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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사, 2부 뿌리① - 3장 전란의 시대, 유럽 문명을 구한 아테네와 스파르타 본문

역사&절기/세계사

서양사, 2부 뿌리① - 3장 전란의 시대, 유럽 문명을 구한 아테네와 스파르타

건방진방랑자 2022. 1. 2. 0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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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럽 문명을 구한 아테네와 스파르타

 

 

마라톤 전투에서 재미를 본 그리스 연합군은 이번에도 페르시아의 육군을 상대할 전략적 지점을 선택했다. 이번에는 병력 차이가 워낙 나는 만큼 10년 전처럼 평원에서 막을 수는 없었으므로 그들은 아티카의 관문인 테르모필레의 좁은 산길을 방어 장소로 정했다. 스파르타의 정예병 300인대를 비롯해 3000여 명의 그리스 연합군은 속속 테르모필레로 모여들어 결사 항전의 태세를 취했다. 여기서 페르시아군을 쳐부수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오래 저지해야만 페르시아 해군의 측면 공격을 유도할 수 있고, 또 그래야만 아테네가 준비한 함선들이 빛을 발할 수 있었다.

 

예상대로 테르모필레에서는 절대 열세의 상황에서도 접전이 벌어졌고, 바다에서 아테네 함대는 페르시아 함대와 맞섰다. 그러나 중과부적(衆寡不敵)의 상태는 역력했다. 테르모필레 전투에서는 페르시아군이 다른 길로 우회해 그리스군을 덮침으로써 요충지를 빼앗겼고테르모필레 전투에서 스파르타 300인대의 활약은 눈부셨다. 그들은 최후까지 항전하다가 전원이 장렬히 전사했다(이 전투에서 페르시아 측 전사자는 무려 2만 명이었다고 한다). 헤로도토스는 훗날 이곳에서 300인대의 지휘자인 스파르타 왕 레오니다스를 기념해 세운 석조 사자상(‘레온은 사자라는 뜻이다)을 본 것을 기록하고 있으며, 전쟁의 역사를 쓴 2차 세계대전의 영국군 원수 몽고메리는 1933년에 이곳을 방문해 다음과 같은 비문이 새겨진 기념비를 보았다고 전한다. “이곳을 지나는 자, 가서 스파르타 사람들에게 말하라. 우리는 스파르타의 군법에 복종하여 여기 누워 있노라고.”, 동시에 벌어진 아르테미시온 해전에서도 그리스 해군은 최선을 다했으나 결국 후퇴하고 말았다.

 

테르모필레가 함락되자 페르시아군을 막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문제는 그들을 맞아주는 사람도 전혀 없었다는 점이다. 패전 소식을 들은 아테네 시민들은 재빨리 귀환한 함대의 도움으로 남쪽의 살라미스섬으로 대피했던 것이다. 페르시아군은 아테네로 오는 도중의 모든 도시를 유린하고 약탈하면서 거침없이 아테네 시내로 진군했지만, 아테네는 텅 빈 유령의 도시로 변해 있었다. 페르시아군은 남아 있는 아테네 시민들을 살육하고 신전을 불사르고 아크로폴리스를 불태우는 등 그동안 쌓인 스트레스를 마음껏 풀었는데, 이것이 크세르크세스의 마지막 실책이 되고 말았다.

 

그리스는 결코 항전을 포기한 게 아니었다. 포기하기는커녕 그들에게는 아직 뽑아들지 않은 최후의 카드가 남아 있었다. 이제 그것을 쓸 차례였다. 테미스토클레스는 반대하는 여러 지휘관, 특히 함대 총사령관인 스파르타의 에우리비아데스를 끈질기게 설득한 끝에 살라미스 해안에 전 함대를 집결시켰다. “아르테미시온 해전에서도 우리 함대가 진 것은 아니다. 이제 함대 전체가 모였으니 전면전에 승부를 걸자. 페르시아의 육군은 강하지만 해군은 적의 본대가 아니므로 해볼 만하다. 하물며 살라미스는 지금 우리의 가족들이 대피해 있는 곳, 여기서 한 걸음이라도 물러난다면 그리스는 끝장이다.” 그의 이런 설득은 주효했다.

 

 

하지만 전 함대가 모였다고는 하지만, 수도 적고 속도도 느린 그리스 함대가 페르시아 함대를 이길 확률은 대단히 낮았다. 전술적 결함은 전략으로 극복해야 했다. 기본 원칙은 한 가지, 테르모필레에서도 그랬듯이 대병력과 싸울 때는 좁은 곳이 유리하다는 것이었다. 그리스 함대는 살라미스의 좁은 지협에서 페르시아 함대가 올 때까지 기다렸다. 페르시아 육군이 텅 빈 아테네를 뒤로 하고 곧바로 진격해왔더라면 그리스가 이런 시간을 벌기란 불가능했을 터이다.

 

좁은 해협에 이르자 페르시아 함대는 3열 종대를 2열 종대로 바꿀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배들이 밀집해 있는 데다 물살이 거칠었다. 조짐이 좋지 않았다. 대포가 없던 시절의 해전은 단순했다. 일단 적선을 들이받은 다음 백병전을 벌이는 것이다. 그리스 삼중 노선은 적선의 노를 부러뜨리고 좌우현을 들이받았다. 배들이 맞닿았을 때는 즉각 선상에서 육박전을 벌였다. 페르시아 함대는 혼란에 빠져 당황하다가 이내 상당한 타격을 입고 퇴각하기 시작했다. 현명하게도 그리스 함대는 적을 추격하지 않았다.

