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유럽을 낳은 전쟁
화재를 부른 불씨
절충과 타협은 원래 문제의 근본적 해결 방식이 아니다. 잘되어야 문제를 오래 묶어둘 뿐이고, 잘못되면 문제를 더욱 키우게 된다. 전형적인 절충과 타협이었던 1555년의 아우크스부르크 화의가 바로 그랬다. 가장 큰 불씨는 바로 루터파에 한해서만 신앙의 자유를 허용했다는 점이다. 보수적인 황제파와 가톨릭 측은 당장 불거진 루터파 영방군주들의 불만을 달래는 방식으로 문제를 덮으려 했으나 그것은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도 막지 못할 문제로 키우는 꼴이 되고 말았다(만약 시대의 추세를 따라 완전한 신앙의 자유를 허용했더라면 적어도 종교의 외피를 두른 문제는 더 이상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가톨릭의 반성도 있었다. 아우크스부르크 화의로 루터파를 공인하게 된 것은 가톨릭에도 대단히 뼈아픈 일이었다. 사실 인정하기는 싫어도 성서로 돌아가자는 신교파의 호소가 먹힌 데는 교회의 타락이 큰 원인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들의 주장대로 교회의 종교 의식을 폐지한다면 가톨릭은 정체성을 잃게 될 게 뻔했다. 자칫하면 교회 조직과 사제도 성서에 나오지 않으니 없애야 한다고 할지 몰랐다.
그래서 가톨릭 측은 트리엔트 공의회를 열어 기본 교리부터 점검하기로 했다. 우선 인간은 신의 뜻에 복종하기만 하는 존재가 아니라 나름대로 자유의지를 가지는 존재로 규정되었다(즉 신은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부여했다). 또한 신교 측의 주장을 가톨릭 방식으로 소화해 성직 매매를 금지하고 성직자의 자질 향상을 모색하기로 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가톨릭이 존립하는 기반을 약화시키면 안 되었으므로 성서와 신앙만이 아니라 교회와 교회 의식도 여전히 중요하다고 결정했다.
더 중요한 개혁은 수도회에서 나왔다. 중세부터 교회가 위기에 빠질 때면 늘 구해주었던 수도회 운동은 또다시 가톨릭 교회에 큰 힘을 실어주었다. 전통적인 프란체스코회와 도미니쿠스회도 활동을 재개했지만, 그보다 큰 힘은 예수회였다. 1534년 에스파냐의 로욜라(Ignatius de Loyoli, 1491~1556)가 교황의 승인을 얻어 출범시킨 예수회는 군대식 복종과 규율로 무장하고 가톨릭 부흥에 앞장섰다. 특히 예수회 수도사들은 북독일 군주들의 개종으로 혼란 상태에 빠져 있던 남독일 군주들과 폴란드를 가톨릭으로 복귀시키는 개가를 올렸다【세계적으로 보면 예수회가 가장 큰 성과를 거둔 곳은 독일이 아니라 동양이었다. 예수회는 유럽에서 실추된 가톨릭의 명예를 해외에서 회복하고자 노력했다. 명 제국 시대의 중국과 전국시대의 일본에 온 서양인 선교사들은 대부분 예수회 소속이었다. 이는 예수회의 탄생지가 당시 대양 항로 개척의 주역인 에스파냐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에스파냐 상선을 타고 멀리 동양에까지 포교 활동에 나섰다. 그러나 새로운 지역에서 포교하려면 가톨릭보다는 신교가 유리했을 것이다. 교회 제도와 의식을 강조하는 것보다는 성서와 신앙을 앞세우는 게 그리스도교에 대한 동양인들의 거부감을 줄일 수 있었을 테니까. 실제로 동양에 온 가톨릭 선교사들은 마치 유럽의 신교파처럼 교회보다 성서를 위주로 포교했다】.
▲ 교황의 오른팔 로욜라가 교황 파울루스 3세 앞에 무릎을 꿇고 예수회의 창립을 승인받는 장면이다. 헨리 8세를 파문하고 카를 5세의 신교 탄압을 적극 지지한 파울루스는 물론 대만족이었다. 그러나 예수회 선교사들은 이미 신교로 대세가 기운 유럽을 포기하고 새로운 종교 ‘시장’을 찾아 멀리 동양으로 진출하게 된다. 중국을 서양에 최초로 알린 이탈리아 선교사 마테오 리치가 바로 그 예수회 소속이었다.
그러나 가톨릭의 ‘종교개혁’은 신교 측으로서는 ‘반(反)종교개혁’인 셈이었다. 더구나 배타적인 성격으로 말한다면 신교 역시 가톨릭에 못지않았다. 그나마 루터파는 공인을 받았으므로 다소 갈등이 해소되었으나 진짜 큰 문제는 칼뱅주의였다. 남프랑스만큼은 아니었지만 칼뱅주의의 호소력은 독일에도 서서히 퍼져가기 시작했다. 16세기 중반에는 이미 독일 인구의 90퍼센트가 신교도였고, 그중 상당수는 칼뱅파였다. 그러자 루터파에 회의를 품은 신교 영방군주들도 대안으로 칼뱅주의를 택했다. 그러나 칼뱅주의는 아직 공인되지 않은 신앙이었다. 게다가 예수회의 활동으로 다시 종교적 보수화가 진행되기 시작했다.
이래저래 칼뱅파 군주들은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위기는 곧 기회다. 프랑스에서 위그노가 승리를 거두는 모습을 지켜본 그들은 놀라움과 함께 큰 자극과 고무를 받았다. 그도 그럴 것이 신교가 현실 정치 투쟁에서 가톨릭을 누르고 승리한 경우는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서유럽의 전통적 중심지인 프랑스에서.
새삼스럽게 칼뱅주의의 위력을 실감한 그들은 서서히 결속을 이루기 시작했다. 마침 리더도 있었다. 전통의 영방군주인 팔츠 선제후 프리드리히 5세가 칼뱅파로 돌아선 것이다(혹시 루터파의 리더인 작센 선제후에 대한 경쟁심 때문이었을까?). 칼뱅파 군주들은 1608년 프리드리히를 중심으로 ‘연합’을 결성했다. 최소 목표는 자신들의 보위이고, 최대 목표는 프랑스처럼 칼뱅파의 승리다.
그러나 위그노 전쟁에서 자극을 받은 것은 승리한 신교 측만이 아니었다. 남독일의 가톨릭 세력은 프랑스에서 가톨릭이 무너지는 것을 보고 가뜩이나 긴장하고 있는 판에 칼뱅파 군주들이 뭉치자 자신들도 모종의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그들은 1609년 바이에른 대공 막시밀리안을 리더로 삼아 ‘동맹’을 결성했다.
무르익은 전운을 전쟁으로 표출시킨 계기는 바깥에서 생겨났다. 아우크스부르크 화의를 성립시킨 페르디난트 1세의 손자 페르디난트 2세는 어린 시절부터 예수회의 교육을 받고 자란 가톨릭 ‘골수분자’였다. 개인적으로만 그랬다면 별 문제가 없겠는데, 그는 1617년에 보헤미아 왕이 되었고, 그 이듬해에는 헝가리의 왕까지 겸했다(보헤미아와 헝가리는 모두 합스부르크 가문의 소유였으니까 특별한 일이 아니다). 권력을 손에 쥔 그는 자신의 개인적인 꿈을 두 나라에 걸쳐 실현하려 했다. 보헤미아 신교도들은 가혹한 탄압 아래 놓였다. 수십 년 전 아우크스부르크 화의 때만 해도 군주와 귀족들은 그런대로 타협을 이룰 수 있었으나 이제는 사정이 달랐다. 우선 페르디난트는 할아버지의 타협을 가톨릭의 패배라고 여겼으며, 탄압받는 보헤미아의 신교파 귀족들도 과거처럼 굴욕적인 타협 따위는 하지 않으려 했다.
