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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종횡무진 서양사 - 6부, 5장 근대의 완성 본문

역사&절기/세계사

종횡무진 서양사 - 6부, 5장 근대의 완성

건방진방랑자 2022. 1. 2. 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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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장 근대의 완성

 

 

중심에서 부는 변화의 바람

 

 

변혁의 세기인 18세기에 프랑스의 추락은 역력했다. 세기 벽두에 에스파냐 왕위를 놓고 겨루었다가 그 왕위만 얻고 다른 모든 것을 잃은 프랑스는 이후 거듭된 전쟁에서도 좀처럼 형세를 만회하지 못했다.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에서는 서유럽 국가가 아닌 이교도국 러시아와도 동맹을 맺으며 애썼으나 별무신통이었다. 결국 신흥국 프로이센에마저 추월할 지경에 이르렀고, 영국과 한 세기에 걸쳐 인도와 아메리카에서 맞붙은 결과 모두 패배했다. 이제 프랑스는 이류 국가로 전락했다. 비록 미국의 독립을 지원함으로써 영국에 다소나마 앙갚음을 했지만, 중세 내내, 그리고 근대의 문턱에서도 서유럽의 선두 주자이자 터줏대감이던 프랑스의 체면은 말이 아니었다.

 

사실 프랑스가 추락한 원인은 서유럽의 터줏대감이었다는 데 있다. 중세 문명(로마-게르만 문명)의 적통을 이어받은 프랑스는 서유럽 사회가 안정되었을 때는 힘을 썼지만 변화의 물결이 휘몰아칠 때는 가장 발걸음이 느릴 수밖에 없었다. 위그노 전쟁에서 신교가 승리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가톨릭으로 선회한 것만 해도 그랬다. 1689년 낭트 칙령을 폐지한 것은 루이 14세의 개인적인 취향이라기보다는 당시 프랑스 지배층의 수구적 성격을 드러내는 것이었다(그 때문에 프랑스의 상공업을 장악한 신교도들이 대거 국외로 망명함으로써 이미 루이 14세의 치세 말기에 프랑스의 국력은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비록 에스파냐에 부르봉 왕조의 분점이 하나 생기기는 했으나 그것은 프랑스의 국력에 보탬이 된 게 아니라 유럽의 보수성을 대변하는 가톨릭의 두 나라가 공동으로 추락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루이 14세는 다섯 살에 즉위했지만 72년이나 재위하는 바람에 아들과 손자가 모두 먼저 죽었다. 프랑스의 몰락과 더불어 가문의 몰락도 본 셈인데, 아직 부르봉 왕가의 수명은 좀 더 남아 있었다. 그의 증손자로 왕위를 계승한 루이 15(1710~1774, 재위 1715~1774)도 증조부처럼 다섯 살 때 왕위에 올랐고 증조부에 버금갈 만큼 오래 재위했다. 하지만 그의 치세 60년 동안 프랑스는 내내 추락하면서도 오히려 보수화의 추세는 더욱 강해지는 희한한 상황이 전개되었다. 프랑스는 안으로 점점 곪아갔고, 문제는 쌓여갔다.

 

 

학문은 문제가 있는 곳에서 발전하게 마련이다. 학문이란 문제를 추구해 답을 알아내는 것이므로 문제가 없다면 학문 자체가 성립할 수 없다. 문제로 가득한 18세기 프랑스에는 그만큼 답을 찾아내려는 노력도 많았다. 많은 사람이 관심을 가진 만큼 그 노력은 극히 다양했으나 전부 프랑스가 처한 어둠에 빛을 던지려는 처방적인 의도를 담고 있었으므로 크게 계몽주의(enlighternment)라고 부른다.

 

이렇게 계몽주의는 사회적 문제의식에서 출발했지만 여기에는 지성적인 배경도 있었다. 종교가 지배하던 중세에는 사회문제도 종교적 관점에서 바라보았으나 이제는 그럴 수 없었고 해결도 교회에 맡길 수 없었다. 그래서 계몽사상가들은 신앙이 아니라 인간 이성의 힘과 그 이성을 바탕으로 한 역사의 진보를 믿었다인간 이성이라는 개념 자체가 근대의 산물이다. 종교의 시대인 중세에도 후기에 접어들면 이성의 존재가 인정되었지만 이성은 올바른 신앙의 길을 닦기 위한 보조 수단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여겼다. 인간 정신의 모든 영역을 신이 지배하고 있었으므로 이성 역시 신의 의지에 종속된 것일 뿐이었다. 그러나 르네상스는 이성의 독립성을 부각시켰고, 종교개혁은 신의 통제력을 축소시켰다. 이로써 신으로부터 벗어나 독자적인 영역을 지닌 근대 이성이 탄생했다. 그래서 17세기 프랑스 철학자 데카르트(René Descartes, 1596~1650)나는 생각한다. 따라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라는 유명한 문구를 근대 철학의 출발점으로 삼는다. 쉽게 말하면 이제 인간은 신의 의지에 종속된 존재에 불과한 게 아니라 스스로 역사를 발전시킬 줄 아는 존재가 되었다는 뜻이다. 개인적으로도 모든 것은 자기 하기 나름이 되었고, 국가적으로도 교회의 조언이 필요 없어졌다. 그래서 계몽사상은 종교의 속박에서 벗어나 한창 각개약진 중인 유럽의 군주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앞에서 본 것처럼,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와 러시아의 예카테리나가 계몽사상에 매료된 이유는 그 때문이다.

 

그러나 변방이라면 몰라도 유럽의 중심인 프랑스는 사정이 달랐다. 많은 계몽사상가가 나왔고 그에 따라 많은 계몽책이 제안되었으나 정작 프랑스의 지배층은 요지부동이었다. 볼테르는 철학 콩트 <캉디드(Candide)>에서 인간 정신이 종교적 권위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고 주장하고 프랑스 사회의 보수적 신분제도를 꼬집었지만, 프랑스의 지배층은 그의 비판을 받아들이기는커녕 그의 저서를 금서로 지정했다. 몽테스키외(Montesquieu, 1689~1755)법의 정신(De l‘esprit des lois)에서 법이란 인간 이성의 산물이며 입법·사법·행정의 3권이 분립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루이 15세는 그에게 프랑스 아카데미 회원의 자격을 주자는 의견마저 묵살했다. 그러니 루소(Jeon-Jacques Rousseau, 1712~1778)사회계약론(Du contrat social)에서 주권이란 사회 내 개인들의 계약을 통해 형성된 것이라고 말했을 때, 주권은 곧 왕권이고 왕권은 신이 내린 것이라고 믿은 루이 15세의 강력한 제재를 받은 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이었다. 루소는 저서가 금서 처분을 받는 데 그치지 않고 체포장이 떨어지는 바람에 국외로 달아나야 했다.

 

 

동료인 루소의 처지를 목격한 디드로(Denis Diderot, 1713~1784)와 달랑베르(Jean Le Rond D‘Alenbert, 1717~1783)합법적인테두리 내에서 계몽 활동을 펼치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서 그들이 생각해낸 사업은 백과전서(Encyclopédie)를 간행하는 것이었다. 모든 지식을 집대성해 계몽사상의 올바름을 증명하자! 당대의 유명한 학자와 지식인 160명이 집필진으로 참여한 백과전서1751년부터 21년간 편찬되어 1772년에 총 33권으로 완간되었다. 그러나 이미 첫 두 권이 출간될 때부터 당국의 금서 처분을 받았다우연의 일치일까? 마침 비슷한 시기에 중국 청 제국에서도 대규모 백과사전을 편찬하는 사업이 있었다. 청 황제 강희제의 명령으로 학자들이 동원되어 1725년에는 1만 권짜리 백과사전 고금도서집성(古今圖書集成)이 완성되었으며, 건륭제(乾隆帝) 시절인 1782년에는 당대의 모든 서적을 집대성한 사고전서(四庫全書)가 간행되었다. 이에 자극을 받아 조선의 정조(正祖)규장각(奎章閣)을 설치하고 서적 출간에 큰 힘을 기울였다. 그렇게 보면 18세기 후반은 가히 세계적으로 지 식 운동이 활성화된 시기였다고 할까?. 이제 프랑스에서는 합법적인 활동이란 없었다.

