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   2025/02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Archives
Today
Total
관리 메뉴

건빵이랑 놀자

종횡무진 서양사 - 6부, 1장 영토와 주권의 의미 본문

역사&절기/세계사

종횡무진 서양사 - 6부, 1장 영토와 주권의 의미

건방진방랑자 2022. 1. 2. 05:16
728x90
반응형

 6부 열매

 

 

중세적 질서가 완전히 사라진 다음에는 각개약진밖에 없다. 새로 탄생한 유럽 국가들은 영토와 주권의 의미를 새삼스럽게 각인한다.

 

프랑스와 영국을 선두로 각국은 한 뼘의 땅이라도 더 차지하기 위해 치열한 경쟁과 전쟁을 벌인다. 그러나 아직도 중세의 잔재를 버리지 못한 독일은 신성 로마 제국의 명패를 합스부르크 제국으로 바꾸어 달고 로마 가톨릭이 지배한 좋았던 옛날로 돌아가고자 애쓴다.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이라는 영예로운 별명을 얻었던 에스파냐는 불운하게도 합스부르크 제국의 본거지가 되면서 몰락의 길을 걷기 시작 한 반면, 영국은 활발한 시민혁명으로 가장 먼저 정치적 안정을 이루고 대외 진출에 나선다. 구체제의 상징이던 프랑스는 뒤늦게 시민혁명을 이루는데, 이 프랑스 혁명은 유럽 전역에 메가톤급 폭발력을 발산한다.

 

이것으로 서양 문명의 첫 번째 열매인 민족국가가 유럽의 새로운 질서를 담당할 주역으로 떠오른다.

 

 

 1장 영토와 주권의 의미

 

 

누더기 제국

 

 

거의 동시에 진행된 르네상스와 항로 개척, 종교개혁을 통해 서유럽 세계는 중세의 흔적을 걷어내고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는 출발선에 서게 되었다. 아직은 다가오지 않았지만, 그 새로운 시대란 곧 서유럽 각국이 근대적인 영토와 주권을 가진 국가로서 발돋움하면서 서로 국력을 키우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이게 되는 시대, 지금의 서양과 직접적으로 연관된 시대를 가리킨다. 그럼 그 이전의 국가들은 그렇지 않았던가?

 

중세의 국가들은 엄밀한 의미에서 영토 국가도, 주권국가도 아니었다. 영토는 있었지만 오늘날과 같이 국경선으로 꼼꼼히 구획된 개념의 영토가 아니라 봉건 영주의 지배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점() 개념의 영토였다이는 일찍부터 선() 개념의 영토 국가가 성립한 동양의 경우와 대조를 보인다. 중국은 대륙을 최초로 통일한 진() 제국 때부터 영토 개념이 분명했으며, 한반도의 경우에는 고려 중기 윤관(尹瓘)의 북방 정벌이 이루어진 때부터 분명한 영토 국가를 이룬다(이때도 중국의 한 지방이라는 의미가 강했지만 통일신라시절보다는 중국과의 일체감이 약했다). 물론 서양의 봉건 군주들이라고 해서 땅 욕심이 적었던 것은 아니다. 다만, 그네들은 동양처럼 강력한 중앙집권력이 없었기에 영토 국가의 성립이 늦었을 뿐이다. 영주의 세력에 따라 크고 작은 차이는 있었으나 선() 개념의 국경선은 없었다. 영토가 선으로 확정되지 않았으므로 주권도 불분명했다. 주권의 주인은 물론 봉건 영주였지만(‘주권sovereignty’이라는 말도 봉건 군주를 뜻하는 프랑스어 souverain에서 비롯되었다), 그 주권이 어디까지 미치는지가 확실치 않았다. 예를 들어 툴루즈 백국이나 작센 공국의 주권이 정확히 어느 곳, 어느 백성에게까지 미치는지는 툴루즈 백작과 작센 공작 자신도 알지 못했다. 고대부터 영토 국가의 면모를 가졌던 동양식 왕국과 달리, 서양의 중세 왕국은 기본적으로 도시국가의 체제였다. 서유럽에 수천 개의 도시가 있었다면 곧 수천 개의 왕국이 있었던 것이나 다름없다.

 

이렇게 극도로 분립적인 서유럽 세계가 그런대로 통합성을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교황과 교회의 덕분이었다. 세속의 영역은 무수히 나뉘어 있었어도 신성의 영역은 하나였고, 세속 군주들은 교황의 영적 지배(아울러 그에 따르는 어느 정도의 세속적 지배)를 나름대로 인정하고 있었다. 이렇게 보면 중세의 서유럽 세계는 한편으로는 수천 개의 나라로 분열되었다고 볼 수도 있지만, 다른 편으로는 각 봉건 군주가 내정의 자치권만 가진 채 외교권을 교황에게 맡겨두고 있는 하나의 거대한 제국이었다고도 볼 수 있다. 여기서 교황은 각국 간의 분쟁과 갈등을 해결하는 국제 질서의 조정자라는 역할을 맡았다(29쪽에서 말한 토르데시야스 조약 같은 경우가 그런 사례인데, 교황의 조정 기능은 교황의 인물됨과 무관하게 오로지 지위에서 나오는 기능이다).

 

따라서 종교개혁으로 교황권이 몰락한 것은 단순히 종교상의 문제만이 아니었다(그랬다면 종교개혁은 종교사에서만 다루어도 충분할 것이다). 그것은 중세라는 틀을 유지해온 국제 질서의 중심이 무너진 것이다. 이제 서유럽 각국은 스스로의 의지와 힘으로 새로운 국제 질서를 만들어야 했다. 그 과정이 20세기까지 지속되었으므로 중세 이후는 하나의 시대로 묶을 수 있다(나중에 보겠지만, 정확히 한정하면 2차 세계대전이 그 종착역이다. 전후 지금에 이르는 현대사는 서양의 입장에서 보면 500년 만에 새로운 국제 질서, 서양만이 아니라 전 세계를 아우르는 질서를 만들어가는 과정이다).

