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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사, 3부 뿌리② - 5장 추락하는 제국, 제국의 최후 본문

역사&절기/세계사

서양사, 3부 뿌리② - 5장 추락하는 제국, 제국의 최후

건방진방랑자 2022. 1. 8. 0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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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국의 최후

 

 

의사가 담당 환자보다 먼저 죽는다면 그 환자의 앞날은 뻔할 것이다. 콘스탄티누스가 죽자 로마 제국은 걷잡을 수 없이 무너졌다. 그 뒤로도 제국은 150년 가까이 더 존속하지만, 산소 호흡기로 겨우 명맥을 유지했을 뿐 제대로 산 것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이제는 세상의 어느 누구도 로마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병든 사자를 공격하는 하이에나들의 이빨은 더욱 날카로워졌다.

 

4세기 후반부터 이민족들은 로마를 거세게 물어뜯었다. 367년에 브리타니아의 여러 부족은 서로 힘을 합쳐 브리타니아 속주를 대대적으로 공격했다. 브리타니아야 원래부터 반란이 끊이지 않았지만, 아직 단일한 정체성이 없던 픽트족과 색슨족, 스코트족이 연계해 로마에 대항한 것은 처음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서곡일 뿐이었다. 주제곡은 375년부터 시작된 게르만족의 대이동이었다이 게르만족의 대이동은 수백 년에 걸친 세계적 민족대이동의 결과다. 근원은 기원전 2세기 한 무제의 흉노 공격에서 시작된다(종횡무진 동양사, 111~113쪽 참조). 여기서 밀려난 흉노는 중앙아시아로 진출해 그 지역의 주인으로 자리 잡았다(흉노에 쫓겨난 대월지의 부족들은 인도로 남하해 쿠샨 왕조를 열었다). 계속해서 서쪽으로 동유럽까지 진출한 흉노의 일파는 훗날 유럽 역사가들에게 훈족(Hun)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375년 이 훈족이 다키아 일대에 살던 서고트족을 공격해 서고트족이 남쪽의 모에시아로 이동한 게 게르만족 대이동의 시작이다. 이후 유럽의 여러 민족은 마치 도미노 게임처럼 연쇄 이동을 벌이게 되는데, 그 와중에 로마 제국이 멸망한다. 고대의 동양과 서양은 500여 년에 걸친 기나긴 시차를 두고 세계사적 사건을 합작한 셈이다.

 

중앙아시아의 강성한 민족인 훈족이 침략해오자 도나우 강 하류에 살던 게르만족의 일파인 서고트족은 큰 두려움을 느꼈다(고트족은 원래 스칸디나비아가 고향이었는데, 기원 전후 무렵에 남쪽으로 이동하면서 동고트족과 서고트족으로 나뉘었다. 고트라는 명칭에서 중세 예술 양식인 고딕이라는 용어가 나왔다). 동방 출신답게 훈족의 병사들은 말을 잘 다루었고, 개인 전술에 능했으며, 특히 활 솜씨가 뛰어났다. 게다가 그들의 옆으로 찢어진 눈, 큰 광대뼈, 강인하고 무시무시한 인상은 서고트족이 고향을 버리고 달아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훈족에게 쫓겨난 서고트족의 한 무리는 서쪽으로, 다른 한 무리는 남쪽으로 이동을 시작했다. 남쪽에는 콘스탄티노플로 옮긴 지 얼마 안 되는 로마 제국의 심장부가 있었다. 로마는 이들이 영토 내로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면서 각종 조건을 달았는데, 이게 서고트족의 심기를 건드렸다. 그들은 훈족에게서 맞은 뺨을 로마에 대한 화풀이로 돌렸다. 378년에 로마는 서고트군에게 대패한 뒤 교통의 요지인 마케도니아의 아드리아노플을 잃고 황제인 발렌스(Flavius Iulius Valens, 328년경~378)마저 전사하는 참극을 겪었다. 콘스탄티누스가 제국의 중심을 동방으로 옮긴 뒤 처음으로 당하는 굴욕이었다.

