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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사, 6부 열매① - 1장 영토와 주권의 의미, 누더기 제국 본문

역사&절기/세계사

서양사, 6부 열매① - 1장 영토와 주권의 의미, 누더기 제국

건방진방랑자 2022. 1. 9. 1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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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장 영토와 주권의 의미

 

 

누더기 제국

 

 

거의 동시에 진행된 르네상스와 항로 개척, 종교개혁을 통해 서유럽 세계는 중세의 흔적을 걷어내고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는 출발선에 서게 되었다. 아직은 다가오지 않았지만, 그 새로운 시대란 곧 서유럽 각국이 근대적인 영토와 주권을 가진 국가로서 발돋움하면서 서로 국력을 키우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이게 되는 시대, 지금의 서양과 직접적으로 연관된 시대를 가리킨다. 그럼 그 이전의 국가들은 그렇지 않았던가?

 

중세의 국가들은 엄밀한 의미에서 영토 국가도, 주권국가도 아니었다. 영토는 있었지만 오늘날과 같이 국경선으로 꼼꼼히 구획된 개념의 영토가 아니라 봉건 영주의 지배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점() 개념의 영토였다이는 일찍부터 선() 개념의 영토 국가가 성립한 동양의 경우와 대조를 보인다. 중국은 대륙을 최초로 통일한 진() 제국 때부터 영토 개념이 분명했으며, 한반도의 경우에는 고려 중기 윤관(尹瓘)의 북방 정벌이 이루어진 때부터 분명한 영토 국가를 이룬다(이때도 중국의 한 지방이라는 의미가 강했지만 통일신라시절보다는 중국과의 일체감이 약했다). 물론 서양의 봉건 군주들이라고 해서 땅 욕심이 적었던 것은 아니다. 다만, 그네들은 동양처럼 강력한 중앙집권력이 없었기에 영토 국가의 성립이 늦었을 뿐이다. 영주의 세력에 따라 크고 작은 차이는 있었으나 선() 개념의 국경선은 없었다. 영토가 선으로 확정되지 않았으므로 주권도 불분명했다. 주권의 주인은 물론 봉건 영주였지만(‘주권sovereignty’이라는 말도 봉건 군주를 뜻하는 프랑스어 souverain에서 비롯되었다), 그 주권이 어디까지 미치는지가 확실치 않았다. 예를 들어 툴루즈 백국이나 작센 공국의 주권이 정확히 어느 곳, 어느 백성에게까지 미치는지는 툴루즈 백작과 작센 공작 자신도 알지 못했다. 고대부터 영토 국가의 면모를 가졌던 동양식 왕국과 달리, 서양의 중세 왕국은 기본적으로 도시국가의 체제였다. 서유럽에 수천 개의 도시가 있었다면 곧 수천 개의 왕국이 있었던 것이나 다름없다.

 

이렇게 극도로 분립적인 서유럽 세계가 그런대로 통합성을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교황과 교회의 덕분이었다. 세속의 영역은 무수히 나뉘어 있었어도 신성의 영역은 하나였고, 세속 군주들은 교황의 영적 지배(아울러 그에 따르는 어느 정도의 세속적 지배)를 나름대로 인정하고 있었다. 이렇게 보면 중세의 서유럽 세계는 한편으로는 수천 개의 나라로 분열되었다고 볼 수도 있지만, 다른 편으로는 각 봉건 군주가 내정의 자치권만 가진 채 외교권을 교황에게 맡겨두고 있는 하나의 거대한 제국이었다고도 볼 수 있다. 여기서 교황은 각국 간의 분쟁과 갈등을 해결하는 국제 질서의 조정자라는 역할을 맡았다(29쪽에서 말한 토르데시야스 조약 같은 경우가 그런 사례인데, 교황의 조정 기능은 교황의 인물됨과 무관하게 오로지 지위에서 나오는 기능이다).