 

 

동아시아에는 중국이라는 국제 질서의 중심이 있었으므로 서양처럼 분권화되지 않았다. 제국이 있다면 국제 질서가 수직적으로 일사불란하게 편제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서양의 중세에도 제국이 없지는 않았다. 그것도 교황이 지배하는 영적인 제국이 아니라 현실의 제국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었다. 그게 바로 신성 로마 제국이 아닌가? 물론 이것이 신성하지도 않았고, ‘로마와도 무관했으며, ‘제국도 아니었음은 앞에서도 본 바 있다. 그러나 이 기묘한 제국이 제국의 명패를 되찾으려 하면서 제국도 원치 않은 새로운 국제 질서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15세기 중반 프리드리히 3세가 제위에 오르면서 합스부르크 가문은 황제 자리를 세습하게 된다. 그전까지 신성 로마 제국의 제위를 세습하던 가문은 작센과 잘리에르, 호엔슈타우펜 등 세 개가 있었지만, 합스부르크 가문은 그들과 질적으로 달랐다. 물론 유전자나 체질의 면에서 다르다는 게 아니라 시대적 배경에서 차이가 있다는 이야기다. 15세기 중반이라면 중세가 거의 해체되고 서유럽 각국이 새로운 개념의 국가를 형성해가던 와중이니까.

 

앞에서 본 것처럼(80쪽의 주) 프리드리히 3세는 통혼이라는 대단히 육탄적인 정책을 구사했는데, 당시 상황에서는 매우 적절하고도 효과적인 외교술이었다. 이름만 제국일 뿐 프랑스와 영국 같은 전통의 강국, 나아가 에스파냐 같은 후발 주자보다도 국력이 약한 신성 로마 제국(독일)이 일약 강국의 반열에 오르게 된 것은 바로 그 정책 덕분이다.

 

프리드리히 3세와 그 아들 막시밀리안 1세의 대를 이은 통혼 정책으로 합스부르크 가문은 다음 황제인 카를 5세 때에 이르러 에스파냐에서 헝가리에 이르는 대제국을 이루게 된다. 그러나 동서로 2000킬로미터가 넘는 이 지역을 전부 통솔한 것은 아니었을 뿐 아니라 제국에 걸맞은 중앙집권력도 부족했다. 그러므로 합스부르크 제국의 실체는 여기저기 천 조각들을 기워 만든 누더기 제국이나 다름없었다(‘통혼으로 만든 제국의 한계다). 그래도 누더기라면 그중에 좋은 조각도 있을 터이다. 그곳은 어딜까? 단연 에스파냐다. 당시 에스파냐는 신대륙에서 유입된 막대한 양의 금과 은을 밑천 삼아 서유럽 세계의 새로운 경제 중심지로 떠오르고 있었다. 카를 5세가 신성 로마 제국의 전통적 중심지인 오스트리아를 버리고 에스파냐에 오랫동안 머문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지역에서 국가 13~15세기 무렵의 서유럽이다. 당시에는 거의 개별적인 나라를 이루었던 지형들이 오늘날에는 대부분 지역이나 도시 이름으로 바뀌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주의할 것은, 아직까지는 선적 개념의 영토 국가가 확실히 자리 잡지 못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 시기부터는 서서히 주권과 영토의 개념을 각인한 지배 세력들이 출현하고 그에 따라 오늘날과 같은 국경선국가의 모습이 등장하게 된다.

 

 

그러나 합스부르크 제국에는 적이 많았다. 우선 카를 5세와 제위를 놓고 싸운 프랑스가 전통의 적수였고, 종교개혁으로 생겨난 신교 영방군주들도 만만치 않았으며, 헝가리 부근까지 손에 넣고 오스트리아를 위협하고 있는 당대 세계 최대의 강국인 튀르크의 오스만 제국은 감당하기 어려운 강적이었다. 전통적으로 신성 로마 제국의 지원 세력이던 독일 영방군주들마저 신교와 구교로 분열된 상황이었으므로, 합스부르크 제국은 오로지 에스파냐의 경제력만을 바탕으로 그 세 적과 싸워야 했다.

 

결과는 비참했다. 1529년 빈을 포위한 튀르크군은 간신히 물리쳤으나서양의 역사를 통틀어 보면 어려운 처지에서도 용케, 혹은 운 좋게 동양의 침략을 막아낸 경우가 자주 있었다. 기원전 5세기에 객관적인 전력에서 절대 열세인 그리스가 페르시아 전쟁에서 승리한 것, 8세기 초반 비잔티움 제국이 유럽의 동쪽 끝에서 이슬람을 막아내고 프랑크가 서쪽 끝에서 방어한 것이 용한 경우라면, 5세기에 로마를 침입한 훈족이 교황 레오 1세의 설득으로 철수한 것이라든가 13세기 몽골군이 본국 사정으로 스스로 물러난 것은 운이 좋았던 경우다. 합스부르크 제국이 당대 최강인 오스만튀르크의 침략을 빈에서 물리친 것도 그런 예에 속한다. 그 전쟁들 가운데 어느 한 전쟁에서라도 패배했더라면 오늘날의 서양은 없었을지 모른다1538년 지중해에서는 튀르크 함대에 패배했고,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화의에서는 루터파 군주들에게 양보해야 했다. 게다가 북이탈리아에 대한 영향권을 놓고 벌인 프랑스와의 다툼에서도 제국은 승리하지 못했다. 1559년 카토-캉브레지 조약에서 북이탈리아는 가까스로 유지했으나 라인 강변의 요지들을 송두리째 프랑스에 내준 것이다(이 문제는 알자스-로렌 분쟁으로 이어져 19세기 말까지 두고두고 프랑스 - 독일 간의 대립을 야기한다).

 

카를 5세는 아우크스부르크 화의 이듬해인 1556년에 동생인 페르디난트 1세에게 제위를 물려주고, 에스파냐의 왕위는 아들인 펠리페 2(Felipe II, 1527~98, 재위 1556~98)에게 물려준 다음 정계에서 은퇴해버렸다. 이로써 한동안 엉성하게나마 세계 제국을 이루었던 합스부르크 제국은 사라지고, 오스트리아와 에스파냐는 다시 원래의 독립국으로 분리되었다. 서유럽 최대의 부국 에스파냐의 왕이 된 펠리페 2세는 여러 대째 지속된 합스부르크 가문의 새로운 전통, 즉 통혼 외교를 계속 전개하면서 근대로 향하는 서유럽 세계의 패자를 꿈꾼다. 그러나 이미 낡은 수법에 의존한 데서 짐작할 수 있듯이, 그는 자신의 나라 에스파냐와 더불어 유럽 역사의 무대에서 끝내 주연의 문턱에 오르지 못하고 조연에 그칠 운명이었다.

