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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사, 6부 열매① - 1장 영토와 주권의 의미, 영토 국가의 선두 주자 본문

역사&절기/세계사

서양사, 6부 열매① - 1장 영토와 주권의 의미, 영토 국가의 선두 주자

건방진방랑자 2022. 1. 9. 1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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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토 국가의 선두 주자

 

 

중세의 해체는 변방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서쪽 변방(이베리아)에서 대항해시대가 열리고, 남쪽 변방(이탈리아)에서 르네상스가 빛나고, 동쪽 변방(독일)에서 종교개혁의 파도가 휩쓰는 동안, 서유럽의 전통적 중심지인 프랑스는 상대적으로 조용했다. 물론 바깥에서 볼 때 그랬다는 이야기다. 원래 변방에서는 변화를 추구하지만 중심에서는 안정을 추구하게 마련이다. 사방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새로운 질서를 모색하는 가운데서도 프랑스에서는 의연히 중세의 절정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중세의 절정이라면 분권화의 완성? 그렇지는 않다. 분권화가 중세의 커다란 특징인 것은 분명하지만, 유럽 전체를 놓고 볼 때 그런 것이고, 각 지역별로는 중앙집권화를 향한 완만한 흐름이 이어지고 있었다. 중세의 분권화는 원시 사회에서와 같은 단순한 분권화가 아니다. 아무리 봉건 영주들이 독립국처럼 행세한다 하더라도 어차피 지역적으로 서열은 지어지게 마련이며, 이 서열은 중심을 지향할 수밖에 없다. 다만 중세에 그런 변화가 서서히 전개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교황이라는 가상의중앙집권체가 존재했기 때문이다. 아비뇽 교황청 시대 이후 프랑스는 그 가상을 일찌감치 떨쳐버렸으니, 그런 점에서 보면 오히려 프랑스는 가장 먼저 종교개혁을 이룬 나라인지도 모른다.

 

15세기 중반 백년전쟁이 끝나면서 프랑스는 프랑스 내의 영국 왕실 영토를 완전히 없애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아직도 프랑스에는 영토 문제가 남아 있었고, 서유럽의 다른 지역들과는 달리 그 문제를 가장 시급하게 여겼다. 서유럽의 중심답게 프랑스는 가장 일찍 영토 국가의 길로 나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세계사적으로는 그 시대에 다른 데서 벌어진 사건들, 즉 항로 개척과 르네상스, 종교개혁이 더 중요하겠지만, 그 역사적 흐름을 주도한 나라들보다 프랑스가 더 전형적인 서양의 역사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프랑스는 맨 먼저 근대국가의 체제로 향했기 때문이다(영국도 비슷한 행보를 보였지만 영국의 경우 체제상의 내적 요인보다 섬이라는 지리적 요인이 컸다).

 

백년전쟁은 프랑스 서부의 영토를 말끔하게 구획 정리해주었다. 그럼 이제 남은 것은 동부다. 동부의 영토 문제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북부에서는 부르고뉴 공국과의 문제(1445쪽 주 참조), 중부와 남부에서는 신성 로마 제국 및 북부 이탈리아 자치도시들과의 문제다길게 보면 이 무렵 프랑스의 영토 문제는 600년 전 프랑크 왕국이 분열될 때 생겨난 문제의 최종 마무리에 해당한다. 9세기 베르됭 조약에서 중부 프랑크를 모태로 출발한 프랑스는 백년전쟁으로 옛 서프랑크 영토를 완전히 손에 넣었고(그때까지 수백 년 동안 이 지역에는 앙주, 툴루즈 등의 봉건 왕조들이 지배했으므로 엄밀히 말해 프랑스의 역사가 아니었다), 이제는 동프랑크의 영토 문제가 남은 것이다. 물론 좋게 말해서 문제이고 실은 분쟁이다.

 

샤를 7세의 아들로 프랑스 왕위를 계승한 루이 11(1423~1483, 재위 1461~1483)는 먼저 부르고뉴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그러나 플랑드르 르네상스를 지원해 후대의 역사가들에게서 유럽의 대공이라는 영예로운 별명으로 불리는 부르고뉴의 영주 필리프 2세는 발루아 가문의 새까만 후배인 루이 11세가 걸어오는 시비에 신경 쓰지 않았다. 필리프 2세는 문화와 학문을 애호하는 군주였는데, 대개 이런 군주는 정치적으로 무관심하거나 무능하게 마련이다. 하지만 그의 아들 샤를은 달랐다. 1467년 아버지의 뒤를 이은 샤를은 프랑스 왕가의 영향력을 벗어나 부르고뉴를 독립 왕국으로 발전시키려는 움직임을 보였다당시 부르고뉴 가문은 서유럽 전체에서 프랑스 왕가인 발루아 가문 다음으로 세력이 컸다. 부르고뉴는 5세기에 독일 중부에 있었던 게르만 왕국인 부르군트에서 유래했고, 9세기 메르센 조약에서 맏아들인 로테르의 영지로 분봉되었을 만큼 전통과 연혁이 오랜 지역이다. 카페 왕조 시절부터 부르고뉴는 프랑스 왕실과 밀접한 연관을 맺었으며, 백년전쟁이 한창이던 14세기 중반에 영주의 대가 끊기자 다시 발루아 혈통을 영주로 삼았다. 특히 필리프 2세 때 부르고뉴는 네덜란드와 룩셈부르크까지 지배했는데, 아직 자국 내의 영국령도 차지하지 못한 프랑스에 결코 뒤지지 않는 국력을 자랑했다.

