 유럽 국가들과 달랐다(오늘날의 국가들은 17세기부터 시작된 국민국가를 직계 조상으로 한다). 중세의 프랑스ㆍ독일 영국은 오늘날처럼 명확한 국경과 국민을 포함하는 영토 국가가 아니었고, 영주들 간의 완만한 서열구조로 존재하는 느슨한 국가였다. 물론 왕은 있었지만 대영주의 의미에 그칠 뿐 넓은 영토를 다스리는 지위는 아니었다. 영주는 자기 영지에서 누구나 왕이었다(서양의 중세 동화에서 왕자와 공주가 그렇게 많이 등장하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넓은 지역이 단일한 왕조로 묶인 동양과 달리 분권화된 서양 중세에는 왕자와 공주가 동양에 비해 훨씬 많았다). 이를테면 프랑스의 왕이라 해도 프랑스 전역의 봉건 영주들을 중앙집권 체제 아래 강력히 관할하는 입장은 못 되었고, 그저 그 지역에서 가장 큰 세력을 지닌 영주 정도에 불과했다. 따라서 휘하 영주들도 프랑스라는 나라에 대해 강한 소속감은 가지지 않았다.

 

하지만 정치적으로는 분권적이었어도 종교적으로는 중앙집권적이었다. 다시 말해 땅의 중앙정부는 없었지만 하늘의 중앙정부는 있었던 것이다. 바로 로마 교황과 그가 거느린 각 지역의 교회들이 그것이었다. 처음에는 교황도 자신이 직접 나서서 세속의 권력마저 중앙집권식으로 편제할 자신은 없었고 능력도 부족했다. 무엇보다 종교적 지배자가 정치적 지배자를 겸하는 것은 그리스도교의 교리에 어긋나는 것이었다.

 

그래서 교황의 필요에 의해 생겨난 게 앞서 말한 신성 로마 제국이었다. 그러나 차차 보겠지만 신성 로마 제국은 교황의 뜻대로 서유럽의 정치적 중심이 되기는커녕 독일 지역의 발전에도 보탬이 되지 못했다(오히려 중세 후기에 프랑스와 영국이 민족의식을 키우고 근대국가의 형체를 갖추어가기 시작할 무렵에 이르면 신성 로마 제국은 독일의 성장을 저해하는 요인이 된다). 그래도 신성 로마 제국은 다른 지역보다 교황권이 더 잘 먹히는 곳이었으므로 교황권의 성장에는 큰 역할을 했다. 좋은 경험을 쌓은 로마 교황은 이제 본격적으로 서유럽의 세속적 질서에도 개입하기 시작했다. 그 최대의 성과가 바로 십자군이었다.

 

 

인용

목차

한국사 / 동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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