 

 

영욕의 펠리페 카를 5세의 아들로 에스파냐 왕위에 오른 펠리페 2세의 초상이다. 40년이 넘는 재위 기간 동안 그는 에스파냐를 일약 유럽의 강국으로 성장시켰으나, 그것은 그의 치적이라기보다 신대륙에서 유입된 경제적 부에 힘입은 바가 컸다. 결국 그의 만년에 에스파냐는 무적함대를 잃으며 몰락하기 시작한다.

 

 

 세계 진출의 계승자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왕서방이 챙긴다.”라고 했던가? 항로 개척을 통해 전 세계로 향하는 문들을 모두 열어놓은 에스파냐가 곰이라면 그것을 바탕으로 네덜란드와 영국은 세계 지배에 나서서 알짜 수익을 거두었다. 원래 일하는 자와 누리는 자가 늘 달랐던 게 인류 역사 아닌가?

 

아무리 가문의 내력이라지만 펠리페 2세의 통혼은 정도를 지나친 감이 있었다. 그는 포르투갈 왕녀, 영국 여왕, 프랑스 왕녀, 합스부르크 왕녀와 네 차례나 결혼을 했는데, 이것이 모두 성공했더라면 그의 대에서 합스부르크 가문이 다시 부활하는 것은 물론 서유럽 세계는 16세기에 왕실들의 혼맥을 통해 정치적 통합을 이루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펠리페가 통혼의 결실을 거둔 것은 포르투갈을 상속받아 합병한 것뿐이었다. 특히 1554년에 왕비로 맞아들인 영국의 메리 1(Mary , 1516~1558)는 아버지 카를 5세의 이모인 캐서린의 딸이었고, 넷째 아내인 합스부르크 왕녀 안나는 카를 5세의 외손녀였으니, 펠리페는 항렬의 위와 아래를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통혼했던 셈이다왕실의 근친혼은 동서고금에서 흔히 볼 수 있었다. 우리 역사의 경우 유명한 사례로는 김유신과 김춘추가 있다. 김춘추는 젊은 시절 김유신의 누이동생과 결혼했는데, 나중에 김유신 덕분에 왕위에 오르자 그 보답으로 자기 딸을 김유신에게 시집보낸다. 두 사람은 처남-매부이자 장인-사위가 된 것이다. 또한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敬順王)은 고려 태조 왕건에게 사촌누이를 주고 왕건은 그 대신 자기 딸을 경순왕에게 보냈는데, 이때도 처남-매부이자 장인-사위 관계가 성립된다. 유학을 국가 이념으로 삼은 조선 사회부터 왕실의 근친혼은 사라지지만, 그 때문에 왕실의 외척 세력이 힘을 얻게 되었고, 이들이 왕권을 위협하면서 사대부 정치의 폐해를 조장했다. 그 절정이 19세기 초·중반의 세도정치(勢道政治).

 

1571년 레판토 해전에서 오스만 제국에 설욕한 시기가 펠리페와 에스파냐의 최전성기였다. 이때 에스파냐는 대서양 항로를 독점한 것은 물론 지중해 무역에서도 패자가 되었다. 펠리페가 특별히 엄청난 공과 돈을 들여 육성한 당시의 에스파냐 함대에 영국인들이 무적함대라는 이름을 붙인 것도 무리가 아니다. 그러나 절정의 기쁨을 맛보기가 무섭게 에스파냐는 쇠퇴기로 접어든다. 영국은 1588년 노예무역과 약탈을 일삼던 해적 두목 출신 드레이크(Sir Francis Drake, 1543 ~1596)가 에스파냐 무적함대를 무찔러 자신들이 지은 이름을 무색케 했다(무적함대를 긴 함대는 어떤 함대라고 불러야 할까?). 이 사건을 계기로 에스파냐는 쇠퇴의 늪에 빠져들지만 실상 에스파냐의 몰락을 부른 것은 그것만이 아니다.

 

에스파냐에서는 이슬람에 대한 전통적인 적대감으로 가톨릭이 득세한 데다 교황과 결탁한 합스부르크 왕가의 지배로 종교적 보수화가 극에 달했다. 따라서 서유럽 각국이 새로운 국민국가를 형성해가는 와중에도 에스파냐에서는 제대로 된 관료 집단이 성장하지 못했으며, 서유럽 과거의 봉건 왕조보다도 뒤진 국가 체제를 이루고 있었다. 그나마 에스파냐를 버티게 해준 것은 신대륙에서 오는 막대한 이익이었는데, 이마저도 왕실의 사치와 방탕, 프랑스와의 지루한 다툼, 튀르크와의 전쟁 등으로 인해 바닥날 지경에 이르렀다. 국가 재정이 부실해지자 신대륙에서 오는 금과 은은 점차 에스파냐에서 사용되지 못하고 다른 나라들로 유출되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플랑드르의 상인들은 에스파냐의 지배를 벗어나 독립을 이루고 네덜란드라는 새로운 나라를 건설했다. 이로써 에스파냐는 서유럽의 전진기지이자 최대의 부유한 영토를 잃고 말았다.

 

 

사태를 더욱 악화시킨 것은 영국과 치른 전쟁이었다. 시대착오적인 국가 운영, 종교 정책, 외교 정책(통혼)을 무기로 삼은 펠리페 2세는 영국에서 자신의 아내이자 독실한 가톨릭교도인 메리 1세가 죽고 엘리자베스 1(헨리 8세와 앤 불린의 딸)가 즉위하면서 영국 국교회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선회하자 즉각 응징을 계획했다. 하지만 그 결과는 무적함대의 참패였다. 이제 곰을 부리는 자의 정체가 서서히 드러나고 있었다. 에스파냐에서 독립한 네덜란드와 무적함대를 격침시킨 영국이 바로 곰의 주인들이었다.

