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 목표는 아테네
전쟁을 시작한 지 1년이 지났을 무렵, 페르시아는 소아시아의 해안 지대와 섬의 폴리스들을 모조리 점령했다. 페르시아 측에 협력하는 폴리스에는 지배 관계를 확실히 다지고, 말을 듣지 않는 폴리스는 잔인하게 불태워 파괴하는 식이었다. 결국 이오니아는 뭐하러 반기를 들었나 싶을 만큼 아무런 성과도 없이 쓴맛만 보고 다시 페르시아에 복속되었다【페르시아는 점령한 폴리스의 참주를 내쫓고 민주정을 지원했는데, 이는 민주정을 옹호하기 때문이 아니라 새로운 정복지에 왕정을 승인하지 않으려는 조치였다】.
그런데 반란을 너무도 손쉽게 제압하자 다리우스의 생각이 달라졌다. 마침 이오니아에 출병한 병력이 고스란히 남아 있으니 내친 김에 말썽 많은 그리스 본토의 폴리스들까지 평정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더욱이 그리스에는 장차 페르시아의 새로운 적수가 될 만한(따라서 ‘싹’을 제거해버려야 할) 세력이 떠오르고 있었다. 바로 아테네였다. 이오니아의 반란이 일어나기 직전 그리스와 이오니아의 폴리스들은 연합군을 편성해 페르시아 측에 붙은 소아시아의 사르디스(리디아의 수도)를 무참하게 파괴한 적이 있었다. 특히 그들이 사르디스의 키벨레 신전을 불태워 파괴한 일은 두고두고 문제가 되었다. 키벨레는 당시 소아시아 전역에서 섬기던 대모신(大母神, 신들의 어머니)이었던 것이다. 그 사건을 주도한 것이 아테네였다.
최종 목표가 아테네로 바뀌면서 이오니아 진압군은 그리스 원정군으로 바뀌었다. 기원전 492년 헬레스폰토스에 집결한 페르시아의 육군과 해군은 이제 그리스를 향해 진군하기 시작했다. 대군이 지나치는 길목에 있는 폴리스들은 무자비하게 파괴되었다. 육군이 마케도니아를 유린하는 동안 해군은 타소스 섬을 정복했다. 이제 그리스의 북부 지역은 송두리째 페르시아의 수중에 떨어졌다. 이대로 원정이 진행되었더라면 그리스는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클레이스테네스(Cleisthenes, 기원전 570년경~기원전 508년경)의 민주정치는 제대로 꽃을 피우기도 전에 동방의 전제정치에 짓밟혔을 테고, 찬란한 고대 그리스 문명은 역사에 남지 않았을 것이다【참주정치 시대에 아테네에서 추방된 귀족 클레이스테네스는 기원전 510년 참주정치가 무너지자 아테네로 돌아와 평민들의 지지를 등에 업고 개혁을 단행했다. 개혁의 골자는 전통 귀족들의 세력을 억누르기 위해 행정구역을 재편하고 아테네의 전 시민에게 평등한 참정권을 부여하는 것이었다. 구체적으로 보면, 입법 겸 행정 기관으로 500인회를 구성하고, 사법기관으로 시민 법정을 설치하며, 시민권을 가진 20세 이상의 성년 남자들로 민회를 구성해 정책의 최종 결정과 심의를 맡기고, 영향력 있는 10개 가문 출신의 장군 10명이 교대로 군을 지휘하는 방식으로 군제를 개편했는데, 이로써 그리스 민주정은 처음으로 제 골격을 갖추게 되었다. 또한 그는 참주정치의 부활을 막기 위해 도편추방(ostrakismos: 참주가 될 가능성이 있는 위험인물을 도기 조각에 적게 해 그 수가 6000개 이상이면 그 인물을 10년간 국외로 추방하는 제도)을 도입했다】.
풍전등화의 그리스를 구한 것은 하늘이었다. 타소스를 떠난 페르시아 해군이 그리스로 남하하려면 세 개의 갈퀴 같은 반도를 회항해야 했다. 그중 첫째 반도에 아토스 곳이 있었는데, 이 일대는 예로부터 풍랑이 심해 배가 난파하기 일쑤였다. 페르시아 해군이 이곳을 지날 즈음 때맞추어 맹렬한 북풍이 불어왔다. 이곳에서 페르시아는 함선 300척이 파괴되고 2만 명이 떼죽음을 당했다. 싸워보기도 전에 결정타를 입은 것이다. 더욱이 육로로 행군하던 육군마저 트라키아의 한 부족에게 한밤중에 기습을 당해 막심한 피해를 입었다.
하늘이 갓 태어난 그리스의 민주정을 보살핀 것일까? 어쨌든 잇단 악재에 페르시아군은 그리스 원정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불발로 끝난 이 원정은 페르시아와 아테네 양측에 중요한 메시지를 남겼다. 페르시아에는 아테네를 정벌하지 않으면 천하를 얻을 수 없다는 확신을 주었고, 아테네에는 페르시아에 대한 공포감과 아울러 페르시아를 극복하지 못하면 그리스의 앞날은 없다는 확신을 주었다. 이 두 가지 확신이 머잖아 충돌할 것은 필연이었다.
▲ 대륙 간의 전쟁 기원건 5세기에도 아시아와 유럽은 다른 대륙이라는 인식이 있었다. 그러므로 페르시아 전쟁은 말하가면 두 대륙 대표주자의 결전이었다. 1차건에서 쓴맛을 본 레르시아는 2. 3차전에서도 그리스의 도시국가들의 연합에 결국 무릎을 꿇었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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