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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사, 3부 뿌리② - 5장 추락하는 제국, 정치적 무기가 된 종교 본문

역사&절기/세계사

서양사, 3부 뿌리② - 5장 추락하는 제국, 정치적 무기가 된 종교

건방진방랑자 2022. 1. 8. 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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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치적 무기가 된 종교

 

 

디오클레티아누스와 콘스탄티누스라는 뛰어난 의사가 연이어 출현한 덕분에 로마 제국은 늙고 병든 몸으로나마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디오클레티아누스에 비해 콘스탄티누스의 개혁은 그다지 새로울 게 없었고, 제국의 골간을 이루는 농민들의 삶을 낫게 해준 것도 없었다(오히려 그는 세금 부담을 늘렸고, 콜로나투스를 더욱 강화했다). 그런데도 후대의 역사가들은 콘스탄티누스를 그냥 황제라고 부르지 않고 대제(大帝)라고 부른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물론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도 그런 호사스런 칭호를 얻지는 못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313년의 밀라노 칙령이 없었다면 콘스탄티누스는 그저 그런 황제로 역사에 남았을 것이다. 밀비우스 전투에서 승리해 서방 정제가 된 이듬해에 그는 밀라노 칙령을 내려 그리스도교를 공인했다. 이것은 로마 제국이 서양 문명의 뿌리로서 마지막으로 기여한, 그러나 가장 중요한 공헌이었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밀비우스 전투를 앞둔 3121028일 저녁에 콘스탄티누스는 하늘에서 저무는 해의 바로 위에 십자가가 나타난 것을 보았다고 한다. 그 십자가에는 ‘Hoc Vince(정복이 끝났노라)’라는 글자가 쓰여 있었다. 병사들과 함께 있었으니 본 사람이 아주 많은데다, 훗날 콘스탄티누스는 에우세비오스라는 신학자(그는 콘스탄티누스의 전기를 썼다)에게 자기가 본 것이 사실이라고 맹세까지 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교 학자들이 기적이라고 부르는 것도 당연하다.

 

이것이 사실인지 거짓인지, 아니면 환영인지 사기극인지는 확인할 길이 없으나, 어쨌든 콘스탄티누스는 그리스도교를 공인함으로써 이후 서구의 역사, 특히 중세의 형성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그러나 그가 밀라노 칙령을 내린 배경에는 그렇게 종교적인 요소만이 있었던 게 아니다.

 

그리스도교 역사가들 덕분에 콘스탄티누스가 대제로 기록되었듯이, 그들 덕분에 폭군의 대명사로 기록된 네로가 로마 황제로 있던 시절(1세기)에 그리스도교는 팔레스타인에서 유대교를 모태로 탄생했다(물론 그리스도교의 창시자인 그리스도는 아우구스투스 시대에 태어났지만 그리스도교가 종교의 골격을 갖추고 전파되기 시작한 것은 그의 사후부터다). 생겨날 당시만 해도 그리스도교는 성서에 나오는 12사도 등 일부 마니아들만 믿는 컬트적 종교였고, 유대교도들로부터도 인정을 받지 못했다. 12사도보다 그리스도교의 포교에 더욱 큰 공헌을 한 인물은 바울(바오로)이었다. 그는 유대교에서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뒤 지중해 동부 일대를 돌아다니며 이 신흥종교를 널리 알렸다(후대에 바울은 그 공로로 사도와 동급의 반열에 오르게 된다).

