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자본주의의 출범
국부의 탄생
유럽의 17세기 전반부는 역사상 유례없는 전란의 시대였다. 대륙에서는 여러 나라의 이해관계가 얽히고설킨 30년 전쟁이 일어났고, 영국에서는 왕과 의회 간에 내전이 벌어졌다. 무수한 사람이 죽고 많은 도시가 파괴되었으며, 각국의 정치와 사회는 지극히 혼란스러웠다. 문명의 종말인가? 물론 지금 우리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유럽 문명은 종말을 맞기는커녕 이후 더욱 성장하고 더욱 힘을 키워 나중에는 세계 정복에 성공하니까. 그럼 그 죽음과 파괴, 혼란은 어떤 의미였을까??
배고프면 단결하지만 배부르면 분열하게 마련이다. 빵 덩어리가 작을 때는 그것을 키우기 위해 힘을 합치지만 먹을 만큼 커지면 거기서 각자 제 몫을 더 차지하기 위해 싸운다. 17세기 전반의 유럽이 대체로 그런 상황이었다. 아메리카의 발견으로 부를 쌓은 에스파냐의 합스부르크 가문이 서유럽의 패권을 꿈꾼 것이나, 조금 일찍 영토 국가의 개념을 깨우친 프랑스가 동부(알자스-로렌)의 영토를 노리고 30년 전쟁에 개입한 것이나, 엘리자베스 시대의 번영을 계기로 한껏 커진 국력(구체적으로는 과세권)을 틀어쥐기 위해 영국의 왕과 의회가 싸운 것이나, 모두 ‘배고픈 시절’에는 생각지도 못한 행동들이었다. 신성의 외피를 두르고 시작한 전쟁들이 막상 전쟁이 진행되면서 모두 세속적이고 정치적인 성격으로 바뀐 이유는 그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17세기의 30년 전쟁과 영국 내전은 서유럽이 근대사회로 접어드는 데 따르는 ‘진통’이었고, 어찌 보면 근대로 들어가는 ‘입장료’였다.
먹고살 만해지니까 싸우기 시작했다면, 그 전쟁들을 촉발시킨 원인이 되는 서유럽의 부는 어떻게 형성된 걸까? 그 단초는 대항해시대에 생겼다. 이 시대에 동양과 아메리카에서 에스파냐를 통해 유입된 물자들은 향료나 금과 은처럼 현금과 다름없는 것들도 있었지만, 더 중요한 것은 옥수수와 감자 같은 새로운 농작물, 설탕과 차, 염료, 가죽, 목재, 소금, 수산물 등 극히 다양한 생필품이었다. 특히 동양 항로를 장악한 포르투갈은 총포를 내주고 물자를 교환하는 경제적 ‘무역’에 그쳤지만, 신대륙을 정치적으로 정복한 에스파냐의 경우에는 무상으로 현지의 물자를 빼앗았다. 게다가 풍부한 노예 노동력이 생산한 농업 생산물이 서유럽으로 대량 유입되었으니 서유럽이 부자가 되지 않으면 오히려 이상할 판이었다(설령 종교개혁이 일어나지 않았다 하더라도, 서유럽의 ‘교통경찰’이던 로마 교황은 이렇게 급증한 부를 교통정리하지 못해 어차피 무너졌을 것이다).
▲ 영국의 중산층 자본주의는 신분상으로는 평민이면서 생활상으로는 귀족이나 다름없는 신흥 증산충을 만들어냈다. 영국에서는 젠트리, 프랑스에서는 부르주아지가 바로 그들이었다(지주 냄새를 풍기는 젠트리는 주로 산업 자본가들이었고, 산업가 냄새를 풍기는 부르주아지는 주로 지주들이었다는 점이 흥미롭다). 그림은 18세기 영국 화가인 게인즈버러가 그린 앤드루스 부부로, 전형적인 중산층의 모습을 보여준다.