보헤미아의 의회는 페르디난트를 보헤미아 왕으로 인정하지 않겠다고 주장했다. 영리하게도 그들은 독일의 팔츠 선제후이자 ‘연합’의 리더인 프리드리히 5세를 자신들의 새로운 왕으로 추대했다. 그러나 페르디난트는 전선이 확대될 조짐을 보이는 것에도 개의치 않았다. 1618년 그는 종교적 이단에서 정치적 반란 세력으로 탈바꿈한 보헤미아 귀족들에 대해 군사적 공격에 들어갔다. 이렇게 해서 30년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 전쟁은 명칭처럼 1618년에서 1648년까지 30년을 끌게 된다.
▲ 분노한 보헤미아의 귀족 15세기 후스 운동의 중심지였던 탓으로 프라하의 귀족들은 신교적 성향이 강했다. 그런 판에 가톨릭의 본산인 합스부르크 가문의 페르디난트 2세가 보헤미아의 왕을 겸하게 되자 그들은 당연히 불만이었다. 그림은 보헤미아 귀족들이 가톨릭 관리들을 창밖으로 내던지는 장면이다. 바로 이 사건이 30년 전쟁의 직접적인 계기가 된다.
국제전과 복마전
보헤미아 신교도 귀족들의 노림수는 빗나갔다. 믿었던 프리드리히 5세와 칼뱅파 연합은 막상 뚜껑이 열리고 보니 별로 힘을 쓰지 못했다. 독일에서 칼뱅파는 아직 가톨릭은커녕 루터파보다도 세력이 약했다. 게다가 페르디난트는 1619년에 제위도 차지하면서 가톨릭의 새로운 맹주로 떠올랐다. 힘을 얻은 독일의 가톨릭 동맹은 황제와 ‘또 다른 동맹’을 맺었다. 여기에 가톨릭 문제라면 만사를 제쳐두고 약방의 감초처럼 끼어드는 에스파냐까지 합세했다. 보헤미아 신교파는 사면초가에 처했다. 결국 1620년 그들은 프라하 부근에서 황제군에게 패배하고 뜻을 접어야 했다. 잠시 그들과 운명이 엮인 팔츠 선제후 프리드리히는 국외로 도망쳐버렸다.
이로써 반란은 진압되었고 보헤미아는 원래대로 합스부르크의 소유가 되었다. 이것으로 전쟁이 끝났다면 이 전쟁은 유럽의 역사에서 그토록 큰 비중을 갖지 못했을 것이다. 하마터면 ‘2년 전쟁’으로 끝날 뻔한 사건을 ‘30년 전쟁’으로 만든 것은 예상외의 변수인 덴마크였다.
덴마크의 올덴부르크 왕조는 이미 루터의 종교개혁 초기에 국내의 가톨릭 세력을 물리치고 1537년부터 루터파를 승인했다. 특히 크리스티안 4세(Christian IV, 1577~1648, 재위 1588~1648)는 왕권강화와 더불어 중상주의 정책으로 국력을 크게 키웠으며, 종교적 열망에 못지않게 정치적 야심도 큰 인물이었다. 1625년 그는 그 열망과 야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북독일로 쳐들어왔다.
이렇게 해서 2라운드가 벌어지게 되었는데, 전쟁의 성격도 종전과는 달라졌다. 이제 종교적 색채는 거의 탈색되고 국제정치적 맥락이 전쟁의 중심에 놓였다. 30년 전쟁의 1라운드가 마지막 종교전쟁이라면, 2라운드부터는 영토 확장을 목적으로 하는 본격적인 근대 전쟁의 양상을 띠게 된 것이다. 이 점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1621년부터는 네덜란드가 완전 독립을 이루기 위해 에스파냐와 전쟁을 시작했다(이 때문에 에스파냐는 2차전부터 독일 전선에서 빠지게 된다).
새로 강적을 맞은 페르디난트는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국왕이 직접 나선 덴마크는 보헤미아 귀족들이나 루터파 연합체럼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이때 페르디난트의 고민을 해결해준 인물은 발렌슈타인(Wallenstein, 1583~1634)이었다【발렌슈타인은 황제에 의해 제국군 총사령관에 임명되었으나 군인 출신은 아니었다. 보헤미아 하층 출신의 이 야심가는 죽은 아내의 유산을 잘 굴려 막대한 재산을 쌓았고 이후 공작의 작위까지 받고 제국 제후의 신분에 오른 입지전적 인물이었다. 그런 만큼 발렌슈타인의 주 무기는 바로 돈이었다. 1라운드에서도 그는 직접 용병대를 구성해 황제를 도운 적이 있었는데, 덴마크의 침략을 맞아서도 그의 주 무기는 돈으로 산 용병이었다】. 그는 페르디난트에게 즉각 5만 명의 군대를 모집하겠다고 약속했고, 그 약속을 지켜 덴마크군을 뤼베크에서 격파했다.
덴마크마저 무너지자 독일의 신교파는 종교개혁 이래 최대의 위기에 봉착했다. 때를 놓치지 않고 가톨릭 세력이 최후 공세에 나섰더라면 칼뱅파는 물론 루터파까지 몰락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근본도 없는 자가 일약 스타로 떠오르는 모습을 본 가톨릭 제후들은 다음 화살을 발렌슈타인에게로 돌렸다. 그렇잖아도 점차 발언권이 커지는 발렌슈타인에게 경계심을 품고 있던 페르디난트는 제후들의 반발을 핑계 삼아 일등공신인 그를 파면해버렸다. 이것으로 전쟁은 끝났다고 낙관한 걸까?
하지만 북유럽에는 덴마크만 있는 게 아니었다. 스웨덴은 16세기 초 덴마크의 합병 위협을 벗어난 뒤 곧바로 중앙집권화에 성공해 서유럽 무대에 등장하길 꿈꾸고 있었다. 크리스티안이 데뷔에 실패한 것을 본 스웨덴 왕 구스타프 2세(Gustay II, 1594~1632, 재위 1611~1632)는 1630년 스칸디나비아의 두 번째 주자로 독일을 침략했다【구스타프의 주 무기는 발렌슈타인과 정반대였다. 그는 용병 대신 스웨덴 국민들을 대상으로 강제 징집 제도를 도입해 유럽 역사상 최초의 국민군을 창설했다. 애국심은 기본이며, 국가에서 먹여주고 훈련시키고 급여까지 주었으므로 이들의 사기는 용병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게다가 구스타프는 타고난 무장이었다. 그는 군대 편제를 혁신한 것 이외에도 당시의 신무기인 화약에 일찍부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당시 다른 유럽 군대와 달리 야포 부대를 주력의 하나로 편성했고, 창병보다 머스킷 병을 주 무기로 활용하는 신개념의 전술을 구사했다. 창병은 다른 나라의 군대에서는 주력군이었으나 스웨덴 군대에서는 머스킷 병사들이 화약을 장전하는 동안 엄호해주는 게 주된 임무였다】. 그는 신교의 보호를 참전의 명분으로 내세웠으나 실은 페르디난트의 세력이 자신의 텃밭인 발트 해까지 미치게 되지 않을까 우려하고 있었다. 이렇게 전쟁 후반에는 처음에 전쟁을 유발한 종교가 뒷전으로 물러나고 각국의 현실적인 이해관계만이 전쟁을 이끌어가는 힘이 되었다.