 

따라서 종교개혁으로 교황권이 몰락한 것은 단순히 종교상의 문제만이 아니었다(그랬다면 종교개혁은 종교사에서만 다루어도 충분할 것이다). 그것은 중세라는 틀을 유지해온 국제 질서의 중심이 무너진 것이다. 이제 서유럽 각국은 스스로의 의지와 힘으로 새로운 국제 질서를 만들어야 했다. 그 과정이 20세기까지 지속되었으므로 중세 이후는 하나의 시대로 묶을 수 있다(나중에 보겠지만, 정확히 한정하면 2차 세계대전이 그 종착역이다. 전후 지금에 이르는 현대사는 서양의 입장에서 보면 500년 만에 새로운 국제 질서, 서양만이 아니라 전 세계를 아우르는 질서를 만들어가는 과정이다).

 

 

동아시아에는 중국이라는 국제 질서의 중심이 있었으므로 서양처럼 분권화되지 않았다. 제국이 있다면 국제 질서가 수직적으로 일사불란하게 편제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서양의 중세에도 제국이 없지는 않았다. 그것도 교황이 지배하는 영적인 제국이 아니라 현실의 제국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었다. 그게 바로 신성 로마 제국이 아닌가? 물론 이것이 신성하지도 않았고, ‘로마와도 무관했으며, ‘제국도 아니었음은 앞에서도 본 바 있다. 그러나 이 기묘한 제국이 제국의 명패를 되찾으려 하면서 제국도 원치 않은 새로운 국제 질서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15세기 중반 프리드리히 3세가 제위에 오르면서 합스부르크 가문은 황제 자리를 세습하게 된다. 그전까지 신성 로마 제국의 제위를 세습하던 가문은 작센과 잘리에르, 호엔슈타우펜 등 세 개가 있었지만, 합스부르크 가문은 그들과 질적으로 달랐다. 물론 유전자나 체질의 면에서 다르다는 게 아니라 시대적 배경에서 차이가 있다는 이야기다. 15세기 중반이라면 중세가 거의 해체되고 서유럽 각국이 새로운 개념의 국가를 형성해가던 와중이니까.

 

앞에서 본 것처럼(80쪽의 주) 프리드리히 3세는 통혼이라는 대단히 육탄적인 정책을 구사했는데, 당시 상황에서는 매우 적절하고도 효과적인 외교술이었다. 이름만 제국일 뿐 프랑스와 영국 같은 전통의 강국, 나아가 에스파냐 같은 후발 주자보다도 국력이 약한 신성 로마 제국(독일)이 일약 강국의 반열에 오르게 된 것은 바로 그 정책 덕분이다.

 

프리드리히 3세와 그 아들 막시밀리안 1세의 대를 이은 통혼 정책으로 합스부르크 가문은 다음 황제인 카를 5세 때에 이르러 에스파냐에서 헝가리에 이르는 대제국을 이루게 된다. 그러나 동서로 2000킬로미터가 넘는 이 지역을 전부 통솔한 것은 아니었을 뿐 아니라 제국에 걸맞은 중앙집권력도 부족했다. 그러므로 합스부르크 제국의 실체는 여기저기 천 조각들을 기워 만든 누더기 제국이나 다름없었다(‘통혼으로 만든 제국의 한계다). 그래도 누더기라면 그중에 좋은 조각도 있을 터이다. 그곳은 어딜까? 단연 에스파냐다. 당시 에스파냐는 신대륙에서 유입된 막대한 양의 금과 은을 밑천 삼아 서유럽 세계의 새로운 경제 중심지로 떠오르고 있었다. 카를 5세가 신성 로마 제국의 전통적 중심지인 오스트리아를 버리고 에스파냐에 오랫동안 머문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지역에서 국가 13~15세기 무렵의 서유럽이다. 당시에는 거의 개별적인 나라를 이루었던 지형들이 오늘날에는 대부분 지역이나 도시 이름으로 바뀌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주의할 것은, 아직까지는 선적 개념의 영토 국가가 확실히 자리 잡지 못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 시기부터는 서서히 주권과 영토의 개념을 각인한 지배 세력들이 출현하고 그에 따라 오늘날과 같은 국경선국가의 모습이 등장하게 된다.

