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족정+민주정+왕정 로마 공화정
기원전 390년 갈리아인의 침입에서부터 통일에 이르는 전란기에도 로마 평민들의 신분 투쟁은 그치지 않았다. 조국이 위기에 처해 있는데 신분 투쟁이라니, 어찌 보면 어울리지 않은 듯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조국을 위해 싸운 것도 바로 평민들이었으니까.
갈리아에 패배했을 때 로마는 몹시 힘든 상황이었다. 막대한 배상금도 배상금이지만 정복 활동이 중지된 게 더 치명적이었다. 그전까지는 식민시를 건설하거나 정복으로 얻은 공유지를 분배하는 것으로 토지 없는 농민들을 달랠 수 있었는데, 그게 불가능해진 것이다. 심각한 경제난 속에서 토지는 갈수록 부족해졌고, 가난한 평민들은 점점 쌓여가는 부채에 시달렸다. 물론 토지와 부채의 임자인 귀족들은 난리 속에서도 끄떡없었다.
아무리 나라가 위기에 처했어도 개혁의 필요성은 명확했다. 오히려 나라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서도 개혁이 필수적이었다. 가난한 농민들은 빚을 얻어 살았고, 빚이 감당할 수 없는 규모에 이르면 귀족들의 노예 신세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다. 다시 한 번 옛날 그리스의 사정이 생각나는 장면이다. 12표법을 낳은 기원전 5세기 중반의 상황이 드라콘 법전을 낳은 아테네의 상황에 해당한다면, 이번의 로마는 솔론의 개혁을 앞둔 아테네의 사정과 비슷했다. 그러나 개혁의 내용은 달랐다.
솔론의 개혁에서는 빈민들이 채무 노예로 전락하는 것을 막기 위해 채무를 탕감해주는 정책이 나왔다. 하지만 로마에서는 귀족들의 대토지 소유 자체를 억제하기 위한 정책이 시행되었다. 그것이 기원전 376년의 리키니우스 법이다【비슷한 상황에서 아테네와 로마의 처방이 서로 다른 이유는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우선 개혁 주체의 문제다. 아테네는 귀족출신의 집정관인 솔론이 개혁 주체로 나선 반면, 로마는 평민들이 개혁 추진 세력이었다(드라콘의 법전도 귀족이 주체였지만 12표법은 평민들이 주체였다). 그러므로 단순히 채무를 탕감해주는 것보다 훨씬 강력한 정책이 나올 수 있었다. 둘째는 로마와 아테네의 성격이 다르다는 데 있다. 아테네는 농경보다 대외 무역이 중심이었으므로 토지 분배의 문제가 그렇게까지 중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로마는 농경 국가였으므로 토지문제가 가장 핵심이었다. 또한 로마는 대외 식민 활동 이외에 정복 활동을 하지 않았던 그리스와는 달리 정복을 통해 공유지를 분급하는 정책을 전통적으로 사용했으므로 그게 어려워지면 토지문제가 난관에 봉착할 것은 필연적이었다】. 리키니우스 법은 토지 소유 상한선을 500유게라(약 1.3제곱킬로미터)로 제한했다(농지가 아닌 목초지의 경우에는 500마리의 양이나 소를 방목할 수 있는 규모를 상한선으로 정했다). 물론 모든 토지의 면적을 일일이 잴 수 있었던 것도 아닐 뿐더러 당시에도 명의 변경 같은 변칙적인 토지 소유 방법이 있었으니, 리키니우스 법이 정확하게 통용되기란 어려웠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토지 소유 상한선이 제도로 정해져 있다는 것은 귀족들의 대토지 겸병을 억제하는 데 기여했다. 또한 귀족들은 대부분 이미 상한선에 걸려 있었기 때문에 새로 정복지가 생겼을 경우에는 그 토지가 평민들에게 분급될 가능성이 컸다. 평민들이 노린 것도 바로 그 점이었다.