1631년 구스타프는 라이프치히 근방의 브라이텐펠트에서 황제군에게 대승을 거두었다. 그러자 다급해진 페르디난트는 발등의 불을 끄기 위해 다시 발렌슈타인을 불러들였고, 발렌슈타인은 예의 주 무기인 재력을 이용해 자비로 4만 명의 병력을 모집했다. 이리하여 그 이듬해 30년 전쟁의 두 영웅인 구스타프와 발렌슈타인이 맞대결을 벌이게 되었다. 뤼첸에서 벌어진 이 전투의 결과는 승패의 판정을 내리기가 곤란하다. 스웨덴은 이겼으나 구스타프가 전사했고, 제국은 패했으나 발렌슈타인이 살아남았다. 상황은 묘하게 전개되었다. 전투에서 이긴 스웨덴은 오히려 주춤하고, 발렌슈타인은 다시 군대를 재건했다. 전세는 오히려 제국 측에 유리하게 돌아갔다. 그러나 이미 강적을 물리쳤다고 생각한 페르디난트는 또다시 발렌슈타인을 파면했는데, 이번에는 돌아올 수 없었다. 발렌슈타인이 암살당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30년 전쟁의 클라이맥스는 이제부터다. 전쟁의 전면에 나섰던 두 영웅이 죽자 숨은 음모자가 나온 것이다. 그는 바로 프랑스의 리슐리외였다. 일찍이 구스타프를 부추겨 제국 공략에 나서게 한 사람도 그였으며, 덴마크와의 전쟁에서 공을 세운 발렌슈타인을 파면하도록 페르디난트를 부추긴 사람도 그였다. 두 영웅 뒤에 숨은 모사꾼 리슐리외는 지금까지 이 전쟁이 기본적으로 에스파냐와 바이에른의 가톨릭 세력을 등에 업은 합스부르크 제국과 기타 유럽의 신교 국가들의 대표주자인 프랑스 간의 전쟁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물론 멍청한 페르디난트는 알지 못했다).
이제는 리슐리외가 직접 나서 전쟁을 매듭지을 때다. 1635년 프랑스군이 제국의 텃밭 남독일을 침략하면서 전쟁은 막바지로 접어들었다. 힘을 잃어가던 스웨덴도 다시 공격을 재개했다. 전세는 순식간에 역전되었다. 오랜 전쟁 기간을 거치면서 합스부르크 제국은 보헤미아의 반란을 진압하고 덴마크와 스웨덴의 침략을 잘 막아냈으나, 3연승을 거둔 뒤 마지막 전투에서 패배함으로써 모든 주도권을 잃었다.
▲ 최대ㆍ최후의 종교전쟁 역사상 최초의 국제전이라 할 30년 전쟁은 그 이전까지 있었던 어느 전쟁보다 규모가 크고 소모적인 전쟁이었다. 전쟁의 주요 무대였던 독일 지역에서는 이 전쟁 기간 동안 무려 800만 명이 희생되었다. 왼쪽 그림은 행군하는 신성 로마 제국군의 모습인데, 발렌슈타인(오른쪽)의 용병 부대가 아니었을까?
사라진 것과 생겨난 것
한 명의 귀재가 두 명의 영웅을 조종한 30년 전쟁은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끝났다. 길다고 하면 긴 30년이었으나 전쟁 기간보다도 전쟁의 특징을 더 잘 드러내주는 것은 유럽 최초의 국제전이라는 사실이다. 관련된 나라만 해도 합스부르크 제국의 세습령인 오스트리아를 비롯해 에스파냐, 보헤미아, 헝가리 등 제국의 속국들, 독일의 영방국가들, 여기에 덴마크, 스웨덴, 네덜란드, 프랑스 등 수십 개국에 달했다. 영국을 제외한 서유럽의 모든 나라가 전쟁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한 것이다. 이전까지 유럽의 역사상 30년 전쟁보다 큰 규모의 전쟁은 있었어도, 유럽 세계가 이처럼 각 나라별로 나뉘어 각자의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인 적은 없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종교 문제가 전쟁의 계기였지만 30년 전쟁은 과거의 종교 분쟁과 달랐다. 무엇보다 교황이 전혀 개입하지 못했다는 점이 중요한 차이다. 종교개혁으로 교황과 교회의 권위가 실추되자 로마 교황청은 현실 정치에 대해 전혀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 유럽 각국은 각자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새로운 국제질서를 정립하고자 했다.
덴마크의 선공으로 시작된 2라운드에서는 종교 문제가 명분으로만 이용되었을 뿐 현실적으로는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수십 년전에 벌어진 프랑스의 위그노 전쟁만 해도 전쟁의 양측은 구교와 신교였다. 30년 전쟁도 종교전쟁으로 시작된 만큼 초기에는 구교와 신교의 갈등이 주요한 계기였으나 전쟁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그런 구도가 무너지고 어느덧 근대적인 국가 관계에 바탕을 둔 전쟁으로 변형되었다. 그런 점에서 이 전쟁은 서양의 근·현대사를 특징짓는 ‘전쟁을 통한 갈등 해결’의 출발점을 이룬다. 쉽게 말하면 이 전쟁을 계기로 이후의 전쟁들은 전부 근대적 영토 전쟁이며, 서양 세계는 수백 년간 대규모 국제전의 혼란기에 접어들게 된다. 그 마지막 전쟁이 바로 20세기의 제2차 세계대전이다.
많은 나라가 개입하고 이해관계가 얽히고설킨 탓에 전쟁의 결과를 마무리하는 베스트팔렌 조약의 논공행상도 매우 복잡했다. 전쟁의 숨은 주역 프랑스는 알자스-로렌을 손에 넣었고, 스웨덴은 발트 해의 제해권을 얻었으며, 네덜란드는 에스파냐의 지배에서 완전히 독립했다(이미 그전에 독립한 스위스도 이 조약을 통해 비로소 독립이 승인되었다). 한편 패전국인 독일은 당연히 최대의 피해자였지만 얻은 것도 있었다. 전쟁 기간 독일 지역에서는 무려 800만 명이 희생되었으며, 스웨덴에 약탈당한 마그데부르크를 위시해 전국이 폐허로 변했다. 그러나 합스부르크 제국이 사실상 붕괴하면서 제국에 속해 있던 영방국가와 자치도시 들은 완전한 주권과 독립을 얻었다【제국의 중앙집권력이 크게 약화되었다는 점에서는 13세기 중반 영방국가가 탄생할 때(1권 449~450쪽 참조)와 비슷한 점도 있으나 그때와는 차이가 크다. 교황권이 절정에 달했던 13세기에는 독일 지역이 영방국가들로 분립되었어도 정치적으로만 분열이었을 뿐 ‘신성의 통합’에서 벗어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구심점이 전혀 없었다. 이때부터는 독일 지역에서 ‘제후국’이나 ‘영방국가’라는 명칭도 쓸 필요가 없었다. 중세의 흔적으로 ‘공국’(작센 공국, 브란덴부르크 공국 등) 같은 명칭이 남았으나 그들은 사실상 독립 왕국이었다】.