 

 

새 황제 테오도시우스(Theodosius, 347~395)의 해결책은 하나뿐이었다. 서둘러 서고트족과 평화 관계를 맺고 그들을 용병으로 삼을 수밖에 없었다. 한때 막강했던 로마 군단은 자취도 없이 사라졌으며, 이제 로마 본대보다 용병 부대가 더 많고 더 강력해졌다. 테오도시우스는 392년에 그리스도교를 국교로 삼고, 제국의 전체 영토를 얼추 통합해 꺼져가는 제국의 촛불을 되살리기 위해 애썼다.

 

그러나 결국 그는 통일 제국의 마지막 황제가 되고 말았다. 그가 죽은 뒤 제국은 다시 동방 제국과 서방 제국으로 나뉘었고 두 번 다시 통합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테오도시우스 이후의 황제들은 지극히 무능했기 때문에 그는 실제적인 마지막 황제라고도 할 수 있다.

 

강국을 유지하려면 정치와 경제가 살아야 하고, 국가의 꼴이라도 유지하려면 군대가 살아야 한다. 그러나 로마는 최후의 보루인 군대마저 무너졌다. 로마 안에서는 게르만족 용병들이 군대의 실권을 잡고 있었고, 로마 밖에서는 게르만족의 강성한 민족들이 로마 침공을 노리고 있었다(둘 다 게르만족이니 같은 민족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앞에서 말했듯이 게르만족이란 로마인들이 중부 유럽의 여러 민족을 통칭한 것일 뿐 단일한 민족이 아니다).

 

이제 세상은 게르만족의 것이었다. 406년 로마 안의 게르만족과 로마 밖의 게르만족이 게르마니아에서 서로 맞붙었다. 승자는 바깥의 게르만족이었다. 서고트족은 순식간에 갈리아와 에스파냐까지 정복했고, 반달족은 바다를 건너 북아프리카로 진출했다. 그렇잖아도 로마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는 중이던 브리타니아는 그런 변화를 계기로 로마에서 영영 멀어졌다. 그 와중에 410년에는 서고트의 왕 알라리크가 이탈리아 반도를 침략하고 로마 시를 점령했다당시 서방 제국의 황제는 호노리우스(Flavius Honorius, 384~423)였는데, 무능한 황제의 전형을 보여주는 일화를 남겼다. 닭을 기르는 데 광적인 취미를 가지고 있었던 그는 아끼던 닭의 이름을 로마라고 지었다. 서고트군이 로마 시를 함락시키자 부하가 황급히 그에게 달려와 보고했다. “폐하, 로마를 잃었습니다.” 호노리우스는 거의 사색이 되었으나 잃은 것이 병아리 로마가 아니라 수도 로마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안정을 되찾았다. 이런 황제가 40년 동안이나 제위에 있었으니 그렇잖아도 어려운 로마의 부흥을 기대하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 덕분에 호노리우스는 로마 역사상 가장 나약한 황제라는 평가를 받았다. 수도 로마를 유린당한 것은 기원전 390년 갈리아인의 침략 이후 800년 만에 당하는 치욕이었다. 다행히도 알라리크는 로마를 통치하려 들지 않고 황제와 평화조약을 맺은 뒤 에스파냐 쪽으로 기수를 돌렸다.

 

온갖 수모를 겪은 로마에 또 한 가지 다행스런 일이 있었다. 배불리 먹었다 싶은 게르만족은 이후 수십 년 동안 로마를 괴롭히지 않았다. 에스파냐에 서고트 왕국, 북아프리카에 반달 왕국, 갈리아에 부르군트(부르고뉴) 왕국, 프랑크 왕국 등이 자리를 잡은 뒤에는 판세가 이렇게 굳어지는 것처럼 보였다. 로마는 서방 속주들을 거의 다 잃었지만 더 이상의 참화는 없는 듯했다.

 

 

원로원의 명맥 제국 시대에도 로마 원로원은 존속했다. 물론 공화정 시대와 같은 의사 결정 기구는 아니었고, 황제를 보좌하는 정도의 역할로 축소되었다. 제국의 중심을 동방으로 옮긴 콘스탄티누스는 콘스탄티노플에 새로 원로원을 구성하고 이것을 추밀원이라는 정식 관료 기구로 재편했다. 사진은 로마에 있는 원로원 건물이다.