 

이처럼 가장 기본적인 자유마저 탄압을 받았다는 것은 그만큼 프랑스 체제의 위기를 뜻하는 것이었으나, 오로지 지배층만은 그 점을 모르고 있었다. 사람들의 생각은 갈수록 자유로워지는 데 반해 체제는 여전히 자유를 옥죄려 했다. 그것은 분명한 구체제, 즉 앙시앵 레짐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사상의 측면에만 있는 게 아니라 그 사상을 낳은 사회 자체에 있었다. 계몽사상가들이 이구동성으로 지적한 문제는 무엇보다 사회적 불평등과 특권층의 존재였다. 당시 프랑스의 총인구는 약 2700만명이었는데, 그 가운데 2퍼센트도 되지 않는 성직자와 귀족들은 면세의 특권을 누렸고 전국 토지의 10분의 1을 소유했다. 이런 현상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었으나 그래도 프랑스가 한창 대외적으로 팽창하던 루이 14세의 전성기에는 큰 문제로 부각되지 않았다. 하지만 루이 15세의 시대에 프랑스의 대외 정책이 연달아 실패하면서 왕실 재정마저 달리는 상황이 되자 숨어 있던 문제는 곧장 수면 위로 떠올랐다. 정부는 재정 적자를 메우기 위해 세금을 올리고 국채를 무모하게 발행했는데, 그런 미봉책이 사태를 더 악화시켰다.

 

그래도 루이 15세는 수를 다하고 죽었으니 개인적으로는 불운하지 않았다. 1774년 그의 손자로 왕위를 계승한 루이 16(1754~1793, 재위 1774~1792)5대조 할아버지(루이 14)부터 누적되어 온 프랑스의 모든 문제를 혼자 걸머져야 했다. 그는 무능하고 타락했던 할아버지에 비해 선량하고 신앙심이 두터워 국민들의 사랑을 받았지만, 수줍고 심약한 성격에 사냥이나 즐기는 인물이었으니 난세의 군주로서는 빵점짜리였다.

 

 

살롱의 사상가들 17세기부터 프랑스에서는 귀부인들이 여는 살롱이 크게 유행했다. 물론 사교에만 치중하는 살롱은 오늘날의 싸롱처럼 천박한 문화의 공간이 되기도 했지만, 제도권 내로 흡수되지 않은 진보적 지식인들이 모이는 고급 살롱은 학문과 예술, 나아가 정치 토론의 주요 무대가 되었다. 그림은 18세기 중반의 유명한 조프랑 부인(앞줄 오른쪽에서 세 번째)의 살롱인데, 여기 모인 사람들 중에는 루소, 디드로, 달랑베르 등 프랑스의 계몽주의 3총사가 모두 있다.

 

 

 평민들의 세상

 

 

미국의 독립은 영국의 패권 전략을 저지했다는 점에서 프랑스의 왕실에 기쁨을 주었지만, 그 때문에 가뜩이나 좋지 않던 왕실의 재정은 더욱 악화되었다. 유럽도 아닌 아메리카 영국 식민지의 독립 전쟁까지 지원하느라 프랑스의 국고는 텅 비었다.

 

만성적인 재정 적자에 견디다 못한 루이 16세는 마침내 1789년에 삼부회를 소집했다. 재정난에 시달리는 왕실이 의회를 소집하는 것은 어딘가 낯익은 전술이다. 삼부회는 명색이 의회지만 1614년 루이 13세의 섭정인 마리가 소집한 이후 한 번도 소집한 적이 없었으니 (123쪽 참조) 무려 175년만의 재소집이었다. ‘바로 전의 삼부회가 소집된 때는 프랑스가 잘나가던 무렵으로 리슐리외라는 유능한 재상을 얻었으나, 이번 삼부회는 오히려 1628년 영국의 찰스 1세가 재정난을 타개하기 위해 의회를 소집한 상황과 비슷했다. 더 중요한 것은 상황만 비슷한 게 아니라 결과도 그랬다는 점이다. 오만하고 독선적인 찰스가 순전히 귀족들에게서 돈을 뜯어낼 목적으로 의회를 소집한 것과 달리, 루이는 왕실의 위기와 나름대로 나라의 안위를 걱정하는 마음에서 삼부회를 소집한 것이었다. 그러나 상황이 같았던 만큼 결과도 다를 바 없었다.

 

17895월 베르사유 궁전에서 열린 삼부회에서 가장 할 말이 많은 사람은 제3신분인 시민서양사에서 흔히 쓰는 시민이라는 말은 도시 거주자만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일반 평민’, 우리식으로 말하면 국민에 해당한다. 서양의 도시들은 예로부터 독립적이고 자치적으로 발전했으며(가장 중앙 권력이 강했던 로마 시대에도 그랬다), 중세를 거치면서 그런 성격이 더욱 강화되었다. 물론 계급으로서의 시민은 근대의 산물이지이만, 그런 역사적 전통이 있기에 서양에서는 시민을 곧 국민에 해당하는 것으로 여기는 게 자연스러웠다. 사실 서양에는 우리의 국민에 해당하는 말이 없다. 이를테면 정치 연설에서도 우리는 국민 여러분이라고 시작하지만 서양에서는 시민 여러분으로 시작한다. 거꾸로 우리에게는 서양과 같은 시민의 개념이 없다. 서구 민주주의 제도가 이식된 오늘날에도 아직 우리 사회에 민주주의가 완전히 뿌리 내리지 못한 이유는 시민사회의 역사적 경험이 부재하기 때문이다대표들이었다. 그것은 당연했다. 높은 인플레와 과중한 세금, 거기다 산업혁명으로 경제력이 크게 팽창한 영국의 경제적 침략으로 가장 큰 어려움을 겪는 것은 바로 평민들이었으니까(설상가상으로 삼부회가 소집된 바로 전해인 1788년에는 대흉작이었다). 그러나 지배층인 제1신분(성직자)과 제2신분(귀족)은 사정을 너무도 모르고 있었다.

 

양측의 갈등은 사소한 데서 생겼다. 시급한 현안을 논의하기도 전에 표결 방식에서 의견이 엇갈렸던 것이다. 지배층은 전통적인 신분제별 투표를 고집했고, 시민층은 다수결 투표를 주장했다.

 

문턱에서부터 합의를 이루지 못하자 시민들은 6월에 별도로 헌법제정국민의회(Assemblée nationale constituante)를 조직하고 새로 헌법을 제정할 때까지 농성을 계속하겠다고 선언했다. 이들의 회의 장소가 테니스 코트였기에 이것을 테니스 코트의 서약이라 부르는데, 얼마 안 가 하급 성직자들과 일부 자유주의 귀족들도 동참했다. 이들의 강경한 기세에 놀란 루이는 성직자와 귀족 들에게 어서 국민의회에 참여하라고 명했다. 이로써 오랜만에 열린 삼부회는 겨우 한 달만에 문을 닫았고(결국 이것이 마지막 삼부회가 되었다), 처음으로 신분제를 떨쳐버린 근대식 국민의회가 성립했다.

 

 

돌아온 삼부회 175년 만에 열린 삼부회의 모습이다. 왕실의 재정난을 타개하기 위한 것이었으니 청교도혁명 시기 영국의 찰스 1세가 의회를 소집한 상황과 여러모로 비슷했다. 문제는 그다음 진행도 비슷했다는 점이다. 영국의 찰스처럼 프랑스의 루이 16세도 결국 그 의회의 손에 의해 처형을 당하게 되니까.

 

 

그러나 루이는 결국 보수적인 귀족들의 주장을 꺾지 못하고 국민의회를 탄압하기 위해 베르사유 궁전에 군대를 투입했다. 헌법 제정의 꿈에 부풀어 있던 시민 대표들은 분노했다. 그러나 그들을 발탁한 시민들은 더욱 분노했다. 마침내 파리 시민들은 714일 총과 탄약을 찾기 위해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했다. 이것이 프랑스 대혁명의 신호탄이었다(바스티유란 성채라는 뜻으로 원래는 영국군의 침략을 막기 위해 세워진 것이었으나 리슐리외가 정치범을 수용하는 감옥으로 만들었다. 바스티유만을 놓고 본다면 바로 전 삼부회로 정치에 입문한 그가 다음 삼부회를 망친 셈이다).