▲ 근대 최초의 국제조약 30년 전쟁이 최초의 국제전이었던 만큼 그 전쟁을 마무리하는 베스트팔렌 조약도 최초의 근대적인 국제조약이었다. 1648년에 마무리된 베스트팔렌 조약은 이후 유럽의 국제전에서 체결되는 평화조약의 모범이 된다. 그림은 당시 뮌스터에 머물고 있던 네덜란드 화가 테르보르흐가 조약이 최종적으로 조인되는 장면을 그린 것이다. 미술이 정치적 기념사진의 역할을 한 사례다.
그 덕분에 독일에도 이제 강력한 (영방)국가를 중심으로 절대왕정 체제가 출현할 수 있게 되었다. 그 대표주자가 프로이센이었다. 전쟁 초반에 브란덴부르크 공국은 프로이센을 통합해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을 이루었다. 브란덴부르크 선제후인 프리드리히 빌헬름(Friedrich Wilhelm, 1620~1688)은 전쟁으로 입은 타격을 극복하기 위해 세금제도를 개선하고 상비군을 육성하는 한편, 대외적으로는 뛰어난 외교술로 신흥국을 일약 독일 지역의 새로운 리더로 키워냈다. 이로써 그의 가문인 호엔촐레른(Hohenzollern)은 사실상 독일 지역의 왕가처럼 군림하게 되었다.
합스부르크를 비롯해 앞서 있었던 독일의 왕가들이 모두 신성 로마 제국의 황가였던 것과 달리, 호엔촐레른 가문은 처음으로 제후국의 가문으로 출발해 최고 왕가의 지위에까지 올랐다. 이후 호엔촐레른 가문은 1701년에 프로이센이 공국에서 왕국으로 격상함으로써 프로이센 왕가가 되어, 20세기 초반 독일의 군주제가 무너질 때까지 그 지위를 계속 유지하게 된다. 이렇게 패전국이면서도 멸망하기는커녕 오히려 재도약의 발판을 마련하게 되는 ‘독일적 전통’은 20세기에 두 차례나 대규모의 세계대전을 일으켰다가 패전했을 때도 달라지지 않았다.
낙동강 오리알의 신세가 된 것은 보헤미아였다. 전쟁의 시발점인 보헤미아는 초반부에 일찌감치 몰락하고 전선에서 이탈했기 때문에 논공행상에서 전혀 배려를 받지 못했다. 따라서 보헤미아는 전쟁 전보다 오히려 사정이 더욱 나빠졌다. 그 이전에도 합스부르크의 영토이기는 했으나, 이제부터는 아예 합스부르크 가문의 ‘부동산’처럼 취급되었기 때문이다(이 때문에 이 지역에는 ‘게르만족이 슬라브족을 지배하는 전통’이 자리 잡았는데, 이런 상태는 20세기 초슬라브족이 자각해 체코를 독립시킬 때까지 지속된다).
30년 전쟁이 역사상 최초의 국제전이었듯이, 베스트팔렌 조약도 유럽의 역사만이 아니라 그때까지 지구상 어느 지역의 역사에서도 없었던 최초의 명실상부한 국제조약이었다. 고대부터 국제 조약이 없지는 않았으나 대부분 전쟁 당사자 두 나라가 맺는 조약일 뿐 베스트팔렌 조약처럼 여러 나라가 참여한 조약은 없었다. 그런 점에서 이 조약은 근대 유럽의 새로운 국제 질서를 예고하고 있었다.
전쟁 도중에 전쟁의 성격이 완전히 달라진 이상 종교 문제는 전혀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다. 물론 칼뱅파를 신교로 공인하는 조항이 포함되었으나, 그것은 종교가 분쟁을 낳는 낡은 질서와의 마지막 고별과 같았다. 종전까지 모든 조약에서 항상 가장 중요한 관심사인 종교 대신 베스트팔렌 조약에서 관심의 초점이 된 것은 주권과 영토의 문제였다. 논공행상에서 보았듯이, 조약 체결에 참여한 각국은 저마다 이 문제에 비상한 관심을 보였다. 아직 주권이 확립되지 못한 국가들(네덜란드, 스위스, 독일의 영방국가들)은 주권을 주장했고, 주권이 안정된 국가들(프랑스, 스웨덴, 덴마크)은 더 많은 영토를 확보하려 했다. 이제부터는 주권과 영토가 본격적인 쟁점으로 부각되는 시대였다. 바야흐로 유럽 세계는 근대로 접어든 것이다.
▲ 근대를 낳은 진통 종교 문제로 시작해서 영토 문제로 끝난 전쟁, 이런 점에서 30년 전쟁은 중세의 끝이자 근대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지도는 무수한 전투가 벌어지고 무수한 인명이 희생된 북독일의 전장이다. 이 어지러운 형세는 곧 유럽의 근대를 낳는 진통이었다.
정치와 종교의 도가니
유럽의 정치 지형을 크게 바꾼 30년 전쟁에 영국이 개입하지 못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당시 영국 역시 대륙에 못지않은 복잡한 격변기를 맞이하고 있었던 것이다.
에스파냐 무적함대의 격파로 영국을 새로운 해상 강국으로 만들고, 셰익스피어로 대표되는 ‘영국 르네상스’를 지원한 엘리자베스 1세가 45년을 재위한 끝에 1603년 일흔 살의 나이로 죽자 튜더 왕조는 대가 끊겼다. 젊은 시절 그녀에게는 유럽의 여러 군주가 구혼했지만, 엘리자베스는 오히려 그것을 적절히 이용하면서 여러 가지 외교적 실익을 얻어냈다【구혼자들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은 에스파냐의 펠리페 2세다. 통혼 정책으로 톡톡히 재미를 본 그는 엘리자베스의 배다른 언니인 메리 1세와 결혼했으면서도 그녀가 죽자 엘리자베스에게 다시 청혼했다. 그러나 메리가 그와 결혼했을 때도 외국인 남편에 대한 영국 국민들의 큰 반발을 받은 적이 있었으므로 엘리자베스는 그에 응하지 않았다. 여기에 앙심을 품은 펠리페는 군사적 침략에 나섰는데, 그 결과가 무적함대의 패배였으니 구혼의 대가 치고는 값비싼 것이었다】. 그녀가 평생 독신으로 지낸 결과로 나라는 번영했으나 당연히 후사는 없었다.
의회는 다시 후계 문제로 골머리를 앓아야 했다. 헨리 8세의 한 아들과 두 딸(에드워드 6세, 메리 1세, 엘리자베스 1세)이 연속 왕위를 잇는 동안 영국 왕실의 손은 씨가 말라버렸다. 한참을 고민하던 의회는 가까스로 튜더 왕조의 핏줄을 찾아냈다. 헨리 8세의 자손은 끊겼으므로 더 위로 올라가야 한다. 그러자 헨리 8세의 누나인 마거릿 튜더의 혈통이 보였다. 그녀는 아버지 헨리 7세의 정략결혼 정책에 따라 1503년 스코틀랜드 왕인 제임스 4세와 결혼했는데, 그 후손이 있었던 것이다. 제임스 4세의 아들인 제임스 5세 역시 정략결혼으로 프랑스 기즈 가문의 딸 마리와 결혼했다. 그는 서른 살에 죽은 탓에 별다른 치적을 남기지 못했으나 그 대신 딸 메리 스튜어트를 남겼다. 바로 그 메리 스튜어트의 아들인 스코틀랜드 왕 제임스 6세(James Ⅵ, 1566~1625)가 튜더 왕가의 유일한 혈통이었다.
