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라톤의 결전
어차피 피할 수 없는 전쟁이라면 이를수록 좋다. 다리우스는 아토스 곶에서 참사를 겪은 후 불과 2년 만에 다시 그리스 원정군을 발진시켰다. 이번에도 역시 휘하의 조공국들에 임무 분담을 하달한 다음, 다티스와 아르타페네스 두 명을 사령관으로 삼아 대규모의 다국적 연합군을 편성했다. 하지만 2년 전에 싸워보지도 못하고 패배를 안겨주었던 아토스 곶은 피해야 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연안을 따라가는 항해 대신 바다를 가로지르는 해로를 택했다. 사모스에서 키클라데스 제도를 거쳐 아테네로 직진하는 것이다.
기원전 490년, 600척의 함선에 나누어 탄 페르시아의 대군은 먼저 몸풀이 삼아 낙소스 섬을 간단히 제압하고 곧바로 일차 목표인 에우보이아 섬의 에레트리아를 공격했다. 페르시아에 대항할 힘이 없는 데다 국론도 분열되어 있던 에레트리아는 며칠도 버티지 못하고 함락되었다. 이제 아테네까지는 겨우 50여 킬로미터, 하루나 이틀이면 닿을 거리였다. 자, 어디서 아테네와 맞붙을까?
페르시아의 원정군에는 길잡이가 한 명 있었다. 그는 아테네인으로서 참주까지 지냈다가 쫓겨난 경력이 있었다. 이 정도면 누군지 분명해진다. 바로 페이시스트라토스의 아들 히피아스였다. 스파르타의 공격으로 아테네의 참주정치가 무너지면서 조국에서 쫓겨나자 그는 페르시아에 몸을 의탁해 조국 침략의 길을 인도하는 적의 앞잡이, 매국노가 되었다. 하지만 아테네가 정복되면 그는 다시 금의환향해 실권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러나 아토스 곶에서 한 번 아테네를 보호한 하늘은 아테네가 매국노의 손에 들어가도록 놔두지 않았다. 히피아스가 제안한 결전장은 바로 아테네 동북쪽 40킬로미터 지점에 있는 마라톤 평원이었다. 여기서 오늘날 올림픽경기의 한 종목으로 이름이 전해지는 유명한 마라톤 전투가 벌어지게 된다.
마라톤에서 다리우스의 야망과 히피아스의 염원을 꺾은 그리스의 영웅은 밀티아데스(Miltiades, 기원전 554년경~기원전 489년경)였다. 그의 가문은 클레이스테네스의 군제 개혁으로 생긴 10가문 중 하나였으며, 밀티아데스는 고대 올림픽에서 주요 경기 종목이었던 전차 경주에서 우승해서 이름이 높았다. 무장으로서 그의 능력을 높이 평가한 다른 가문의 장군들은 자신들이 지휘권을 맡은 순번에도 그 권한을 밀티아데스에게 양도했을 정도다.
페르시아의 대군이 코앞에 이르렀다는 소식에 아테네의 지도자들은 주전론과 주화론의 두 패로 갈렸다. 밀티아데스는 결정권을 쥐고 있던 군사장관인 칼리마코스를 설득해 주전론으로 이끌었다. 그때 그의 설득 무기는 바로 히피아스가 권력을 장악하면 모두 혹독한 보복을 당하리라는 것이었다. 결국 페르시아가 히피아스를 길잡이로 내세운 것은 득보다 실이 많았던 셈이다.
▲ 왕정의 반대자들 독재자의 최후는 고대에도 비참했다. 페이시스트라토스의 두 아들 히피아스와 히파르코스가 아버지의 후광을 등에 업고 독재정치를 펼치자 아테네의 귀족들은 그들을 살해하기로 결심한다. 사진은 히파르코스를 살해한 하르모디오스(왼쪽)와 아리스토게이톤의 조각상이다. 이 사건이 없었다면 아테네에는 참주정(왕정)이 정착했을 테고, 클레이스테네스의 민주정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대적을 앞에 둔 상황에서도 그리스의 폴리스들은 결집된 행동을 보여주지 못했다. 아테네와 불화를 빚던 폴리스들은 오히려 아테네의 위기를 기회로 여기고 세력을 확장하고자 했다. 게다가 ‘이념과 체제’는 달라도 그리스 전체가 위험해질 때는 협력하리라고 믿었던 스파르타마저도 제사가 열리는 기간이라는 핑계를 대며 원군을 보내오지 않았다. 아테네는 고립무원이었다. 유일한 지원군은 아테네의 보호국인 플라타이아였다.
마라톤 평원에 도착한 밀티아데스는 아테네의 주력군을 오른쪽에, 플라타이아군을 왼쪽에 포진시키고 중앙에는 약한 병력을 배치했다. 결과적으로 이것이 바로 그리스군의 승착이 되었다. 전투가 벌어지자 예상한 대로 중앙에서는 페르시아군이 이겼지만, 양 날개 쪽에서는 그리스군이 승리했다. 날개 쪽의 페르시아군은 도망쳤으나 그리스군은 도망치는 적을 내버려두고 중앙의 적을 공략해 섬멸해버렸다. 빛나는 전략의 승리였다.
여기서 전령이었던 병사 필리피데스(페이디피데스라는 설도 있다)는 약 36 킬로미터의 거리를 뛰어 아테네 사람들에게 승전보를 전하고는 그만 숨이 차서 죽었는데, 그것이 마라톤 경기의 기원이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아테네는 승리했는데도 왜 한 병사를 희생하면서까지 승전보를
빨리 전해야 했을까? 그것은 마라톤에서 패배한 페르시아군이 재빨리 함선으로 철수해 아테네를 직접 공략하기로 작전을 변경했기 때문이다. 필리피데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도시에 남아 있던 아테네군은 방비 태세에 들어갔고 곧이어 마라톤의 주력군도 아테네로 돌아왔다. 페르시아 함대는 손 한 번 써보지 못하고 아테네의 외항인 팔레론에 며칠간 머무르다가 뱃머리를 돌려 철군했다. 또다시 원정에 실패한 것이다【전술적인 면에서 그리스를 구한 것은 마라톤 전투에서 최초로 선보인 밀집대형 전술이다. 궁병과 기병으로 오리엔트를 정복한 페르시아군에 아테네의 밀집대형은 낯선 것이었다(그리스에는 말을 기르기에 적합한 목장이 거의 없었으므로 기병이 거의 발달하지 못했다. 기병이 있었더라면 필리피데스처럼 발로 달리는 전령을 쓰지도 않았겠지만). 보병끼리의 싸움이라면 농노와 고원족 등 용병으로 이루어진 페르시아 보병이 고도로 훈련된 중간층 출신의 그리스 보병을 당해내기 어려웠다. 마라톤 전투에서 전사자 수는 페르시아 측이 6400명이었고, 아테네 측은 192명이었다】.
▲ 그리스의 무기 마라톤 전투에서 그리스를 구한 중장보병의 모습이다. 중장보병은 밀집대형 전술을 가능케 했고, 이 전술은 마라톤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중장보병은 기원전 8세기에 생겨났으나, 기원전 6세기부터는 무거운 청동제 흉갑 대신 질긴 베나 가죽으로 만든 간편한 갑옷과 모자처럼 작은 투구를 사용했으므로 보병치고는 기동성도 매우 뛰어났다. 그래서 ‘달리는 중장보병’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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