 

 

그러나 합스부르크 제국에는 적이 많았다. 우선 카를 5세와 제위를 놓고 싸운 프랑스가 전통의 적수였고, 종교개혁으로 생겨난 신교 영방군주들도 만만치 않았으며, 헝가리 부근까지 손에 넣고 오스트리아를 위협하고 있는 당대 세계 최대의 강국인 튀르크의 오스만 제국은 감당하기 어려운 강적이었다. 전통적으로 신성 로마 제국의 지원 세력이던 독일 영방군주들마저 신교와 구교로 분열된 상황이었으므로, 합스부르크 제국은 오로지 에스파냐의 경제력만을 바탕으로 그 세 적과 싸워야 했다.

 

결과는 비참했다. 1529년 빈을 포위한 튀르크군은 간신히 물리쳤으나서양의 역사를 통틀어 보면 어려운 처지에서도 용케, 혹은 운 좋게 동양의 침략을 막아낸 경우가 자주 있었다. 기원전 5세기에 객관적인 전력에서 절대 열세인 그리스가 페르시아 전쟁에서 승리한 것, 8세기 초반 비잔티움 제국이 유럽의 동쪽 끝에서 이슬람을 막아내고 프랑크가 서쪽 끝에서 방어한 것이 용한 경우라면, 5세기에 로마를 침입한 훈족이 교황 레오 1세의 설득으로 철수한 것이라든가 13세기 몽골군이 본국 사정으로 스스로 물러난 것은 운이 좋았던 경우다. 합스부르크 제국이 당대 최강인 오스만튀르크의 침략을 빈에서 물리친 것도 그런 예에 속한다. 그 전쟁들 가운데 어느 한 전쟁에서라도 패배했더라면 오늘날의 서양은 없었을지 모른다1538년 지중해에서는 튀르크 함대에 패배했고,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화의에서는 루터파 군주들에게 양보해야 했다. 게다가 북이탈리아에 대한 영향권을 놓고 벌인 프랑스와의 다툼에서도 제국은 승리하지 못했다. 1559년 카토-캉브레지 조약에서 북이탈리아는 가까스로 유지했으나 라인 강변의 요지들을 송두리째 프랑스에 내준 것이다(이 문제는 알자스-로렌 분쟁으로 이어져 19세기 말까지 두고두고 프랑스 - 독일 간의 대립을 야기한다).

 

카를 5세는 아우크스부르크 화의 이듬해인 1556년에 동생인 페르디난트 1세에게 제위를 물려주고, 에스파냐의 왕위는 아들인 펠리페 2(Felipe II, 1527~98, 재위 1556~98)에게 물려준 다음 정계에서 은퇴해버렸다. 이로써 한동안 엉성하게나마 세계 제국을 이루었던 합스부르크 제국은 사라지고, 오스트리아와 에스파냐는 다시 원래의 독립국으로 분리되었다. 서유럽 최대의 부국 에스파냐의 왕이 된 펠리페 2세는 여러 대째 지속된 합스부르크 가문의 새로운 전통, 즉 통혼 외교를 계속 전개하면서 근대로 향하는 서유럽 세계의 패자를 꿈꾼다. 그러나 이미 낡은 수법에 의존한 데서 짐작할 수 있듯이, 그는 자신의 나라 에스파냐와 더불어 유럽 역사의 무대에서 끝내 주연의 문턱에 오르지 못하고 조연에 그칠 운명이었다.

 

 

영욕의 펠리페 카를 5세의 아들로 에스파냐 왕위에 오른 펠리페 2세의 초상이다. 40년이 넘는 재위 기간 동안 그는 에스파냐를 일약 유럽의 강국으로 성장시켰으나, 그것은 그의 치적이라기보다 신대륙에서 유입된 경제적 부에 힘입은 바가 컸다. 결국 그의 만년에 에스파냐는 무적함대를 잃으며 몰락하기 시작한다.

 

 

인용

목차

한국사 / 동양사

누더기 제국

세계 진출의 계승자

영토 국가의 선두 주자

종교전쟁의 개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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