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   2024/12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Archives
Today
Total
관리 메뉴

건빵이랑 놀자

서양사, 6부 열매① - 2장 유럽을 낳은 전쟁, 국제전과 복마전 본문

역사&절기/세계사

서양사, 6부 열매① - 2장 유럽을 낳은 전쟁, 국제전과 복마전

건방진방랑자 2022. 1. 9. 15:47
728x90
반응형

 국제전과 복마전

 

 

보헤미아 신교도 귀족들의 노림수는 빗나갔다. 믿었던 프리드리히 5세와 칼뱅파 연합은 막상 뚜껑이 열리고 보니 별로 힘을 쓰지 못했다. 독일에서 칼뱅파는 아직 가톨릭은커녕 루터파보다도 세력이 약했다. 게다가 페르디난트는 1619년에 제위도 차지하면서 가톨릭의 새로운 맹주로 떠올랐다. 힘을 얻은 독일의 가톨릭 동맹은 황제와 또 다른 동맹을 맺었다. 여기에 가톨릭 문제라면 만사를 제쳐두고 약방의 감초처럼 끼어드는 에스파냐까지 합세했다. 보헤미아 신교파는 사면초가에 처했다. 결국 1620년 그들은 프라하 부근에서 황제군에게 패배하고 뜻을 접어야 했다. 잠시 그들과 운명이 엮인 팔츠 선제후 프리드리히는 국외로 도망쳐버렸다.

 

이로써 반란은 진압되었고 보헤미아는 원래대로 합스부르크의 소유가 되었다. 이것으로 전쟁이 끝났다면 이 전쟁은 유럽의 역사에서 그토록 큰 비중을 갖지 못했을 것이다. 하마터면 ‘2년 전쟁으로 끝날 뻔한 사건을 ‘30년 전쟁으로 만든 것은 예상외의 변수인 덴마크였다.

 

덴마크의 올덴부르크 왕조는 이미 루터의 종교개혁 초기에 국내의 가톨릭 세력을 물리치고 1537년부터 루터파를 승인했다. 특히 크리스티안 4(Christian IV, 1577~1648, 재위 1588~1648)는 왕권강화와 더불어 중상주의 정책으로 국력을 크게 키웠으며, 종교적 열망에 못지않게 정치적 야심도 큰 인물이었다. 1625년 그는 그 열망과 야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북독일로 쳐들어왔다.

 

이렇게 해서 2라운드가 벌어지게 되었는데, 전쟁의 성격도 종전과는 달라졌다. 이제 종교적 색채는 거의 탈색되고 국제정치적 맥락이 전쟁의 중심에 놓였다. 30년 전쟁의 1라운드가 마지막 종교전쟁이라면, 2라운드부터는 영토 확장을 목적으로 하는 본격적인 근대 전쟁의 양상을 띠게 된 것이다. 이 점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1621년부터는 네덜란드가 완전 독립을 이루기 위해 에스파냐와 전쟁을 시작했다(이 때문에 에스파냐는 2차전부터 독일 전선에서 빠지게 된다).

 

 

새로 강적을 맞은 페르디난트는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국왕이 직접 나선 덴마크는 보헤미아 귀족들이나 루터파 연합체럼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이때 페르디난트의 고민을 해결해준 인물은 발렌슈타인(Wallenstein, 1583~1634)이었다발렌슈타인은 황제에 의해 제국군 총사령관에 임명되었으나 군인 출신은 아니었다. 보헤미아 하층 출신의 이 야심가는 죽은 아내의 유산을 잘 굴려 막대한 재산을 쌓았고 이후 공작의 작위까지 받고 제국 제후의 신분에 오른 입지전적 인물이었다. 그런 만큼 발렌슈타인의 주 무기는 바로 돈이었다. 1라운드에서도 그는 직접 용병대를 구성해 황제를 도운 적이 있었는데, 덴마크의 침략을 맞아서도 그의 주 무기는 돈으로 산 용병이었다. 그는 페르디난트에게 즉각 5만 명의 군대를 모집하겠다고 약속했고, 그 약속을 지켜 덴마크군을 뤼베크에서 격파했다.

 

덴마크마저 무너지자 독일의 신교파는 종교개혁 이래 최대의 위기에 봉착했다. 때를 놓치지 않고 가톨릭 세력이 최후 공세에 나섰더라면 칼뱅파는 물론 루터파까지 몰락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근본도 없는 자가 일약 스타로 떠오르는 모습을 본 가톨릭 제후들은 다음 화살을 발렌슈타인에게로 돌렸다. 그렇잖아도 점차 발언권이 커지는 발렌슈타인에게 경계심을 품고 있던 페르디난트는 제후들의 반발을 핑계 삼아 일등공신인 그를 파면해버렸다. 이것으로 전쟁은 끝났다고 낙관한 걸까?

