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유럽을 낳은 전쟁
화재를 부른 불씨
절충과 타협은 원래 문제의 근본적 해결 방식이 아니다. 잘되어야 문제를 오래 묶어둘 뿐이고, 잘못되면 문제를 더욱 키우게 된다. 전형적인 절충과 타협이었던 1555년의 아우크스부르크 화의가 바로 그랬다. 가장 큰 불씨는 바로 루터파에 한해서만 신앙의 자유를 허용했다는 점이다. 보수적인 황제파와 가톨릭 측은 당장 불거진 루터파 영방군주들의 불만을 달래는 방식으로 문제를 덮으려 했으나 그것은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도 막지 못할 문제로 키우는 꼴이 되고 말았다(만약 시대의 추세를 따라 완전한 신앙의 자유를 허용했더라면 적어도 종교의 외피를 두른 문제는 더 이상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가톨릭의 반성도 있었다. 아우크스부르크 화의로 루터파를 공인하게 된 것은 가톨릭에도 대단히 뼈아픈 일이었다. 사실 인정하기는 싫어도 성서로 돌아가자는 신교파의 호소가 먹힌 데는 교회의 타락이 큰 원인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들의 주장대로 교회의 종교 의식을 폐지한다면 가톨릭은 정체성을 잃게 될 게 뻔했다. 자칫하면 교회 조직과 사제도 성서에 나오지 않으니 없애야 한다고 할지 몰랐다.
그래서 가톨릭 측은 트리엔트 공의회를 열어 기본 교리부터 점검하기로 했다. 우선 인간은 신의 뜻에 복종하기만 하는 존재가 아니라 나름대로 자유의지를 가지는 존재로 규정되었다(즉 신은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부여했다). 또한 신교 측의 주장을 가톨릭 방식으로 소화해 성직 매매를 금지하고 성직자의 자질 향상을 모색하기로 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가톨릭이 존립하는 기반을 약화시키면 안 되었으므로 성서와 신앙만이 아니라 교회와 교회 의식도 여전히 중요하다고 결정했다.
더 중요한 개혁은 수도회에서 나왔다. 중세부터 교회가 위기에 빠질 때면 늘 구해주었던 수도회 운동은 또다시 가톨릭 교회에 큰 힘을 실어주었다. 전통적인 프란체스코회와 도미니쿠스회도 활동을 재개했지만, 그보다 큰 힘은 예수회였다. 1534년 에스파냐의 로욜라(Ignatius de Loyoli, 1491~1556)가 교황의 승인을 얻어 출범시킨 예수회는 군대식 복종과 규율로 무장하고 가톨릭 부흥에 앞장섰다. 특히 예수회 수도사들은 북독일 군주들의 개종으로 혼란 상태에 빠져 있던 남독일 군주들과 폴란드를 가톨릭으로 복귀시키는 개가를 올렸다【세계적으로 보면 예수회가 가장 큰 성과를 거둔 곳은 독일이 아니라 동양이었다. 예수회는 유럽에서 실추된 가톨릭의 명예를 해외에서 회복하고자 노력했다. 명 제국 시대의 중국과 전국시대의 일본에 온 서양인 선교사들은 대부분 예수회 소속이었다. 이는 예수회의 탄생지가 당시 대양 항로 개척의 주역인 에스파냐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에스파냐 상선을 타고 멀리 동양에까지 포교 활동에 나섰다. 그러나 새로운 지역에서 포교하려면 가톨릭보다는 신교가 유리했을 것이다. 교회 제도와 의식을 강조하는 것보다는 성서와 신앙을 앞세우는 게 그리스도교에 대한 동양인들의 거부감을 줄일 수 있었을 테니까. 실제로 동양에 온 가톨릭 선교사들은 마치 유럽의 신교파처럼 교회보다 성서를 위주로 포교했다】.
▲ 교황의 오른팔 로욜라가 교황 파울루스 3세 앞에 무릎을 꿇고 예수회의 창립을 승인받는 장면이다. 헨리 8세를 파문하고 카를 5세의 신교 탄압을 적극 지지한 파울루스는 물론 대만족이었다. 그러나 예수회 선교사들은 이미 신교로 대세가 기운 유럽을 포기하고 새로운 종교 ‘시장’을 찾아 멀리 동양으로 진출하게 된다. 중국을 서양에 최초로 알린 이탈리아 선교사 마테오 리치가 바로 그 예수회 소속이었다.