 

바스티유 습격의 소식은 금세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농민들이었으나 일단 그들의 첫 반응은 공포였다당시 프랑스 전국의 농민들에게 만연된 막연한 공포심을 대공포(La Grande Peur)’라고 부른다. 낡고 부패한 체제가 무너지는 것은 역사적 진보와 혁신이지만, 그래도 오랜 기간 존속한 낡은 체제가 무너지는 순간 대중은 공포감을 느끼게 된다. 구체제에 의해 탄압을 받고 희생된 대중이라 해도 잠시 안정이 흔들리는 상황을 공포로 여기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는 197918년 동안 독재로 일관한 박정희가 암살된 직후에도 그랬다. 그 공포를 이용해 신군부가 쿠데타로 정권을 잡고 유신독재의 변형판인 새로운 독재 체제를 구축해 5공화국을 열었다. 중앙정부가 무너졌다는 소식과 외국군이 침략해 들어올지 모른다는 소문은 농민들을 극도의 불안과 공포 속으로 몰아넣었다. 곳곳에서 농민들은 자위대를 조직해 자기 집과 자기 동네의 방어에 나섰다. 공포가 무장을 갖추면 폭력으로 표출된다. 비록 호미와 갈퀴 등의 엉성한 무장이지만 농민들의 공포심은 곧 그들을 수비에서 공격으로 나서게 만들었다. 각지에서 농민들은 영주의 장원을 습격해 약탈하고 봉건적 특권이 기록된 장원 문서들을 불태웠다. 이제 혁명의 무대는 파리만이 아니라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사태가 이렇게 번지자 헌법 제정만이 아니라 봉건제 자체도 타도의 대상이 되었다. 마침내 84일 국민의회는 봉건제 폐지를 선언했다(봉건제가 이렇게 공식적으로폐지된 것은 유럽 역사상 유일무이한 일이다). 이것으로 앙시앵 레짐은 무너지고 혁명의 최소 목표는 실현되었다.

 

첫 결실을 거둔 혁명은 곧이어 두 번째 결실을 맺는다. 그것은 1789826일에 성립된 인권선언이었다. 모든 인간은 자유롭고 평등한 존재다. 주권은 왕이 아닌 국민의 것이다. 재산권은 신성 불가침하다. 오늘날에도 변함없이 통용되는 이러한 인권 개념은 바로 프랑스 혁명의 인권선언에서 최초로 문서화되었다. 바로 전까지 엄격한 신분제와 절대왕권이 지배한 프랑스 사회로서는 엄청나고도 급격한 변화였다. 보수 귀족들은 물론 국왕 루이 16세도 이 인권선언에는 도저히 찬성할 수 없었다. 한 달 이상을 승인하지 않고 버티던 루이는 결국 10월에 파리의 주부들이 빵을 달라며 벌인 시위에 굴복하고 선언에 동의했다.

 

이제 국민의회는 모든 법적 장애물을 넘어 사실상 프랑스 정부가 되었다(당시에는 행정부라는 개념이 독립되지 못했고, 의회가 곧 행정부였다. 218쪽의 주 참조). 따라서 지금부터는 정부로서의 기능이 중요했다. 가장 시급히 해결해야 할 것은 혁명 직전의 정부가 맞닥뜨린, 그리고 삼부회를 불러 혁명의 계기를 제공한 재정 문제였다.

 

혁명의 와중에 세금이 제대로 걷히지 않았기에 재정 문제는 몇 개월 전보다 더 심각한 상태였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국민의회는 절묘한 방책을 구상했다. 교회 재산을 몰수하는 것이었다. 프랑스의 가톨릭 세력은 왕권이 유명무실화되면서 힘을 잃은 데다 이미 주권은 국민의 것이 되었으니 법적으로 하자가 될 일도 아니었다. 국민의회는 몰수한 교회 재산을 매각하고 그 대금을 일종의 국채인 아시냐(assignat) 화폐로 지불했다. 이 화폐 때문에 이후 심각한 인플레를 겪게 되지만 그건 나중 문제고 이로써 급한 불은 껐다. 이제 국민의회는 애초부터 하려 한 일, 즉 헌법 제정의 과제로 넘어갔다.

 

 

대혁명의 시작 17세기 영국에는 의회가 왕권을 견제하는 전통이 있었지만, 18세기 프랑스에는 그런 전통이 없었다. 이 차이는 혁명의 질적 차이로 나타났다. 청교도혁명에서는 의회가 영국 민중의 의지를 대변했으나, 프랑스 혁명에서는 민중의 불만과 분노가 아무런 여과 없이 곧바로 터져 나왔던 것이다. 그림은 프랑스 혁명의 도화선이 된 바스티유 감옥 습격 사건이다.

 

 

 혁명은 전쟁을 부르고

 

 

혁명의 초기에서 가장 균형 잡힌 사고를 한 지도자는 라파예트(L. Fayette, 1757~1834)일 것이다. 그는 일찍이 미국의 독립전쟁에서도 공을 세워 미국과 프랑스에서 두루 인기와 명성이 높았으며, 인권선언의 작성을 담당한 혁명의 주역이었다. 30대 초반의 젊은 나이에 어울리지 않을 만큼 침착하게 혁명을 주도한 그는, 당시 국민의회가 채택할 수 있는 유일한 정치제도는 입헌군주제라고 생각했다. 그의 주장이 반영되어 국민의회는 1791년부터 입헌군주제와 단원제를 골간으로 하는 프랑스 최초의 헌법을 마무리하는 단계에 들어갔다. 헌법이 제정되면 국민의회는 이룰 것을 다 이루는 셈이다. 그럼 혁명은 완성되는 걸까?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혁명과 같은 매머드급 태풍이 일어나면 혁명 세력 내부에서도 급진파와 온건파로 갈리게 마련이다. 국민의회가 2년을 끌어오면서 그 안에서도 서서히 균열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 균열이 혁명의 기조를 저해할 만큼 커지는 것을 막으려면 강력한 지도력이 필요했다. 국민들의 폭넓은 인기를 누리고 균형 감각을 잃지 않고 있던 라파예트는 바로 그 적임자였다. 그러나 한창 지도력을 굳혀가던 그에게 치명타를 던진 사건이 터졌다. 혁명의 전개 과정에 불만을 넘어 불안을 느끼고 있던 국왕 루이가 가족을 데리고 오스트리아로 망명을 시도한 것이다오스트리아는 루이의 아내 마리 앙투아네트의 친정이었으니 루이로서는 망명이 아니라 처가댁을 방문하러 가는 중이었다고 변명할 수도 있었겠다. 앙투아네트는 바로 오스트리아의 여제였던 마리아 테레지아의 막내딸이었고, 당시 오스트리아 황제인 레오폴트 2세는 그녀의 오빠였다. 물론 정략결혼이었는데, 유럽 최고의 보수적인 합스부르크 왕실에서 막내딸로 귀하게 자란 탓인지 그녀는 프랑스 왕실의 재정난은 아랑곳하지 않고 베르사유 궁전에서 사치스런 생활을 일삼은 철없는 왕비였다. 결국 그녀는 그 대가를 호되게 치른다. 차라리 성공했더라면 좋았을 텐데(물론 그랬다면 입헌군주제 자체도 필요 없어졌겠지만), 못난 왕은 변장까지 하고서도 그만 국경 부근에서 잡혀 파리로 송환되고 말았다.

 

그렇잖아도 혁명의 더딘 속도에 불만을 품고 있던 급진파는 이참에 아예 입헌군주제를 넘어 공화제를 주장하고 나섰다. 그런데 공화제는 유럽 어느 나라도 채택하고 있지 않았다. 사실 당시 분위기는 공화제를 과거 그리스 시대와 로마 초기에나 있었던 골동품쯤으로 여기고 있었다이렇게 역사에서 진보의 개념은 시대마다 다르다. 16세기 이래 유럽에서는 절대왕정이 가장 진보적인 정치제도였고, 이것을 이루지 못한 나라는 시대에 뒤처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 판에 공화정이라니? 물론 공화정이라는 개념자체는 살아 있었다. 이를테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일찍이 존재할 수 있는 모든 정부 형태는 군주제(왕정), 과두제(귀족정), 민주제(공화정)라고 말했으며, 이는 영국의 홉스와 로크(John Locke, 1632~1704), 프랑스의 루소 등의 계몽사상가들에 이르기까지 수천 년 동안 정설로 여겨져왔다(사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계몽주의 시대까지만 해도 공화정은 까마득한 과거에나 존재한 제도였을 뿐이고 그냥 분류상으로서만 의미가 있었다. 사회계약론을 주장했으면서도 국가가 커지면 커질수록 정부는 축소되고 통치자의 수는 인민의 수의 증가에 반비례해야 한다.”라고 말한 루소의 사상은 그 예다. 따라서 그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라파예트는 급진파가 선동한 왕의 퇴위를 요구하는 시위를 무력으로 진압했다. 그러나 그 사건을 계기로 정치력의 한계를 드러낸 라파예트는 실각하고 말았다. 좌절한 라파예트는 점차 균형 감각을 잃고 이념적으로 보수화되었다.