부가 급속히 늘어나자 서유럽 각국은 저마다 제 몫을 챙기려 들었다. 특히 합스부르크가 여기저기 전쟁을 벌이면서 흥청망청 돈을 쓴 것은 서유럽 지역 전체로 보면 부의 국제적 재분배를 대신해준 것이나 다름없었다【그런 점에서 에스파냐 국왕 펠리페 2는 서유럽 번영의 일등공신이다. 비록 때문에 에스파냐는 쫄딱 망했지만, 펠리페의 재산은 1556~1573년 기간 동안 그 이전 재산의 두 배가 되었고, 다시 20년 뒤에는 또 재산이 두 배로 늘었다. 그러나 지출은더 엄청났다. 예를 들면 1571년의 레판토 해전에 지출된 전비 400만 두카트(ducat: 당시 유럽의 금화와 은화 단위) 중 상당 부분이 그가 한 지출이었으며, 무적함대 육성에도 1000만 두카트가 들었다】. 그러나 유럽 문명의 역사상 처음으로 정치의 주체가 된 국가들은 그만큼 돈 쓸 곳도 많았다. 절대주의의 강력한 왕권을 유지하려면 관료와 상비군이 있어야 했고, 그 밖에도 국가 기구들을 운영하기 위한 막대한 재원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런 재원을 확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전쟁이다. 다른 나라를 집어삼키거나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면 국가의 부를 단 기간에 크게 늘릴 수 있다. 실제로 그런 의도에서 서유럽 각국은 국가 재정의 상당 부분을 군사 부문에 투입했는데, 이는 말하자면 가장 효율적이고 생산적인 ‘재투자’에 해당한다(오늘날의 경제학에서는 군사 부문의 국가 지출을 비생산적 소비 부문의 지출로 간주하지만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다). 그러나 전쟁이라는 방식에는 엄연히 한계가 있다. 아무 나라나 먹는다고 될 일이 아니라 부유한 나라를 정복해야 한다. 그런데 부유한 나라는 힘이 세다【그러나 개별 국가 체제의 초기였기 때문에 이따금 경제적 부와 군사력이 일치하지 않는 나라가 있었다. 이런 나라가 일차적인 정복의 대상이 되는데, 예를 들면 에스파냐의 지배를 받은 네덜란드 같은 경우다. 또한 거꾸로 경제력에 비해 군사력이 상대적으로 강한 나라도 있었다. 오늘날에는 경제력이 강해야 군사력도 증강할 수 있지만 당시에는 경제력이 좀 약하면 군사력으로 극복하는 것도 가능했다. 나중에 보겠지만 프로이센 같은 나라가 이에 해당한다】. 따라서 국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전쟁이 아닌 다른 방식도 필요했다. 그래서 각국이 주목한 게 바로 무역이다.
원리는 오늘날 보호무역주의와 기본적으로 같다. 즉 수입을 줄이고 수출을 늘리면 국가의 부가 쌓인다. 그러기 위해서는 보호관세가 필요하다. 강물의 흐름을 통제하려면 댐이 필요하듯이, 수입을 억제하고 수출을 증대하려면 관세의 장벽을 높이 세워야 한다. 수출 증대와 보호관세를 내세우는 이 무렵 서유럽 각국의 정책을 중상주의(mercantilism)라고 부른다(이런 경제 정책은 서유럽 세계가 정치적으로 각 국가별로 분립되지 않은 시기, 즉 중세라면 불가능하다. 그런 점에서 근대사회로 향하는 물꼬를 먼저 튼 것은 경제보다 정치일 수도 있다).
