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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서양사, 3부 뿌리② - 5장 추락하는 제국, 몰락의 시작 본문

역사&절기/세계사

서양사, 3부 뿌리② - 5장 추락하는 제국, 몰락의 시작

건방진방랑자 2022. 1. 8. 0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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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장 추락하는 제국

 

 

몰락의 시작

 

 

번영과 몰락의 교체는 한순간이었다. 5현제의 끝, 그러니까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를 끝으로 로마 제국은 순식간에 쇠퇴 일로를 걷게 된다. 그러나 그 단초는 역설적이게도 아우렐리우스가 제공했다.

 

아우렐리우스는 5현제 중에서 유일하게 아들을 낳은 황제였다(로마 황제 모두를 통틀어도 아들을 낳은 경우는 상당히 드물다). 인지상정일까? 그는 몇 대째 지속되어온 양자 상속제를 파기하고 싶은 유혹에 빠져들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이 몇 대째 지속되어온 로마의 평화를 파괴하는 결과를 빚게 될 줄은 알지 못했다.

 

아버지가 현명하다고 아들도 현명할 수는 없다. 마르쿠스의 아들로 제위를 계승한 콤모두스(Commodus, 161~192)는 우선 아버지가 시작한 모든 정복 사업을 포기해버렸다. 하드리아누스처럼 내치에 주력하기 위해서? 천만의 말씀, 화려하고 사치스럽고 방탕한 생활을 즐기기 위해서다. 이런 지배자가 대개 그렇듯이, 그는 공포정치로 일관했다. 또한 그런 지배자가 대개 그렇듯이, 그는 얼마 못 가 친위대장에게 살해되었다.

 

여러모로 네로와 닮은 콤모두스, 그렇다면 그의 사후에 벌어지는 일도 네로와 닮아야 할 것이다. 과연 이번에도 제위 계승을 놓고 치열한 내전이 벌어졌다. 네로 시대에 베스파시아누스의 역할을 한 것은 아프리카 출신으로 처음 제위에 오른 세베루스(Lucius Septimius Severus, 146~211)였다. 무관 출신인 그가 군사독재를 꾀한 것은 당연하지만, 군사독재는 무력으로 집권한 것이기에 대개 정통성이 취약한 법이다. 그런데 세베루스가 권력의 정통성으로 삼은 것은 특이하게도 300년 전의 로마였다. 그는 마리우스와 술라를 계승하겠다고 공공연히 주장한 것이다.

 

어쨌든 세베루스는 군인으로서는 유능한 인물이었다. 그는 친위대를 개편해 권력의 물리적 기반을 다진 다음, 멀리 제국의 동쪽으로 달려가 여전히 로마에 굴복하지 않는 파르티아를 물리쳤다. 그러고는 숨 돌리기가 무섭게 이번에는 서쪽 끝으로 달려갔다. 브리타니아에서 반란이 일어난 것이다.

 

 

철학자 황제 이 위풍당당한 모습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팍스 로마나의 마지막을 장식한 황제였다. 그 자신이 철학자였으면서도 그는 양자 상속의 전통을 깨고 자신의 피붙이에게 제위를 물려주는, 현명하지 못한 짓을 저질렀다. 그것은 곧 제국의 몰락을 앞당기는 결과를 빚었다.

 

 

잊을 만하면 터져 나오는 속주 접경지대에서의 반란, 그러나 사정은 예전과 달랐다. 로마는 약해지고 있었고, 그에 반비례해 이민족들은 강해지고 있었다. 칼레도니아의 스코트족과 픽트족은 하드리아누스 장성을 부수고 브리타니아 남부까지 치고 내려왔다. 분노한 세베루스는 이 기회에 칼레도니아까지 점령해 브리타니아를 완전히 영토화할 마음을 먹었는데, 이것이 의욕 과잉이자 판단 실수였다. 그는 요크에서 전사함으로써 브리타니아에서 죽은 유일한 황제가 되고 말았다. 결국 브리타니아 속주의 경계선은 하드리아누스 장성으로 확정되었다(오늘날의 하드리아누스 장성은 당시 파괴된 이후에 재건된 것이다).

 

군사적 측면에서 세베루스는 베스파시아누스와 같은 역할을 담당했지만, 다른 면에서는 전혀 그렇지 못했다. 뛰어난 행정 능력을 겸비한 베스파시아누스와 달리, 세베루스는 오로지 군인이었다. 두 아들에게 전해진 그의 유언장에는 서로 합심해라, 병사들을 후대하라, 나머지는 모두 무시하라.”라고 되어 있었다.

 

세베루스의 아들 카라칼라(Caracalla, 188~217)는 첫째 유언을 무시하고 둘째와 셋째 유언만 지켰다. 몇 개월 동안 공동 황제로 있던 동생 게타를 죽이고 단독 황제가 되었고(그전에 그는 자기 장인도 살해한 터였다), 자신의 병사들을 비밀경찰로 만들어 공포정치를 실시했던 것이다. 짧은 재위 기간 내내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계승자로 자처하며 동방 정벌을 계획한 그는 그것을 실행에 옮기지도 못하고 군대의 손에 살해되었다. 그가 남긴 유일한 업적은 212년에 로마 시민권을 무제한으로 모든 속주민에게 확대 부여한 것인데, 실은 그 목적도 세금을 많이 거두어 자신의 병사들에게 봉급을 충분히 주기 위해서였다. 어쨌든 이것을 계기로 로마 본토 주민과 속주민 사이에 지위상의 구별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그가 의도하지 않은 발전이었다.

 

 

황제의 사치 5현제 시대 동안 억눌려왔던 황제의 사치와 방탕은 그 시대가 끝나자마자 화산처럼 분출했다. 그림은 오로지 자신의 군대만 특별히 배려하며 공포정치를 일삼았던 카라칼라가 지은 공중목욕탕의 복원도다. 황제의 품성과는 무관하게 이 목욕탕은 로마의 뛰어난 건축술을 보여주며, 당시 로마 시의 종합 오락 센터였다.

 

 

인용

목차

한국사 / 동양사

몰락의 시작

위기는 위기를 부르고

수명 연장조치

두 번째 의사

정치적 무기가 된 종교

제국의 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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