 

균형 잡힌 지도력이 사라지자 국민의회 내의 갈등이 표면화되기 시작했다. 일단 헌법은 원안대로 통과되었지만, 입헌군주제에 찬성한 파는 점차 왕당파로 변질되었고, 반대한 파는 공화파로 결집했다. 신분제를 해소하기 위해 단원제를 택한 것이었으나 단원제 내에서도 분파가 이루어진 것이다. 급기야 왕당파는 아예 보따리를 싸서 나와 푀양파라는 별도의 팀을 꾸리기에 이르렀다. 한편 공화파는 자코뱅파(Jacobins)를 이루면서 로베스피에르(Robespierre, 1758~1794)라는 서른셋의 젊은이를 리더로 내세웠다. 혁명의 계절답게 때는 바야흐로 젊은이의 시대였다.

 

 

그래도 우여곡절 끝에 17919월 헌법이 제정되었다. 그에 따라 다음 달에 국민의회는 해산되고 프랑스 최초의 근대적 의회인 입법의회(Assemblée Législative)가 구성되었다. 그러나 겉으로 순조로워 보이는 정치 일정의 이면에서는 갈등의 싹이 커져만 갔다. 푀양파는 다수당이었으나 애초의 입헌군주제에서 입헌을 떼고 보수화되어갔으므로 이념의 선명성에서 앞선 자코뱅파가 입법의회를 주도하는 분위기였다. 자코뱅파에는 아키텐의 한 지방인 지롱드 출신이 많았기에 지롱드파(Gitrondians)라고도 불렸는데, 여기서 이론가의 역할을 한 사람은 파리 출신의 브리소(Jacques Pierre Brissot, 1754-1793)와 콩도르세(Marquis de Condorcet, 1743~1794)였다(콩도르세는 백과사전서의 집필자이기도 했는데, 마지막 계몽사상가로서 프랑스 혁명에 직접 참가한 인물이다).

 

국왕의 망명 미수 사건을 계기로 브리소는 프랑스에 공화제를 수립하는 일이 결코 간단치 않음을 깨달았다. 무엇보다 프랑스는 유럽 세계의 그렇고 그런 국가가 아니었다. 1000년 동안이나 프랑스는 유럽 문명의 중심지였고, 혁명이 일어나기 수십 년 전까지만 해도 유럽 최강국이었다. 그래서 혁명이 발발하자 유럽 각국은 온통 프랑스의 정세에 이목을 집중했으며, 특히 국왕 루이의 처가인 오스트리아는 루이 가족의 운명에 대한 관심도 겹쳐 혁명 세력에게 노골적인 적대감을 보이고 있었다. 이런 국제 정세 속에서 프랑스에 공화제가 들어서는 것은 이미 프랑스 한 나라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바로 이 점이 17세기 내내 일어난 영국 시민혁명과의 차이였다.

 

17923월 내각 구성을 마친 브리소는 승부수를 던졌다. 루이로 하여금 420일 오스트리아에 대해 선전포고를 하게 한 것이다(브리소는 그것을 자유의 십자군이라고 불렀다). 바야흐로 혁명은 혁명전쟁으로 바뀌었다.

 

 

보편적 인권 개념 프랑스 혁명이 일어난 당대에는 공화국 헌법이 가장 뜨거운 쟁점이었으나 혁명의 역사적 의의는 인권선언에 있었다. 사진은 자유와 평등에 기초한 근대적 인권 개념을 최초로 정립한 프랑스 혁명의 인권선언이다(정식 명칭은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이다). 전문과 본문 17조로 된 이 선언은 발표된 직후 유럽 각국어로 번역되었다.

 

 

 국제전으로 번진 혁명전쟁

 

 

자코뱅의 목적은 이중적이었다. 대외적으로는 외국의 간섭을 차단하는 게 목적이고, 대내적으로는 왕과 왕당파의 기를 꺾겠다는 것이었다(대내적인 목적을 더 중시했을 것이다). 하지만 수십 년 동안 영국에 연전연패한 프랑스 군대는 너무 무기력했다(한때 혁명의 지도자였던 라파예트는 오스트리아에 투항함으로써 혁명의 대열에서 완전히 이탈했다). 먼저 선전포고를 한 것이 머쓱할 만큼 프랑스군은 패전을 거듭했다. 게다가 군사 강국 프로이센이 오스트리아 측에 가담하고 나섰다.

 

혁명의 위기이자 프랑스 전체의 위기였다. 자코뱅은 전국에서 의용군을 모집했다. 이미 혁명의 맛을 본 프랑스 국민들은 조국이 위기에 처해 있다는 호소에 적극 호응해 속속 파리로 모여들었다조국이라는 말에서 당시 유럽에 국가의 개념이 확실히 자리 잡았음을 볼 수 있다. 30년 전쟁에서부터 유럽 세계에는 개별 국가의 개념이 형성되기 시작했지만, 프랑스 혁명 이전까지 그것은 주로 지배층의 이념일 뿐이었다(영토 국가로 발돋움하는 데서 당장 이익을 보는 것은 그들이었으니까). 그러나 프랑스 혁명을 계기로 이제 유럽 각국에는 일반 시민들에게까지 국가와 국민이라는 개념이 퍼지게 된다. 이때 마르세유의 의용군이 행군하면서 부른 노래는 오늘날 프랑스 국가가 된 라 마르세예즈(La Marsellaise)>였다.

 

자코뱅은 최소한 한 가지 목적을 이루었다. 처음부터 전쟁에 반대한 왕당파와 루이는 오스트리아와 내통하려다가 그만 들통이나고 말았다. 성난 민중은 왕궁으로 쳐들어가 친위병들을 살해하고 왕을 체포한 다음 왕권의 정지를 요구했다. 자코뱅은 이참에 왕권을 정지시키는 게 아니라 아예 폐지하기로 했다. 17929월 자코뱅은 입법의회를 국민공회(Convention Nationale)로 바꾸고 왕정 폐지와 공화정 수립을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로마 공화정이 무너진 이래 거의 2000년 만에 유럽 세계에 다시 공화정이 부활한 것이다. 이제 프랑스는 왕국이 아니라 공화국이었다.

 

 

국제전의 조짐 1793121일 많은 사람이 모인 자리에서 루이 16세가 공개적으로 처형되었다. 한 사람이 단두대로 잘린 왕의 머리를 쳐들고 있다. 루이의 처형은 유럽의 군주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그전까지 유럽의 보수 세력인 오스트리아만을 상대로 했던 혁명전쟁에 영국이나 네덜란드처럼 가톨릭이 아닌 국가들까지 개입하게 된 것은 이 사건 때문이었다. 또다시 유럽 세계에는 대규모 국제전의 조짐이 감돌았다.

 

 

그러나 그것을 계기로 혁명의 지도부가 또다시 분립했다. 왕당파는 완전히 몰락했지만, 이제 공화파가 둘로 갈렸다. 기층 민중과 소시민을 대변하는 세력은 그대로 자코뱅으로 남았고자코뱅의 이념에 따르는 당시 프랑스의 소시민층은 자신들을 상퀼로트(sans culotte)라고 불렀다. 이 말은 퀼로트(반바지)가 없는 사람이라는 뜻인데, 귀족이나 상층 부르주아지가 반바지를 즐겨 입은 데서 비롯되었다. 놀라운 사실은 그들이 상퀼로트라는 이름을 자조적으로 부르기는커녕 자랑스럽게 사용했다는 점이다. 이는 이미 프랑스 민중이 신분제를 감정으로만이 아닌 이성으로도 부정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들은 고용 노동을 거부한 점에서, 영국과 같은 자본주의 체제를 목표로 한 지롱드의 이념과 크게 달랐다. 상퀼로트에서 싹튼 이념은 얼마 뒤 프랑스의 초기 사회주의 이념으로 이어지게 된다(마르크스는 이것을 공상적 사회주의라 부르면서 자신의 과학적 사회주의와 대비시켰으나 후자의 사상적 뿌리가 전자에 있음을 분명히 밝혔다), 상층 부르주아지를 대변하는 자유주의 세력은 지롱드파를 구성해 딴살림을 꾸렸다. 입헌군주파인 푀양파가 떨어져나가면서 군주파로 변신했듯이 지롱드도 보수화되면서 옛 왕당파의 이념까지 일부 수용했다. 양측은 반역자의 처리 문제를 두고 대립했다. 그 반역자란 다름 아닌 얼마 전까지 프랑스의 왕이었던 루이다.