이제 국가는 정치의 주체만이 아니라 역사상 처음으로 경제의 주체가 되었다. 그래서 예전에는 존재하지 않던 개념이 탄생했다. 바로 국부(國富)라는 개념이다. 서유럽 세계가 통합적이었던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에는 경제가 자연스럽게 흘렀고 누구도 인위적으로 통제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근대에 접어들어 서유럽 세계가 각국별로 분립된 중상주의 시대에 이르면 경제에도 국적이 생겨났고 일국적인 부의 형성이 가능해졌다. 이 국부의 개념은 곧 이어 자본주의라는 새로운 체제를 가능케 했다. 이로부터 한 세기가 지나면서 국부의 개념이 충분히 성숙했을 때, 즉 자본주의의 정체가 뚜렷이 드러났을 때, 영국의 경제학자 애덤 스미스(Adam Smith, 1723~1790)는 『국부론(The Wealth of Nations)』이라는 책을 쓰게 된다.
자본주의라는 새로운 바람
그런데 중상주의에는 문제가 있다. 우선 보호관세가 제 구실을 하려면 반드시 필요한 게 있다. 그것은 바로 국내 산업이다. 수출할 물건이 없는데 수출에 집중할 수는 없다. 따라서 국내에 어느 정도의 산업 기반이 확립되어 있어야 한다. 처음에는 에스파냐를 본받아 상업과 무역에만 관심을 가졌던 각국은 점차 산업과 공업 쪽으로 시선을 돌리게 되었다. 그러자 중세 말기부터 번영하기 시작한 자치도시들에 새삼 눈길이 갔다. 사실 중상주의는 13세기 자치도시의 상인들이 이미 실험했다가 역시 마찬가지 문제점을 느끼고 포기한 정책이었다(물론 그때는 국가라는 강력한 정치체가 없는 상황이었지만).
상업과 무역은 잘하면 큰 이익을 남길 수 있지만, 근본적으로 보면 물자를 유통시키는 것일 뿐 생산과는 무관하다. 그러므로 어디선가 이득을 보면 반드시 그만큼 어디선가 손해를 보게 마련이다. 즉 부가 외부에서 추가로 유입되지 않는다면 총체적인 부의 증가는 없다. 그래서 13세기 이탈리아 자치도시의 상인들은 자체적으로 생산 시스템을 마련한 적이 있었다. 수공업자에게 미리 돈과 원료를 주고 물건을 제작하게 한 뒤 그것을 가지고 상업과 무역을 전개하는 방식인데, 이것을 선대제(putting-out system)라고 불렀다.
개별 상인이 개별 수공업자와 거래하는 이 옛 방식을 그대로 국가 체제에 적용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부의 생산을 국내적으로 가능하게 해야 한다는 발상은 배울 수 있다. 게다가 중세의 그런 실험을 통해 ‘시장을 위한 생산’이라는 관념이 충분히 무르익었다. 그런 발상과 관념이 낳은 새로운 제도가 바로 자본주의다. 자본주의적(자본가적) 생산‘이라는 용어는 19세기 카를 마르크스(Karl Mars, 1818~83)가 처음 사용했고, 생산과 분배를 포괄하는 경제 제도라는 의미로서의 자본주의(capitalism)라는 용어는 20세기에 들어서야 사용되지만, 자본주의의 발상과 관념은 그보다 훨씬 이전부터 싹텄던 것이다.
중세 서유럽에 동방의 문물을 전함으로써 서유럽의 발전에 기여한 것은 이탈리아 상인들이었고, 대항해시대에 서유럽을 세계 최대의 경제 중심지로 만든 것은 에스파냐였다. 그러나 이들 지중해 국가들은 자본주의의 뿌리를 키우는 역할에 그쳤을 뿐 그 꽃은 피우지 못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그들이 전통적인 문명권에 속해 있었기 때문이다. 전통이 강한 곳에서는 새로운 바람이 불기 어렵다. 변화의 바람은 중심이 아니라 변방으로부터 온다. 그럼 그 변방은 어딜까? 바로 중세적 전통이 가장 약한 곳이다.