어머니가 반역죄로 엘리자베스 1세에게 처형된 뒤 겨우 한 살에 어머니에 이어 스코틀랜드 왕위에 오른 제임스는 영국 왕가의 유일한 혈통이라는 것 때문에 가문의 원수인 영국 왕위까지 상속하게 되었다. 그래서 스코틀랜드 왕계로는 제임스 6세이지만 영국 왕계로는 제임스 1세가 된다. 외가 쪽은 튜더라도 친가 쪽은 스코틀랜드 왕조인 스튜어트이므로 이때부터 18세기 초반까지 이어지는 영국 왕가를 스튜어트(Stuart) 왕조라고 부른다.
▲ ‘여성 교황’의 행차 영국 국교회를 처음 만든 사람은 헨리 8세였으나 그것을 실제로 안정시킨 사람은 그의 딸 엘리자베스 1세다. 엘리자베스의 시대에 확립된 영국 국교회는 교리상으로 신교를 취하고 예배 형식은 가톨릭을 취하면서 신교와 가톨릭에 양다리를 걸쳤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가톨릭과 비슷해졌다. 그림은 엘리자베스의 행차 모습인데, 가톨릭도 신교도 아닌 제3교파의 수장이라는 신분이었으니 이를테면 여성 교황의 행차인 셈이다.
새 왕조를 개창한 왕답지 않게 제임스 1세는 초장부터 반동적으로 나아갔다. 개인적으로는 어머니의 원수(엘리자베스)를 칭송하는 분위기가 영 마음에 들지 않은 데다, 그는 전통적으로 프랑스에 가깝고 대륙 문화를 숭상하는 스코틀랜드 왕실 출신이었다. 위그노 전쟁을 승리로 이끈 당시 프랑스 왕 앙리 4세는 절대왕권을 누리고 있지 않은가? 선진국 프랑스를 본받자! 사실 영국이 프랑스를 본받을 이유는 없었다. 이미 경제력에서는 결코 프랑스에 뒤지지 않았던 영국의 위치를 그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제임스 1세는 스코틀랜드의 왕으로 있던 시절에 자신이 쓴 글을 통치 이념으로 삼기로 했다. 「자유 왕국의 진정한 법(The True Law of Free Monarchies)」이라는 거창한 제목의 그 글은 후대에 이른바 ‘왕권신수설’이라고 알려지는 주장을 담고 있다. 사실 그로서는 그저 프랑스의 왕권을 모방하려 했을 뿐이지만 영국은 프랑스와 사정이 달랐다. 가장 큰 차이는 바로 의회였다. 프랑스의 의회인 삼부회는 제도로만 남아 있을 뿐(18세기 말 프랑스 혁명 때까지) 유명무실한 상태였으나, 영국의 의회는 13세기 말 ‘모델 의회’ 이래 꾸준히 발전해왔던 것이다. 심지어 강력한 왕권을 가졌던 헨리 8세나 엘리자베스 1세 같은 왕들도 의회를 무시하기는커녕 국정의 대소사에 의회의 의견을 구했으며, 최소한 무시하지는 않았다.
게다가 제임스의 결정적인 실책은 수구적인 신교 박해였다. 전유럽을 휩쓸면서 프랑스에서 위그노라는 강력한 정치 세력을 이루기도 한 칼뱅주의는 영국에도 널리 퍼졌다. 특히 영국의 칼뱅교도들은 이름부터 청교도(Puritan)라고 부를 만큼 더 철저하고 근본적인 교회 개혁과 성서 중심주의를 내세웠다. 그러나 앞에서 보았듯이(97쪽의 주 참조), 영국 국교회는 껍데기를 보면 종교개혁을 통해 성립한 ‘신교’였으나 알맹이는 가톨릭과 다를 바 없었다.
제임스는 ‘영국적 가톨릭’에 해당하는 국교회를 강화하는 한편 청교도에 대한 강력한 탄압에 나섰다. “주교가 없으면 왕도 없다.”라는 그의 주장은 대륙에서도 사라진 케케묵은 논리였다. 하긴, 왕권을 신이 부여했다는 그의 이론을 정당화하려면 교회를 강화하는 게 지극히 당연했다. 그의 탄압에 시달린 청교도들 중에는 프랑스에서 위그노들이 그랬듯이 국외로 종교적 망명까지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 덕분에 얼마 뒤인 1620년에는 102명의 청교도들을 태운 메이플라워호가 북아메리카의 뉴잉글랜드에 도착해 오늘날 미국의 기원을 이루게 되지만, 등 떠밀려 먼 타향으로 간 그들이나 국내에 남은 청교도들이나 고통스러운 삶을 산 것은 마찬가지였다.
▲ 가이 포크스 데이 영국 국교회의 탄압을 받은 것은 신교의 청교도만이 아니라 가톨릭도 마찬가지였다. 가톨릭 세력은 1605년 11월 5일 의회 개회일에 화약을 폭발시켜 국왕과 왕당파를 제거하려는 음모를 꾸몄다. 이것을 화약 음모 사건이라 부르는데, 결국 미수로 끝나고 주동자인 가이 포크스는 체포되어 처형당했다. 오늘날까지도 영국에서는 11월 5일을 가이 포크스 데이라 부르며 국경일로 기념하고 있는데, 의회민주주의를 처음 도입한 국가에서 왕권신수설의 신봉자였던 제임스의 무사함을 지금까지도 경축하고 있다는 것은 의외다.
왕권과 의회의 대립, 국교도와 청교도의 대립, 정치와 종교에서 팽팽히 맞선 이 두 가지 대립은 점차 하나의 전선을 형성했다. 왕과 주교는 더욱 밀착되었고, 그들만큼은 아니지만 의회와 청교도도 한 몸이 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제임스는 그런 사태를 파국에까지 몰아가지는 않았다. 끝장을 보자고 덤빈 것은 모든 정책을 아버지와 같이, 그러나 그 강도는 아버지보다 높게 구사한 그의 아들 찰스 1세(Charles I, 1600~1649, 재위 1625~1649)였다.
프랑스, 에스파냐와 크고 작은 전쟁을 끊임없이 벌이던 영국 왕실에서는 무엇보다 전쟁을 수행할 경비가 필요했다. 귀족들에게서 반강제로 돈을 빌려 충당하던 찰스는 마침내 재정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1628년에 의회를 소집했다. 그러나 이것은 의회에서도 바라던 바였다. 찰스가 재정 문제를 타개하고자 마련한 자리에서 의회는 권리청원(Petition of Right)을 들이밀었다.
400년 전 마그나 카르타가 탄생하던 무렵이 생각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 과연 권리청원의 내용도 마그나 카르타와 거의 다를 바 없다. “국왕이 귀족들의 동의를 구하지 않고 마음대로 세금을 징수할 수 없도록 한다.”라는 게 마그나 카르타가 아니었던가? 당시에는 의회가 없었으니까 ‘귀족들의 동의’라는 표현을 썼지만, 의회가 존재하는 지금은 표현이 달라진다. 권리청원의 가장 주요한 내용은 “국왕이 의회의 동의를 구하지 않고 마음대로 세금을 징수할 수 없도록 한다.”라는 것이었다. 귀족이라는 말을 의회로 바꾼 것에 불과하다. 400년 동안 영국 의회는 고작 의회의 존재를 확인한 것 이외에는 한 걸음도 전진하지 못했던 것이다(거꾸로 말하면 이 작은 한 걸음을 나아가기 위해 그토록 오랜 기간이 필요했다고도 할 수 있겠다).