 

예나 지금이나 국가의 반역자는 사형이다. 이 점을 잘 알기에 지롱드는 재판을 질질 끌려 했고, 자코뱅은 속전속결로 처리하려 했다. 그러나 입헌군주국이라면 또 몰라도 공화국에서 왕은 필요 없는 존재였고, 게다가 루이는 대역죄인이었다. 17931월 자코뱅은 집요하게 반대하는 지롱드를 근소한 차이로 누르고 국민공회에서 루이 부부의 처형을 가결했다. 그러나 이 사건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지롱드는 몰락하고 자코뱅은 권력을 확고히 다졌으나 프랑스에 쏠린 유럽 각국의 관심이 이것을 계기로 일제히 적대적으로 변했기 때문이다.

 

국왕이 처형된 사례는 150년 전 영국의 찰스 1세가 먼저였지만 루이의 처형이 남긴 파장은 그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유럽을 한 나라에 비유한다면 찰스의 경우는 지방 군수가 처형된 것이지만 루이는 말 그대로 한 나라의 왕이 백성들의 손에 의해 처형된 격이었다. 여기서 다른 나라들은 귀족에 해당한다. 왕을 살해한 반란을 그냥 두고 볼 귀족은 없다. 즉각 영국, 네덜란드, 에스파냐의 세 귀족이 프랑스에 선전포고를 했다. 이제 혁명전쟁은 국제전으로 비화했다. 7년 전쟁이 끝난 지 50년도 채 못 되어 다시 유럽 세계는 대규모의 국제전에 돌입한 것이다.

 

 

비난받는 타협 1791년의 헌법은 완전한 공화정을 구현하지 못하고 입헌군주제라는 절충적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타협의 산물인 만큼 누구도 헌법에 완전히 만족하지는 않았다. 그림은 새 헌법이라는 제목의 책을 모루 위에 올려놓고 귀족과 평민, 성직자가 두드려대는 모습이다.

 

 

프랑스의 새 공화 정부는 바깥으로 전쟁을 수행하면서 안으로는 혁명의 과업을 완수해야 하는 어려움에 봉착했다. 바깥은 마음대로 할 수 없지만 권력을 잡은 이상 안은 마음대로 할 수 있다. 자코뱅의 리더 로베스피에르는 혁명을 수호하기 위해 어느 정도의 공포정치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그는 이름도 서슬 퍼런 공안위원회를 조직하고 지롱드파를 비롯한 반혁명분자들을 가차 없이 처형했다. 이어 그는 국민총동원령(8)과 최고가격령(9)으로 전시 체제를 갖춘 다음 공식적으로 혁명정부의 수립을 선포했다. 이것으로 공포정치는 합법적인 면허를 얻었다(오늘날로 치면 비상계엄이 상시화된 것에 해당한다).

 

그러나 반대파를 제거한 뒤에 떨어진 공포의 면허장은 그 쓰임새가 원래 의도보다 확대될 가능성이 높았다. 달력을 제정하는 온건한 활동이 달력은 공화력(共和曆)이라고 부르는데, 17931124일부터 적용되어 1806년까지 존속했다. 1년을 12개월로 한 것은 그전까지 사용한 그레고리력과 같았으나 공화력에서는 각 달의 이름을 포도, 안개, 보리, 눈 등 그 달의 특징에서 따온 이름으로 바꾸었다. 거기까지는 괜찮았지만 한 달을 30일로 고정하고 남는 5일을 마지막 달에 추가한 방식은 이후 역사 기록에서 날짜의 혼선을 빚었다. 그래서 1793년부터 1806년까지의 프랑스 역사는 공화력으로 환산해야만 정확한 날짜를 알 수 있다으로 국가 운영을 시작한 혁명 정부는 이내 본격적인 공포 체제를 가동시켰다. 그에 따라 공안의 칼날은 차츰 바깥보다 안을 향하게 되었다.

 

혁명정부의 노력으로 대외 전선에서 어느 정도 균형을 이루고 혁명 이후 내내 불안했던 경제도 다소 회복되자 혁명 주도 세력 내부에도 이견이 생겨났다. 입헌군주파와 공화파, 푀양파와 자코뱅파, 지롱드당과 자코뱅당, 혁명의 발발 이후 이렇게 분립해오는 동안 혁명 세력은 점차 색깔이 선명해졌고, 혁명의 노선 역시 확고해졌다. 따라서 이제는 공화제라는 정치 체제와 기층 민중을 기반으로 한다는 계급적 이념의 면에서는 누구도 의문을 달지 않았다. 다만 문제는 혁명의 진전 속도였다.

 

이 문제를 두고 혁명 세력은, 일단 어느 정도 성과를 이루었으니 완급 조절을 해야 한다는 온건파와 내친 김에 수백 년간 진보의 발목을 잡아온 그리스도교마저 폐지하고 근대적 합리성을 구축해야 한다는 급진파로 나뉘어 논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는 사실을 잊은 걸까? 로베스피에르는 그것을 혁명 세력의 분열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1794년 봄에 양 파의 보스인 당통(Georges Jacques Danton, 1759~1794)과 에베르(Jacques-René Hébert, 1757~1794)를 처형해버렸는데, 그것은 최종 승리를 눈앞에 둔 프랑스 혁명의 5년을 물거품으로 만든 결정적인 실책이었다.

 

 

살벌한 달력 표시 프랑스 혁명기에 반포된 공화력의 표지다. 신생국이 달력부터 손보는 것은 동서고금에 마찬가지다. 표지에 보이는 공화국의 통일과 단결, 자유ㆍ평등ㆍ박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선연한 문구가 혁명적 분위기를 말해준다.

 

 

 죽 쒀서 개 준 혁명

 

 

당시 로베스피에르가 취했어야 할 최선의 방책은 공포 체제를 완화하는 것이었다. 혁명정부의 집권은 확고해졌고, 프랑스는 대내적으로나 대외적으로나 어느 정도 안정기에 접어든 시점이었다. 최선이 안 된다면 차선의 방책은 혁명 지도부의 통합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를 위해서는, 있을 수 있는 내부 논쟁을 허용하고 합의를 이끌어내는 정치력이 필요했다. 로베스피에르기는 판단 실수로 최선의 방책을 놓쳤고, 능력 부족으로 차선의 방책을 놓쳤다. 그 결과는 그 개인으로서도, 프랑스 전체로서도 최악이었다.

 

1794727, 로베스피에르는 국민공회에서 연설하려던 순간 독재 타도를 외치는 의원들에 의해 전격적으로 체포되었다. 그 날짜를 공화력으로 치면 공화력 2()의 달’, 즉 테르미도르에 해당하므로 그 사건을 테르미도르의 반동이라고 부른다. 로베스피에르는 미처 정신을 차릴 여유도 없이 바로 다음 날 혁명의 지도자에서 혁명의 반역자로 곤두박질치며 처형되었다. 여기까지가 로베스피에르의 개인적인 피해라면 그다음부터는 프랑스 혁명의 수난이었다.

 

공포정치로 비난을 받은 로베스피에르였지만 생전에 그의 목표는 ()이 지배하는 공화국이었다. 심지어 그는 자신의 공포정치를 덕의 공포라고 부를 정도였다. 그랬으니 그를 반대하는 사람은 많았겠지만 그를 죽일 만큼 증오하는 사람은 덕과 가장 거리가 먼 자들일 게 뻔했다. 과연 테르미도르의 반동을 저지른 자들은 부패와 악덕의 죄과를 가지고 있어 언제 공안위원회에 소환될지 몰라 두려워하던 의원들이었다. 악덕이 덕을 누르고 부패가 청렴을 죽인 것이다. 이것으로 프랑스 혁명의 최종적 운명이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당통과 에베르를 제거한 뒤부터 로베스피에르의 지지 세력은 얼마 남지 않았다. 그런 마당에 그가 제거되자 그를 중심으로 결집했던 자코뱅파는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다. 어부지리를 얻은 것은 온건 공화파였다. 로베스피에르의 철권통치 시절 숨죽이고 지냈던 그들은 일만 저지르고 수권 능력이 없는 반동파를 제치고 국민공회를 장악해 임자 없는 권력을 손에 쥐었다.

 

그러나 혁명의 최후 성과를 결정하는 중대한 시점에 그들이 이룬 혁명적 과업이라고는 공화제와 공화력을 유지한 것뿐이었다. 공안위원회와 혁명재판소는 폐지되었고, 로베스피에르가 만든 모든 법은 휴지통에 처박혔다. 하지만 공포정치를 해소하는 데 그친 정치 개혁보다 더 큰 문제는 경제적 무능이었다. 자유 시장경제가 도입되면서 물가가 급속히 상승했고, 최고 가격제가 폐지되면서 민중은 생활고에 시달렸다.

