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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서양사, 2부 뿌리① - 3장 전란의 시대, 최후의 승부 본문

역사&절기/세계사

서양사, 2부 뿌리① - 3장 전란의 시대, 최후의 승부

건방진방랑자 2022. 1. 2. 0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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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후의 승부

 

 

마라톤에서의 허망한 패배에 다리우스는 격분했다. 세계의 어느 곳을 정복할 때보다 더 많고 더 강한 병력을 투입했음에도 페르시아는 그리스 원정에서 두 차례나 보기 좋게 고배를 마셨다. 더구나 1차 파병 때는 주요 목표(이오니아 반란의 진압)를 달성한 다음에 내친 김에 실행한 원정이었고 폭풍을 만나 철군한 것이었으나, 2차 때는 철저한 준비와 계획이 뒷받침된 원정인데도 패했기에 충격이 더욱 컸다.

 

대군으로 실패했다면 더 큰 대군을 보내리라. 다리우스는 패전의 상처를 치유하기도 전에 곧바로 3차전의 준비에 들어갔다. 준비의 원칙은 간단했다. 무엇이든 지난번보다 더 많이, 더 크게 준비하라. 조공국들이 할당받은 전쟁 준비물은 함선과 말, 식량, 수송선 등 모든 부분에서 이전의 규모를 훨씬 넘는 것이었다. 전쟁 준비 4년째인 기원전 486년에 이집트가 반란을 꾀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마침 이집트 지배를 확고히 다지고 새로 편성한 원정군을 시험 가동하기에 이것은 좋은 기회가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다리우스는 이집트 원정을 꾀하던 중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다리우스의 제위를 승계한 그의 아들 크세르크세스는 원래 그리스 원정에는 관심이 없었다. 아버지가 숙제로 남긴 이집트 원정은 성공했으나 전쟁을 재개하고 싶지는 않았다. 게다가 바빌로니아에서도 반란이 일어나 간신히 진압한 터였다. 하지만 전부터 그리스 원정을 준비하던 장군들과 아테네에서 추방된 그리스 귀족들은 끈질기게 그를 설득했다. 마침내 크세르크세스는 그의 아버지처럼 그리스를 정복해 천하 통일을 이루기로 결심한다헤로도토스는 크세르크세스가 신하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전한다. “그리스를 평정한다면 우리는 페르시아의 판도를 제우스신(헤로도토스가 그리스인이기 때문에 이렇게 표현했을 테고, 사실은 당시 페르시아의 국교인 조로아스터교의 주신인 아후라마즈다라고 했을 것이다)께서 살고 계시는 하늘 끝까지 넓힐 수 있을 것이오.” 이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크세르크세스는 분명 문자 그대로 천하 통일을 꿈꾼 것이다.

 

크세르크세스는 만전을 기하기 위해 4년간 더 준비한 뒤 기원전 480년 봄에야 그리스 원정에 나섰다. 이렇게 해서 벌어진 3차전은 2차전과 세 가지 점에서 달랐다. 첫째, 이번에는 페르시아의 황제가 직접 총지휘를 맡았다(다리우스는 휘하 장군들을 파견했을 뿐 전쟁에 나서지는 않았다). 둘째, 선박으로 이동한 1차전, 2차전과 달리 이번에는 헬레스폰토스 해협(당시에는 어땠을지 몰라도 오늘날의 너비는 약 5킬로미터다)에 선박들로 다리를 놓고 병력을 이동시킨다는 어마어마한 계획

을 세웠다. 셋째는 더욱 엄청난 것으로, 유사 이래 최대 규모의 원정군을 편성했다는 점이다. 페르시아, 아시리아, 메디아, 박트리아, 파르티아 등 페르시아의 강역 내에 있는 민족들은 물론 아라비아, 인도, 리비아, 에티오피아에 이르기까지 수십 개 민족들에서 70만 명의 보병 부대를 편성했다.

 

페르시아가 자랑하는 기병은 8만 명, 페니키아ㆍ이집트 키프로스를 주축으로 한 함선은 1207, 수송선은 무려 3000척에 달했으니, 당시 그리스와 중국을 제외한 문명 세계의 군대는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동원한 것이나 다름없었다(더욱이 페르시아군은 트라키아와 마케도니아를 행군하면서 도중에 현지인들로 병력을 계속 충원해 그리스에 이를 무렵에는 더 큰 규모가 되었다. 헤로도토스는 최종 병력이 528만여 명에 이를 것으로 계산했는데, 이 수치는 믿기 어렵지만 엄청난 대군이었음은 분명하다).