 

 

역설적인 이야기지만, 바울이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그리스도교는 박해를 받지 못했을 테고 세계 종교로 자라나지도 못했을 것이다. 로마는 전통적으로 다른 종교에 관용적이었으나 그리스도교가 크게 세력을 키우자 아연 긴장하고 3세기부터는 대대적인 탄압에 나섰다. 교세가 확장될수록 탄압의 강도도 심해졌다. 무릇 종교란 탄압이 심할수록 더욱 확산되게 마련이다. 순교자의 수가 늘어날수록 그만큼 그리스도교의 기반은 공고해졌다당시 순교자들은 후대에 그리스도교 세상이 되었을 때 성인으로 존경받게 된다. 그래서 그들의 이름은 오늘날 서양인의 이름에도 전승되었다. 편의상 영어식 이름만 살펴보면, 비틀스 멤버들의 이름인 존, , 조지를 비롯해 피터, 지미, 조셉, , 스티븐, 그레그, , 앤디, 데이비드, 크리스, 앤터니, 니컬러스, 저스틴, 패트릭, 메리, 제인, , 루시, 실비아, 캐서린 등등 그리스도교와 관련된 남녀의 이름들은 극히 많다. 서양 이름의 또 다른 계통은 중세의 왕들에게서 비롯되었다. 헨리(앙리, 하인리히, 엔리케), 찰스(샤를, 카를, 카를로스), 윌리엄(빌헬름, 기욤, ), 에드워드(에두아르, 에드바르트, 에디), 리처드(리하르트, 리치), 앨프레드(프레드, 프레디) 등의 이름들이 그것이다. 교회와 사제, 주교, 부제 등의 교직도 생겨났다. 초기의 어려움은 순전히 신앙의 힘만으로 이겨내야 했으나 그다음부터는 조직으로 버틸 수 있게 되었다. 바야흐로 그리스도교는 이제 세계 종교로서 첫발을 내딛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박해는 끊이지 않았다. 303년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칙령을 내려 그리스도교도들을 대량 학살했는데, 이것이 최대의 박해로 기록된 사건이다. 자신을 살아 있는 신이라고 주장하고 전통 종교의 최고신인 유피테르가 현신한 존재라고 선언한 디오클레티아누스로서는 그리스도교를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을 것이다(로마 제국을 위해서는 더 공적이 컸던 그가 대제라는 호칭을 콘스탄티누스에게 빼앗긴 이유는 여기에 있다).

 

그로부터 불과 10년 만에 그리스도교가 공인되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 권력투쟁의 후발 주자로서 위험한 승부를 벌이고 있었던 콘스탄티누스는 신흥 세력에 의지하지 않으면 승리할 수 없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하늘에서 십자가를 목격한 사건은 그 목적을 위해 조작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보면 밀라노 칙령은 고도의 정치적 게임이었다.

 

콘스탄티누스의 측근들 중에 그리스도교도가 많은 것은 사실이었으나 정작 그 자신은 죽기 직전에 세례를 받았다. 또한 그는 개인적으로 그리스도교에 관심이 크고 우호적이었으면서도 다른 종교들에 관해서도 관용을 취했다. 어쨌든 그리스도교를 공인한 만큼 그는 이 신흥 종교를 널리 전파하기 위한 여러 가지 후속 조치를 시행했다. 성직자가 행정상의 의무에서 면제된 것이라든가, 교회 건축이 활성화된 것이 그런 예다. 하지만 초기 그리스도교에 대한 그의 공헌은 따로 있었다. 밀라노 칙령에 뒤이어 그의 두 번째 종교적 공로는 단독 황제에 오른 이듬해인 325년에 개최한 니케아 공의회였다.

 

그리스도교의 역사가 수백 년에 이르자 자연히 종파도 여럿이 생겨나게 되었다. 어려운 시절에는 종파의 대립이 두드러지지 않았으나 오히려 공인을 받은 뒤부터 종파들 간에 첨예한 대립이 생겨났다. 특히 4세기 초의 사제인 아리우스(Arius, 250년경~336)는 신과 그리스도가 본질적으로 같지 않다는 문제를 제기했다. 그리스도는 아버지 신처럼 영원한 존재가 아니라 특정한 시대에 신이 세계의 구원을 위한 도구로 창조한 존재라는 주장이었다. 말하자면 그리스도는 구약성서에 자주 등장하는 예언자 급의 인물일 뿐 신과 혈통적 관계는 없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는 신격을 유지하지 못하게 될뿐더러 처음부터 선을 긋고 출발한 유대교와 다를 바가 없어지므로 아리우스의 주장은 커다란 문제였다. 반격이 필요할 때 총대를 멘 사람은 알렉산드리아의 주교인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293년경~373)였다. 그는 아버지인 신(성부)과 그 아들인 그리스도(성자), 성령의 세 위격(位格)이 본질적으로 하나라는 삼위일체설을 주장했다.