 

 

그러나 451년 이번에는 민족대이동의 첫 도미노를 쓰러뜨렸던 민족이 로마를 침략해왔다. 훈족이 쳐들어온 것이다. 아틸라(Artila, 406년경~453)가 이끄는 훈족의 침략은 그때까지 로마가 겪은 어떤 시련보다도 참혹한 결과를 초래했다. 게르만족이 게임을 즐기는 수준이었다면, 훈족은 직업적인 약탈자였다. 오죽하면 로마인들이 아틸라를 신의 채찍(혹은 신의 재앙)’이라고 불렀을까?

 

처음에는 서고트와 프랑크, 부르고뉴 등이 훈족의 침략을 어느 정도 저지했다. 그러나 신의 채찍을 막아낸 것은 신의 사자였다. 교황 레오 1(Leo , ?~461)가 아틸라를 설득해서 철군하게 한 것이다아틸라는 동양인 최초로 서양의 유명한 문학작품에 등장하기도 했다. 독일 중세의 서사시 니벨룽겐의 노래(Das Nibelungenlied)가 그것이다. 여기서 에첼이라는 이름으로 나오는 아틸라는 여주인공 크림힐트를 아내로 삼는데, 그녀는 죽은 연인 지크프리트의 복수를 위해 친정인 부르군트 왕족을 몰살시킨다. 실제로 부르군트 왕국은 훈족에게 멸망당했는데, 중세 독일인들에게는 이민족의 침략을 크림힐트의 이야기로 각색하는 게 위안이 되었을 것이다. 이 작품은 이후 19세기에 독일 민족주의를 고취하려 한 바그너에 의해 <니벨룽겐의 반지>라는 악극으로 만들어졌다.

 

훈족의 침략에서 배웠을까? 455년 또 다른 이민족이 로마 시를 점령했다. 이번의 주인공은 유럽에서 북아프리카로 쫓겨난 반달족이었다. 당시 반달족은 몇 년 전의 훈족처럼 점잖게 행동하지 않았다. 그들이 로마를 무참히 파괴한 사건을 계기로 후대에 반달리즘(vandalisn)이라는 말이 생겨났는데, 바로 야만적인 파괴 행위라는 뜻이다.

 

이렇게 제국이 허수아비가 되어가는 가운데서도 로마의 황제는 여전히 두 명씩 존재했다. 그러나 동방 제국이나 서방 제국이나 모두 실권은 황제에게 있지 않고 이민족 출신의 장군들에게 있었다. 그래도 굳이 비교한다면, 속주들을 모두 잃은 서방 제국보다는 그런대로 영토를 유지하고 있던 동방 제국의 형편이 더 나았다. 속주들의 독립으로 서방 제국은 제국이 아니라 왕국의 수준으로 하락했다. 게다가 황제마저 장군이 마음대로 임명했으니 왕보다도 못한 존재였다.

 

그러던 중 서방 제국의 장군인 오도아케르(Odoacer, 433~493)는 선배인 오레스테스 장군이 자기 아들을 황제로 옹립하자 이런 허수아비 짓을 그만두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오레스테스를 죽이고 어린 황제를 폐위시켰다. 이때 폐위된 서방 제국의 마지막 황제 이름은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Romulus Augustulus)였다. 우연의 일치겠지만 로물루스는 로마의 건국자요 아우구스투스는 제국의 건국자였으니 공교로운 이름이었다(아우구스툴루스는 어린 아우구스투스’, 어린 황제라는 뜻이다).

 

이리하여 476년에 서방 로마 제국은 멸망했다. 동방 제국(비잔티움 제국)은 그 뒤에도 1000년 이상 더 존속했지만, 사실상 유럽 문명의 뿌리를 키운 로마는 서방 제국이었다. 그래서 로마 제국은 476년에 멸망했다고 말하는 게 일반적이다.

 

 

훈족의 병사 수백 년 동안 로마의 이었던 게르만족은 이제 늙고 병든 로마를 마구 물어뜯기 시작했다. 그러나 로마도, 게르만도 가장 두려워한 것은 바로 동방의 강맹한 민족인 훈족이었다. 게르만의 민족대이동을 촉발시킨 훈족은 5세기 중반 드디어 로마 본토에까지 침공한다. 그림은 이탈리아 전역을 공포로 떨게 한 훈족의 왕 아틸라가 부하들에 둘러싸여 있는 모습이다.

 

 

인용

목차

한국사 / 동양사

몰락의 시작

위기는 위기를 부르고

수명 연장조치

두 번째 의사

정치적 무기가 된 종교

제국의 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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