 

 

바다의 육교 크세르크세스가 만들게 한 배다리의 상상도, 비록 바다 치고는 폭이 좁지만 헬레스폰토스는 유럽과 아시아를 가르는 해협인 데다 물살이 아주 거센 곳이므로 여기를 배다리로 건너려면 그림에서처럼 상당히 많은 배가 필요했을 것이다. 노들을 뱃전에 쌓아두고 뱃머리와 꼬리를 밧줄로 연결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한편 이에 맞서는 그리스에서도 1, 2차전과 달라진 점이 있었다. 크세르크세스가 몇 년씩이나 전쟁 준비를 했다는 것은 그리스에도 잘 알려져 있었다. 그리스인들은 누구나 페르시아가 다시 침범해오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폴리스 특유의 분열은 극복하지 못했다. 이미 페르시아의 편을 들었으므로 안심하는 폴리스도 있었고, 겁에 질려 애초에 항전을 포기하는 폴리스도 있었다.

 

게다가 마라톤의 영웅 밀티아데스는 금을 구하기 위해 파로스 섬을 정벌하러 나섰다가 실패하고 병사한 상태였다. 하지만 만약 그가 살아 있었더라면 그리스는 오히려 전쟁에서 승리하지 못했을 것이다. 3차전은 병력의 차이가 비교도 되지 않는 만큼 전술보다는 전략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밀티아데스가 탁월한 전술로 마라톤 전투에서 이겼다면, 이제 아테네에는 탁월한 전략가 테미스토클레스(Themistocles, 기원전 528년경~기원전 462년경)가 있었다.

 

밀티아데스의 정적이었다가 그의 죽음으로 기원전 493년 집정관에 오른 테미스토클레스는 그리스가 생존하려면 해군을 육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앞서 두 차례의 전쟁에서 페르시아 함대가 에게 해를 무사통과했으니 당연한 주장으로 여겨지지만 당시 그리스의 분위기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리스는 일찍부터 해상무역이 활발했음에도 불구하고 해군을 중시하지 않았다. 선박은 어디까지나 무역용이었고 기껏해야 군대의 수송용이었다. 기원전 7세기에야 비로소 그리스 최초로 군함이 만들어졌으나 그것도 그다지 활성화되지는 못했다하지만 해상무역의 풍부한 경험 덕분에 그리스는 군함 건조에 나선 지 얼마 지나지 않은 기원전 6세기 중반에 뛰어난 성능을 자랑하는 삼단노선을 개발했다. 이 함선은 이후 200년 동안 지중해의 물살을 갈랐으며, 이것을 모델로 개발된 갤리선은 16세기까지 2000년 동안이나 유럽 세계의 주력 함선으로 활약했다.

 

이런 상황에서 해군력을 강화하자는 주장이 지지를 얻을 리 없었다. 그러나 테미스토클레스는 끈질기게 고집했고, 집권하자마자 즉각 군함 건조에 나섰다(그는 이재 감각에도 뛰어나 국가재정을 크게 늘리는 데 기여했으니 다른 사람들이 더 이상 반대하기도 어려웠을 터이다).

 

2차전과 다른 점은 또 있었다. 이번에는 아테네 혼자가 아니었다. 비록 폴리스들은 여전히 분열과 반목을 계속했지만, 페르시아의 진군이 시작되자 일부를 제외한 대부분의 폴리스들이 병력을 지원했다. 특히 그리스 최강의 육군을 거느린 스파르타의 지원은 결정적이었다. 어느 모로 보나 이번 3차전은 아테네 대 페르시아를 넘어 그리스 대 오리엔트, 아니 유럽 대 아시아의 대결이었다(결과적으로 여기서 그리스가 승리한 것은 곧 아시아 문명의 쇠퇴와 유럽 문명의 도약을 예고한 셈이다).

 

 

인용

목차

한국사 / 동양사

최초로 맞붙은 동양서과 서양

최종 목표는 아테네

마라톤의 결전

최후의 승부

유럽 문명을 구한 아테네와 스파르타

전후의 새 질서

분쟁의 싹

공멸을 가져온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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