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전쟁의 개막
프랑수아 1세가 신교를 탄압한 것은 가뜩이나 어지러운 서유럽의 종교적 지형을 더욱 큰 혼란에 빠뜨렸다. 그의 아들 앙리 2세(Henri Ⅱ, 1519~1559, 재위 1547~1559)는 모든 면에서 아버지의 유지를 충실히 받들었는데, 특히 신교의 탄압에서는 한술 더 떴다. 사실 그가 카토-캉브레지 조약을 맺어 아버지가 남긴 숙제를 해결하고 합스부르크와 타협한 데는 종교적인 이유가 컸다. 스위스에서 칼뱅교도들이 대거 프랑스로 이주하자 그는 대외 전쟁보다 대내의 종교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먼저라고 판단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조약 체결을 기념하는 마상 경기에서 그만 근위대장이 잘못 던진 창을 맞고 마흔 살의 한창 나이에 죽었다. 그는 자신의 신교 탄압이 복잡한 종교전쟁으로 이어질 줄은 몰랐을 테고, 자신의 아내가 거기에 깊숙이 관여하게 될 줄은 더더욱 몰랐을 것이다.
일찍이 프랑수아는 이탈리아에서 합스부르크와 전쟁을 벌일 무렵 합스부르크의 전매특허인 통혼 전략을 구사한 적이 있었다. 1533년 아들(앙리 2세)을 동갑내기인 카트린 드 메디시스(Catherine de Medicis, 1519~1589)라는 이탈리아 처녀와 결혼시킨 것이다. 프랑스식으로 읽어 메디시스지만 이탈리아식으로 읽으면 그녀의 성은 메디치가 된다. 카트린은 바로 르네상스를 이끈 피렌체의 지배자 로렌초 메디치의 증손녀였다.
정략결혼이었지만 부부의 의는 나쁘지 않았던지, 앙리 2세와 카트린은 모두 열 명의 자식을 낳았다. 자식들 가운데 세 명의 프랑스 왕들이 연속해서 나왔고 다른 나라의 왕비로 시집보낸 딸들도 두 명이나 되었으니, 카트린으로서는 남편복은 없었어도 자식복은 있었던 셈이다. 앙리 2세가 변사하는 바람에 열여섯 살의 어린 아들 프랑수아 2세가 왕위를 이었지만 병약한 탓으로 2년도 못 가서 죽고, 1560년 그의 동생인 샤를 9세가 열 살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다른 때 같으면 몰라도 한창 왕권이 뻗어나고 있는 상황에서, 게다가 서유럽의 국제 정세가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는 상황에서 어린 왕이 즉위했다는 것은 프랑스에 치명적일 수 있었다. 그래서 카트린은 직접 섭정을 맡기로 했다.
이탈리아의 명문 출신답게 카트린은 정치적 자질과 수완이 뛰어난 여성이었으나, 외국인이라는 제약 때문에 프랑스 귀족들을 주무르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먼저 지지 세력을 규합하기로 결심했는데, 그 대상이 바로 가톨릭 귀족들이었다. 특히 프랑수아 1세의 비호를 받아 단기간에 명문 세가로 성장한 기즈(Guise) 가문이 그녀의 가장 굳건한 동맹자가 되었다. 더구나 기즈 가문은 프랑수아 2세의 처가였으니 카트린에게는 든든한 사돈이기도 했다.
