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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서양사, 3부 뿌리② - 5장 추락하는 제국, 두 번째 의사 본문

역사&절기/세계사

서양사, 3부 뿌리② - 5장 추락하는 제국, 두 번째 의사

건방진방랑자 2022. 1. 8. 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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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번째 의사

 

 

과연 강력한 권력이 사라지자 즉각 그 체제는 무너졌다. 체질상 전제군주에 맞지 않았고 정치적 야심도 크지 않았던 디오클레티아누스는 305년 홀연히 정계 은퇴를 선언하고 고향인 달마치야의 해변에 집을 짓고 은거해버렸다(그 무렵 그는 비록 예순 살의 노인이기는 했으나 권력의 절정에 있었고 경쟁자도 없었던 터라 그의 돌연한 은퇴는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

 

기둥이 빠져나갔으니 체제가 온전하기는 어려웠다. 그전부터 기미를 보이던 인플레는 더욱 걷잡을 수 없는 사태로 바뀌었다. 사람들은 화폐를 믿지 않고 현물 거래에 나섰다. 심지어 세금마저도 현물로 납부했다. 이 상태가 지속된다면 통화 체계가 무너질 테고, 제국의 경제가 송두리째 붕괴할 게 뻔했다.

 

그러나 더 직접적인 위협은 권력 승계의 문제였다. 최고 권력자가 사라진 마당에 4두 정치를 유지할 의지는 나머지 3두에게 없었다. 그렇다면 유일한 정제인 서방 황제 막시미아누스가 최고 서열이 아닐까? 그러나 그는 그럴 깜냥이 되지 못했다. 형님처럼 받들던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은퇴하자 마음도 허전하고 권력에도 불안을 느껴 곧장 그의 뒤를 따랐다(그는 2년 뒤 아들과 함께 다시 제위를 노리지만 콘스탄티누스에게 제압을 당한다).

 

부제 두 명, 즉 갈레리우스와 콘스탄티우스가 정제에 오르는 데는 별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부제의 후계자들, 즉 다음 부제를 임명하는 데는 격렬한 다툼이 있었다. 여기서 혜성처럼 등장한 인물이 바로 콘스탄티우스의 아들 콘스탄티누스(Constantinus, 280년경~337)였다.

 

니코메디아에 인질로 살고 있던 콘스탄티누스는 갈레리우스가 니코메디아의 주인이 되자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즉각 궁성을 탈출해 멀리 아버지가 있는 갈리아의 불로뉴로 갔다(지금의 터키에서 프랑스까지 간 셈이다). 그의 아버지는 마냥 반가웠다. 브리타니아 원정을 계획하고 있는 판에, 디오클레티아누스를 따라 이집트와 페르시아 원정에도 참가했던 베테랑 아들이 돌아온 것이다. 그러나 306년 콘스탄티우스는 아들과 함께한 브리타니아 원정에서 사망했다. 휘하 병사들과 갈리아 여러 속주의 총독들은 일제히 아들 콘스탄티누스를 황제, 그것도 서방 정제로 추대했다.

 

 

밀비우스 전투 전투 자체는 중요하지 않지만 밀비우스 전투는 로마 제국의 수명 연장을 위해, 더 중요하게는 유럽 문명의 줄기를 위해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이었다. 여기서 콘스탄티누스가 승리하지 않았다면 로마 제국은 일찌감치 분해되었을 테고, 그리스도교의 공인도 훨씬 늦어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화가 난 갈레리우스는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별도로 서방 정제와 부제를 임명했다. 이제 권력투쟁은 불가피해졌다. 하지만 아직 열세라고 느낀 콘스탄티누스는 갈리아와 브리타니아에 머물면서 힘을 길렀다. 311년 갈레리우스가 병사한 것은 그에게 신호탄이 되었다. 그 이듬해 로마 정복을 결심한 콘스탄티누스는 밀비우스 다리의 전투에서 예상을 뒤엎고 승리함으로써 실력으로 서방 정제의 자리를 차지했다. 뒤이어 324년에 그는 동방 정제인 리키니우스마저 죽이고 제위에 올랐다. 디오클레티아누스의 4두 정치 이후 무려 40년 만의 단독 황제였다.

 

세력의 근거지를 서방에 두고 있던 콘스탄티누스였으나 그의 마음은 늘 동방에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행정의 중심은 수백 년 동안이나 서방(로마 시)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경제와 문물의 중심은 동방이었던 것이다(더구나 그의 고향은 발칸의 나이수스였다). 그가 보기에 그간 로마가 수많은 어려움과 위기를 겪었던 이유는 정치적 중심과 경제적 중심이 달랐기 때문이다. 그래서 330년에 그는 로마 제국 역사상 처음으로 천도를 결심하기에 이르렀다. 새 수도는 동방에 있어야 하고 기존의 대도시가 아니어야 한다는 게 천도의 원칙이었다. 그렇게 해서 결정된 새 수도는 유럽과 아시아의 중간인 옛 비잔티움의 터전에 건설되었으며, 황제의 이름을 따 콘스탄티누스의 도시, 즉 콘스탄티노플(지금의 이스탄불)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콘스탄티누스의 지배 체제는 기본적으로 디오클레티아누스와 다르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전제 체제를 더욱 강화하고 게르만 용병 부대로 이루어진 친위대를 증강해 처음부터 반란의 가능성을 차단하고자 했다. 행정제도에서는 추밀원을 새로 구성했다. 그전까지는 황제의 임명으로 구성되는 자문 기구가 있었으나 추밀원은 정부 각 부서의 장들이 참여하는 회의체였으므로 오늘날의 내각처럼 한층 발달한 관료 기구였다.

 

경제적인 측면에서는 무엇보다 인플레이션을 잡는 게 급선무였다. 콘스탄티누스는 유명무실해진 은화를 버리고 솔리두스라는 금화를 새로 만들었다. 현물 경제는 여전히 지속되었지만 솔리두스는 금화인 덕분에 통화 가치를 잃지 않았으므로 그런대로 인플레이션을 억제하는 효과가 있었다.

 

 

콘스탄티누스의 노력 역사적 의의로는 그리스도교를 공인한 게 최고의 업적이겠지만, 그 밖에도 콘스탄티누스는 솔리두스라는 금화를 만들어 물가를 안정시켰고, 콘스탄티노플을 건설해 제국의 수도를 동유럽으로 옮겼다. 그러나 결국 그의 조치는 제국의 수명을 잠시 연장한 임시방편에 불과했다. 왼쪽은 그의 시대에 제조된 금 펜던트이고 오른쪽은 콘스탄티누스의 흉상이다.

 

 

인용

목차

한국사 / 동양사

몰락의 시작

위기는 위기를 부르고

수명 연장조치

두 번째 의사

정치적 무기가 된 종교

제국의 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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