400년 전의 존처럼 찰스도 일단 의회 앞에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제 코가 석 자인지라 당장 특별세를 얻어내는 게 시급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듬해 의회가 관세의 징수를 거부하고 나서자 찰스는 그동안 품고 있던 복안을 실행에 옮겼다. 혹을 떼어주기는커녕 더 큰 혹을 갖다붙이다니? 그렇게 국왕의 행보에 엇각을 놓는 의회라면 아예 소집하지 않는 편이 낫지 않은가? 그래서 그는 이후 11년 동안이나 의회를 무시한 채 측근인 로드 대주교와 스트래퍼드 백작을 중용해 마음껏 전제정치를 펼쳤다. 물론 의회의 감시 기능이 마비되었으므로 종전처럼 세금은 국왕이 마음대로 매겼으며, 심지어 불법 과세도 서슴지 않았다.
그러나 찰스의 아킬레스건은 또다시 그를 괴롭혔다. 이번에는 ‘믿는 도끼’가 그의 발등을 찍었다. 1637년 로드 대주교가 스코틀랜드에 영국 국교회 신앙을 강요하려다 반발을 사 스코틀랜드와 전쟁이 벌어진 것이다. 스코틀랜드의 완강한 저항으로 전쟁은 길어졌고, 찰스는 다시 전비가 필요했다. 그리하여 1640년에 실로 오랜만에 왕의 요청으로 의회가 소집되었다. 오랫동안 소집되지 않았던 것을 시위하기라도 하듯이 이 의회는 이후 13년이나 지속되었기에 장기의회(Long Parliarnent)라고 부른다【사실 1640년에는 의회가 두 차례 소집되었다. 봄에 소집된 의회는 11년 전 권리 청원이 제출되었던 때와 똑같은 상황이었다. 찰스는 돈이 궁했고, 의회는 왕의 정책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고 권리를 찾으려 했다. 그런데 찰스가 곧바로 의회를 해산해버렸기 때문에 이것을 단기의회라고 부른다. 그러나 스코틀랜드와의 전투에서 패하면서 찰스는 그해 11월에 다시 의회의 문을 두드렸다. 이번에는 반드시 바라던 성과를 얻어 내겠다고 다짐한 그였지만 결국 그 의회의 회기 중에 자신이 비참한 최후를 맞으리라고는 예상치 못했을 것이다】.
▲ 꼭두각시 테러범 가이 포크스는 사실 신앙심은 독실했어도 그다지 명민한 인물은 아니었다. 그는 로버트 케이츠비의 사주를 받아 화약을 매설한 꼭두각시였을 뿐이다. 그림은 가이 포크스 데이에 가이 포크스의 분장을 하고 축제에 참여한 모습이다. 축제의 절정은 가이 포크스의 인형을 불태우는 행사인데, 그의 화형을 상징한다.
크롬웰 왕조
찰스 1세는 의회의 요구를 최대한 수용하겠다는 자세였으나 의회의 태도는 생각한 것보다 훨씬 강경했다. 의회는 왕이 자의적으로 행사하던 사법권과 종교재판권을 제한했고, 두 명의 흉적, 로드와 스트래퍼드를 처단하라고 요구했다. 어쩔 수 없이 찰스는 전횡의 도구였던 성실법원(星室法院, Star Chamber)【튜더 왕조의 개창자로 왕권 강화에 힘쓴 헨리 7세는 웨스트민스터 궁전 내에 특별 법정을 만들어 운영했다(‘성실’이란 이름은 이 방의 천장에 별이 그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영국의 법체계는 대륙보다 크게 뒤떨어져 있어 일종의 관습법인 코먼로(common law)가 지배했으므로 성실법원은 이 결함을 극복하려는 의미가 있었다. 이것은 영국사의 한 가지 특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성실법원으로 알 수 있듯이, 영국은 중세를 벗어난 16세기 초까지도 왕권과 사법권이 일치될 만큼 후진적이었다. 게다가 헨리 8세의 수장령으로 왕이 종교권력마저 얻게 된 것도 일종의 후진성을 보여준다. 하지만 정치권력, 사법권력, 종교권력을 모두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영국의 왕은 의회 하나 때문에 끝내 전제정치를 완성하지 못하고 말았다】과 고등종무관재판소를 닫았으며, 스트래퍼드를 처형하고 로드를 런던탑에 가두는 것으로 읍참마속을 대신했다. 물론 왕이 부과한 각종 불법 세금은 금지되었다.
영국 국교회에서는 국왕이 곧 ‘교황’이므로 왕권의 약화는 국교회의 약화를 의미한다. 사실 그동안에도 종교 문제는 정치의 혼란에 가려 표면으로 부상하지 않았을 뿐 결코 해소된 것이 아니었다. 정치적 쟁점이 소강상태에 접어드는 틈을 타서 이윽고 종교문제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하지만 그 발단은 청교도가 아니었다. 1641년 전통적 가톨릭권인 아일랜드에서 가톨릭 연맹이 결성되어 아일랜드 독립의 기치를 높이 올린 것이다(대륙에서는 신교와 구교의 갈등만 일어난 데 비해, 영국에서는 국교회가 신교인 청교도와 구교인 가톨릭을 모두 배척했으므로 종교 갈등의 양상이 복잡했다).
불안한 평화를 이루고 있던 찰스와 의회는 이 아일랜드 반란을 진압하는 문제를 놓고 결정적으로 갈라선다. 의회가 진압군의 지휘권을 왕에게 내주지 않자 찰스는 독자적으로 군대를 편성했다. 이제 국왕과 의회가 별도의 군대를 거느렸으니 군사적 충돌은 필연적이었다.
양측은 1642년부터 충돌의 계기가 된 아일랜드 문제는 아랑곳하지 않고 즉각 서로를 상대로 삼아 전쟁에 들어갔다. 이것을 청교도혁명이라고 부르는데, 실상 혁명이라기보다 내전이었다. 대륙에서 30년 전쟁이 막바지에 이를 무렵부터 영국은 격렬한 내전의 소용돌이에 휩싸였다. 대륙의 전쟁이나 영국의 전쟁이나 모두 종교가 개입되어 있었으니 가히 유럽 세계의 마지막 종교전쟁의 무대라 할 만했다.
정치권력은 의회가 장악하고 있었으나 막상 전쟁이 벌어지니 역시 왕은 왕이었다. 개전 초기 왕당파는 전투에서 연승을 거두면서 곧 그간의 세력 약화를 만회할 듯했다. 그러나 시대가 인물을 낳는 법, 의회파에는 크롬웰(oliver Cromwell, 1599~1658)이라는 인물이 혜성같이 등장했다. 의회 의원이었던 그는 동부에서 청교도들을 모아 강력한 철기군을 조직하고 1644년부터 착실히 전세를 역전시키기 시작했다. 이들이 승리하지 않았다면 청교도혁명이라는 이름도 없었을 것이다. 사실 이 내전에서 종교는 이미 정치의 뒷전으로 물러앉았을 뿐 아니라 종교의 대립에서도 가톨릭과 국교회가 주인공이지 청교도는 아니었다.
▲ 아일랜드 문제의 시작 1641년 영국 역사상 최대 규모의 학살극이 아일랜드 북부의 얼스터에서 일어났다. 그림에서 보듯이 가톨릭 세력이 3000여 명의 신교도들을 무차별 살해한 사건이다. 결국 이 사건은 청교도혁명의 한 계기가 되었으며, 혁명으로 집권한 크롬웰은 아일랜드의 가톨릭교도들을 학살하는 것으로 보복했다. 그러나 ‘피의 빚’은 그것으로 해결되지 않고 이후 영국과 아일랜드의 갈등 요소로 남아 20세기에까지 이르게 된다.