당시 프랑스에는 남부를 중심으로 칼뱅교도들이 널리 퍼져 있었다. 프랑스 남부라면 바로 13세기에 이단으로 몰린 알비파의 고장(434~435쪽 참조)이었으므로 전통적으로 로마 가톨릭에 반대하는 분위기가 강한 곳이었다. 칼뱅파는 과거 알비파의 교세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상인과 수공업자 등 신흥 계층만이 아니라 귀족도 많았으며 몇몇 대영주들 중에도 신교도로 개종한 사람들이 있었다. 이렇게 칼뱅주의의 새로운 성지가 된 남프랑스에서는 신교도를 가리키는 새로운 이름으로 위그노(Huguenot)라는 말이 생겨났다(위그노란 ‘동맹’이라는 뜻의 독일어 Eidgenossen에서 파생된 말로 알려져 있다). 빠른 속도로 성장한 위그노는 금세 정치 세력화하면서 ‘국가 안의 국가’라고 불릴 만큼 강력해졌다. 이미 위그노는 종교적 일파만을 가리키는 제한적인 의미를 벗어나 새로운 정치적 대안을 뜻하는 대명사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종교의 분열이 정치적 분열로 이어지고 양측이 타협할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면 그다음은 전쟁밖에 없다. 그렇게 해서 터진 전쟁이 프랑스 최초의 종교전쟁인 위그노 전쟁(1562~1598)이다【위그노 전쟁은 기본적으로 종교전쟁이므로 구교와 신교의 대립이 가장 큰 전선을 이루었다. 그러나 위그노 자체가 정치 세력인 데다 위그노를 둘러싸고 프랑스의 왕과 귀족들이 개입한 탓에 위그노 전쟁은 전면적인 내전이 되었고, 나아가 국제적인 세력들까지 편을 갈라 간섭했으므로 국제전의 성격도 가졌다(당시 프랑스의 정치는 서유럽 모든 나라의 관심 대상이었다). 따라서 위그노 전쟁은 과거의 종교전쟁, 이를테면 그 얼마 전에 독일에서 있었던 슈말칼덴 전쟁과는 비교할 수 없는 규모와 영향력을 가진 사건이었다】.
사실 카트린은 자신도 가톨릭교도였고 가톨릭 세력의 지원도 받고 있었으나 중립적인 입장에 가까웠다. 섭정을 맡고 있는 그녀는 우선 왕권을 확립하고 국내 정치의 안정을 꾀하는 게 급선무이고 종교 문제는 그다음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그녀와 연대하고 있는 기즈 공작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광신도에 가까운 가톨릭교도인 데다 정치적 야심이 가득한 인물이었다. 결국 위그노 전쟁의 방아쇠를 당긴 것도 그였다.
1562년 기즈 공작의 명령으로 프랑스 정부군이 창고에서 예배를 올리고 있던 위그노들을 기습 공격하면서 모두 8차에 걸친 위그노 전쟁이 시작되었다. 애초에 위그노 측은 가톨릭 측과 전쟁을 벌일 마음이 없었다. 그들은 비록 정치 세력을 이루고 있었으나 정부에 대해 종교적 관용 이외에 별다른 요구 사항이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3차전까지 치른 뒤 양측은 평화 협상을 벌여 어렵지 않게 합의를 이루었다. 이것으로 전쟁은 끝나는가 싶었다. 그러나 불씨가 꺼지지 않았는데 끝나는 전쟁은 없다. 위그노는 여전히 정부 측에 종교의 자유를 요구했고, 정부는 여전히 그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모순은 해소되지 않고 높아만 갔다.
결국 1차전에서 기습으로 재미를 본 기즈 공작이 또 선수를 쳤다. 게다가 이때부터는 카트린까지 적극 가담했다. 그들은 함께 위그노를 근절하기 위한 치밀한 비밀공작을 세웠다. 거사일은 1572년 8월 24일 성 바르톨로메우의 축일로 정해졌다. 때마침 콜리니(그는 앙리 2세의 두터운 신임을 받은 제독으로서 에스파냐 함대를 물리친 전과로 프랑스 국민의 존경도 받은 인물이었다)를 비롯한 위그노의 주요 지도자들은 나바르의 왕인 앙리의 결혼식을 맞아 일주일 전부터 파리에 머물고 있었다. 가톨릭 측의 기습 공격으로 축일이 저물기까지 불과 한나절 동안 파리에서만 2000여 명의 위그노가 학살되었고, 지방에서도 수천 명의 위그노가 무참히 살해되었다. 독일인 용병의 손에 살해된 콜리니의 시신은 창문 밖으로 내던져져 거리에 나뒹굴었다. 이것이 역사에 성 바르톨로메우의 대학살로 알려진 참극이다. 이 터무니없는 학살극은 9월까지 이어지면서 2만 명의 목숨을 더 거두어갔다.