 

 

부르고뉴의 파티 프랑스의 압박을 받자 부르고뉴는 자연히 합스부르크 쪽으로 기울었다. 그림은 1473년 부르고뉴와 합스부르크의 왕가가 모여 파티를 벌이는 장면이다. 그러나 이 파티가 열리고 얼마 뒤 부르고뉴는 프랑스와 합스부르크로 분할, 통합되면서 역사 지도에서 지워지고 말았다(오늘날 부르고뉴에 해당하는 나라는 벨기에다).

 

 

샤를의 시도가 성공했더라면 오늘날 벨기에는 부르고뉴로 불렸을지도 모른다. 19세기에 부르고뉴 땅(그리고 네덜란드 연방 공화국에 반대한 남부의 가톨릭 주들)에는 벨기에라는 독립국이 세워지니까. 하지만 루이 11세는 에스파냐와 영국, 독일의 영방군주들과 결탁해 집요하게 샤를을 압박했다. 마침내 1477년 샤를이 전사함으로써 부르고뉴의 독립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샤를의 딸 마리아는 자신을 며느리로 삼으려는 루이 11세의 압력을 거부하고 합스부르크의 막시밀리안 1세를 선택했지만 국제적 긴장 관계 속에서 선장을 잃은 부르고뉴호는 온전할 수 없었다. 결국 부르고뉴는 둘로 나뉘어 각각 프랑스와 합스부르크 제국의 영토가 되었다(바꾸어 말하면 부르고뉴는 완전히 해체되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이제 프랑스의 영토 문제는 북이탈리아에 대한 지배권을 놓고 신성 로마 제국의 합스부르크와 한판 승부를 벌이는 것만 남았다. 당시 프랑스 왕인 프랑수아 1세는 특히 적극적으로 나왔다. 앞서 보았듯이 그가 신성 로마 제국의 제위를 놓고 카를 5세와 겨룬 것도 실은 북이탈리아의 영토 문제가 원인이었다. 황제 선거에서 패배한 뒤 그는 힘으로 역전을 이루기 위해 이탈리아의 파비아에서 합스부르크와 맞붙었으나 여기서도 패하고 그 자신은 포로로 잡히는 치욕까지 겪었다. 결국 이 문제는 그가 죽고 나서 1559년 카토-캉브레지 조약으로 해결되었다. 그런 점에서 이 조약은 9세기 베르됭 조약이 남긴 숙제를 600년만에 해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프랑수아가 이탈리아에 집착한 이유는 일단 영토 문제가 컸지만 그가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학문과 예술에 심취한 탓도 있었다. 그는 당시 프랑스 군주로서는 드물게 르네상스의 도입에 적극적이었으며, 이탈리아 학자들을 궁정에 초청하기도 했다그 일환으로 프랑수아는 1546년에 루브르 궁전을 짓기 시작했다. 이 궁전은 나중에 계속 증축되었고 17세기부터 미술품이 소장되지만 건축 당시부터 그렇게 사용할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프랑수아는 루브르를 짓기 30년 전인 1516년에 예순네 살의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프랑스로 초청했고, 그가 세상을 떠난 뒤에는 그의 걸작 모나리자를 사들였다. 현재 이 작품은 루브르에 소장되어 있다. 특히 오늘날 자국어에 유달리 자부심을 가지는 프랑스 국민들은 프랑수아에게 감사해야 할 것이다. 그는 라틴어 대신 프랑스어를 공용어로 사용하도록 만들었으니까.

 

그러나 호방한 무인 기질과 섬세한 문인 기질을 함께 갖춘 프랑수아도 신교에 대해서만큼은 용납하지 않았다. 적수인 합스부르크 가문이 로마 교황청을 지지했으니 그로서는 신교를 지원할 법도 한데, 전혀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전통적으로 프랑스가 신성 로마 제국보다 더 로마 가톨릭의 세속적 하수인과 같은 역할을 충실히 담당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만약 프랑수아가 종교개혁의 바람을 받아들이고 합스부르크와 대결했더라면 더 승산이 크지 않았을까? 어차피 프랑스는 곧이어 엄청난 종교전쟁의 회오리에 휘말리게 되니 말이다.

 

 

프랑스의 르네상스 프랑스는 북이탈리아나 플랑드르에 비해 르네상스가 크게 발달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프랑수아 1세 때는 프랑스 르네상스의 전성기였다. 사진은 그의 시대에 르네상스 양식으로 건축된 퐁텐블로 궁전이다. 이후 이 궁전은 루이 14세가 낭트 칙령을 철폐하고 19세기 초 나폴레옹이 폐위되는 등 굵직한 역사적 사건들의 무대가 된다.

 

 

인용

목차

한국사 / 동양사

누더기 제국

세계 진출의 계승자

영토 국가의 선두 주자

종교전쟁의 개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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