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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서양사, 2부 뿌리① - 3장 전란의 시대, 전후의 새 질서 본문

역사&절기/세계사

서양사, 2부 뿌리① - 3장 전란의 시대, 전후의 새 질서

건방진방랑자 2022. 1. 2. 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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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후의 새 질서

 

 

페르시아 전쟁이 역사적으로 중요한 이유는 그 이후에 그리스 고전 시대가 활짝 열렸고 이를 바탕으로 서양 문명의 뿌리가 자라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란의 시대는 아직 끝나지 않았고, 수십년 뒤 펠로폰네소스 전쟁이라는 긴 전쟁을 한 차례 더 치르고서야 그리스는 평화를 되찾게 된다. 그런데 묘한 일은 그것을 정점으로 그리스 반도는 외부(마케도니아)의 침략으로 문명이 쇠퇴하고 그 대신 지중해 문명이 싹트게 된다는 점이다.

 

오리엔트의 대적을 물리친 경험은 그리스 반도에 새로운 판세를 가져왔다. 우선, 비록 승리는 했지만 페르시아는 여전히 공포를 느끼게 하는 존재였으므로 그리스 전체가 공동으로 대처해야 한다는 문제가 있었다. 대처 방식은 폴리스들이 동맹을 결성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맹주는 누굴까? 둘을 꼽으라면 만장일치였다. 아테네와 스파르타 말고 또 있겠는가? 하지만 하나의 폴리스를 꼽으라면? 만장일치는 아니지만 아테네가 우세한 것은 분명했다. 아테네는 단독으로 페르시아에 맞선 마라톤 전투에서 승리했고, 전쟁 기간 내내 한 번도 항전을 포기하지 않은 구심력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아테네를 중심으로 한 델로스 동맹이 탄생했다.

 

왜 아테네 동맹이 아니고 델로스 동맹일까? 델로스는 그리스 반도에서도 제법 떨어진 에게 해 한복판의 조그만 섬이었는데, 여기에 폴리스들의 공동 군자금을 관리하는 금고를 설치했기 때문이다(하지만 아테네가 만장일치의 맹주였다면 아테네 동맹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는 곧 스파르타와의 불화의 씨앗이 내포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하나의 상징이다). 귀중한 금고를 에게 해 한복판에 두었다는 것 자체가 이미 이오니아를 제패했다는 그리스의 자신감을 말해주고 있었다.

 

폴리스들의 우두머리가 공식적으로 정해졌으니 이제 그리스 반도는 통일을 이룬 걸까? 그보다 약간 나중이지만 기원전 3세기에 중국에서는 춘추전국시대의 오랜 분열기를 끝내고 통일을 이룬 진()이 강력한 제국 체제를 구축했다. 아테네는 과연 그런 제국이 되었을까?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했다. 우선 그리스는 제국이 들어서기에는 너무 좁았고, 중국의 중원과 같은 지리적 중심이 없었다. 또한 중국 춘추전국시대의 제후국들과 달리 그리스의 폴리스들은 독자적인 노선을 오래 걸어왔던 탓에 서열은 지어졌어도 통일을 이루기는 어려웠다(중국의 제후국들은 분열기에도 내내 통일을 지향하고 있었다), 게다가 2인자 스파르타의 세력은 아테네가 1인자라고 해도 함부로 할 수 없는 만만찮은 상대였다.

 

그렇다 해도 아테네에 맹주를 넘어서 제국의 중심이 되고픈 의도가 없을 리 없다. 폴리스들이 점점 노골화되는 아테네의 지배를 거부하자 아테네는 오히려 더욱 고삐를 조였다. 기원전 454년 아테네는 델로스의 금고마저 아테네로 옮기고 제국 체제를 서둘렀다. 동맹 폴리스들이 정기적으로 내는 군자금은 점차 아테네에 바치는 조공으로 변해갔다. 이 재력과 해상무역의 독점으로 얻은 이익은 아테네의 민주정을 화려하게 만개시킨 물질적 기반이 되었다.

 

 

승리의 여신 승리의 여신 니케가 전리품으로 얻은 갑옷과 무기를 만지고 있다. 하지만 유럽의 소국이 동방의 대적을 물리친 것은 니케의 도움보다는 그리스의 여러 폴리스가 힘을 합쳐 단결한 덕분이었다. 특히 헌신과 희생이 가장 컸던 아테네는 전후 그리스 세계의 리더로 떠올랐다.