당연히 평화 무드는 깨졌다. 격분한 위그노는 전국에서 들고 일어났다. 이에 대해 가톨릭의 총사령관 기즈 공작은 과격파를 중심으로 가톨릭동맹을 결성하고 한 치의 물러섬 없이 맞섰다. 그러나 이 무대의 실제 주인공은 그가 아니라 카트린이었다. 기즈 공작은 해묵은 십자군과 성전을 부르짖었으나 그녀의 생각은 달랐다. 토끼를 잡았으니 이제 사냥개는 필요가 없다. 더욱이 위그노는 기즈를 처형하라고 외쳐대고 있지 않은가?
카트린은 셋째 아들 앙리 3세를 사주해 기즈 공작을 암살하라는 지령을 내렸다【샤를 9세의 동생 앙리 3세가 왕위를 계승한 데는 사연이 있다. 샤를 9세는 성년이 되었으나 어머니는 권력을 아들에게 넘기려 하지 않았다. 어머니가 섭정이었어도 프랑스의 왕은 그였으므로 샤를은 바르톨로 메우 대학살이 일어난 것에 큰 충격을 받았다. 결국 그는 1574년 양심의 가책에 시달리다가 죽었다. 그러나 이 발표의 이면에는 숨겨진 사실이 있다. 원래 그는 1570년부터 위그노의 지도자 콜리니와 접촉하여 사태를 수습하고자 노력했다. 이 사실을 안 카트린은 아들을 제거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녀는 둘째 아들을 자기 손으로 죽였다는 슬픔보다도 셋째 아들 앙리 3세가 ‘충실한 개’ 노릇을 하는 것에 더 만족했을 것이다】. 대학살의 표면상의 주범은 1588년 암살로 최후를 맞았다. 그런데 사냥개를 잡았는데도 사태는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 특히 기즈 공작처럼 가마솥에 들어갈 운명에 처한 다른 사냥개들은 그냥 앉아서 죽을 수만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왕을 암살하려는 엄청난 계획을 꾸미고, 그 이듬해 드디어 거사에 성공했다. 공교롭게도 같은 해에 풍운의 여걸 카트린 드 메디시스가 사망했다.
악명 높은 지배 세력이 일거에 무너졌으니 새 왕조가 들어설 절호의 기회다. 후사가 없는 앙리 3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앙리 4세 (Henri IV, 1553~1610, 재위 1589~1610)는 바로 바르톨로메우의 비극으로 결혼식을 망쳐버린 나바르 왕 앙리였다. 그는 생루이의 후손으로 부르봉 Bourbon 가문이었으므로, 오랫동안 프랑스 왕권을 이어온 발루아 왕조가 끝나고 이때부터 부르봉 왕조로 바뀌었다.
어머니부터 철저한 위그노였고 그 자신도 콜리니를 아버지처럼 존경한 앙리 4세였으니, 이제 종교전쟁의 승자는 결정된 셈이었다. 어차피 그가 아니었다 해도 사태의 수습책은 오직 하나, 신앙의 자유를 인정하는 것밖에는 없었다. 다만 그는 가톨릭 측의 거부감을 고려해 신앙의 자유를 프랑스 내의 일정한 지역에만 국한하기로 했다(심지어 그는 1593년 종교 화해의 손짓으로써 가톨릭으로 개종하기도 했다). 이 절충안이 1598년의 낭트칙령이다. 이것으로 36년간을 끌어오던 위그노 전쟁은 마침내 끝이 났다【위그노 전쟁에서 흥미로운 사실 하나는 영국이 위그노를 지지했다는 점이다. 이는 당시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가 영국 국교회를 지원하면서 가톨릭과 사이가 멀어졌기 때문이다. 백년전쟁 이후 내내 적수로 지내온 두 나라의 관계가 원만해진 것은 이 무렵이 처음일 것이다(하지만 곧이어 리슐리외의 공격적인 외교로 두 나라는 다시 다투게 된다). 에스파냐의 펠리페 2세는 당연히 가톨릭을 지지했으나 1588년 무적함대의 패배로 기가 꺾이면서 에스파냐는 프랑스 문제에서 손을 떼게 된다. 위그노가 승리한 데에는 영국의 간접적인 지원 사격이 있었던 셈이다】.