 

 

기요탱의 기요틴 단두대를 가리키는 기요틴은 이 장치를 만든 기요탱(Guillotin)의 이름을 영어식으로 잘못읽은 말이다(잘못읽은 예는 길로틴이다). 흔히 기요틴은 끔찍한 형벌의 대명사로 사용되지만 발명될 무렵에는 그 반대로 인도적인장치였다. 당시에는 죄인에게 서서히 고통을 가해 처형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이듬해인 1795년 국민공회는 새로 헌법을 제정해 위기를 타개하고자 했다. 단원제를 양원제로 바꾸고, 다섯 명의 총재를 두어 권력을 분담하도록 하는 게 주요 내용이었다. 그러나 이 헌법을 바탕으로 하여 구성된 총재정부 역시 온건 공화파에 못지않게 철저히 무능했다총재정부는 처음으로 의회가 아닌 행정부 형태를 취한 기관이다(로베스피에르의 혁명정부는 조직으로서의 정부라기보다는 구호적인 성격이 강했다). 혁명으로 공화정이 수립된 것은 1791년 헌법 제정 때였으나 실제로 공화정에 걸맞은 행정부는 없었고 의회가 정부 기능을 수행했다. 몽테스키외가 3권 분립을 주장한 지 50년이 지나고서도 아직 행정부의 개념은 제대로 확립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해서 생긴 프랑스 최초의, 나아가 유럽 최초의 행정부는 정부의 명패만 남겼을 뿐 제 기능은 하지 못했다. 자코뱅의 잔존 세력은 물론이고 헌법 개정을 주도한 세력조차 정부 비판에 앞장설 정도였다. 군대의 힘을 빌려 그럭저럭 양측의 공세를 차단하면서 연명하던 총재정부는 179911월 마침내 믿는 도끼에 발등을 찍히는 사태를 맞았다. 정부의 물리력인 군대가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그 주역은 서른 살의 젊은 나이에 프랑스의 전쟁 영웅으로 떠오른 코르시카 출신의 촌놈나폴레옹(Napoleom Bonaparte, 1769~1821)이었다.

 

보잘것없는 신분의 나폴레옹이 처음으로 명성을 얻은 것은 1793년 영국과 에스파냐 함대가 봉쇄하고 있던 툴롱 항구를 탈환한 공로 덕분이었다(국제적으로 고립된 채 유럽 각국과 힘든 전쟁을 수행하던 프랑스 국민들은 영웅을 고대하고 있었고, 그 영웅은 전장에서 탄생할 가능성이 가장 높았다). 그 공로로 나폴레옹은 20대의 나이에 여단장으로 승진했고, 1796년에는 취약한 이탈리아 전선에 투입되었다(그가 젊은 나이에 초고속 승진한 데는 혁명 이후 경험 많은 장군이 대거 국외로 탈출해 군 지휘 계통에서 공백이 생겨났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에게 주어진 프랑스군은 특히 오합지졸이었고 장비도 엉성했으나 나폴레옹은 200년 전 한반도의 이순신이 그랬듯이 1년 동안 거의 모든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을 무찌르는 괴력을 선보였다. 1797년 오스트리아는 이탈리아에서 철수할 수밖에 없었으며, 프랑스는 캄포포르미오 조약을 통해 롬바르디아를 오스트리아로부터 양도받고 벨기에를 영토에 포함시켰다.

 

 

혁명의 끝 흥미진진한 영화일수록 끝은 시시한 경우가 많다. 테르미도르의 반동은 프랑스 혁명을 용두사미로 만들어버렸다. 공화정을 당면 목표로, 보편적 인권을 궁극적 이념으로 내걸었던 프랑스 혁명은 결국 소수 반동 세력의 준동으로 삽시간에 물거품이 되었다. 그림은 반동파에 의해 로베스피에르가 체포되는 장면이다.

 

 

이순신은 권력을 꿈꾸지 못했고 주변의 모함을 받았지만, 나폴레옹은 권력을 꿈꾸었고 주변의 도움을 받았다. 나폴레옹의 등장을 계기로 프랑스의 혁명전쟁은 소극적 방어에서 적극적 침략으로 궤도를 선회한다. 자신감을 찾은 총재정부는 이참에 영국의 인도 무역로를 차단하기로 마음먹었다. 비록 대서양 항로가 개척된 이래로 많이 위축되기는 했어도 여전히 지중해 무역은 중요했다. 총재정부가 노린 곳은 지중해 무역의 거점인 이집트였다. 1798년 정부는 나폴레옹을 사령관으로 삼아 이집트 원정군을 파견했다. 그러나 이미 프랑스의 모든 행동은 유럽 전체에 경보를 발하는 상황이었다. 당시 동부 지중해 진출을 최대의 목표로 삼고 있던 러시아를 비롯해 오스만 제국, 포르투갈, 시칠리아 등이 일제히 영국 측에 가담해 대프랑스 동맹을 맺었다(종교적으로 프로테스탄티즘, 가톨릭, 동방정교, 이슬람교 국가 들이 섞여 있었다는 것은 그 무렵이면 종교가 국제 관계에서 전혀 고려 대상이 되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그러나 총재정부로서 더 중요한 사실은 나폴레옹의 마음이 콩밭에 가 있었다는 점이다. 1년이 넘도록 이집트에서 영국군과 악전고투를 벌인 나폴레옹은 179910월 군대를 이집트에 남겨둔 채 단신으로 귀국했다이집트 원정은 초기에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17988월 나폴레옹은 나일 강 전투에서 참패를 당하고 점차 영국에 밀리기 시작했다. 전황이 불리해지자 단신 귀국을 결정한 것이니 영웅나폴레옹의 모습은 아니다. 나일 강 전투에서 영국 측 지휘관은 바로 호레이쇼 넬슨이었는데, 7년 뒤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나폴레옹은 또다시 넬슨에게 패해 실각하고 만다. 그를 환영한 것은 그의 명성을 이용해 총재정부를 타도하려는 세력과 그들이 모아둔 군대였다. 군대를 거느리고 파리에 온 나폴레옹은 119일 자코뱅파의 준동을 방지한다는 구실로 총재정부의 지도자들을 감금했다. 그 이튿날 그는 정부의 해체를 공식적으로 선언하고 헌법을 개정한 뒤 스스로 통령이 되어 통령정부를 새로 열었다. 1799119일은 공화력으로 안개의 달, 즉 브뤼메르 18일이었기에 이 사건을 브뤼메르 쿠데타라고 부른다.

 

프랑스 혁명은 이미 테르미도르의 반동으로 사실상 끝난 것이었지만, 그나마 혁명의 흔적이라도 유지하던 총재정부마저 무너짐으로써 혁명은 완전히 물거품이 되었다. 무엇보다 애초에 혁명 세력이 목표로 했고 또 한동안 실현한 공화제가 끝장났기 때문이다흔히 프랑스 혁명의 의의를 인권의 신장이라든가 자유ㆍ평등ㆍ박애의 정신을 유럽에 확산시켰다는 등으로 말하지만, 그건 후대의 역사가들이 살을 덧붙여 말하는 것일 뿐이고 실은 그보다 단순했다. 혁명의 목표는, 국내적으로는 공화제를 이룩하는 것이었고, 국제적으로는 한동안 뒤처진 프랑스를 유럽 국제사회의 핵심으로 다시 복원하려는 것이었다. 후자는 나폴레옹이 한때나마 실현하지만 공화제는 나폴레옹이 무너뜨렸으므로, 프랑스 혁명은 나폴레옹의 등장으로 물거품이 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결국 프랑스 혁명은 죽을 쒀서 나폴레옹에게 준 격이 되어 버렸다.

 

 

이집트 원정의 성과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에는 군대만이 아니라 많은 학자도 수행했다. 왼쪽은 그들이 발견한 로제타석이고, 오른쪽은 이집트 유적을 조사하는 프랑스 학자들이다. 고대 이집트 문자의 해독에 결정적인 열쇠가 된 로제타석은 프랑스로 운송되었다가 나폴레옹 전쟁 때 영국으로 넘겨져 현재 대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학자들의 연구 성과로 이후 유럽에는 이집트학이 크게 발달했으며, 이는 19세기의 오리엔탈리즘(서양의 동양 연구)으로 이어진다.

