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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서양사, 6부 열매① - 2장 유럽을 낳은 전쟁, 사라진 것과 생겨난 것 본문

역사&절기/세계사

서양사, 6부 열매① - 2장 유럽을 낳은 전쟁, 사라진 것과 생겨난 것

건방진방랑자 2022. 1. 9. 1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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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라진 것과 생겨난 것

 

 

한 명의 귀재가 두 명의 영웅을 조종한 30년 전쟁은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끝났다. 길다고 하면 긴 30년이었으나 전쟁 기간보다도 전쟁의 특징을 더 잘 드러내주는 것은 유럽 최초의 국제전이라는 사실이다. 관련된 나라만 해도 합스부르크 제국의 세습령인 오스트리아를 비롯해 에스파냐, 보헤미아, 헝가리 등 제국의 속국들, 독일의 영방국가들, 여기에 덴마크, 스웨덴, 네덜란드, 프랑스 등 수십 개국에 달했다. 영국을 제외한 서유럽의 모든 나라가 전쟁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한 것이다. 이전까지 유럽의 역사상 30년 전쟁보다 큰 규모의 전쟁은 있었어도, 유럽 세계가 이처럼 각 나라별로 나뉘어 각자의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인 적은 없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종교 문제가 전쟁의 계기였지만 30년 전쟁은 과거의 종교 분쟁과 달랐다. 무엇보다 교황이 전혀 개입하지 못했다는 점이 중요한 차이다. 종교개혁으로 교황과 교회의 권위가 실추되자 로마 교황청은 현실 정치에 대해 전혀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 유럽 각국은 각자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새로운 국제질서를 정립하고자 했다.

 

덴마크의 선공으로 시작된 2라운드에서는 종교 문제가 명분으로만 이용되었을 뿐 현실적으로는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수십 년전에 벌어진 프랑스의 위그노 전쟁만 해도 전쟁의 양측은 구교와 신교였다. 30년 전쟁도 종교전쟁으로 시작된 만큼 초기에는 구교와 신교의 갈등이 주요한 계기였으나 전쟁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그런 구도가 무너지고 어느덧 근대적인 국가 관계에 바탕을 둔 전쟁으로 변형되었다. 그런 점에서 이 전쟁은 서양의 근·현대사를 특징짓는 전쟁을 통한 갈등 해결의 출발점을 이룬다. 쉽게 말하면 이 전쟁을 계기로 이후의 전쟁들은 전부 근대적 영토 전쟁이며, 서양 세계는 수백 년간 대규모 국제전의 혼란기에 접어들게 된다. 그 마지막 전쟁이 바로 20세기의 2차 세계대전이다.

 

많은 나라가 개입하고 이해관계가 얽히고설킨 탓에 전쟁의 결과를 마무리하는 베스트팔렌 조약의 논공행상도 매우 복잡했다. 전쟁의 숨은 주역 프랑스는 알자스-로렌을 손에 넣었고, 스웨덴은 발트 해의 제해권을 얻었으며, 네덜란드는 에스파냐의 지배에서 완전히 독립했다(이미 그전에 독립한 스위스도 이 조약을 통해 비로소 독립이 승인되었다). 한편 패전국인 독일은 당연히 최대의 피해자였지만 얻은 것도 있었다. 전쟁 기간 독일 지역에서는 무려 800만 명이 희생되었으며, 스웨덴에 약탈당한 마그데부르크를 위시해 전국이 폐허로 변했다. 그러나 합스부르크 제국이 사실상 붕괴하면서 제국에 속해 있던 영방국가와 자치도시 들은 완전한 주권과 독립을 얻었다제국의 중앙집권력이 크게 약화되었다는 점에서는 13세기 중반 영방국가가 탄생할 때(1449~450쪽 참조)와 비슷한 점도 있으나 그때와는 차이가 크다. 교황권이 절정에 달했던 13세기에는 독일 지역이 영방국가들로 분립되었어도 정치적으로만 분열이었을 뿐 신성의 통합에서 벗어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구심점이 전혀 없었다. 이때부터는 독일 지역에서 제후국이나 영방국가라는 명칭도 쓸 필요가 없었다. 중세의 흔적으로 공국’(작센 공국, 브란덴부르크 공국 등) 같은 명칭이 남았으나 그들은 사실상 독립 왕국이었다.

 

 

근대 최초의 국제조약 30년 전쟁이 최초의 국제전이었던 만큼 그 전쟁을 마무리하는 베스트팔렌 조약도 최초의 근대적인 국제조약이었다. 1648년에 마무리된 베스트팔렌 조약은 이후 유럽의 국제전에서 체결되는 평화조약의 모범이 된다. 그림은 당시 뮌스터에 머물고 있던 네덜란드 화가 테르보르흐가 조약이 최종적으로 조인되는 장면을 그린 것이다. 미술이 정치적 기념사진의 역할을 한 사례다.