리키니우스 법은 경제적인 내용만 있는 게 아니었다. 이 법으로 평민들은 두 명의 집정관 중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제부터 집정관 한 명은 평민 출신으로 임명하게 된 것이다. 곧이어 다른 고위 관직들도 점차 평민들에게 문호가 개방되었다. 심지어 귀족들이 악착같이 사수하려 했던 신관(神官)도 결국 평민에게 개방되었다(에트루리아의 전통으로 로마의 정치에서는 마법과 주술, 점술이 중요했으며, 따라서 신관은 상당한 정치적 권한을 가졌다).
경제적 불평등을 해소하고 참정권까지 확보한 평민들에게 이제 남은 목표는 한 가지뿐이다. 얻을 것을 다 얻었으니 이제 ‘이대로 영원히’만 이루면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평민회의 권한이 강화되어야 한다. 하지만 자칫하면 최고 권력을 평민들에게 넘겨줄 판이었으므로 이번에는 귀족들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그래서 평민들은 다시 한 번 비장의 무기를 쓴다. 바로 철수다.
기원전 287년, 200년 만에 다시 ‘시민 총파업’을 감행한 평민들은 파업의 대가로 호르텐시우스 법을 얻어냈다. 이 법으로 이제 평민회의 결정은 원로원의 승인을 거치지 않고 그대로 법으로 시행될 수 있게 되었다. 바야흐로 평민회는 정식 입법기관이 된 것이다. 호르텐시우스 법은 기원전 494년 첫 번째 철수 이후 200여년에 걸쳐 진행된 신분 투쟁의 대단원을 내리는 쾌거였다.
신분 투쟁 기간 동안 평민들은 거의 폭력을 사용하지 않고 모든 목표를 달성했다(철수가 가장 적극적인 저항 수단이었으니 비폭력일 수밖에 없다). 그리스에서처럼 유혈 사태로 치닫지 않았을 뿐 아니라, 처음에는 그리스보다 한 걸음씩 뒤졌던 개혁도 이제 확실히 앞서 가게 되었다. 의회, 상원(세나투스), 국민투표 등 오늘날까지 서구 민주정치에서 사용하는 용어들은 모두 이 시대 로마에서 탄생했으며, 로마의 원로원과 민회는 오늘날 양원제 민주주의의 기원이 되었다.
물론 당시 로마의 귀족들은 불만이었지만, 그리 심한 정도는 아니었다. 로마의 귀족들은 평민의 진출을 어쩔 수 없는 것으로 여기거나 심지어 환영하기도 했다. 그들은 가지고 있던 모든 특권을 잃었고 오로지 전통과 명예만이 남았지만, 그랬기에 더더욱 귀족다웠다. 그들은 그들에게 주어진 정치적 권한, 즉 원로원 활동에 충실했으며, 그 이상도 그 이하도 노리지 않았다【당시 로마 귀족의 귀족다운 자세는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 즉 ‘귀족의 의무’라는 말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 오늘날 이 말은 ‘상류층의 도덕과 책임’을 강조하는 데 주로 사용한다. 흔히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상류층의 양심이라고 이해하지만, 의무(오블리주)라는 말이 붙은 데서 보듯이 도덕적 개념이라기보다 역사적으로 형성된 개념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전통이 없는 사회에서는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실현되기 어렵다】. 원로원의 귀족정, 평민회의 민주정, 집정관의 왕정이 조화 속에 한데 어우러진 당시 로마의 공화정은 가장 완성된 정치 형태였다.
하지만 문제는 있었다. 로마의 공화정이 완벽하게 기능하기 위해서는 로마가 이탈리아 반도 안에 머물러 있어야만 했다. 그런데 로마는 애초부터 타고난 정복 국가였다. 따라서 로마의 공화정이 아름다운 조화를 이룬 것은 잠시뿐이었다. 반도의 통일을 이룬 뒤 로마는 곧장 더 큰 목표를 향해 나아가게 된다. 그것은 바로 지중해의 패자가 되는 것이다.
▲ 그리스풍 초기 로마의 역사는 여러 면에서 그리스를 본받는 식으로 전개된다. 한가운데 광장과 신전이 있는 로마 시가지 유적의 현재 모습(위쪽)과 옛 로마를 표현한 모형(아래쪽)에서도 그리스 폴리스의 냄새가 물씬 풍긴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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