 

사실 펠리페 2세가 네덜란드를 계속 유지하려면 우선 종교 정책을 변화시켜야 했다. 에스파냐는 본국에서 가톨릭을 유지하더라도 최소한 네덜란드에서만큼은 유연성을 보여야 했다. 중세 말기에 상인들이 지배하는 자치도시체로 출발한 플랑드르적 전통에다 루터와 칼뱅의 종교개혁이 가장 큰 결실을 거둔 지역이 바로 네덜란드가 아니던가? 펠리페의 종교 탄압은 네덜란드의 상인들은 물론 전통적인 귀족들마저도 적으로 만들어버린 악수였다.

 

가톨릭 귀족으로 성장했고 젊은 시절 에스파냐 궁정에서 카를 5세와 펠리페 2세를 위해 일한 적이 있는 네덜란드 총독 빌렘(Willem, 1533~1584)그의 가문은 오라녜(Oranje) 공국의 지배 가문이었으므로 그를 흔히 오라녜 공 빌렘이라고 부른다. Oranje를 영어식으로 읽으면 오렌지가 되기 때문에 영어명은 오렌지 공 윌리엄이다. 과일 오렌지(orange)와 철자가 같은데, 가문 명칭과 과일 이름이 어떤 관계인지는 확실치 않다. 오라녜 가문에 관한 기록은 12세기부터 전해지지만 과일 오렌지는 15세기 말 바스쿠 다 가마가 인도에서 처음 유럽에 들여온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현재 네덜란드 축구 대표팀이 오렌지색 유니폼에 오렌지 군단이라는 별명을 가진 것에서 보듯이 오렌지와 네덜란드의 각별한 관계를 보면 오라녜 가문과 과일 오렌지는 모종의 관계가 있을 것이다침묵공이라는 별명답게 웬만하면 참으려 했다. 그러나 펠리페는 총애하는 측근을 총독으로 앉혔으면서도 믿지 못하고 계속 다른 측근 인사들을 네덜란드에 보내 간섭했다. 더구나 네덜란드에 온 에스파냐인들은 토착 귀족들과 자주 마찰을 빚었다. 여기에 결정적으로 빌렘의 꼭지를 돌게 만든 것은 펠리페의 신교 박해였다.

 

1567년 펠리페는 군대를 파견해 네덜란드의 신교도들을 철저히 색출하기 시작했다. 이를 피해 신교도들이 국외로 도망가는 일이 잦아지자 마침내 빌렘은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게 되었다. 국민이 국가를 버린다면 국가가 존립할 수 없지 않은가?

 

일단 망명자들을 따라 국외로 망명한 빌렘은 신교도들로 군대를 편성해 네덜란드 탈환 작전에 나섰다. 조국을 수복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는데, 쉬운 일은 아니었다. 원래부터 신교도가 우세한 홀란트 주는 쉽게 점령했으나 남부의 가톨릭 주들이 반발하고 나섰다. 어쩔 수 없이 빌렘은 신교도들의 북부 7주만을 규합해 위트레흐트 동맹을 결성했다. 그래도 국가 수립의 대세에는 지장이 없었다. 1581년 동맹은 독립을 선언하고 네덜란드 연방 공화국을 이루었다(빌렘은 1584년 가톨릭교도에게 암살되었으나 그의 후손들은 19세기에 네덜란드 왕가를 이루어 오늘날에까지 이르고 있다).

 

플랑드르 시절부터 모직물 공업과 해외 무역에는 일가견이 있었던 네덜란드는 독립을 이루자마자 곧바로 해외 진출에 나섰다. 때는 바야흐로 과거에 플랑드르 상인들이 지배했던 지중해 무역 정도가 아니라 에스파냐가 개척해놓은 항로를 통해 전 세계가 하나의 무역권으로 변모해가는 시대였다. 지중해 중개무역을 통해 갈고 닦은 항해술과 새로 개척된 대서양 항로가 결합되면서 네덜란드는 보잘것없는 영토의 규모에 어울리지 않게 에스파냐에 뒤이어 일약 전 세계를 대상으로 하는 해외 무역의 중심지로 발돋움했다.

 

 

에스파냐의 젖소 독일은 교황청의 콧소였지만 네덜란드는 에스파냐의 젖소였다. 그림은 당시의 풍자화인데, 소는 네덜란드를 뜻하며, 소를 탄 사람은 필리려 2세가 젖을 짜기 위해 네덜란드에 파견한 알바 공작이다. 오른에는 네덜란드 총독 빌령과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1세가 서 있다.

 

 

 영토 국가의 선두 주자

 

 

중세의 해체는 변방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서쪽 변방(이베리아)에서 대항해시대가 열리고, 남쪽 변방(이탈리아)에서 르네상스가 빛나고, 동쪽 변방(독일)에서 종교개혁의 파도가 휩쓰는 동안, 서유럽의 전통적 중심지인 프랑스는 상대적으로 조용했다. 물론 바깥에서 볼 때 그랬다는 이야기다. 원래 변방에서는 변화를 추구하지만 중심에서는 안정을 추구하게 마련이다. 사방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새로운 질서를 모색하는 가운데서도 프랑스에서는 의연히 중세의 절정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중세의 절정이라면 분권화의 완성? 그렇지는 않다. 분권화가 중세의 커다란 특징인 것은 분명하지만, 유럽 전체를 놓고 볼 때 그런 것이고, 각 지역별로는 중앙집권화를 향한 완만한 흐름이 이어지고 있었다. 중세의 분권화는 원시 사회에서와 같은 단순한 분권화가 아니다. 아무리 봉건 영주들이 독립국처럼 행세한다 하더라도 어차피 지역적으로 서열은 지어지게 마련이며, 이 서열은 중심을 지향할 수밖에 없다. 다만 중세에 그런 변화가 서서히 전개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교황이라는 가상의중앙집권체가 존재했기 때문이다. 아비뇽 교황청 시대 이후 프랑스는 그 가상을 일찌감치 떨쳐버렸으니, 그런 점에서 보면 오히려 프랑스는 가장 먼저 종교개혁을 이룬 나라인지도 모른다.