혁명은 절정으로 치달았다. 1648년 크롬웰은 찰스를 포로로 잡았고 이듬해에는 그를 처형해버렸다. 이제까지 유럽 역사에서 국왕이 암살된 경우는 있었어도 혁명 세력에게 공개적으로 처형된 경우는 없었다. 그만큼 혁명의 강도는 유례없는 것이었다.
왕이 없으니 이제 영국은 형식상으로 왕정이 아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왕정이 유지된다. 누가 ‘왕‘이 되었을까? 바로 혁명의 지도자인 크롬웰이었다. 그는 1653년 군대를 동원해 무력으로 의회를 해산하고【의회파가 승세를 탈 때부터 의회는 급진적인 파와 온건한 파로 분열되어 다툼을 벌였다. 크롬웰이 집권했을 때는 이미 온건파가 쫓겨나 급진파의 일부 의원들만 남아 있었다. 그래서 이 의회를 럼프(rump) 의회, 즉 잔여(殘餘) 의회라고 부르는데, 거의 의회의 기능을 하지 못했다】 스스로 호국경(護國卿, Lord Protector)이라는 지위에 올라 국정을 맡았는데, 사실상 왕이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굳이 왕정이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면 때 이르게 들어선 ‘군사독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657년 다시 구성된 의회가 그에게 차라리 왕위에 오를 것을 권했을 때 크롬웰은 그 제의를 거부했다. 하지만 이듬해 그가 죽고 나서 그의 아들 리처드 크롬웰이 호국경의 지위를 물려받게 되므로 왕위의 세습이나 마찬가지다.
개인적으로는 독실한 칼뱅주의 청교도였던 크롬웰은 청교도 이념에 입각한 정치를 펼쳤다. 이런 경우 대개는 건전하고 검소한 생활을 엄격하게 강조하는 한편 거기에 어긋나는 요소는 일체 용납하지 않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된다. 일종의 문화 독재라고 볼 수 있다. 그는 음주와 도박을 금지하는 등 국민 생활을 철저하게 압박하는 공포정치로 일관했다. 거기까지는 괜찮았으나 아일랜드의 가톨릭을 학살과 토지 몰수 등 군홧발로 철저히 짓밟은 것은 두고두고 분쟁의 불씨가 되었다. ‘크롬웰의 저주’라는 말로 아일랜드인의 뇌리에 깊이 각인된 그 만행은 20세기 북아일랜드 독립 운동에까지 이어지게 된다(대륙에서는 가톨릭이 신교를 탄압한 데 반해 당시 영국은 신교가 가톨릭을 탄압하는 희한한 상황이 벌어졌다).
그러나 ‘크롬웰 왕조’는 오래가지 못했다. 그의 아들 리처드는 아버지의 지위만 물려받았을 뿐 카리스마까지 받지는 못했으며, 국민들은 벌써 공포정치에 신물이 나 있었다. 결국 그는 8개월 만에 자진 사퇴 형식으로 물러났고, 다시 럼프 의회가 소집되어 찰스 1세의 아들을 왕으로 옹립했다. 전쟁까지 벌인 왕과 의회가 ‘크롬웰 왕조’의 치하를 계기로 타협을 이룬 것이다. 영국사에서는 이 사건을 왕정복고라고 부르지만, 엄밀히 말하면 크롬웰 왕조에 의해 잠시 왕위가 찬탈되었다가 스튜어트 왕조가 다시 이어졌다고 보아야 한다.
▲ 국왕의 처형 역사상 암살된 국왕은 많아도 공개 처형된 국왕은 드물다. 1649년 찰스는 바로 그 드문 사례가 되었다. 단두대가 발명되지 않은 시대라 도끼로 참수했는데, 단상의 두 인물이 잘린 찰스의 머리와 도끼를 들고 있다.
근대의 문턱에 들다
한바탕 홍역을 치렀으니, 하마터면 영원히 잃을 뻔한 왕위를 되찾은 찰스 2세(1630~1685, 재위 1660~1685)나 ‘근본도 없는 왕조’를 섬기게 될 뻔한 의회 측이나 피차 조심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종교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아직 영국의 왕과 의회는 합일을 이루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래서 양측은 완만하지만 확고하게 각자 자신의 입지를 강화해나갔다. 찰스는 국교회를 강화하기 위해 총교적으로 신교보다 더 가까운 가톨릭을 중흥시켰고, 그 일환으로 프랑스의 루이 14세와도 친교를 맺었다(나중에 보겠지만 프랑스는 30년 전쟁 이후 다시 가톨릭으로 되돌아왔다). 또 의회는 최초로 여당과 야당의 구분이 생겨났다. 여당인 토리당은 예전의 왕당파였고, 야당인 휘그당은 예전의 의회파였으니 성격이 크게 달라진 것은 없지만, 그래도 이것은 근대식 정당 제도로 향하는 중요한 길목을 이룬다.
신교를 반대하고, 프랑스를 모델로 삼고, 의회를 부담스러워한다. 이것은 바로 60년 전 찰스 2세의 할아버지 제임스 1세의 정책이며, 바로 그 시대의 상황이다. 따라서 그때의 문제는 아직도 전혀 해결된 게 없었다(크롬웰 치하가 ‘허송세월’이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할 수 있겠다). 결국 제임스 1세의 치세에는 문제가 잠복해 있는 상태로 그런대로 평온히 지나갔으나 그다음 찰스 1세에게서 대형사고로 터져 나왔다. 지금의 찰스 2세가 당시의 제임스 1세라면, 찰스 1세의 역할을 한 것은 제임스 2세였다. 찰스 2세의 동생, 그러니까 찰스 1세의 둘째 아들로 왕위를 계승한 제임스 2세(James Ⅱ, 1633~1701, 재위 1685~1688)는 불과 3년의 재위 기간에 비해 역사적인 업적을 남겼다. 바로 명예혁명이다. 물론 그가 의도한 혁명은 결코 아니다.
제임스 2세는 형보다 한술 더 떠 노골적인 가톨릭으로 선회했다. 그의 성향을 알고 있었던 의회는 그의 즉위부터 반대하고 나섰으나【사실은 토리(Tony)와 휘그(Whig)라는 이름도 이 사건 때문에 생겨났다. 당시 의회에서는 제임스 2세를 왕위 계승자로 삼자는 의견과 그에 반대하는 의견으로 엇갈렸다. 당연히 양측은 서로를 비난하면서 좋지 않은 뜻의 별명으로 불렀다. 즉 찬성파는 반대파를 휘그당이라고 불렀고, 반대파는 찬성파를 토리당이라고 불렀다. 휘그는 스코틀랜드의 폭도였고, 토리는 아일랜드의 폭도였으니 둘 다 ‘폭도들’이 된 것이다】, 찰스 2세에게 후사가 없었고 싶둘의 노인네가 하면 얼마나 하랴 싶었다. 게다가 지긋지긋한 내전의 경험이 아직도 생생한 판에 조심스럽게 다져온 평화 기조를 해치고 싶지도 않았다. 그런데 아들이 없던 그가 1688년 쉰다섯의 나이로 아들을 보게 되자 상황이 급변했다. 의회는 긴장했다. 토리당과 휘그당은 제임스의 아들을 왕위 계승자로 삼으면 안 된다는 것에서 모처럼 하나로 뭉쳤다. 그들은 비밀리에 대륙으로 사람을 보내 새로운 왕위 계승자를 모셔오기로 했다. 새 왕의 후보는 제임스의 사위인 네덜란드 총독 오라녜 공 빌렘이었다【이 빌렘은 16세기에 네덜란드의 독립을 이끈 빌렘 1세의 후손이다. 그런데 대륙에서 영국의 왕이 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온 ‘윌리엄’이라면 또 한 명이 있었다. 바로 11세기에 영국 왕이 된 노르망디 공 윌리엄(1권 358~359쪽 참조)이다(그의 이름을 프랑스식으로 읽으면 ‘기욤’이 된다). 이 두 명의 윌리엄, 기욤과 빌렘은 영국 역사의 중요한 장면에서 외국인으로서 영국 왕이 되는 기연을 맺었다】.