 

 

 유럽의 황제를 향해

 

 

통령은 나폴레옹을 포함해 총 세 명이었으나 사실상 나폴레옹이 유일한 통령임은 나머지 두 통령도, 프랑스 국민도, 나아가 유럽 각국도 잘 알고 있었다. 우리는 통령이라는 말로 번역하지만 그말은 원래 콘술(consul)’이다. 그런데 콘술이라면 로마 공화정 시대에 있었던 집정관이 아닌가? 실제로 통령정부 치하의 프랑스는 여러모로 로마 공화정 말기와 비슷했다. 콘술만이 아니라 원로원(상원)도 있었다. 자연히 로마의 콘술이었던 카이사르가 생각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 하지만 로마의 콘술이었던 카이사르는 황제를 꿈꾸다가 실패했으나 나폴레옹은 끝내 그 꿈을 이루었다.

 

황제가 되기 위한 단계로 카이사르가 종신 독재관을 거쳤듯이, 1802년 나폴레옹은 헌법을 개정해 종신 통령이 되었다(그와 함께 그는 영국과 아미앵 조약을 맺어 휴전을 이루었다). 그리고 2년 뒤에는 마침내 꿈에 그리던 제위에 올랐다. 원로원의 승인만 강요하면 되었던 카이사르와 달리, 나폴레옹은 국민투표를 거쳐야 했다. 그러나 프랑스 국민들은 옥타비아누스에게 아우구스투스라는 존칭을 바쳤던 로마 원로원처럼 국민투표에서 새 황제에게 전폭적인 지지를 보냈다. 기원전 1세기 로마 원로원은 공화정의 경험이 풍부했고 19세기 벽두의 프랑스 국민들은 혁명기에 잠시 공화정의 맛만 보았을 뿐이지만, 2000년을 사이에 두고 로마와 프랑스는 영웅의 출현을 필요로 하는 똑같은 상황에 처했던 것이다.

 

이제 프랑스는 샤를마뉴 시대의 프랑크 제국에 이어 역사상 두 번째로 제국이 되었다. 하지만 제국이라면 반드시 필요한 게 중앙집권과 식민지인데, 이 점에서 프랑크와 프랑스는 정반대였다. 옛 프랑크는 300여 곳의 속주를 거느렸으나 중앙집권력이 약했고, 19세기의 프랑스는 강력한 중앙집권을 이루었으나 휘하의 식민지가 없었다.

 

신참황제로서 나폴레옹은 한동안 내치에 주력했다. 혁명 중에 재산을 모두 빼앗겨 알거지가 된 가톨릭 사제들과는 국가가 봉급을 주는 제도를 도입해 화해에 성공했고, 교육제도와 금융제도를 혁신해 유럽의 다른 나라들과 엇비슷하게 수준을 맞추었다. 무엇보다 큰 업적은 법전의 편찬이다. 1804년 그가 직접 지휘해 편찬하도록 한 나폴레옹 법전은 이후 프랑스 법전의 원본이 되었으며, 오늘날까지도 골조가 살아남아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진정한 제국이라면 식민지가 있어야 했고 식민지를 획득하려면 바깥으로 나가야 했다. 이집트 작전에 실패한 뒤 프랑스의 외부 영토는 북이탈리아밖에 없었는데제위에 오를 때 나폴레옹은 이탈리아의 왕을 겸한다고 선언했다. 물론 당시 북이탈리아는 프랑스가 장악하고 있었으니 그럴 만도 했지만, 그가 굳이 그렇게 선언한 이유는 추측하기 어렵지 않다. 그는 가깝게는 아직 명패를 내리지 않고 있는 신성 로마 제국을, 멀게는 샤를마뉴의 프랑크 제국을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북이탈리아의 롬바르디아는 10세기에 오토 1세가 신성 로마 제국을 세울 때부터 왕을 자칭한 지역이었으며, 샤를마뉴도 마찬가지였다. 롬바르디아가 이렇게 유럽의 황제와 상징적인 연관을 가지는 이유는 샤를마뉴의 아버지 피핀이 이곳을 정복해 교황령으로 바친 데서 비롯되었다(1332쪽 참조). 상당히 멀어 보이는 서양의 근대와 중세 초기는 이렇게 연결된다, 그것만 가지고 제국으로 자칭한다면 남부끄러운 일이었다. 그렇잖아도 대외 진출을 염두에 둔 판에 바깥에서 계기가 생겨났다. 영국이 먼저 아미앵 조약을 깨고 선공으로 나온 것이다. 곧이어 1805년에는 영국을 중심으로 3차 대프랑스 동맹이 결성되었다. 또다시 프랑스는 영국, 오스트리아, 러시아, 스웨덴 등 유럽 열강을 맞아 전쟁을 벌여야 했다.

 

이전의 동맹들이 그렇듯이, 동맹의 핵심은 언제나 영국이었다. 영국은 루이 14세의 강력한 팽창정책에도 제동을 걸었고, 18세기 두 차례의 왕위 계승 전쟁에서도, 또 신대륙에서도 늘 프랑스에 패배의 쓴잔을 안겨주었다. 프랑스로서는 영국이 최대의 라이벌이자 걸림돌이었다. 나폴레옹은 영국을 제압하지 않고서는 유럽을 제패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이집트를 원정한 목적도 영국의 힘을 약화시키려는 데 있지 않았던가? 하지만 그 형세 판단은 옳았으나 나폴레옹은 루이 14세와 똑같은 오류를 저지르고 만다.

 

 

전통적으로 프랑스는 육군에 관한 한 영국을 능가했다. 그러나 알다시피 영국은 섬나라이므로 해군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이길 수 없었다. 루이 14세가 영국에 덜미를 잡힌 것도 영국 해군에게 패했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100년이 지난 나폴레옹 시대에 영국 해군은 더욱 강해졌다. 18세기 내내 프랑스 해군은 전 세계 식민지에서 벌어진 영국 해군과의 싸움에서 거의 재미를 보지 못하고 있었다. 물론 나폴레옹도 그 점을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여섯 시간만 영국 해협을 장악한다면 런던을 접수할 수 있으리라고 판단했다. 아닌 게 아니라 영국은 프랑스군의 영국 침략을 경계해 영국 해협에 함대를 집중시켜 봉쇄하는 중이었다. 여섯 시간만 그 봉쇄를 뚫어준다면…….

 

그러나 당시 영국 해군에는 넬슨(Horatio Nelson, 1758~1805)이라는 뛰어난 제독이 있었다. 이집트 원정 때도 발목을 잡았던 나폴레옹의 천적 넬슨은 180510월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대승을 거둠으로써 프랑스에, 그리고 그 자신에게도 최후의 타격을 가했다. 영국 해군의 봉쇄를 뚫으려던 프랑스 해군은 참패를 당하고 다시는 영국 진출을 시도하지 못하게 되었으며, 넬슨은 그 전투에서 전사했던 것이다.

 

비록 해상권은 영국에 넘겨주었어도 대륙에서는 프랑스군의 적수가 없었다. 180511월 프랑스는 보헤미아에서 러시아와 오스트리아의 동맹군을 격파하고 다음 달에는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어 대륙의 동맹군에 결정적인 타격을 가했다. 여기서 완전히 제압당한 오스트리아는 일부 영토를 프랑스에 양도하고 동맹에서도 빠졌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로부터 한 가지를 더 빼앗고자 했다. 그것은 바로 제국이라는 명패였다(황제는 두 명일 수 없으니까), 1806년 나폴레옹은 남독일의 16개 영방 국가를 오스트리아로부터 떼어내 독립시켰다. 제후국을 잃은 제국은 더 이상 제국일 수 없다. 이제 오스트리아는 일개 왕국으로 전락했다. 마침내 최후의 황제 프란츠 2세가 제위를 포기함으로써 1000년 가까이 존속한 신성 로마 제국은 완전히 해체되었다16세기 중반 카를 5세가 동생과 아들에게 각각 오스트리아와 에스파냐를 물려주면서 사실상 신성 로마 제국은 해체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뒤이어 30년 전쟁에서 합스부르크 왕가가 몰락한 이후 신성 로마 제국은 오스트리아 제국으로 바뀌어 제국의 명패만 보존해왔다. 세습령이었던 오스트리아 이외에 남독일의 가톨릭 영방국가들을 제후국으로 거느리기는 했으나 정치적 영향력은 거의 없었다. 나폴레옹은 그런 느슨한 연관마저 끊어버린 것이다.