전통적인 것 중에서도 가장 전통적인 요소가 신분제다. 기도하는 사람(성직자), 지배하는 사람(영주), 싸우는 사람(기사), 일하는 사람(농노)이 명확히 나뉘어 있던 중세 사회의 전통에서는 모든 개개인이 신분에 의해 규정된 사회적 역할에서 벗어나기 어려웠다. 귀족은 상업에 종사하는 게 법으로 금지되어 있었으므로 아무리 이재 감각이 있는 영주라 해도 대상인이 될 수 있는 길은 애초부터 막혀 있었으며, 농노는 일을 아무리 열심히 해도 큰 재산을 모은다거나 농노 신분을 면할 길이 원래부터 봉쇄되어 있었다. 이런 신분제를 더욱 부추긴 게 종교의 굴레다. 모든 종교가 그렇듯이, 중세의 그리스도교(로마 가톨릭)는 현세보다 내세를 중시했다. 현세는 좋은 내세(천국)로 가기 위한 중간 단계 혹은 시험장에 불과했다. 따라서 현세에는 오로지 신앙만이 중요할 뿐 세속적인 삶의 내용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런 환경이었기에 대항해시대가 서유럽의 경제적 부를 가져다 준 것만으로는 중세의 틀을 완전히 깰 수 없었다. 중세를 부수는 또 하나의 망치, 종교개혁이 필요했던 이유는 거기에 있다. 또한 루터의 사상보다 칼뱅주의가 훨씬 중요했던 이유도 거기에 있다. 칼뱅주의는 현세의 세속적인 삶이 신앙과 무관한 게 아니라 오히려 좋은 내세를 보장받는 척도라고 가르쳤으니까(실제로 남프랑스에 자리 잡은 위그노는 상업에 많이 종사했는데, 이들이 없었다면 프랑스는 자본주의만이 아니라 중상주의도 상당히 늦어졌을 것이다).
그렇다면 자본주의가 어디서부터 등장할 수밖에 없는지는 자명해진다. 자본주의의 발생에 필요한 적당한 부를 가지고 있고, 중세의 종교적 신분제적 굴레로부터 자유로운 곳, 바로 영국이 그곳이다. 영국은 에스파냐를 물리치고 최대의 해상무역 국가로 발돋움함으로써 자본주의를 이루기 위한 ‘재정적 자격’을 구비했고, 비록 가톨릭 냄새가 짙지만 일찍부터 영국 국교회로 종교 독립을 이룸으로써 ‘종교적 면허’도 땄다. 게다가 영국은 대륙의 봉건제가 그다지 강력하게 뿌리 내리지 못한 곳이었으므로 신분적 굴레에서도 비교적 자유로웠다【사실 에스파냐도 영국 못지않게 자본주의의 요건을 갖춘 곳이었다. 경제적 부라면 영국을 훨씬 능가하는 수준이었고, 봉건제의 발달은 영국보다도 못했기 때문이다. 이런 ‘호조건’에도 불구하고 에스파냐에서 자본주의를 이루지 못한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장점이 곧 단점이 되어버린 탓이다. 오랜 이슬람 지배를 받았기에 봉건제가 발달하지 못했다는 것은 장점이지만, 바로 그 때문에 레콘키스타가 끝난 직후부터 에스파냐는 이교도에 대한 과도한 적대감으로 인해 곧장 골수 가톨릭이 되어버린 것이다. 다른 하나는 합스부르크 왕가 때문이다. 만약 합스부르크가 에스파냐를 지배하지 않았더라면 에스파냐의 지배층은 그렇게까지 보수화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처음에 에스파냐 왕실이 통혼으로 합스부르크 가문에 접근한 이유는 다른 서유럽 왕실들에 비해 정통성이 취약하다는 약점 때문이었으나, 그렇다고 해도 그 대상이 합스부르크라는 것은 에스파냐의 장기적 미래를 위해서는 불행이었다】.