 

살라미스 해전 자체는 큰 성과가 아니었다. 그보다 더 큰 성과는 크세르크세스의 심경 변화였다. 패전 소식을 들은 그에게는 무엇보다 먼저 헬레스폰토스에 남겨둔 배다리가 떠올랐다. ‘해전에서 승리한 그리스 함대가 그 다리를 끊어버린다면 우린 꼼짝없이 유럽에 갇혀버리리라.’ 수송선을 모두 그곳에 두고 온 게 후회막급이었다(당시 육군은 현지에서 양식과 물을 조달해가며 행군하고 있었다). 조바심이 난 그는 퇴각 명령을 내렸다.

 

사실 그리스군도 그 점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페르시아 함대가 전의를 완전히 상실했다는 것을 깨달은 테미스토클레스는 내친 김에 헬레스폰토스의 배다리를 끊으러 가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독 안에 갇히는 것은 쥐가 아니라 호랑이다. 이번에는 에우리비아데스의 반대가 주효했다. 그는 배다리를 끊을 경우 궁지에 처한 페르시아 대군이 오히려 공격으로 전환해 그리스 전역을 유린하리라고 주장했다. 테미스토클레스가 주도한 살라미스 해전, 에우리비아데스가 주장한 추격 중지는 서로 절묘하게 맞아떨어져 그리스를 구했다.

 

 

신도시 건설 다리우스는 제국의 행정적 중심으로서 한계에 이른 수사 대신 새 수도인 파르사를 건설했다. 나중에 알렉산드로스의 원정으로 상당히 파괴되었지만, 사진에서 보듯이 아직도 옛 제국의 영광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스인들은 파르사를 페르세폴리스라고 불렀는데, 후대에는 이 이름으로 더 잘 알려졌다. 심지어 그리스인들은 이 이름 때문에 그리스 신화의 영웅 페르세우스가 페르시아를 건설한 것처럼 착각하기도 했는데, 자민족중심주의가 신화에도 영향을 미친 사례다.

 

 

그러나 아직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크세르크세스는 주전론자인 부하 마르도니오스에게 30만 명의 병력을 맡기고 귀국했다(헬레스폰토스의 배다리는 폭풍으로 이미 파괴되어 있어 결국 크세르크세스는 배를 타고 사르디스로 귀환했다), 마르도니오스는 테살리아에 근거지를 잡고 겨울을 나기로 했다. 하지만 페르시아를 출발할 때 갖추었던 세 가지 유리한 조건은 이미 사라졌다. 즉 직접 원정에 나선 크세르크세스 황제는 돌아갔고, 헬레스폰토스 배다리는 파괴되었으며, 유사 이래 최대 규모인 대병력도 이제는 아니었다. 이것은 이 엄청난 전쟁의 대단원을 미리 말해주고 있었다.

 

이듬해 봄 페르시아군은 다시 아테네를 향했다. 아테네는 여전히 비어 있었다. 그러나 페르시아의 목표는 이제 아테네가 아니라 펠로폰네소스 반도였다. 그 무렵 그리스 연합군이 플라타이아에 포진하고 있다는 소식이 페르시아군에 전해졌다. 페르시아군은 최후의 결전장이 될 플라타이아로 진군하기 시작했다.

 

이번에도 먼저 맞붙을 장소를 선택한 그리스군은 아테네와 스파르타를 위시해 시키온, 에피다우로스, 트로이, 메가라 등 수십 개의 폴리스에서 파견한 병력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페르시아는 여전히 그리스보다 병력에서 우세했으나 여전히 장기인 기병 전술을 제대로 쓰지 못했다(전쟁 기간 내내 페르시아 기병대가 힘을 쓰지 못한 이유는 그리스 중장보병의 강력한 방어와 더불어 산악과 구릉이 많은 그리스의 지형 탓일 것이다). 페르시아 병사들은 용감했으나 그리스 병사의 중무장에 비해 경무장이었고 전술에 능하지 못했다. 육박전이 벌어지자 그들은 무모하게 그리스 진영으로 돌입하다가 쓰러졌다.

 

장시간에 걸친 격전 끝에 지휘관인 마르도니오스가 전사하고 페르시아 정예부대가 무너지는 것을 계기로 그리스의 승세는 굳어졌다. 이번에는 그리스군도 페르시아군이 쉽게 패주하도록 내버려두지 않고 추격했다. 페르시아군이 미리 준비해놓은 요새로 들어가 수비로 전환하자 그리스군은 요새 공격에 나섰다. 누가 원정군이고 누가 방어군인지 모를 일이었다. 그리스군은 페르시아 육군을 섬멸하는 데 그치지 않고 함선으로 사모스 섬까지 진군했다. 페르시아는 속절없이 밀리며 이오니아마저 그리스에 내주고 말았다. 이로써 크세르크세스는 천하 통일은커녕 아버지 다리우스의 업적마저 물거품으로 만든 불명예를 뒤집어쓰게 되었다.

 

 

인용

목차

한국사 / 동양사

최초로 맞붙은 동양서과 서양

최종 목표는 아테네

마라톤의 결전

최후의 승부

유럽 문명을 구한 아테네와 스파르타

전후의 새 질서

분쟁의 싹

공멸을 가져온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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