 

15세기 중반 백년전쟁이 끝나면서 프랑스는 프랑스 내의 영국 왕실 영토를 완전히 없애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아직도 프랑스에는 영토 문제가 남아 있었고, 서유럽의 다른 지역들과는 달리 그 문제를 가장 시급하게 여겼다. 서유럽의 중심답게 프랑스는 가장 일찍 영토 국가의 길로 나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세계사적으로는 그 시대에 다른 데서 벌어진 사건들, 즉 항로 개척과 르네상스, 종교개혁이 더 중요하겠지만, 그 역사적 흐름을 주도한 나라들보다 프랑스가 더 전형적인 서양의 역사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프랑스는 맨 먼저 근대국가의 체제로 향했기 때문이다(영국도 비슷한 행보를 보였지만 영국의 경우 체제상의 내적 요인보다 섬이라는 지리적 요인이 컸다).

 

백년전쟁은 프랑스 서부의 영토를 말끔하게 구획 정리해주었다. 그럼 이제 남은 것은 동부다. 동부의 영토 문제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북부에서는 부르고뉴 공국과의 문제(1445쪽 주 참조), 중부와 남부에서는 신성 로마 제국 및 북부 이탈리아 자치도시들과의 문제다길게 보면 이 무렵 프랑스의 영토 문제는 600년 전 프랑크 왕국이 분열될 때 생겨난 문제의 최종 마무리에 해당한다. 9세기 베르됭 조약에서 중부 프랑크를 모태로 출발한 프랑스는 백년전쟁으로 옛 서프랑크 영토를 완전히 손에 넣었고(그때까지 수백 년 동안 이 지역에는 앙주, 툴루즈 등의 봉건 왕조들이 지배했으므로 엄밀히 말해 프랑스의 역사가 아니었다), 이제는 동프랑크의 영토 문제가 남은 것이다. 물론 좋게 말해서 문제이고 실은 분쟁이다.

 

샤를 7세의 아들로 프랑스 왕위를 계승한 루이 11(1423~1483, 재위 1461~1483)는 먼저 부르고뉴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그러나 플랑드르 르네상스를 지원해 후대의 역사가들에게서 유럽의 대공이라는 영예로운 별명으로 불리는 부르고뉴의 영주 필리프 2세는 발루아 가문의 새까만 후배인 루이 11세가 걸어오는 시비에 신경 쓰지 않았다. 필리프 2세는 문화와 학문을 애호하는 군주였는데, 대개 이런 군주는 정치적으로 무관심하거나 무능하게 마련이다. 하지만 그의 아들 샤를은 달랐다. 1467년 아버지의 뒤를 이은 샤를은 프랑스 왕가의 영향력을 벗어나 부르고뉴를 독립 왕국으로 발전시키려는 움직임을 보였다당시 부르고뉴 가문은 서유럽 전체에서 프랑스 왕가인 발루아 가문 다음으로 세력이 컸다. 부르고뉴는 5세기에 독일 중부에 있었던 게르만 왕국인 부르군트에서 유래했고, 9세기 메르센 조약에서 맏아들인 로테르의 영지로 분봉되었을 만큼 전통과 연혁이 오랜 지역이다. 카페 왕조 시절부터 부르고뉴는 프랑스 왕실과 밀접한 연관을 맺었으며, 백년전쟁이 한창이던 14세기 중반에 영주의 대가 끊기자 다시 발루아 혈통을 영주로 삼았다. 특히 필리프 2세 때 부르고뉴는 네덜란드와 룩셈부르크까지 지배했는데, 아직 자국 내의 영국령도 차지하지 못한 프랑스에 결코 뒤지지 않는 국력을 자랑했다.

 

 

부르고뉴의 파티 프랑스의 압박을 받자 부르고뉴는 자연히 합스부르크 쪽으로 기울었다. 그림은 1473년 부르고뉴와 합스부르크의 왕가가 모여 파티를 벌이는 장면이다. 그러나 이 파티가 열리고 얼마 뒤 부르고뉴는 프랑스와 합스부르크로 분할, 통합되면서 역사 지도에서 지워지고 말았다(오늘날 부르고뉴에 해당하는 나라는 벨기에다).

 

 

샤를의 시도가 성공했더라면 오늘날 벨기에는 부르고뉴로 불렸을지도 모른다. 19세기에 부르고뉴 땅(그리고 네덜란드 연방 공화국에 반대한 남부의 가톨릭 주들)에는 벨기에라는 독립국이 세워지니까. 하지만 루이 11세는 에스파냐와 영국, 독일의 영방군주들과 결탁해 집요하게 샤를을 압박했다. 마침내 1477년 샤를이 전사함으로써 부르고뉴의 독립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샤를의 딸 마리아는 자신을 며느리로 삼으려는 루이 11세의 압력을 거부하고 합스부르크의 막시밀리안 1세를 선택했지만 국제적 긴장 관계 속에서 선장을 잃은 부르고뉴호는 온전할 수 없었다. 결국 부르고뉴는 둘로 나뉘어 각각 프랑스와 합스부르크 제국의 영토가 되었다(바꾸어 말하면 부르고뉴는 완전히 해체되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이제 프랑스의 영토 문제는 북이탈리아에 대한 지배권을 놓고 신성 로마 제국의 합스부르크와 한판 승부를 벌이는 것만 남았다. 당시 프랑스 왕인 프랑수아 1세는 특히 적극적으로 나왔다. 앞서 보았듯이 그가 신성 로마 제국의 제위를 놓고 카를 5세와 겨룬 것도 실은 북이탈리아의 영토 문제가 원인이었다. 황제 선거에서 패배한 뒤 그는 힘으로 역전을 이루기 위해 이탈리아의 파비아에서 합스부르크와 맞붙었으나 여기서도 패하고 그 자신은 포로로 잡히는 치욕까지 겪었다. 결국 이 문제는 그가 죽고 나서 1559년 카토-캉브레지 조약으로 해결되었다. 그런 점에서 이 조약은 9세기 베르됭 조약이 남긴 숙제를 600년만에 해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프랑수아가 이탈리아에 집착한 이유는 일단 영토 문제가 컸지만 그가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학문과 예술에 심취한 탓도 있었다. 그는 당시 프랑스 군주로서는 드물게 르네상스의 도입에 적극적이었으며, 이탈리아 학자들을 궁정에 초청하기도 했다그 일환으로 프랑수아는 1546년에 루브르 궁전을 짓기 시작했다. 이 궁전은 나중에 계속 증축되었고 17세기부터 미술품이 소장되지만 건축 당시부터 그렇게 사용할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프랑수아는 루브르를 짓기 30년 전인 1516년에 예순네 살의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프랑스로 초청했고, 그가 세상을 떠난 뒤에는 그의 걸작 모나리자를 사들였다. 현재 이 작품은 루브르에 소장되어 있다. 특히 오늘날 자국어에 유달리 자부심을 가지는 프랑스 국민들은 프랑수아에게 감사해야 할 것이다. 그는 라틴어 대신 프랑스어를 공용어로 사용하도록 만들었으니까.