15세기 말부터 17세기 전반까지 영국 각지에서 일어난 인클로저 운동은 바로 그런 영국적 특성을 잘 보여주는 사건이다. 원래 이 운동은 공동체적 굴레에서 벗어난 농민들이 효율적인 농사를 위해 자기들끼리 자발적으로 토지를 교환하고 소유하는 평화로운 과정으로 시작했다(농민들은 새로 자기 소유가 된 토지에 울타리를 둘렀는데, 여기서 ‘인클로저’라는 말이 나왔다). 그런데 농민들의 토지 구획에서 힌트를 얻은 봉건 영주들이 농민들을 폭력적으로 몰아내고 농민들의 울타리 대신 자신들의 울타리를 두르면서 인클로저 운동의 취지가 변질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자본주의를 기준으로 본다면 그것은 취지의 변질이라기보다 혁신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영주들의 의도는 바로 이 토지에서 농사를 짓는 대신 양들을 길러 당시 첨단 산업이던 양모 가공업의 원료를 대기 위한 데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돈을 벌기 위한 목적이었으니 자본주의의 초기적 단계에 속한다【역사에서 올바른 가치 평가란 무엇일까? 토지를 잃은 영국 농민들은 유랑민이 되어 고통을 겪었고, 이것이 여러 가지 사회 문제를 일으켰다. 당시 진보적 지식인이던 토머스 모어는 「유토피아」에서 “양들이 사람을 잡아먹는다.”라고 개탄했다. 그러나 누가 봐도 나무랄 만한 영주들의 탐욕은 결국 영국 자본주의를 앞당기는 역할을 했고, 이를 바탕으로 영국은 이후 세계 최강국으로 발돋움할 수 있었다. 그래서 역사에서는 통시대적으로 올바른 평가가 어렵다. 예를 들어 이집트의 피라미드와 중국의 시황릉은 축조 당시 수십만 명의 피와 땀을 잡아먹었으나 후대에게 귀중한 문화유산이 되었다】.
모직물 공업이 발달하면서 농민들 중 일부 부유층은 자작동(yeoman)으로 성장했고, 이들 중 상층부가 또 평민 출신으로 가장 귀족 신분에 가까이 다가간 젠트리(entry)를 형성했다. 이 젠트리가 의회 시민원의 주력을 이루었고 청교도혁명의 주체 세력이 되었으니, 영국의 근대적 의회제도는 자본주의가 없으면 불가능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선후 관계를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다. 거꾸로 영국이 중세적 전통이 약하고 의회적 전통이 강하지 않았더라면 자본주의의 발생도 불가능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 유토피아를 꿈꾼 사상가 독일 화가 홀바인이 그린 토머스 모어의 초상이다. 모어는 주의가 싹트기도 전에 사회주의사상을 품은 진보적인 사상가였으며, 지주의 욕심 때문에 농민이 토지에서 쫓겨나 산업 노동자가 되는 현상을 개탄했다.
세계 정복을 향해
영국이라는 튼튼한 계승자가 있었기에 에스파냐가 몰락해도 서유럽 문명의 세계 진출은 위축되기는커녕 그 반대로 더욱 가속화되었다. 하지만 영국보다 먼저 그 바통을 이어 받은 것은 네덜란드였다. 영국이 엘리자베스 시대의 번영을 이어가지 못하고 내전의 도가니에 휘말려 있는 동안, 네덜란드는 에스파냐에서 독립해 정치적 안정을 이루고 순식간에 최대의 무역국으로 급성장했다. 플랑드르 시절부터 중개무역에는 일가견이 있는 데다 모직물 산업과 조선업의 발전까지 등에 업은 네덜란드의 무역은 말 그대로 ‘무역풍에 돛단 격’이었다.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이 피땀 흘려 닦아놓은 대서양 항로에는 점차 네덜란드의 상선들이 더 많아지기 시작했다. 항로에는 원래 임자가 없는 데다 토르데시야스 조약으로 이베리아의 항로 독점권을 인정해준 교황도 이제 유명무실한 존재로 전락했다. 몰락해가는 에스파냐의 유산은 한때 에스파냐의 ‘자식’이었던 네덜란드에 거의 다 상속되었다. 네덜란드는 원래부터 텃밭이던 발트 해와 북해의 무역뿐 아니라, 예전보다는 많이 쇠퇴했지만 아직 짭짤한 수익을 낳는 지중해 무역, 게다가 대서양 항로까지 지배하게 되었다. 이제 네덜란드가 에스파냐에 이어 ‘해가 지지 않는 나라’의 지위를 계승하는 걸까? 하지만 바로 그때 영국이 등장했다.