 

 

클레이스테네스가 토대를 놓은 아테네의 민주정을 그리스 민주주의라는 건물로 완성한 사람은 페리클레스Perikles(기원전 495년경~기원전 429)였다. 여기에는 물론 페리클레스의 정치적 능력도 중요했지만, 당시 아테네에는 민주정이 발달할 만한 배경이 있었다. 우선 전 국민이 참전 용사였으니 당연히 신분 차별이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살라미스 해전의 승리로 사회의 하층이던 수병의 지위가 상승했고, 동맹의 맹주로서 아테네의 상공업이 전성기를 맞은 덕분에 상공업자의 지위도 올라갔다. 전쟁 전에도 아테네에서는 평민층의 성장이 두드러졌으니 전후에는 말할 것도 없었다. 시민계급이 두터워진 것은 민주주의의 가장 기본적인 요건이었다.

 

당연히 민회의 권한이 크게 강화되었다. 그에 반비례해 귀족들의 회의체인 500인회는 민회에 제출하는 의안을 준비하고 민회의 결정 사항을 집행하는 수준으로 격하되었다. 500인회가 근대 민주주의의 입법부와 행정부라면 민회는 그 위에 존재하면서 모든 것을 총괄하는 의회였다. 중요한 국사는 모두 민회에 의해 결정되었다. 민회에서 임명하는 중요 인물 중에 장군이 있었다.

 

클레이스테네스의 개혁 이래 아테네에서는 10개 귀족 가문 출신의 장군 10명이 교대로 군 지휘관을 맡았는데(사실 그리스에서는 무장의 비용을 자비로 담당했으므로 귀족이 아니면 장군이 될 수도 없었다), 이제는 이들을 민회에서 매년 재임명하는 방식이 채택되었다. 페리클레스가 30년 동안 집권할 수 있었던 이유도 바로 장군으로서 매년 재선되었기 때문이다.

 

페리클레스는 늘어난 아테네의 부를 바탕으로 500인회를 비롯한 공직자들에게 처음으로 일정한 급료를 지불했다. 또한 시민 법정에서도 배심원 제도를 채택하고 배심원들에게는 수당을 지급했다. 오늘날에까지 이어지는 서구 사회의 배심원 제도는 바로 여기서 비롯된 것이다.

 

페르시아 전쟁 이후 아테네 민주주의가 가장 발달한 이 기간을 가리켜 페리클레스 시대라고 부른다. 비록 외국인과 노예, 여성에게까지 참정권을 부여하지는 않았으나(서구 사회에서 여성에게 참정권이 부여되는 것은 20세기의 일이다) 페리클레스 시대에는 직접민주주의가 가장 이상적으로 구현되었다페리클레스는 전사자들을 추모하는 연설에서 아테네의 민주주의에 대해 이렇게 자신감을 피력하고 있다. “우리의 정체(政體)는 이웃의 관례에 따르지 않고 남의 것을 모방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남들의 규범이 되고 있습니다. 그 명칭도, 정치적 책임도 소수에게 있지 않고 다수에 골고루 나뉘어 있기 때문에 민주주의라고 불리고 있습니다. 개인의 분규와 관련해서는 모든 사람이 법 앞에 평등하며, 이와 동시에 개인의 가치에 따라, 즉 각자가 얻은 성과에 기초하여 계급에 의거하지 않고 능력 본위로 공직자를 선출합니다.”. 그러나 페리클레스의 기본 정책인 반스파르타 노선은 다시 한 번 그리스를 전란의 소용돌이 속으로 밀어넣게 된다.

 

 

최고 시민 페리클레스 페리클레스(위쪽)는 좋은 가문 출신에다 군인으로서나 정치가로서나 모두 뛰어난 인물이었다. 그래서 30년 동안이나 아테네의 최고 시민으로서 권좌에 있을 수 있었다. 하지만 아테네의 시민들은 1인자의 장기 집권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 기피하고 싶은 인물의 이름을 적는 도편에 페리클레스의 이름이 적힌 경우도 있었다. 아래쪽 사진은 테미스토클레스와 그의 아버지 네오클레스의 이름이 적힌 도편이다.

 

 

인용

목차

한국사 / 동양사

최초로 맞붙은 동양서과 서양

최종 목표는 아테네

마라톤의 결전

최후의 승부

유럽 문명을 구한 아테네와 스파르타

전후의 새 질서

분쟁의 싹

공멸을 가져온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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