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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사, 3부 뿌리② - 1장 로마가 있기까지, 로마를 빛내준 조연들 본문

역사&절기/세계사

서양사, 3부 뿌리② - 1장 로마가 있기까지, 로마를 빛내준 조연들

건방진방랑자 2022. 1. 2.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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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마를 빛내준 조연들

 

 

여러 민족과 문명이 공존하던 무렵에 이탈리아에서 최고의 선진 문명을 자랑하는 세력은 크게 둘이었다. 반도의 중부에는 에트루리아가 있었고, 남부와 시칠리아에는 옛 그리스의 상인들이 건설한 식민시들인 마그나그라이키아 Magna Groecia(‘큰 그리스’)가 있었다. 이들은 로마가 성장하는 드라마에서 훌륭한 조연의 역할을 하게 된다.

 

시칠리아의 시라쿠사가 알렉산드리아와 더불어 헬레니즘 세계 최대의 도시였다는 사실이 말해주듯이, 마그나그라이키아는 헬레니즘 시대에 쇠퇴기를 맞은 그리스 본토보다 훨씬 발달했다. 말이 그리스 식민시일 뿐 사실은 이탈리아로 옮겨온 그리스 문명인 셈이었다. 따라서 마그나그라이키아는 그리스 본토의 장점과 단점을 모두 가지고 있었다. 장점은 지중해 무역을 통한 경제 번영과 선진 문명의 발전이고, 단점은 폴리스들 간의 분열과 다툼이다. 그래서 마그나그라이키아는 로마의 성장에 좋은 배경이 되어주었다. 선진 문명을 전해주었으면서도 자체 통일을 이루지 못해 로마에 정치적인 위협은 주지 못했기 때문이다(만약 마그나그라이키아가 통일을 이루고 이탈리아 반도 정복에 나섰더라면 이후의 역사는 크게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이탈리아 중부의 또 다른 세력인 에트루리아 역시 로마의 성장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상당한 수준의 자체 문명을 가지고 있었던 에트루리아인은 로마 북부, 지금의 토스카나 일대에 여러 개의 도시국가를 이루고 초기 로마를 정치적으로 지배했다. 다만 정치적으로 강력한 통일 국가를 이루지는 못했고 도시국가들 간의 느슨한 연맹체를 형성한 정도였다. 로마는 바로 이 빈 틈을 비집고 들어가 에트루리아의 자리를 대신하게 된다. 그러나 초기 로마의 형성에서 에트루리아의 관습과 제도, 문명은 로마에 풍부한 자양분으로 기능했다에트루리아 문명은 당시의 세력에 비해 알려진 바가 적다. 문헌은 전혀 남아 있지 않고 유적과 미술품 등을 통해서만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로마 측의 기록에 따르면, 로마인들은 에트루리아의 정치적 지배를 무척 혐오한 듯한데, 그래서 에트루리아에 관한 기록을 남기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에트루리아인의 기원도 미스터리다. 헤로도토스는 그들이 소아시아에서 왔다고 말했는데, 그렇다면 그들은 기원전 1000년 무렵에 그리스로 남하한 도리스인과 같은 계열, 아리아인의 후예일 것이다. 인도에서 그리스까지 고대의 세계사에 중요한 흔적을 남긴 아리아인의 민족이동은 이렇게 이탈리아와도 연관된다.

 

 

마그나그라이키아와 에트루리아, 두 조연의 충실한 도움에 힘입어 로마는 점차 이탈리아 중부의 주인공으로 등장했다. 기원전 6세기 말 로마인들은 에트루리아의 독재자 타르퀴니우스를 쫓아내고 독자적인 발전의 토대를 갖추었다. 폭정을 일삼았던 타르퀴니우스는 자신의 의도와 무관하게 로마의 정치 발전에 큰 기여를 했다. 그에 대한 좋지 않은 기억 때문에 로마인들은 왕정을 지극히 혐오하게 되었고, 공화정을 정치제도로 채택했기 때문이다(이후 로마는 기원전 1세기에 제정이 성립하기 전까지 공화정 체제를 유지한다). 물론 그것은 근대적 의미의 공화정과는 큰 차이가 있고, 엄밀히 말하면 공화정이라기보다 과두정 혹은 귀족정의 성격이 강하다. 당시 로마에는 씨족을 바탕으로 한 귀족 가문들이 지배하고 있었는데, 타르퀴니우스를 쫓아내고 과두정을 이룬 것도 바로 이들이다.

 

그러나 과두정이 전부였다면 로마의 공화정은 후대에 그렇게 큰 역사적 의미를 남기지 못했을 것이다. 로마의 공화정은 단순히 왕정에 대비되는 의미를 가지는 것만이 아니었다. 공화정의 시동은 귀족들이 걸었으나, 실제로 공화정을 밀고 나간 것은 바로 평민들이었다. 어떻게 해서 그 까마득한 고대에 평민들이 주도하는 진보적인 공화정이 성립할 수 있었던 걸까로마의 공화정은 앞서 본 그리스의 민주주의처럼 문명의 진보가 아니라 오히려 후진성을 반영하는 것이다. 오리엔트와 중국의 역사에서 보듯이, 고대사회에서는 확실한 왕정이나 제정이 어설픈공화정이나 민주정보다 발달한 정치제도였다. 결국 기원전 1세기에 로마도 공화정에서 제정으로 바뀌게 되는 사실이 그 점을 반증한다. 그러나 그리스 민주정과 로마 공화정의 경험은 이후 서양의 역사를 동양처럼 중앙집권화에 기초한 제국의 질서가 아닌 분권화에 기초한 계약의 질서로 만드는 데 기여했다. 그렇게 보면 역사에서 진정한 진보가 과연 무엇인지 모를 일이다?

 

아무런 문제가 없는데 권력을 스스로 내줄 바보는 없다. 평민들의 정치적 힘이 커진 것은 그들이 주도한 치열한 신분 투쟁의 결과였다.

 

로마 공화정은 그리스의 공화정, 특히 기원전 6세기 초 솔론의 개혁에서 큰 영향을 받았다. 물론 로마인들은 마그나그라이키아를 통해 그리스의 정치제도를 받아들였지만, 대표들을 뽑아 아테네의 정치를 직접 참관하게 할 정도로 정치 개혁에 큰 의욕을 보였다. 앞에서 보았듯이, 솔론의 개혁은 평민층의 정치적 요구를 수용하는 것을 핵심으로 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개혁의 일부가 로마에 도입되자 로마 평민층은 귀족들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발언권이 강해졌다.

 

 

로마 병사의 무장 투구 갑옷, 창 등 무장을 제대로 갖추려면 돈이 많이 들었으므로 처음에는 경제력이 있는 귀족들이나 병사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로마가 에트루리아의 지배에서 벗어난 기원전 6세기경부터 평민들도 로마의 병사가 되기 시작한다.

 

 

인용

목차

한국사 / 동양사

늑대가 우는 언덕에서

로마를 빛내준 조연들

평민들의 총파업

고난 끝의 통일

귀족정+민주정+왕정 로마 공화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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