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명 연장 조치
말기 암 환자를 앞에 둔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최후의 수단인 수술에 의지하기로 했다. 첫 번째 수술은 권력을 안정시키는 것이었다. 의사로 있는 기간이 최소한 어느 정도는 확보되어야 수술이든 무엇이든 할 게 아닌가?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각지에서 사병을 거느리고 있는 군벌들을 달래야 했다. 이를 위해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모험에 가까운 시도를 했다. 그것은 제국을 분할하는 것이었다.
286년에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동료인 막시미아누스를 서방 황제로 삼고 자신은 동방 황제가 되었다【로마 제국이 동서로 구분될 수 있다는 것은 지도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러나 동방 제국(지중해 동부와 소아시아, 이집트)과 서방 제국(이탈리아, 갈리아, 에스파냐, 북아프리카)의 차이는 로마 초기부터 뚜렷했다. 동방은 오리엔트, 그리스의 역사를 이어받은 전통적인 문명 세계였고, 서방은 그 씨앗을 받아 키운 데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따라서 제국의 동부에 관한 한 로마는 관리와 행정만이 가능했을 뿐 더 앞선 문명을 전달하지는 못했다. 디오클레티아누스가 동방 정제를 맡은 것도 그 자신이 달마치야(지금의 유고슬라비아) 출신인 탓도 있겠지만, 동방이 문명의 중심지이기 때문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리고 두 황제가 각자 한 명씩 제위 계승자를 미리 정하기로 했다. 정제(正帝) 두 명에 부제(副帝) 두 명을 두는 방식이었는데, 사실상 황제가 네 명인 셈이었으므로 이것을 테트라르키아(tetrarchia, 4두 정치)라고 부른다. 정제의 정식 명칭은 아우구스투스였고, 부제의 정식 명칭은 카이사르였다는 데서 그 변형된 제정의 지향점을 짐작할 수 있다.
황제가 네 명이니 자연히 수도도 네 곳으로 늘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소아시아의 니코메디아(지금의 터키 이즈미트)를 수도로 삼고 소아시아에서 이집트까지 제국의 동부를 다스렸다. 그의 부제인 갈레리우스는 판노니아의 시르미움에서 발칸을 지배했다. 또 막시미아누스는 메디올라눔(밀라노)을 수도로 정하고 이탈리아와 북아프리카를 맡았으며, 그의 부제인 콘스탄티우스는 갈리아의 트리어에서 에스파냐, 갈리아, 브리타니아를 맡았다.
이처럼 기묘한 제정을 낳은 테트라르키아는 권력의 안정을 가져올 수는 있지만 자칫하면 서열이 무너져 제국이 분열될 가능성이 있었다. 그 점을 우려한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자신이 최고 권력자임을 처음부터 분명히 했다. 동방 정제가 최고 서열이라는 사실은 이후 로마의 향방(아울러 중세 초기의 구도)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최고 권력자에 어울리게, 또한 동방의 정제답게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동양식 전제군주로서의 위상을 확립하려 애썼다. 그는 자신이 신의 대리인이라고 선언하고, 의장과 예식도 페르시아풍으로 바꾸었다. 이로써 로마 제정은 전제군주정(dominatus)이라는 새로운 형태로 변형되었다. 바야흐로 로마 황제는 이집트의 파라오나 중국의 천자 같은 절대 권력의 화신이 된 것이다.
권력의 분산이 오히려 권력의 집중을 가져왔으니 역설적인 일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이것으로 큰 권력의 문제는 해결되었다. 이제 남은 것은 작은 권력, 즉 속주 총독들이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속주 총독이 함부로 군대를 일으키지 못하도록 그들에게서 군사 지휘권을 빼앗았다. 게다가 속주의 크기도 아주 작게 세분하고, 전체를 12개의 큰 관구로 묶어 통제하기 쉽게 만들었다. 명백한 행정 편의주의였지만 황제에게는 국가 비상사태라는 근거가 있었다.
▲ 4두의 상징 병든 로마 환자를 치료하기 위해 의사인 디오클레티아누스는 환자의 몸을 네 조각으로 나누기로 했다. 이 조각상은 그것을 나타내는 <4황제상>이다. 네 명의 황제(두 명의 정제와 두 명의 부제)는 이렇게 서로 부둥켜안고 있으나 실은 저마다 욕심이 달랐다. 로마의 분열은 이제 필연적이다.
이렇게 권력을 수술한 다음에는 군대를 손 볼 차례였다. 앞에서 보았듯이, 아우구스투스 이래 로마군은 변방을 지키는 것을 늘 주요 과제로 삼았으며, 그에 따라 로마 본토에는 군대의 주둔이 허용되지 않았다. 그러나 수십 년 동안 이민족의 침략을 호되게 겪은 결과 중앙군의 필요성이 명백해졌다. 300년전 아우구스투스는 제위를 노리는 군대 사령관들을 경계하기 위해 군대를 억제했으나(게다가 그는 정복도 중단했다), 이제 제위가 아니라 제국 전체가 위험해진 상황이므로 비상조치가 필요했다.
하지만 새로 군대를 육성하는 데는 무엇보다 돈이 필요했다. 더구나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육성하려는 군대는 일반 보병이 아니라 중무장의 기병대였다. 보병을 기초로 한 로마 군단 전술은 이미 낡았다. 기병대를 기동타격대로 삼고 변방에서 문제가 생기면 즉각 지원에 나서는 것이 선진 전술이었다. 그러자면 병력이 많이 필요했다. 그런데 병력이야 게르만족 용병으로 충원하면 된다지만 가뜩이나 어려운 나라 살림에 막대한 군비는 어디서 구할까? 더구나 기병은 돈이 많이 들었다.
황제가 개인 재산으로 국가 재정을 충당하던 것은 낡은 방식이기도 했지만, 빈농 출신에다 말단 병사에서 시작해 제위에 오른 디오클레티아누스로서는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돈 대신 새로 강화한 권력이 있었다. 원래 황제란 재산이 아니라 권력으로 말하는 존재가 아니던가? (이런 점에서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중국 황제에 가장 가까운 지배자였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돈으로 사야 할 것들을 권력으로 징발하기로 했다. 기술자들은 무상으로 국가에 부역해야 했고, 변방을 지키는 군인들은 대를 이어 병역 의무를 수행해야 했다. 콜로나투스도 더욱 강화되어 농민들은 아무리 무거운 세금에 시달려도 마음대로 농토를 버리고 떠날 수 없었다. 기술자나 상인이나 군인이나 농민이나 모두 거주 이전의 자유 같은 것은 없었다.
그러나 사람들의 자유를 묶어놓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국가적 어려움 속에서도 아직 로마 시민들에게 양곡을 무상으로 공급하는 전통은 유지되었지만, 번영의 시대와 자유의 맛을 기억하는 시민들은 빵만으로 살 수 없었다. 그렇게 보면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수술은 문제를 해결한 게 아니라 봉합해놓은 데 불과했다. 더구나 그런 임시방편의 조치는 강력한 권력이 뒷받침할 때만 효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 고난의 신앙 그리스도교는 많은 박해와 탄압을 받은 것처럼 알려져 있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로마 시대 내내 그리스도교는 신앙과 포교의 자유를 누렸다. 그러나 제국 분열의 조짐 속에서 강력한 황권을 확립하려 한 디오클레티아누스 시대에 그리스도교도들은 곤욕을 치러야 했다. 당시 그리스도교도들은 지하 무덤 속에 숨어 신앙을 보존했는데, 이것이 사진에서 보는 것과 같은 카타콤이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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