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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이 휩쓴 공간을 찾아 - 2. 용산참사: 용산개발이 부추긴 용산참사 본문

연재/배움과 삶

자본이 휩쓴 공간을 찾아 - 2. 용산참사: 용산개발이 부추긴 용산참사

건방진방랑자 2019. 4. 21. 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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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용산참사: 용산개발이 부추긴 용산참사

 

 

 

문제: 수도권에 미군기지가 있는 나라는?

 

 

남산타워에서 보는 용산 쪽 풍경. 미군기지와 중앙박물관이 보인다. 

 

 

 

용산개발 사업

 

답은 굳이 얘기하지 않아도 누구나 알 것이다. 그것도 금싸라기 땅인 용산에 미군기지가 있다. 6.25 당시 이승만은 한국군에 대한 전시작전통제권 일체를 유엔군 사령관에 이양했다. 이 때문에 한국군은 유엔군 사령관의 작전 명령을 하달 받으며, 한국전쟁을 수행하게 됐다. 독립국가가 되려면 작전지휘권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하지만 한국은 애석하게도 6.25때 최고 통수권자가 알아서 다른 나라에 자국의 지휘권을 헌납하고 말았다. 과연 한국은 독립국가인가?

용산에 미군기지가 들어설 수 있었던 데엔, 이런 역사적인 배경이 있다. 노무현 대통령 때에 이르러서야 작전 지휘권을 찾아오고자 하는 움직임이 있었지만, 예비군 장성들은 극렬하게 반대하며 대통령을 빨갱이로 몰아붙였다. 2002년도엔 용산미군기지 이전 발표가 났고, 용산은 개발열풍이 불기 시작한다. 모든 투기자본이 용산을 향해 집결하는 모양새가 된 것이다. 용산참사는 바로 이런 움직임 속에 언제든 터질 수밖에 없는 사태였던 것이다.

 

 

용산에서 미군이 빠져 나가며 금싸라기 땅으로 떠올랐다.

 

 

 

어민을 거지로, 세입자를 때쟁이로

 

용산참사가 일어난 직후, 재개발조합원은 세입자들은 지금까지 싼 임대료에 장사한 것을 고마워해야지, 보상비가 적다고 하면 안 된다.”라는 말을 했다. 얼핏 들으면 정당한 얘기인 것 같지만, 그건 어느 한 쪽을 일방적으로 편든 얘기일 뿐이다.

 

 

국가는 어민들에게 일정한 보상금을 지급했는데, 그것은 소유권에 대한 것이 아니라 이용권에 대한 것이었으므로 그 액수가 미미했다. 국가가 일정액의 보상금을 내밀며 바다로부터 떠날 것을 요구했을 때, 우리가 만난 어민은 마치 자신이 국가 바깥에 존재한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우리는 우리가 국가에 빌붙어 먹었던 거지였음을 깨달았다. ‘바다와 갯벌은 너희 것이 아니라 국가의 것이다. 그동안 그렇게 먹고 살게 해주었으면 된 것 아닌가.’ 그러고는 시혜 차원에서 거주지 이전이나 직업전환 비용이라며 돈을 조금 던져 주었다. 그때 깨달았다. , 우리는 국가의 주인이라기보다는 국가에 빌붙어서 생계를 꾸렸던 거지였구나. 우리는 국민이 아니었구나.”

-고병권, 그린비, 추방과 탈주, pp 29~30

 

 

노무현 정부는 국익이 달려 있다는 이유로, 화성 간척 사업을 진행했다. 그러면서 갯벌에서 먹고 살아온 어민들을 쫓아냈다. 그때 그들은 , 우리는 국가의 주인이라기보다는 국가에 빌붙어서 생계를 꾸렸던 거지였구나. 우리는 국민이 아니었구나.”라고 절규를 했다. 국가가 국민을 왕따시킨 것이다.

이처럼 재개발은 이익이란 명분으로 그곳에서 잘 살고 있던 세입자들을 쫓아내는 것이다. 그들은 남일당 건물에 빌붙어 살았던 때쟁이였을 뿐, 인권이나 주권을 지닌 세입자는 아니었던 것이다.

 

 

방조제로 막힌 곳에는 호수가 생기고 갯벌은 육지가 되었다.

 

 

 

누굴 위한 국가기관인가?

 

용산이 뜨거운 감자로 떠오르며 개발열풍이 불어 닥쳤고 억울하게 쫓겨난 사람들은 남일당 건물에 올라 농성을 준비한다.

119, 그 날은 칼바람이 세차게 부는 날이었다. 옥상에 망루를 설치하며 최후 항전을 준비하는 그들의 심정은 어땠을까? 그렇게밖에 할 수 없는 현실이 답답했을 것이고 어떻게든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길 바랐을 것이다. 그들은 죽으러옥상에 올라간 것이 아니라, ‘살러올라간 것이다.

그런데 그들의 모습을 보는 경찰의 태도는 예사롭지 않았다. 19일에 경찰버스가 도로한복판에 서며 자꾸 세입자들을 자극했다. 철거민들은 경찰차가 선 것을 보며, 골프공이나 화염병을 던지며 억울함을 표시했다.

남일당 건물 곁에는 용역들이 서서 온갖 욕설로 농성자들을 자극했고, 2층과 3층에선 가죽소파에 불을 붙여 유독가스를 옥상으로 피워 올렸다. 매서운 추위와 숨까지 막히게 하는 가스는 죽음의 공포를 더욱 부추겼다. 불이 붙은 것을 보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소방서에 연락을 하기도 했지만, 소방서는 공사장 인부들이 피운 불이라며 출동했다가도 그냥 돌아갔단다. 누구 하나 자신들의 처지에는 관심도 두지 않았으며 모든 관공서는 한 통속이 되어 철거민들을 압박했다.

 

 

 

 

주류언론들은 농성에 들어간 세입자에게 딱지를 씌우기에 여념이 없었다.    

 

 

 

신속한 출동 명령

 

농성에 들어간 지 딱 하루 만에 강제진압이 시작되었다. 이렇게 속전속결로 사태 해결에 나선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명분은 철거민들이 시민들을 향해 골프공과 화염병을 던지기에, 치안 유지를 위해 어쩔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철거민들은 경찰을 향해서만 저항의지를 보였을 뿐이다.

20일 새벽, 경찰특공대는 출동했다. 경찰특공대는 88올림픽 때 만들어진, 대테러 임무를 수행하는 특수부대다. 그렇다면 경찰이 철거민들을 어떤 존재로 보는지도 명확해졌다.

경찰특공대는 남일당 건물 밑에 대기하고 있었고 해가 뜨기 전인 새벽시간에 일제히 작전에 돌입했다. 건물 밑에선 겨울 날씨 같은 건 아랑곳없이 물을 계속 해서 뿌려댔고 컨테이너는 망루를 향해 움직였다. 농성에 들어간 지 15시간 만에 철거민들은 사망자와 부상자가 되어 남일당 건물을 내려왔다. 살기 위해 올라갔으나, 관계 당국의 중재하려는 노력도 없이 싸늘한 시체가 되어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왜 옥상에 올라가 농성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는 아무도 묻질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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