위그노 전쟁이 낳은 것은 신교의 승리와 부르봉 왕조만이 아니다(그랬다면 프랑스 역사로만 취급되고 말았을 것이다). 사실 낭트 칙령과 같이 근대국가에서나 볼 수 있는 고도의 정치적 타협이 성립할 수 있었던 것은 그를 뒷받침하는 정치 세력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위그노 전쟁이 예상보다 훨씬 오래 끌면서 프랑스에는 새로운 정치 세력이 생겨났다. 양 극단이 대립하면 이를 중재하려는 노력이 생기는 것은 당연하다. 따라서 새로운 정치 세력은 종교를 떠나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사태를 바라보고 해결책을 찾으려 했으며, 왕권을 강화해 질서를 회복시키고자 했다. 이들은 그 이름도 어울리게 정치파(Politigue)라고 불렸는데, 여기에는 기즈 공작의 지나치게 강압적인 태도에 반대하고 나선 가톨릭 온건파도 합류했다. 불안정한 정정에서 앙리 4세의 즉위, 왕의 개종을 통한 사태 진정, 낭트 칙령을 통한 문제 해결 등 일련의 수습 정책을 제안하고 실행에 옮긴 것은 바로 이 정치파였다.
전통적인 귀족 출신도 아니고, 가톨릭의 보수적 전통에서도 자유로우며, 전쟁 중에 이미 뛰어난 국정 운영 능력을 선보인 이들은 새로 들어선 부르봉 왕조에서 새로운 관료 집단을 이루게 되었다. 프랑스가 가장 먼저 영토 국가의 기틀을 갖추고 절대주의의 시대로 접어들 수 있었던 데는 그들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앙리 4세는 큰 내란을 매듭짓고 분열된 국론을 모아 프랑스의 왕권과 국력을 키우는 데 주력했고 또 상당한 성과도 거두었지만, ‘호색왕’이라는 별명처럼 여색을 밝힌 탓에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었다. 보수적인 가톨릭에서는 용납될 수 없는 일이었던 탓에 그는 1610년 라바야크라는 가톨릭 광신도에 의해 암살되고 말았다. 그의 아들 루이 13세가 아홉 살의 나이로 왕위를 계승하자 그의 어머니 마리(그녀도 메디치 가문이었다)가 섭정을 맡았다. 다시 50년 전 카트린이 생각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지만, 이미 프랑스에는 전쟁을 통해 성장한 관료 집단이 있었다. 1614년 귀족들의 요구로 섭정 마리가 소집한 삼부회는 큰 성과를 내지 못했으나, 성직자 대표로 참가해 마리의 주목을 받은 인물이 하나 있었다. 그의 이름은 리슐리외(Richelieu, 1585~1642)였다.
마리에게 발탁되어 정치 활동을 시작한 리슐리외는 이후 어린 왕을 보필해 프랑스의 왕권을 강화하고 정치적 안정을 이룩하는 데 일익을 담당하게 된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그가 명료한 근대국가의 개념을 가진 인물이었다는 점이다. 당시 서유럽 세계는 종교적 통합성이 사라지고 개별 국가로 각개약진을 시작하려는 시대였다. 여기서 가장 먼저 국내적 안정을 이룬 프랑스는 리슐리외의 화려한 외교 정책으로 ‘강력한 프랑스’의 이념을 내세워 서유럽의 지도자 자리를 다지게 된다. 그 무대는 바로 독일에서 벌어진 마지막 종교전쟁이자 최초의 근대 전쟁이라 할 30년 전쟁이다.
▲ 축일의 대학살 바시의 학살이 있은 지 꼭 10년 만에 그보다 훨씬 더 큰 규모의 바르톨로메우 대학살이 벌어졌다. 그림은 그 학살의 장면이다. 로마 시대 후기에 순교자들의 피를 먹고 자라난 로마 가톨릭은 이제 신교에 대해 똑같은 피를 요구한다. 결과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위그노들은 신앙의 자유를 쟁취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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