 

오스트리아가 무너지자 졸지에 프랑스와 국경을 접하게 된 프로이센도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프로이센은 동맹국이 아니었으나 프랑스가 그다음 목표로 프로이센을 택하리라는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최선의 수비는 공격이라는 생각에 프로이센은 선공을 가했지만 막강한 프로이센군도 승세를 탄 프랑스의 진격을 막을 수는 없었다. 1806년 프로이센은 예나와 아우어슈테트에서 프랑스에 대패한 뒤 이듬해 굴욕적인 틸지트 조약을 맺고 오스트리아처럼 영토의 일부를 프랑스에 양도했다.

 

마침내 나폴레옹의 꿈이 실현되었다. 그는 프랑스의 황계를 넘어 서유럽의 황제가 되었다(물론 대륙으로만 제한되었지만). 이제 서유럽 세계는 한가운데 프랑스가 자리 잡고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러시아, 에스파냐 등 사방의 국가들은 모두 프랑스의 위성국가가 되어버렸다. 유일하게 남은 저항 세력인 영국에 대해 나폴레옹은 1806년 베를린 칙령을 내려 영국과의 모든 교역을 금하는 대륙 봉쇄를 실시하는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이를테면 경제 전쟁인 셈인데, 그러나 영국보다 오히려 대륙 국가들이 더 심한 고통을 당하는 바람에 실효를 거두지는 못했다.

 

 

 유럽 민족주의의 태동

 

 

나폴레옹의 시대가 계속되었더라면 혹시 유럽에서도 강력한 중심을 갖춘 동양식 제국이 성립되지 않았을까? 그러나 유럽의 역사에서는 한 나라가 패권을 장악하는 비정상적인 상태를 오래 용인하지 않는다.

 

나폴레옹의 몰락은 사실 자초한 측면이 있었다. 1807년 제국의 서쪽 변방에 있는 포르투갈이 봉쇄령을 어기고 영국과 통상을 재개하자 나폴레옹은 단호히 응징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냥 응징으로 그쳤으면 좋았을 텐데, 리스본을 점령한 프랑스군은 내친 김에 에스파냐까지 제압했다. 나폴레옹은 아예 자기 형을 에스파냐 왕으로 갖다 앉혔다. 그런 그의 오만은 예상치 못한 강력한 저항에 부딪혔다. 성난 에스파냐 민중이 봉기를 일으킨 것이다왕위 계승 전쟁으로 부르봉 왕조가 들어서면서 프랑스 왕실과 한 집안을 이룬 이래로 에스파냐는 프랑스와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두 나라의 관계는 프랑스 혁명기에 잠시 적대적으로 바뀌었으나 혁명이 쇠퇴하고 다시 관계를 회복했으며, 에스파냐는 일찌감치 나폴레옹을 지지하고 나섰다. 그러나 그것은 에스파냐의 왕실만의 생각이었고, 국민은 달랐다. 이미 유럽 세계는 각 국민국가로 분립되었고, 각국마다 이해관계가 다른 상황이었는데, 군주들은 시대에 뒤처진 사고로 일관했다. 지금까지 우리는 유럽 역사를 살펴보면서 편의상 나라 이름을 주어로 사용했으나, 이 무렵부터는 엄밀히 말해 해당 나라의 지배층을 가리키는 용어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아직도 나폴레옹은 상황을 제대로 판단하지 못하고 군대를 보내 무력으로 진압하고자 했다. 정면 대결에서는 승산이 없으므로 에스파냐 민중은 전국 각지에서 자발적으로 소규모 부대를 조직해 프랑스군을 괴롭히는 전술로 대응했다(이때 생긴 말이 바로 게릴라라는 용어다). 전세는 엉뚱하게도 정규군이 게릴라군에 밀리는 형세로 전개되었다.

 

이 사태가 미처 정리되기도 전에 다음에는 동쪽 변방의 러시아가 프랑스의 지배를 거부하고 나섰다. 결국 이것이 나폴레옹의 명맥을 끊었다. 1812년 나폴레옹은 70만 명의 대군으로 러시아 원정에 나섰다. 그러나 러시아는 전투를 피하고 후퇴하면서 적의 수중에 넘어갈 만한 모든 물자를 파괴하는 초토화 작전으로 맞섰다. 예나 지금이나 러시아는 넓은 나라, 프랑스군이 모스크바에 입성할 즈음에는 이미 겨울이 닥쳤다. 더 이상의 진군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나폴레옹은 할 수 없이 철군을 명했는데, 러시아군은 이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프랑스군의 후방을 덮쳤다.

 

살아남은 프랑스군은 출발 당시의 겨우 4분의 1로 줄어 있었다. 러시아는 또 한 번 중요한 고비에서 역사의 흐름을 바꾸었다. 러시아 원정의 대실패는 나폴레옹에게 결정적이었다. 이듬해 프랑스는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유럽 각국 연합군에 대패했고, 결국 나폴레옹은 실각했다. 1815년 그는 유배지인 엘바 섬에서 극적으로 탈출해 재기를 도모했으나 워털루 전투에서 영국의 웰링턴(Wellington, 1769~1852)에게 패하면서 완전히 몰락했다.

 

 

나폴레옹의 패배와 몰락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가 남긴 영향이다. 프랑스 내에서는 프랑스 혁명의 성과가 공화국의 이념에서 후퇴해 제정의 성립으로 이어졌으나, 묘하게도 나머지 유럽 국가들에서는 나폴레옹으로 인해 오히려 혁명의 건강한 이념이 전파되는 결과를 낳았다. 프랑스의 치하에서 잠깐이나마 비참과 굴욕을 맛본 유럽 각국은 (에스파냐에서 보듯이) 자연스럽게 민족주의를 성장시켰고, 이것은 17세기부터 형성되기 시작한 근대 국민국가 운동을 마무리하는 역할을 했다나폴레옹의 정복이 유럽 각국의 민족주의를 일깨운 직접적증거는 여러 면에서 찾을 수 있다. 그것이 아니었더라면 프로이센 국민의 자각을 외친 피히테의 강연(‘독일 국민에게 고함’), 에스파냐에서 저질러진 프랑스의 만행을 고발한 고야의 그림(<180852, 180853>), 러시아에서 프랑스군의 참패를 웅장하게 그려낸 차이코프스키의 음악(1812년 서곡)도 없었을 것이다.

 

이제 유럽 세계를 들끓게 한 전란의 시대는 일단락되었다. 짧게는 18세기 초 에스파냐 왕위 계승 전쟁부터, 길게는 17세기 초 30년 전쟁부터 시작된 유럽의 진통은 나폴레옹 전쟁으로 끝났다. 200년간의 진통은 유럽의 정치적 지형을 크게 바꾸어, 그전까지 그런대로 중세적 통합성을 유지하고 있던 유럽 세계를 수많은 국가로 나누어놓았다. 그 결과가 오늘날의 유럽이다.

 

그 과정이 하필 전쟁이라는 폭력적이고 혼란스런 형태로 전개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그전까지 유럽 세계에 별다른 전쟁이 없었다는 것으로 설명할 수 있다. 국가(영토 국가)의 개념이 명확하지 않고 교황이 조정자의 역할을 맡았던 시대에는, 다른 문명권과의 전쟁(예컨대 십자군 전쟁)은 있었어도 유럽 문명권 내부의 전쟁은 없었다(백년전쟁이 예외지만 이것은 영국과 프랑스의 특수한 영토 분쟁에 불과했다). 간단히 말하면 교회가 무너지면서 유럽 세계의 통합성이 함께 무너졌고, 그에 따라 각국은 전쟁의 형태로 각자의 역사를 진행시켜나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물론 이후의 유럽 역사에서 전쟁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앞으로 보겠지만 오히려 전쟁은 더욱 치열해진다. 그러나 200년간의 진통을 겪은 유럽 세계는 종전과 다른 역사를 전개하게 된다. 중세 이후 내내 혼란스러웠던 분열상은 각국이 국민국가를 이루면서 끝났고, 유럽 세계 내에서는 모든 구획이 확정되었다. 그렇다면 다음은 바깥을 향해 진출하는 단계다. 그전까지 산발적으로 전개된 세계 무대로의 진출은 19세기부터 집중적이고도 목적의식적인 국가 행동으로 탈바꿈한다. 바야흐로 제국주의적 세계 진출의 시대가 개막되었다.

 

 

탄압의 대가 나폴레옹은 에스파냐에서 일어난 민중 봉기를 과소평가했으나 그것은 결국 나폴레옹 시대의 종말을 알리는 서곡이 되었다. 위쪽은 에스파냐의 민중 봉기를 폭력적으로 진압하는 장면을 그린 기록화이고, 아래쪽은 에스파냐의 화가 고야가 그 사건을 그림으로 고발한 (180853)이다.

 

 

인용

목차

한국사 / 동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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