그러나 가톨릭의 ‘종교개혁’은 신교 측으로서는 ‘반(反)종교개혁’인 셈이었다. 더구나 배타적인 성격으로 말한다면 신교 역시 가톨릭에 못지않았다. 그나마 루터파는 공인을 받았으므로 다소 갈등이 해소되었으나 진짜 큰 문제는 칼뱅주의였다. 남프랑스만큼은 아니었지만 칼뱅주의의 호소력은 독일에도 서서히 퍼져가기 시작했다. 16세기 중반에는 이미 독일 인구의 90퍼센트가 신교도였고, 그중 상당수는 칼뱅파였다. 그러자 루터파에 회의를 품은 신교 영방군주들도 대안으로 칼뱅주의를 택했다. 그러나 칼뱅주의는 아직 공인되지 않은 신앙이었다. 게다가 예수회의 활동으로 다시 종교적 보수화가 진행되기 시작했다.
이래저래 칼뱅파 군주들은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위기는 곧 기회다. 프랑스에서 위그노가 승리를 거두는 모습을 지켜본 그들은 놀라움과 함께 큰 자극과 고무를 받았다. 그도 그럴 것이 신교가 현실 정치 투쟁에서 가톨릭을 누르고 승리한 경우는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서유럽의 전통적 중심지인 프랑스에서.
새삼스럽게 칼뱅주의의 위력을 실감한 그들은 서서히 결속을 이루기 시작했다. 마침 리더도 있었다. 전통의 영방군주인 팔츠 선제후 프리드리히 5세가 칼뱅파로 돌아선 것이다(혹시 루터파의 리더인 작센 선제후에 대한 경쟁심 때문이었을까?). 칼뱅파 군주들은 1608년 프리드리히를 중심으로 ‘연합’을 결성했다. 최소 목표는 자신들의 보위이고, 최대 목표는 프랑스처럼 칼뱅파의 승리다.
그러나 위그노 전쟁에서 자극을 받은 것은 승리한 신교 측만이 아니었다. 남독일의 가톨릭 세력은 프랑스에서 가톨릭이 무너지는 것을 보고 가뜩이나 긴장하고 있는 판에 칼뱅파 군주들이 뭉치자 자신들도 모종의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그들은 1609년 바이에른 대공 막시밀리안을 리더로 삼아 ‘동맹’을 결성했다.
무르익은 전운을 전쟁으로 표출시킨 계기는 바깥에서 생겨났다. 아우크스부르크 화의를 성립시킨 페르디난트 1세의 손자 페르디난트 2세는 어린 시절부터 예수회의 교육을 받고 자란 가톨릭 ‘골수분자’였다. 개인적으로만 그랬다면 별 문제가 없겠는데, 그는 1617년에 보헤미아 왕이 되었고, 그 이듬해에는 헝가리의 왕까지 겸했다(보헤미아와 헝가리는 모두 합스부르크 가문의 소유였으니까 특별한 일이 아니다). 권력을 손에 쥔 그는 자신의 개인적인 꿈을 두 나라에 걸쳐 실현하려 했다. 보헤미아 신교도들은 가혹한 탄압 아래 놓였다. 수십 년 전 아우크스부르크 화의 때만 해도 군주와 귀족들은 그런대로 타협을 이룰 수 있었으나 이제는 사정이 달랐다. 우선 페르디난트는 할아버지의 타협을 가톨릭의 패배라고 여겼으며, 탄압받는 보헤미아의 신교파 귀족들도 과거처럼 굴욕적인 타협 따위는 하지 않으려 했다.
보헤미아의 의회는 페르디난트를 보헤미아 왕으로 인정하지 않겠다고 주장했다. 영리하게도 그들은 독일의 팔츠 선제후이자 ‘연합’의 리더인 프리드리히 5세를 자신들의 새로운 왕으로 추대했다. 그러나 페르디난트는 전선이 확대될 조짐을 보이는 것에도 개의치 않았다. 1618년 그는 종교적 이단에서 정치적 반란 세력으로 탈바꿈한 보헤미아 귀족들에 대해 군사적 공격에 들어갔다. 이렇게 해서 30년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 전쟁은 명칭처럼 1618년에서 1648년까지 30년을 끌게 된다.
▲ 분노한 보헤미아의 귀족 15세기 후스 운동의 중심지였던 탓으로 프라하의 귀족들은 신교적 성향이 강했다. 그런 판에 가톨릭의 본산인 합스부르크 가문의 페르디난트 2세가 보헤미아의 왕을 겸하게 되자 그들은 당연히 불만이었다. 그림은 보헤미아 귀족들이 가톨릭 관리들을 창밖으로 내던지는 장면이다. 바로 이 사건이 30년 전쟁의 직접적인 계기가 된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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