 

그러나 호방한 무인 기질과 섬세한 문인 기질을 함께 갖춘 프랑수아도 신교에 대해서만큼은 용납하지 않았다. 적수인 합스부르크 가문이 로마 교황청을 지지했으니 그로서는 신교를 지원할 법도 한데, 전혀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전통적으로 프랑스가 신성 로마 제국보다 더 로마 가톨릭의 세속적 하수인과 같은 역할을 충실히 담당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만약 프랑수아가 종교개혁의 바람을 받아들이고 합스부르크와 대결했더라면 더 승산이 크지 않았을까? 어차피 프랑스는 곧이어 엄청난 종교전쟁의 회오리에 휘말리게 되니 말이다.

 

 

프랑스의 르네상스 프랑스는 북이탈리아나 플랑드르에 비해 르네상스가 크게 발달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프랑수아 1세 때는 프랑스 르네상스의 전성기였다. 사진은 그의 시대에 르네상스 양식으로 건축된 퐁텐블로 궁전이다. 이후 이 궁전은 루이 14세가 낭트 칙령을 철폐하고 19세기 초 나폴레옹이 폐위되는 등 굵직한 역사적 사건들의 무대가 된다.

 

 

 종교전쟁의 개막

 

 

프랑수아 1세가 신교를 탄압한 것은 가뜩이나 어지러운 서유럽의 종교적 지형을 더욱 큰 혼란에 빠뜨렸다. 그의 아들 앙리 2(Henri , 1519~1559, 재위 1547~1559)는 모든 면에서 아버지의 유지를 충실히 받들었는데, 특히 신교의 탄압에서는 한술 더 떴다. 사실 그가 카토-캉브레지 조약을 맺어 아버지가 남긴 숙제를 해결하고 합스부르크와 타협한 데는 종교적인 이유가 컸다. 스위스에서 칼뱅교도들이 대거 프랑스로 이주하자 그는 대외 전쟁보다 대내의 종교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먼저라고 판단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조약 체결을 기념하는 마상 경기에서 그만 근위대장이 잘못 던진 창을 맞고 마흔 살의 한창 나이에 죽었다. 그는 자신의 신교 탄압이 복잡한 종교전쟁으로 이어질 줄은 몰랐을 테고, 자신의 아내가 거기에 깊숙이 관여하게 될 줄은 더더욱 몰랐을 것이다.

 

일찍이 프랑수아는 이탈리아에서 합스부르크와 전쟁을 벌일 무렵 합스부르크의 전매특허인 통혼 전략을 구사한 적이 있었다. 1533년 아들(앙리 2)을 동갑내기인 카트린 드 메디시스(Catherine de Medicis, 1519~1589)라는 이탈리아 처녀와 결혼시킨 것이다. 프랑스식으로 읽어 메디시스지만 이탈리아식으로 읽으면 그녀의 성은 메디치가 된다. 카트린은 바로 르네상스를 이끈 피렌체의 지배자 로렌초 메디치의 증손녀였다.

 

정략결혼이었지만 부부의 의는 나쁘지 않았던지, 앙리 2세와 카트린은 모두 열 명의 자식을 낳았다. 자식들 가운데 세 명의 프랑스 왕들이 연속해서 나왔고 다른 나라의 왕비로 시집보낸 딸들도 두 명이나 되었으니, 카트린으로서는 남편복은 없었어도 자식복은 있었던 셈이다. 앙리 2세가 변사하는 바람에 열여섯 살의 어린 아들 프랑수아 2세가 왕위를 이었지만 병약한 탓으로 2년도 못 가서 죽고, 1560년 그의 동생인 샤를 9세가 열 살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다른 때 같으면 몰라도 한창 왕권이 뻗어나고 있는 상황에서, 게다가 서유럽의 국제 정세가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는 상황에서 어린 왕이 즉위했다는 것은 프랑스에 치명적일 수 있었다. 그래서 카트린은 직접 섭정을 맡기로 했다.

 

이탈리아의 명문 출신답게 카트린은 정치적 자질과 수완이 뛰어난 여성이었으나, 외국인이라는 제약 때문에 프랑스 귀족들을 주무르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먼저 지지 세력을 규합하기로 결심했는데, 그 대상이 바로 가톨릭 귀족들이었다. 특히 프랑수아 1세의 비호를 받아 단기간에 명문 세가로 성장한 기즈(Guise) 가문이 그녀의 가장 굳건한 동맹자가 되었다. 더구나 기즈 가문은 프랑수아 2세의 처가였으니 카트린에게는 든든한 사돈이기도 했다.