이미 엘리자베스 시대 말기인 1600년에 네덜란드는 동인도(당시 유럽인들은 아메리카를 인도라고 착각한 ‘콜럼버스의 실수’ 때문에 진짜 인도를 동인도라고 불렀다)를 경략하기 위해 동인도회사를 만들었다. 그러자 네덜란드를 바짝 뒤쫓고 있던 영국도 그해에 동인도회사를 세워 경쟁자로 자처했다. 하지만 아직 영국은 무역의 면에서 네덜란드의 한 수 아래였다. 게다가 영국은 제임스 1세의 반동 정책으로 국내 사정이 어지러웠으므로 네덜란드처럼 총력을 기울일 입장이 못 되었다. 1602년 네덜란드는 10여 개로 난립하던 민간 동인도회사를 하나의 국책 동인도회사로 통합하고 인도는 물론 말레이시아, 수마트라, 일본에까지 손을 뻗쳐 본격적인 아시아 무역에 나섰다【특히 이 무렵에 형성된 네덜란드와 일본의 관계는 사뭇 각별하다. 일본에는 16세기 중반부터 포르투갈 상인들이 출입했으나 일본인들은 ‘무식한 장사꾼’의 이미지에다 가톨릭을 앞세우는 그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 반면 네덜란드 상인들은 포르투갈인들에 비해 훨씬 신사였고 종교를 그리 강요하지 않는 신교도였으므로 바쿠후와 쇼군(將軍)의 호감을 샀다. 그런 탓에 17세기부터 19세기 중반까지 약 200여 년간의 공식적인 쇄국기에도 바쿠후는 네덜란드 상인들에게만큼은 나가사키 항구에 별도의 구역을 설정해 무역을 허락했다. 이후 18세기 초반 일본에서는 네덜란드를 통해 서양 문물을 연구하는 란가쿠(蘭學)라는 학문이 성행하게 되는데, 우리로 치면 북학(北學)에 해당한다】.
그러나 언제든 영국이 제 몸을 추스르고 나선다면 네덜란드는 뒤처질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그 이유는 ‘비교 우위’가 없었기 때문이다. 조선력과 해운력에서는 그 이전부터 영국이 네덜란드에 뒤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무적함대의 격파로도 증명된다), 네덜란드가 장기로 삼고 있는 모직물 공업은 바로 영국의 주력 산업이기도 했던 것이다. 무역과 상업만으로 승부하는 중상주의 경기에서는 무승부지만 산업적 생산력을 필요로 하는 자본주의 경기에서는 영국의 잠재력이 훨씬 컸다. 결국 영국이 제 몸을 어느 정도 추슬렀을 때 네덜란드는 잠시 누린 일인자의 지위를 내주어야 했다.
청교도혁명으로 권력을 장악한 크롬웰은 네덜란드를 따라잡기 위해 1651년에 새로운 항해조례를 제정했다. 그 주요 내용은 유럽 이외의 지역에서 산출된 물건을 영국이나 영국 식민지로 운송할 때는 영국의 선박을 이용해야 한다는 것이었는데, 이것은 분명히 네덜란드를 겨냥한 조치였다. 항해조례에 따라 곳곳에서 네덜란드 상선들이 영국 군함에 검문을 당하는 사태가 잇따랐다.
▲ 크롬웰의 유제 고집스러워 보이는 크롬웰의 데스마스크다. 그는 생전에도 내전을 일으키고 철권통치로 일관했지만 죽은 뒤에도 분쟁의 씨앗을 남겼다. 영국의 무역 독점을 위해 그가 제정한 항해조례는 네덜란드와의 전쟁을 낳았다.