당시 빌렘은 프랑스 루이 14세의 강력한 패권 정책에 맞서 싸우고 있었다. 제임스의 딸 메리와 결혼한 이유도 실은 영국을 자기 측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 판에 영국 왕위를 제안받다니 이것은 호박이 넝쿨째 굴러들어 온 격이었다. 그는 즉각 1만 3000명의 병력을 거느리고 바다 건너 런던을 향해 진군했다. 갓난아기를 안고 싱글벙글하던 제임스는 사위가 쳐들어온다는 소식에 아연실색하여 프랑스로 내뺐다.
이듬해인 1689년 1월 의회는 영국 왕위가 공석이 되었음을 공식적으로 선언하고 빌렘과 그의 아내인 메리를 새 왕으로 옹립했다(영국 의회는 왕위 계승의 정통성 문제 때문에 스튜어트 가문의 혈통만큼은 유지하고 싶었으므로 부부의 공동 승계를 결정했다). 영국의 왕이 되었으니 이름도 영국식으로 표기해야 한다. 그래서 빌렘은 역사에 윌리엄 3세(1650~1702, 재위 1689~1702)로 기록되었고, 메리는 메리 2세(1662~1695, 재위 1689~1694)가 되었다. 이렇게 해서 부부가 함께 영국 왕이 되는 전례 없는 일이 생겨났는데, 얼마 전에 최초로 국왕을 처형하기도 한 영국 의회로서는 별로 신기할 것도 없는 신기록이었을 게다.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그래서 ‘명예혁명’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영국 왕위를 얻은 윌리엄 3세로서는 영국 의회의 위력을 새삼 실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잖아도 의회 덕택에 왕이 된 그로서는 의회의 말을 무조건 따를 수밖에 없었다. 반면 의회는 스튜어트 왕실의 피가 섞이지 않은 외국인 왕을 전적으로 믿을 수는 없었다. 서로의 의심이 맞아떨어져 의회는 의회를 무시하지 말라는 보장 각서를 내밀었고 윌리엄은 기꺼이 서명을 보탰다. 이것이 마그나카르타, 권리청원과 함께 영국 의회사의 3대 문서로 간주되는 권리장전(Bill of Rights)이다.
권리장전은 가톨릭교도를 왕위 계승자로 삼지 말고 의회를 자주 소집하라고 규정한 것을 제외하면 그 내용은 사실 앞서의 두 문서와 크게 다를 바 없다. 그러나 내용보다 중요한 게 형식이다. 국왕의 선택과 즉위에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한 영국 의회는 권리장전을 성립시킴으로써 왕권의 한도까지 통제하는 권한을 얻게 되었다. 이제 의회는 왕권보다 우위에 있음이 여실히 증명된 것이다. 대륙의 모든 나라가 일제히 왕권을 강화하는 절대주의의 시대에 영국은 일찌감치 거기서 탈피해 의회주의의 새로운 노선으로 나아갔다. 이로써 유럽은 물론 세계적으로도 최초인 근대적 입헌군주국이 생겨났다.
결과적으로 볼 때 윌리엄 3세는 의회가 권력을 장악하는 데 이용된 도구에 불과했다. 메리가 죽은 뒤 윌리엄은 단독 국왕이 되었지만 권리장전에 따라 그의 계승자는 그의 처제(메리의 여동생)인 앤(Anne, 재위 1702~1714)으로 이미 정해져 있었다. 앤은 평소에 형부를 열렬히 지지했으니 윌리엄으로서는 그나마 위안이 되었을까? 그러나 앤은 아들이 어린 나이에 죽어 후사를 남기지 못했다.
이로써 영욕의 스튜어트 왕조는 마침내 대가 끊겼다【역사적으로 보면, 스튜어트 왕조는 출범 때부터 의회와 대립했다가 결국 의회에 권력을 넘겨주는 역할을 한 셈이다. 그래도 스튜어트 왕조는 영국에 한 가지 커다란 선물을 남겼다. 스코틀랜드의 스튜어트 왕조도 얼마 못 가 대가 끊기면서 1707년 스코틀랜드가 잉글랜드와 통합을 이루게 된 것이다(웨일스와 북아일랜드는 각각 16세기와 17세기에 잉글랜드와 통합되었다). 이때부터 비로소 오늘날과 같은 영국이 되었다】. 스튜어트 왕조의 핏줄은 당시 독일의 하노버 선제후 가문에 가 있었다. 하노버 공의 아들은 스튜어트 왕조의 개창자인 제임스 1세의 증손자(손녀의 아들)였다. 그래서 의회는 그를 데려다 조지 1세(George Ⅰ, 1660~1727, 재위 1714~1727)로 삼아 새로 하노버 왕조를 열었는데, 영어조차 할 줄 모르는 외국인 왕이 즉위했지만 어차피 왕권을 제압한 의회로서는 크게 상관없는 일이었다(그러나 그 덕분에 19세기 중반까지 영국 왕은 하노버 왕까지 겸하게 된다). 이 하노버 왕조가 오늘날 영국 왕실로 이어진다【그러나 오늘날 영국 왕실은 윈저(Windsor) 왕조라고 불린다. 그 이유는 제1차 세계대전 중 독일과 싸우던 영국이 독일식 왕조 이름을 부담스럽게 여겨 바꾸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처음으로 왕궁 소재지 이름을 따서 윈저라고 지었는데, 혈통은 하노버 왕조의 직계다】. 이후 영국의 왕들은 국가를 상징하는 ‘꽃’의 역할만 했을 뿐 실제 정치에 크게 관여하지는 않았다. 왕은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라는 입헌군주제의 기본 원리가 확립된 것이다.
▲ 명예와 불명예 피를 흘리지 않았다는 점에서 명예혁명이지만, 사실 윌리엄 3세가 된 오라녜 공 빌렘으로서는 불명예나 다름없었다. 네덜란드 총독 시절에 라이벌이었던 프랑스의 루이 14세에게서 실권 없는 왕이라는 무시를 받았을 뿐 아니라 의회의 힘으로 왕위에 오른 까닭에 입헌군주제가 성립하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림은 꼭두각시 국왕 부부 메리 2세와 윌리엄 3세다.
인용
'역사&절기 > 세계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종횡무진 서양사 - 6부, 4장 변혁의 18세기 (0) | 2022.01.02 |
---|---|
종횡무진 서양사 - 6부, 3장 자본주의의 출범 (0) | 2022.01.02 |
종횡무진 서양사 - 6부, 1장 영토와 주권의 의미 (0) | 2022.01.02 |
종횡무진 서양사 - 5부, 3장 종교의 굴레를 벗고 (0) | 2022.01.02 |
종횡무진 서양사- 2부, 5장 문명의 통합을 낳은 원정 (0) | 2022.01.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