 

그러나 콘스탄티누스는 종파들 간의 대립이 격화되자 조바심을 느꼈다. 거센 반대를 무릅쓰고 자신이 공인한 그리스도교가 분열과 대립으로 약화된다면 그로서도 큰 위기였던 것이다. 교회가 단일 제국의 정신적 지주로서 역할하려면 결코 분열되어서는 안 되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교리상의 문제가 아니라 단결과 통합이었다324년 콘스탄티누스가 아리우스에게 보낸 친서에는 이 종교 논쟁을 바라보는 그의 시각이 드러나 있다. “양측의 차이점이 생겨난 근원과 토대를 성실하게 연구한 결과, 나는 그 원인이 그렇게 격렬한 다툼이 필요 없을 만큼 아주 사소하고 보잘것없는 것이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 그러니 이제 양측은 인내심을 발휘하여 여러분의 동료[콘스탄티누스]가 보내는 충고를 받아들여주십시오.”. 그래서 그는 최초의 종교회의인 니케아 공의회를 열기로 했다(지역적 종교회의는 그전에도 있었으나 전 지역을 한데 모은 종교회의는 처음이었다).

 

아리우스파는 아타나시우스파는 아무래도 좋다. 중요한 건 이 자리에서 결론을 봐야 한다는 거다. 이런 마음으로 콘스탄티누스는 회의의 개회사를 하고 중립적 진행을 맡았다. 한 달간의 격론 끝에 승리한 것은 아타나시우스파였고, 패배한 아리우스파는 이단으로 몰렸다. 그러나 아타나시우스파는 종교적 승리자일 뿐이었고, 진정한 승리자는 콘스탄티누스였다. 어쨌든 결론이 났으니까. 그가 가장 우려한 사태는 무승부였을 뿐이다(그는 죽기 직전에 아리우스파의 세례를 받았다고 한다)니케아 공의회는 꼬박 한 달 동안 열렸으며, 유럽 전역에서 약 300명가량의 주교들이 참석했다. 회의에서는 이단 문제 이외에도 부활절의 날짜를 확정하는 문제 등이 논의되었다. 회의가 끝난 뒤 콘스탄티누스는 성대한 연회를 열어 주교들의 노고를 치하했으며, 돌아가는 주교들에게 선물 꾸러미를 한 아름씩 안겼다. 콘스탄티누스는 선물을 받은 주교들보다 더 기뻤을 것이다. 아타나시우스파의 주교들보다 더 큰 성공을 거둔 것은 바로 그였으므로.

 

이단으로 판정받고 로마 제국에서 추방된 아리우스파는 이후 게르만족에게 퍼졌다. 그러나 나중에 게르만족이 로마를 멸망시키고 역사의 방향키를 쥐게 되는 것을 고려한다면, 아타나시우스파보다 오히려 아리우스파가 그리스도교 세계의 형성에 더 큰 공헌을 한 셈이다.

 

 

최초의 종교회의 콘스탄티누스가 소집한 니케아 공의회는 최초의 대규모 종교회의였다. 로마 제국 전체의 주교들이 모인 것은 아니었고 동방교회의 성직자들이 대부분이었으나, 이 회의는 콘스탄티누스의 목적을 충족시켜주기에 충분했다. 그림은 6세기에 그려진 니케아 공의회의 장면이다.

 

 

인용

목차

한국사 / 동양사

몰락의 시작

위기는 위기를 부르고

수명 연장조치

두 번째 의사

정치적 무기가 된 종교

제국의 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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