 

 

그 덕분에 독일에도 이제 강력한 (영방)국가를 중심으로 절대왕정 체제가 출현할 수 있게 되었다. 그 대표주자가 프로이센이었다. 전쟁 초반에 브란덴부르크 공국은 프로이센을 통합해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을 이루었다. 브란덴부르크 선제후인 프리드리히 빌헬름(Friedrich Wilhelm, 1620~1688)은 전쟁으로 입은 타격을 극복하기 위해 세금제도를 개선하고 상비군을 육성하는 한편, 대외적으로는 뛰어난 외교술로 신흥국을 일약 독일 지역의 새로운 리더로 키워냈다. 이로써 그의 가문인 호엔촐레른(Hohenzollern)은 사실상 독일 지역의 왕가처럼 군림하게 되었다.

 

합스부르크를 비롯해 앞서 있었던 독일의 왕가들이 모두 신성 로마 제국의 황가였던 것과 달리, 호엔촐레른 가문은 처음으로 제후국의 가문으로 출발해 최고 왕가의 지위에까지 올랐다. 이후 호엔촐레른 가문은 1701년에 프로이센이 공국에서 왕국으로 격상함으로써 프로이센 왕가가 되어, 20세기 초반 독일의 군주제가 무너질 때까지 그 지위를 계속 유지하게 된다. 이렇게 패전국이면서도 멸망하기는커녕 오히려 재도약의 발판을 마련하게 되는 독일적 전통20세기에 두 차례나 대규모의 세계대전을 일으켰다가 패전했을 때도 달라지지 않았다.

 

낙동강 오리알의 신세가 된 것은 보헤미아였다. 전쟁의 시발점인 보헤미아는 초반부에 일찌감치 몰락하고 전선에서 이탈했기 때문에 논공행상에서 전혀 배려를 받지 못했다. 따라서 보헤미아는 전쟁 전보다 오히려 사정이 더욱 나빠졌다. 그 이전에도 합스부르크의 영토이기는 했으나, 이제부터는 아예 합스부르크 가문의 부동산처럼 취급되었기 때문이다(이 때문에 이 지역에는 게르만족이 슬라브족을 지배하는 전통이 자리 잡았는데, 이런 상태는 20세기 초슬라브족이 자각해 체코를 독립시킬 때까지 지속된다).

 

30년 전쟁이 역사상 최초의 국제전이었듯이, 베스트팔렌 조약도 유럽의 역사만이 아니라 그때까지 지구상 어느 지역의 역사에서도 없었던 최초의 명실상부한 국제조약이었다. 고대부터 국제 조약이 없지는 않았으나 대부분 전쟁 당사자 두 나라가 맺는 조약일 뿐 베스트팔렌 조약처럼 여러 나라가 참여한 조약은 없었다. 그런 점에서 이 조약은 근대 유럽의 새로운 국제 질서를 예고하고 있었다.

 

전쟁 도중에 전쟁의 성격이 완전히 달라진 이상 종교 문제는 전혀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다. 물론 칼뱅파를 신교로 공인하는 조항이 포함되었으나, 그것은 종교가 분쟁을 낳는 낡은 질서와의 마지막 고별과 같았다. 종전까지 모든 조약에서 항상 가장 중요한 관심사인 종교 대신 베스트팔렌 조약에서 관심의 초점이 된 것은 주권과 영토의 문제였다. 논공행상에서 보았듯이, 조약 체결에 참여한 각국은 저마다 이 문제에 비상한 관심을 보였다. 아직 주권이 확립되지 못한 국가들(네덜란드, 스위스, 독일의 영방국가들)은 주권을 주장했고, 주권이 안정된 국가들(프랑스, 스웨덴, 덴마크)은 더 많은 영토를 확보하려 했다. 이제부터는 주권과 영토가 본격적인 쟁점으로 부각되는 시대였다. 바야흐로 유럽 세계는 근대로 접어든 것이다.

 

 

근대를 낳은 진통 종교 문제로 시작해서 영토 문제로 끝난 전쟁, 이런 점에서 30년 전쟁은 중세의 끝이자 근대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지도는 무수한 전투가 벌어지고 무수한 인명이 희생된 북독일의 전장이다. 이 어지러운 형세는 곧 유럽의 근대를 낳는 진통이었다.

 

 

인용

목차

한국사 / 동양사

화재를 부른 불씨

국제전과 복마전

사라진 것과 생겨난 것

정치와 종교의 도가니

크롬웰 왕조

근대의 문턱에 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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