 

하지만 북유럽에는 덴마크만 있는 게 아니었다. 스웨덴은 16세기 초 덴마크의 합병 위협을 벗어난 뒤 곧바로 중앙집권화에 성공해 서유럽 무대에 등장하길 꿈꾸고 있었다. 크리스티안이 데뷔에 실패한 것을 본 스웨덴 왕 구스타프 2(Gustay II, 1594~1632, 재위 1611~1632)1630년 스칸디나비아의 두 번째 주자로 독일을 침략했다구스타프의 주 무기는 발렌슈타인과 정반대였다. 그는 용병 대신 스웨덴 국민들을 대상으로 강제 징집 제도를 도입해 유럽 역사상 최초의 국민군을 창설했다. 애국심은 기본이며, 국가에서 먹여주고 훈련시키고 급여까지 주었으므로 이들의 사기는 용병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게다가 구스타프는 타고난 무장이었다. 그는 군대 편제를 혁신한 것 이외에도 당시의 신무기인 화약에 일찍부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당시 다른 유럽 군대와 달리 야포 부대를 주력의 하나로 편성했고, 창병보다 머스킷 병을 주 무기로 활용하는 신개념의 전술을 구사했다. 창병은 다른 나라의 군대에서는 주력군이었으나 스웨덴 군대에서는 머스킷 병사들이 화약을 장전하는 동안 엄호해주는 게 주된 임무였다. 그는 신교의 보호를 참전의 명분으로 내세웠으나 실은 페르디난트의 세력이 자신의 텃밭인 발트 해까지 미치게 되지 않을까 우려하고 있었다. 이렇게 전쟁 후반에는 처음에 전쟁을 유발한 종교가 뒷전으로 물러나고 각국의 현실적인 이해관계만이 전쟁을 이끌어가는 힘이 되었다.

 

 

1631년 구스타프는 라이프치히 근방의 브라이텐펠트에서 황제군에게 대승을 거두었다. 그러자 다급해진 페르디난트는 발등의 불을 끄기 위해 다시 발렌슈타인을 불러들였고, 발렌슈타인은 예의 주 무기인 재력을 이용해 자비로 4만 명의 병력을 모집했다. 이리하여 그 이듬해 30년 전쟁의 두 영웅인 구스타프와 발렌슈타인이 맞대결을 벌이게 되었다. 뤼첸에서 벌어진 이 전투의 결과는 승패의 판정을 내리기가 곤란하다. 스웨덴은 이겼으나 구스타프가 전사했고, 제국은 패했으나 발렌슈타인이 살아남았다. 상황은 묘하게 전개되었다. 전투에서 이긴 스웨덴은 오히려 주춤하고, 발렌슈타인은 다시 군대를 재건했다. 전세는 오히려 제국 측에 유리하게 돌아갔다. 그러나 이미 강적을 물리쳤다고 생각한 페르디난트는 또다시 발렌슈타인을 파면했는데, 이번에는 돌아올 수 없었다. 발렌슈타인이 암살당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30년 전쟁의 클라이맥스는 이제부터다. 전쟁의 전면에 나섰던 두 영웅이 죽자 숨은 음모자가 나온 것이다. 그는 바로 프랑스의 리슐리외였다. 일찍이 구스타프를 부추겨 제국 공략에 나서게 한 사람도 그였으며, 덴마크와의 전쟁에서 공을 세운 발렌슈타인을 파면하도록 페르디난트를 부추긴 사람도 그였다. 두 영웅 뒤에 숨은 모사꾼 리슐리외는 지금까지 이 전쟁이 기본적으로 에스파냐와 바이에른의 가톨릭 세력을 등에 업은 합스부르크 제국과 기타 유럽의 신교 국가들의 대표주자인 프랑스 간의 전쟁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물론 멍청한 페르디난트는 알지 못했다).

 

이제는 리슐리외가 직접 나서 전쟁을 매듭지을 때다. 1635년 프랑스군이 제국의 텃밭 남독일을 침략하면서 전쟁은 막바지로 접어들었다. 힘을 잃어가던 스웨덴도 다시 공격을 재개했다. 전세는 순식간에 역전되었다. 오랜 전쟁 기간을 거치면서 합스부르크 제국은 보헤미아의 반란을 진압하고 덴마크와 스웨덴의 침략을 잘 막아냈으나, 3연승을 거둔 뒤 마지막 전투에서 패배함으로써 모든 주도권을 잃었다.

 

 

최대ㆍ최후의 종교전쟁 역사상 최초의 국제전이라 할 30년 전쟁은 그 이전까지 있었던 어느 전쟁보다 규모가 크고 소모적인 전쟁이었다. 전쟁의 주요 무대였던 독일 지역에서는 이 전쟁 기간 동안 무려 800만 명이 희생되었다. 왼쪽 그림은 행군하는 신성 로마 제국군의 모습인데, 발렌슈타인(오른쪽)의 용병 부대가 아니었을까?

 

 

인용

목차

한국사 / 동양사

화재를 부른 불씨

국제전과 복마전

사라진 것과 생겨난 것

정치와 종교의 도가니

크롬웰 왕조

근대의 문턱에 들다

 

728x90
반응형
그리드형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