결국 전쟁으로 해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1052년부터 2년간 양측은 전쟁에 돌입했다. 육건이 없고 해군끼리의 전쟁이었으므로 그렇게 기열히지는 않았고 이내 양측이 강화조약을 맺고 끝냈으나 누가 보아도 영국의 승리임은 부인할 수 없었다. 이후 네덜란드는 1665년과 1672년 두 차례에 걸쳐 영국에 다시 도전했지만 이미 승부의 추는 기울어졌다(게다가 17세기 후반부터는 프랑스가 해외 식민지 건설에 뛰어들면서 영국과 프랑스의 대결이 더 중요해졌다)【항해조례는 중상주의 정책에 따른 조치였지만 실상은 자본주의 발달에 더 크게 기여했다. 이후에도 항해조례는 영국이 해외 식민지를 확장해나가는 시대에 계속 통용되다가 자본주의가 성숙해지는 19세기 중반에 효력을 잃고 폐지된다】.
이제 영국은 에스파냐의 뒤를 이어 ‘해가 지지 않는 나라’의 명성을 물려받고 세계 진출의 선두 주자로서 확고히 자리매김했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발흥하는 시대였던 만큼 영국의 세계 진출은 두 세기 전의 에스파냐와 다를 수밖에 없었다. 가장 큰 차이는 식민지의 ‘이용 방식’이었다. 대항해시대에는 식민지에서 필요한 물자를 들여오는 게 중요했지만, 자본주의 시대에는 무엇보다 시장이 가장 중요했다. 따라서 에스파냐는 식민지에 대한 철저한 착취를 통해 단기간에 단물을 빼먹는 방식을 썼지만, 영국은 식민지를 장기적이고 다목적적인 용도로, 즉 원료 공급처인 동시에 수출품 시장으로 이용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서는 정치적 지배가 필수적이었다. 에스파냐는 식민지의 원주민 국가들을 한번 휩쓸어 정복하는 것으로 끝냈고 또 그것으로 충분했으나, 영국은 식민지에 본국과 어울리는 정치·행정 구조를 갖추어놓고 장기적으로 경영하려 했다. 가장 대표적인 영국의 식민지는 서쪽으로는 나중에 미국이 되는 아메리카였고, 동쪽으로는 19세기에 칼라일이 “셰익스피어는 인도와도 바꿀 수 없다.”라고 말한 인도였다(셰익스피어의 위대함을 강조하려 한 말이지만 인도인들의 생각과는 전혀 무관한 망언이다).
그러나 17세기 후반까지 영국은 아메리카와 인도에 식민지의 거점만 마련하는 데 그쳤고, 본격적인 식민지 지배는 뒤로 미루어야 했다. 유럽 대륙의 정세가 다시 큰 용틀임을 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전 유럽에 근대국가 체제를 확립시킨 30년 전쟁은 알고 보니 사태의 종결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일차적 영토 분할은 끝났고, 당시 유럽 각국은 그것으로 종결되었다고 여겼지만, 실상 그것은 원대한 변화의 출발점이었다. 바둑으로 치면 전투가 끝나고 집을 세어 승부를 가리는 단계가 아니라 포석을 마치고 본격적인 전투를 개시하는 단계였다. 하기야, 근대국가라면 가장 중요하고도 민감한 게 바로 영토 문제인데, 그것이 그 정도의 전쟁과 조약으로 완전히 매듭지어질 수는 없었다.
▲ 해양 제국의 계승자 에스파냐가 무너짐으로써 영국과 네덜란드가 ‘해가 지지 않는 나라’영예로운 별명을 얻기 위해 다투게 되었다. 그림은 크롬웰의 항해조례로 비롯된 영국-네덜란드 전쟁인데, 이 해전에서 영국이 승리함으로써 해양 제국의 계승자가 된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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