 

 

당시 프랑스에는 남부를 중심으로 칼뱅교도들이 널리 퍼져 있었다. 프랑스 남부라면 바로 13세기에 이단으로 몰린 알비파의 고장(434~435쪽 참조)이었으므로 전통적으로 로마 가톨릭에 반대하는 분위기가 강한 곳이었다. 칼뱅파는 과거 알비파의 교세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상인과 수공업자 등 신흥 계층만이 아니라 귀족도 많았으며 몇몇 대영주들 중에도 신교도로 개종한 사람들이 있었다. 이렇게 칼뱅주의의 새로운 성지가 된 남프랑스에서는 신교도를 가리키는 새로운 이름으로 위그노(Huguenot)라는 말이 생겨났다(위그노란 동맹이라는 뜻의 독일어 Eidgenossen에서 파생된 말로 알려져 있다). 빠른 속도로 성장한 위그노는 금세 정치 세력화하면서 국가 안의 국가라고 불릴 만큼 강력해졌다. 이미 위그노는 종교적 일파만을 가리키는 제한적인 의미를 벗어나 새로운 정치적 대안을 뜻하는 대명사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종교의 분열이 정치적 분열로 이어지고 양측이 타협할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면 그다음은 전쟁밖에 없다. 그렇게 해서 터진 전쟁이 프랑스 최초의 종교전쟁인 위그노 전쟁(1562~1598)이다위그노 전쟁은 기본적으로 종교전쟁이므로 구교와 신교의 대립이 가장 큰 전선을 이루었다. 그러나 위그노 자체가 정치 세력인 데다 위그노를 둘러싸고 프랑스의 왕과 귀족들이 개입한 탓에 위그노 전쟁은 전면적인 내전이 되었고, 나아가 국제적인 세력들까지 편을 갈라 간섭했으므로 국제전의 성격도 가졌다(당시 프랑스의 정치는 서유럽 모든 나라의 관심 대상이었다). 따라서 위그노 전쟁은 과거의 종교전쟁, 이를테면 그 얼마 전에 독일에서 있었던 슈말칼덴 전쟁과는 비교할 수 없는 규모와 영향력을 가진 사건이었다.

 

사실 카트린은 자신도 가톨릭교도였고 가톨릭 세력의 지원도 받고 있었으나 중립적인 입장에 가까웠다. 섭정을 맡고 있는 그녀는 우선 왕권을 확립하고 국내 정치의 안정을 꾀하는 게 급선무이고 종교 문제는 그다음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그녀와 연대하고 있는 기즈 공작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광신도에 가까운 가톨릭교도인 데다 정치적 야심이 가득한 인물이었다. 결국 위그노 전쟁의 방아쇠를 당긴 것도 그였다.

 

1562년 기즈 공작의 명령으로 프랑스 정부군이 창고에서 예배를 올리고 있던 위그노들을 기습 공격하면서 모두 8차에 걸친 위그노 전쟁이 시작되었다. 애초에 위그노 측은 가톨릭 측과 전쟁을 벌일 마음이 없었다. 그들은 비록 정치 세력을 이루고 있었으나 정부에 대해 종교적 관용 이외에 별다른 요구 사항이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3차전까지 치른 뒤 양측은 평화 협상을 벌여 어렵지 않게 합의를 이루었다. 이것으로 전쟁은 끝나는가 싶었다. 그러나 불씨가 꺼지지 않았는데 끝나는 전쟁은 없다. 위그노는 여전히 정부 측에 종교의 자유를 요구했고, 정부는 여전히 그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모순은 해소되지 않고 높아만 갔다.

 

결국 1차전에서 기습으로 재미를 본 기즈 공작이 또 선수를 쳤다. 게다가 이때부터는 카트린까지 적극 가담했다. 그들은 함께 위그노를 근절하기 위한 치밀한 비밀공작을 세웠다. 거사일은 1572824일 성 바르톨로메우의 축일로 정해졌다. 때마침 콜리니(그는 앙리 2세의 두터운 신임을 받은 제독으로서 에스파냐 함대를 물리친 전과로 프랑스 국민의 존경도 받은 인물이었다)를 비롯한 위그노의 주요 지도자들은 나바르의 왕인 앙리의 결혼식을 맞아 일주일 전부터 파리에 머물고 있었다. 가톨릭 측의 기습 공격으로 축일이 저물기까지 불과 한나절 동안 파리에서만 2000여 명의 위그노가 학살되었고, 지방에서도 수천 명의 위그노가 무참히 살해되었다. 독일인 용병의 손에 살해된 콜리니의 시신은 창문 밖으로 내던져져 거리에 나뒹굴었다. 이것이 역사에 성 바르톨로메우의 대학살로 알려진 참극이다. 이 터무니없는 학살극은 9월까지 이어지면서 2만 명의 목숨을 더 거두어갔다.

 

 

당연히 평화 무드는 깨졌다. 격분한 위그노는 전국에서 들고 일어났다. 이에 대해 가톨릭의 총사령관 기즈 공작은 과격파를 중심으로 가톨릭동맹을 결성하고 한 치의 물러섬 없이 맞섰다. 그러나 이 무대의 실제 주인공은 그가 아니라 카트린이었다. 기즈 공작은 해묵은 십자군과 성전을 부르짖었으나 그녀의 생각은 달랐다. 토끼를 잡았으니 이제 사냥개는 필요가 없다. 더욱이 위그노는 기즈를 처형하라고 외쳐대고 있지 않은가?

 

카트린은 셋째 아들 앙리 3세를 사주해 기즈 공작을 암살하라는 지령을 내렸다샤를 9세의 동생 앙리 3세가 왕위를 계승한 데는 사연이 있다. 샤를 9세는 성년이 되었으나 어머니는 권력을 아들에게 넘기려 하지 않았다. 어머니가 섭정이었어도 프랑스의 왕은 그였으므로 샤를은 바르톨로 메우 대학살이 일어난 것에 큰 충격을 받았다. 결국 그는 1574년 양심의 가책에 시달리다가 죽었다. 그러나 이 발표의 이면에는 숨겨진 사실이 있다. 원래 그는 1570년부터 위그노의 지도자 콜리니와 접촉하여 사태를 수습하고자 노력했다. 이 사실을 안 카트린은 아들을 제거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녀는 둘째 아들을 자기 손으로 죽였다는 슬픔보다도 셋째 아들 앙리 3세가 충실한 개노릇을 하는 것에 더 만족했을 것이다. 대학살의 표면상의 주범은 1588년 암살로 최후를 맞았다. 그런데 사냥개를 잡았는데도 사태는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 특히 기즈 공작처럼 가마솥에 들어갈 운명에 처한 다른 사냥개들은 그냥 앉아서 죽을 수만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왕을 암살하려는 엄청난 계획을 꾸미고, 그 이듬해 드디어 거사에 성공했다. 공교롭게도 같은 해에 풍운의 여걸 카트린 드 메디시스가 사망했다.

 

악명 높은 지배 세력이 일거에 무너졌으니 새 왕조가 들어설 절호의 기회다. 후사가 없는 앙리 3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앙리 4(Henri IV, 1553~1610, 재위 1589~1610)는 바로 바르톨로메우의 비극으로 결혼식을 망쳐버린 나바르 왕 앙리였다. 그는 생루이의 후손으로 부르봉 Bourbon 가문이었으므로, 오랫동안 프랑스 왕권을 이어온 발루아 왕조가 끝나고 이때부터 부르봉 왕조로 바뀌었다.

 

어머니부터 철저한 위그노였고 그 자신도 콜리니를 아버지처럼 존경한 앙리 4세였으니, 이제 종교전쟁의 승자는 결정된 셈이었다. 어차피 그가 아니었다 해도 사태의 수습책은 오직 하나, 신앙의 자유를 인정하는 것밖에는 없었다. 다만 그는 가톨릭 측의 거부감을 고려해 신앙의 자유를 프랑스 내의 일정한 지역에만 국한하기로 했다(심지어 그는 1593년 종교 화해의 손짓으로써 가톨릭으로 개종하기도 했다). 이 절충안이 1598년의 낭트칙령이다. 이것으로 36년간을 끌어오던 위그노 전쟁은 마침내 끝이 났다위그노 전쟁에서 흥미로운 사실 하나는 영국이 위그노를 지지했다는 점이다. 이는 당시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가 영국 국교회를 지원하면서 가톨릭과 사이가 멀어졌기 때문이다. 백년전쟁 이후 내내 적수로 지내온 두 나라의 관계가 원만해진 것은 이 무렵이 처음일 것이다(하지만 곧이어 리슐리외의 공격적인 외교로 두 나라는 다시 다투게 된다). 에스파냐의 펠리페 2세는 당연히 가톨릭을 지지했으나 1588년 무적함대의 패배로 기가 꺾이면서 에스파냐는 프랑스 문제에서 손을 떼게 된다. 위그노가 승리한 데에는 영국의 간접적인 지원 사격이 있었던 셈이다.

 

 

위그노 전쟁이 낳은 것은 신교의 승리와 부르봉 왕조만이 아니다(그랬다면 프랑스 역사로만 취급되고 말았을 것이다). 사실 낭트 칙령과 같이 근대국가에서나 볼 수 있는 고도의 정치적 타협이 성립할 수 있었던 것은 그를 뒷받침하는 정치 세력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위그노 전쟁이 예상보다 훨씬 오래 끌면서 프랑스에는 새로운 정치 세력이 생겨났다. 양 극단이 대립하면 이를 중재하려는 노력이 생기는 것은 당연하다. 따라서 새로운 정치 세력은 종교를 떠나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사태를 바라보고 해결책을 찾으려 했으며, 왕권을 강화해 질서를 회복시키고자 했다. 이들은 그 이름도 어울리게 정치파(Politigue)라고 불렸는데, 여기에는 기즈 공작의 지나치게 강압적인 태도에 반대하고 나선 가톨릭 온건파도 합류했다. 불안정한 정정에서 앙리 4세의 즉위, 왕의 개종을 통한 사태 진정, 낭트 칙령을 통한 문제 해결 등 일련의 수습 정책을 제안하고 실행에 옮긴 것은 바로 이 정치파였다.

 

전통적인 귀족 출신도 아니고, 가톨릭의 보수적 전통에서도 자유로우며, 전쟁 중에 이미 뛰어난 국정 운영 능력을 선보인 이들은 새로 들어선 부르봉 왕조에서 새로운 관료 집단을 이루게 되었다. 프랑스가 가장 먼저 영토 국가의 기틀을 갖추고 절대주의의 시대로 접어들 수 있었던 데는 그들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앙리 4세는 큰 내란을 매듭짓고 분열된 국론을 모아 프랑스의 왕권과 국력을 키우는 데 주력했고 또 상당한 성과도 거두었지만, ‘호색왕이라는 별명처럼 여색을 밝힌 탓에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었다. 보수적인 가톨릭에서는 용납될 수 없는 일이었던 탓에 그는 1610년 라바야크라는 가톨릭 광신도에 의해 암살되고 말았다. 그의 아들 루이 13세가 아홉 살의 나이로 왕위를 계승하자 그의 어머니 마리(그녀도 메디치 가문이었다)가 섭정을 맡았다. 다시 50년 전 카트린이 생각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지만, 이미 프랑스에는 전쟁을 통해 성장한 관료 집단이 있었다. 1614년 귀족들의 요구로 섭정 마리가 소집한 삼부회는 큰 성과를 내지 못했으나, 성직자 대표로 참가해 마리의 주목을 받은 인물이 하나 있었다. 그의 이름은 리슐리외(Richelieu, 1585~1642)였다.

 

마리에게 발탁되어 정치 활동을 시작한 리슐리외는 이후 어린 왕을 보필해 프랑스의 왕권을 강화하고 정치적 안정을 이룩하는 데 일익을 담당하게 된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그가 명료한 근대국가의 개념을 가진 인물이었다는 점이다. 당시 서유럽 세계는 종교적 통합성이 사라지고 개별 국가로 각개약진을 시작하려는 시대였다. 여기서 가장 먼저 국내적 안정을 이룬 프랑스는 리슐리외의 화려한 외교 정책으로 강력한 프랑스의 이념을 내세워 서유럽의 지도자 자리를 다지게 된다. 그 무대는 바로 독일에서 벌어진 마지막 종교전쟁이자 최초의 근대 전쟁이라 할 30년 전쟁이다.

 

 

축일의 대학살 바시의 학살이 있은 지 꼭 10년 만에 그보다 훨씬 더 큰 규모의 바르톨로메우 대학살이 벌어졌다. 그림은 그 학살의 장면이다. 로마 시대 후기에 순교자들의 피를 먹고 자라난 로마 가톨릭은 이제 신교에 대해 똑같은 피를 요구한다. 결과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위그노들은 신앙의 자유를 쟁취했으니까.

 

 

인용

목차

한국사 / 동양사

728x90
반응형
그리드형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